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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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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9:27 한국의 스승들/숭산 스님



출가


숭산스님

숭산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총독의 압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은 극심하게 탄압 받고 있었습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
'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 라고 햇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셋째 날에 숭산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스님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결국 스님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선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득도


고봉선사에게 받은 전법게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 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였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숭산행원 대선사 약력

1927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출생
1940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공립학교 졸업
1945
평양시 평안공업고등학교 졸업
1946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47
마곡사 출가 득도
1949
고봉 선사로부터 수계 건당(1.25),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 수지(3.1)
1950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래 11안거 성만(4.15)
1951
마곡사에서 대교과 수료(9.2)
1952
육군 입대(12.3)
1957
육군 중위로 전역(7.20)
1958
화계사 주지로 취임(3.15)
효봉ㆍ동산ㆍ청담ㆍ경산 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 추진
대한불교 조계종 종의회 구성, 종회의원 피선
1960
대한불교 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5.3)
1961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취임(6.5)
군승(軍僧)제도 시행으로 젊은 층 신자 흡수, 신불교 포교시대 전개
1962
대한불교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피선
비구ㆍ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 피선.
승려의 기강 확립을 위한 감찰제도 설립, 초대 감찰부장 취임.
예비역 군 출신, 법조인으로 구성된 불교 지식인 단체 '달마회'조직
동국대학교 동국학원 재단상무이사 피선
대한불교 조계종 재무부장 취임
1964
한국 불교 최초로 승려 대학 교육 실시, 종비생 제도 실시
불교과, 인도철학과 포함 도제 양성, 역경, 포교 종단 3대 사업 확장
1966
일본 흥법원 개설, 초대원장 취임.(한ㆍ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에 한국 사찰 건립)
한ㆍ일 불교 유학생 교류와 문화 교류를 일본 정부와 협의, 민간 외교에 지대한 공헌
군에 불교ㆍ기독교ㆍ천주교 3대 종교의 동등한 헌법상의 종교 활동 자유 보장을 정부에 건의, 국회 국방의원회에서 심의 결정.(군법사 제도 확립)
1969
홍콩 홍법원 개설, 원장 취임
1972
미국 홍법원 개설, 원장 취임
1974
캐나다 토론토 선원 개설
1978
폴란드 바르샤바 홍법원 개설, 8개 선원 개설, 원장 취임
1980
영국 런던 선원 개설
1981
스페인 팔마 선원 개설
1982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서 재미 홍법원 개설 10주년 기념 "세계 평화 종교 지도자 대회" 개최
1983
브라질 상파울로 선원 개설
1985
프랑스 파리 선원 개설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에서 세계평화상 수상(5.13)
중국 북경 불교회 초청, 여러 고승들과의 법거량 통해 한국 선불교 위상 떨침
1986
구소련 정신문화협회 초청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문화적ㆍ정신적 지도자들의 역사적 회합' 에 참가, 구소련 포교 여행
1987
수덕사 '제1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88
폴란드 한국 선불교 포교 10주년 기념 행사 개최
1989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한국 선지식으로 최초로 포교 활동
1990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생존과 환경을 위한 국제대회' 에 종교분과위원으로 초청강연(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영접 받음)
대만에서 한국 선을 지도하고 포교
서울 화계사에서 국제선원 신축을 위한 불사 시작
수덕사에서 '제2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92
중국 본토 육조 혜능 대사 남화사에서 승려와 일반인을 위한 참선 지도
홍콩 국제선원 개설
재미 홍법원 개설 20주년 기념 대회 개최
1993
싱가폴 국제선원 개설, 수덕사에서 '제3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94
한국인 선지식으로는 최초로 베트남 방문(베트남 지도자급 승려들과 법거량)
1995
스리랑카, 미얀마 성지 순례 및 한국 선불교 포교 활동
1996
대한불교 조계종으로부터 '해외 포교 30주년' 감사패 전달받음(6.20)
2000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1년에 3~4번씩 미국, 홍콩, 말레이지아, 유럽 등지의 해외 선원에 포교 여행차 순방
화계사 조실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스님 (1997.3.10~2004.11월 기간7년)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스님 (2001.10.8~2003.10.8 기간2년)
2004년 11월 30일(음력 10월 18일)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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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8개월에 걸쳐, 총 열여덟 분의 선학원 설립조사 및 이사장 스님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열전을 게재하였다. 현존해 계신 14대 이사장 법원 진제(法源 眞際, 1930~ )은 제외하였다.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1979-1944)스님을 필두로 남전 한규(1868-1936), 도봉 본연(1873-1949), 석두 보택(1882-1954), 성월 일전(1866-1943), 만공 월면(1871-1946), 용성 진종(1864-1940), 초부 적음(1900-1961), 경봉 정석(1892-1982), 석주 정일(1909-2004), 청담 순호(1902-1971), 대의 동원(1901-1978), 노노당 대휘(1907-1992), 향곡 혜림(1912-1978), 동일 벽암(1924-2005), 효일 범행(1921-2012), 남산 정일(1932-2004), 성파 도형(1936-2013)스님의 순으로 열전을 실어왔다.

이제 조사 스님들의 오도송과 열반송을 중심으로 조사 스님들의 정신을 되새겨 보며, 그간의 열전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지면 관계상 모든 스님들의 게송을 다룰 수는 없어 몇 분의 게송만을 싣게 되어 못내 아쉬운 감이 있다. 이후 단행본으로 모든 스님들의 게송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된다.

용성 진종(1864-1940) 스님은 23세 되던 해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선산 모례정 근처에서 용맹결사 정진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낙동강을 건너면 오도송을 읊었다.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옛적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1917년(39세) 2월 3일 밤 10시경, 강원도 설악산 오세암에서 궁극적 실재와의 조우라 할 수 있는 극적인 ‘오도(悟道)’를 경험한다. 한 겨울 밤 좌선하던 와중 바람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에 깨닫게 된다. 오도(悟道)는 이후 보살정진에 의한 만해 스님의 실천적 행동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사나이 이르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중에 오래도록 머물렀든가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삼천세계를 갈파하니
설리도화편현홍(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점점이 날리는구나.

만공 월면(1871-1946)의 오도송은 아래와 같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 밖에 있네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 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가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 축시에는 닭이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뜨네.


경봉 정석(1892-1982) 스님은 1927년 12월 13일(음:11월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아시방오물물두(我是訪吾物物頭)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목전즉견주인루(目前卽見主人樓)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가가봉착무의혹(呵呵逢着無疑惑)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발화광법계류(優鉢花光法界流) 우담발화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청담 순호(1902~1971)스님의 오도송은 아래와 같다.

상래불조둔치한(上來佛祖鈍痴漢) 예로부터 부처와 조사는 어리석고 미련하기 그지없어서
안득요지자변사(安得了知玆邊事) 어찌 이쪽 일을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약인문아향소능(若人聞我向所能) 만약 누가 나에게 한 소식 한 바를 묻는다면
노방고탑경서방(路傍古塔傾西方) 길가에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겠네.

향곡 혜림(1912-1978)스님은 열반 3일전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셨다.

목인영상취옥적(木人嶺上吹玉笛) 목인은 잿마루에서 옥피리를 불고
석녀계변역작무(石女溪邊亦作舞)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네
위음나반진일보(威音那畔進一步)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역겁불매상수용(歷劫不昧常受用) 역겁에 불매하고 언제나 수용하리.

동일 벽암(1924-2005) 스님은 원적에 들기 전 제자들이 오도송(悟道頌)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조심전허가명(佛祖心傳虛枷名) 부처와 조사가 마음을 전하나 허깨비 이름이며
중생제도회유사(衆生濟度懷柔事) 중생을 제도하니, 어린아이 달래는 소리로다.
허가회유시십마(虛枷懷柔是什麼) 허까비도, 달래는 소리도 그만 두고 일러라 무슨 도리인가?
무시무종다반사(無始無終茶飯事) 시작도 끝도 없는 차 마시고 밥 뜨는 일이로다.

효일 범행(1921-2012)의 오도송은 단순 간결하다

청풍명월 청산유수(淸風明月 靑山流水)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남산 정일(1932-2004)스님은 아래와 같은 오도송을 남기셨다.

극빈자희환대로적로위총(極貧者喜歡帶露的蘆葦叢)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혼연간일루시광투과정개대지(渾然間一縷始光透過整個大地)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만년전사불이열반(萬年前事佛已涅槃) 만년 전사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노우하착로우하착(霧雨下着霧雨下着)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최후여고별시적상통(最後如告別時的傷痛)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대전인미답치지괘연호(對前人未踏之地掛念呼) 전인 미답지가 궁금하냐?
지정정지범착수파적소계거류일파검파(到靜靜地泛着水波的小溪去洗一把瞼吧)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여라.


성파 도형(1936-2013) 스님의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은 아닐세.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펼쳐도 한 글자 없으나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항상 대광명을 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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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6:42 오늘의 정보/오늘의 여행

조계종, 10년만에 제15대 종정 추대..성파 스님은 누구?
이수지
입력 2021. 12. 13. 15:54수정 2021. 12. 13. 16:06


만장일치로 추대...임기는 5년
1960년 출가 통도사 주지·방장 역임
28년간 도자삼천불·16만 도자대장경 조성
'옻칠민화' 개인전도 개최...2017년 옥관문화훈장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종정(宗正) 스님에 추대된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가운데)이 1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릴 고불식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1.12.13.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조계종 제15대 종정에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82)이 추대됐다.

조계종 종정추대회의는 13일 오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종정 추대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성파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임기는 5년이며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

종정은 조계종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의 전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갖는 자리다. 조계종 헌법인 종헌에 따르면 종정은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통을 승계하며 계율을 관할하는 전계대화상을 위촉할 수 있다. 종헌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경감·복권을 행할 수 있다. 종단 비상시에는 원로회의 재적 3분의 2이상의 제청으로 중앙종회를 해산할 수 있다.

한편 종정 임기 시작일은 현 진제 종정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26일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종정(宗正) 스님에 추대된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이 1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고불식에 참석하여 예불을 드리고 있다. 2021.12.13. pak7130@newsis.com

조계종 신임 제 15대 종정 성파스님은 누구?
1939년 경상남도 합천 출신으로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1970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제5·8·9대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교무부장,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통도사 서운암에 주석하며 28년간 민족통일의 원력을 담은 도자삼천불과 16만 도자대장경을 조성했다.

옻칠불화, 민화, 서예, 천연염색 등 전통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7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18년 희귀병 소아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우들을 위해 5000만 원 기부로 통도사 방장 추대법회를 대신하기도 했다. .

한국 고유의 전통미술을 계승한 민화, 특히 옻칠민화을 알리고 있다. 1983년 옻을 이용한 개인전을 처음 연 후 국내외에서 전통 옻과 불교미술을 접목한 전시를 10여 차례 열었다.

2018년부터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으로 후학 양성에도 힘쓴 조계종 원로의원 중 한명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suejeeq@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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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5:50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원경당 성진 대종사 행장


불기2565(2021)년 12월 6일 주석처인 평택의 만기사에서 홀연히 원적에 든 원경당 성진대종사는 온 몸으로 한국사회의 격동기를 지낸 보기드문 위인입니다. 해방과 분단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불가에 입문한 여로(旅路)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대종사는 남한의 남조선노동당을 이끈 부친 박헌영 거사와 모친 정순년 여사 사이에서 1941년 태어났습니다. 1946년 부친 박헌영 거사가 미군정의 압박을 피해 월북하자 남한에 홀로 남겨져 홀연단신 고아가 되었으며,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부친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출가한 한산(寒山)스님의 슬하에서 청년을 맞았습니다.

자연스레 한산스님의 문하에서 10세 때부터 삭발염의하였으나 정식적으로 출가를 결행한 것은 송담 정은 대선사를 만난 1960년의 일입니다. 1960년 3월 전강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3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시니 어엿한 출가사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1996년 국립사회복지연수원, 1997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였습니다.

대종사는 젊은 시절 은사 송담스님을 따라 화두참선 수행에 매진하여 어묵동정 행주좌와 화두참구하기를 인천 용화선원, 수덕사 정혜선원, 문경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26안거를 성만하시고 비로소 출세간의 깊은 묘리를 세간에 내보이셨습니다.

兜率摘花香自濕 두솔적화향자습
松下喫茶心自閑 송하끽다심자한
圓鏡生平修得何 원경생평수득하
滿庭月光露不霑 만정월광로불점

도솔천에서 꽃 따다 보니 향기 절로 배이고
솔 아래 차 마시다 보니 마음 절로 한가하네.
원경이여 한 평생 닦아 무엇을 얻었는가?
뜰에 가득한 달빛은 이슬에 젖지 않는다오.

대종사는 치열한 정진으로 상구보리하였으니 세간으로 나아가 하화중생하기를 서원(誓願)하여 허물어져 가는 가람을 일신하고 복전을 일구셨습니다. 1974년 흥왕사 주지로 처음 부임한 이래 1983년 청룡사 주지, 1987년 신륵사 주지 등을 거쳐 1995년 만기사 주지를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스님의 원력이 큰 줄기를 이루어 중생이 감화하고 불연이 꽃을 피웠습니다.

큰 어려움이 처할 때에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갔습니다. 2014년 4월 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추대되고, 2015년 1월에는 최고 법계 대종사를 서품하셨으며, 2017년 12월 원로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지난 봄 종단의 법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거듭된 요청을 거절치 못하시고는 후학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 현실을 늘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아울러 가람수호와 중생교화에 진력하면서도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굴곡진 근현대사를 이념과 사상에 치우치지 않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매진하였습니다. 1993년부터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부친 박헌영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아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10년 펴낸 시집 <못다 부른 노래>는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수행자로 살아온 삶을 회고하며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기자협회 한민족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으나, 대종사께서는 이 또한 거추장스런 허물이라며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근래 건강을 걱정하는 제자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지 어찌 꺼리랴” 하시던 대종사의 말씀이 세연을 다함을 미리 알고 계신 가르침이었습니다. 지난 12월 6일 누구도 부르지 아니하고 세연을 다하시며 법납 62년, 세수 81세의 삶을 쪽지 한 장 열반송으로 일러주었습니다.

適來時也何尤誰 적래시야하우수
適去順也何忌憚 적거순야하기탄
離席促我末後句 이석촉아말후구
阿汝爲悲獻一花 아여위비헌일화

올 때가 되어 온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랴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지 어찌 꺼리랴
떠나는 자리 나에게 마지막 말을 재촉한다면
그대여 슬프거든 꽃이나 한 송이 올리게나.

[1613호 / 2021년 12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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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5:21 오늘의 정보/오늘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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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반구대 암각화, 옻칠로 되살렸다···통도사 방장스님 수중 회화전
입력2021.04.23. 오전 5:00 수정2021.04.23. 오전 6:54
백성호 기자



통도사에 당대의 선지식 경봉 스님(1892~1982)이 주석할 때였다. 당시 30대였던 성파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 시를 써서 보냈다. 그냥 시가 아니었다. 마음공부 자리, 수행의 견처를 담은 시였다. 하루는 경봉 스님에게서 편지로 답이 왔다. 답장에는 ‘능문능시(能文能詩)’라고 적혀 있었다. 능히 글을 쓰고, 능히 시를 쓴다. 마음에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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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의 슬로건은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이다. 스님은 "일해야 공부할 수 있지, 일하지 않고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느냐"며 생산 불교를 강조했다.

선가(禪家)의 어법으로 보면 선사가 후학의 마음자리에 고개를 끄덕인 셈이다. 일종의 인가다. 경봉 스님은 이어서 ‘속불혜명(續佛慧命)을 희옹희옹(希顒希顒)하노라’라고 썼다. ‘부처의 법을 잇기를 바라고 또 바라노라’는 의미다. 당시만 해도 절집에서 경봉 스님과 젊은 성파 스님 사이는 층층시하였다. 그런데도 80대 경봉 스님은 30대 성파 스님에게 ‘능문능시’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성파 스님은 통도사 영축총림의 방장이 됐다. 선원ㆍ강원ㆍ율원을 두루 갖춘 총림의 최고 지도자가 방장이다. 14일 푸릇한 신록이 파도치는 통도사 서운암에서 성파(82) 스님을 만났다. 맞은 편에 서 있는 영축산의 산세가 오롯하고 당당했다. 성파 스님은 요즘 각별한 작업을 하고 있다. 7000년 전 선사시대의 예술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주인공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국보 제285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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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이 맨발로 올라가 반구대 암각화를 옻칠로 되살린 작품을 손으로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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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심해 직접 찾아가도 선명한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중앙포토]

선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선사시대 암벽에 새겨놓은 그림에 오늘날 생기를 불어넣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직접 찾아간다 해도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다. 하천 건너 절벽에 새겨진 그림에다, 풍화작용으로 마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물 건너편에서 망원경으로 본다 해도 그다지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성파 스님이 이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다시 그려놓았다. 제작 기간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24일 오후 3시부터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상설 전시된다. 그것도 물속에 잠긴 채 전시되는 전례 없는 수중전이다. 작품 크기는 7.8m×4.4m다. 반구대 암각화와 100% 똑같은 실물 크기다. 누구나 와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마구 올라오는 물음을 마주 앉은 성파 스님에게 던졌다.


Q :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옮겼다고 들었다. 어떤 식인가.

성파 스님은 대답 대신 등 뒤에 서 있는 커다란 도자기를 만져보라고 했다. 조심스레 만졌다가 깜짝 놀랐다. 도자기가 아니었다. 모양은 영락없는 도자기인데, 정체는 삼베였다. 이건 마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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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가 아니다. 삼베에 옻칠을 해서 만든 작품이다. 성파 스님은 아무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A : “삼베에 몇 차례나 옻칠해서 겹으로 붙이면 저렇게 된다. 고려청자가 깨졌을 때 무엇으로 붙이는지 아나. 접착제가 아니다. 옻칠이다. 접착제는 세월이 가면 산화돼서 힘이 없어진다. 물에 들어가도 접착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Q : 그럼 옻칠은 어떤가.

A : “옻칠은 썩지 않고 방부가 된다. 접착력도 강하다.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옻칠로 한번 접착되면 물에 넣고 팔팔 끓여도 안 떨어진다. 게다가 옻칠은 수천 년 가도 색이 안 변한다.”

성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와 동일 크기의 삼베에 옻칠을 했다. 열두 번 넘게 칠한 뒤에 다시 삼베를 붙이고, 다시 칠하고 다시 삼베를 붙이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작품의 바탕을 만들었다. 그러자 도자기처럼 단단한 바탕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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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서운암에 마련된 작업실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되살린 작품의 크기가 너무 커서 반출할 때 작업실 정문을 떼어내야 했다.

참 묘했다. 까맣게 칠한 옻칠 바탕이 영락없는 우주였다. 그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색깔 입은 옻 안료는 하나하나가 별이었다. 한눈에 봐도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우주였다. 성파 스님은 그 위에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을 띄웠다. 그것도 우리 고유의 나전칠기 기법에 옻칠로 색을 입혔다. 그러니 성파 스님의 암각화는 우주 허공에 띄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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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에는 궁극의 순수미가 있다. 삼국시대의 마애불도 이런 암각화를 보고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Q : 왜 ‘반구대 암각화’인가.

A : “7000년 전 선사시대 때 절벽에 새긴 그림이다. 신석기 시대의 그림이다. 그걸 봤는데 ‘아!’하는 순수미가 있더라. 요즘 문화는 세련되고 편리하다. 그런데 조작미라 백 배, 천 배 꾸미고 부풀릴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그것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정신도 순수하고, 그림 그리는 장비도 순수하고, 모든 생활이 순수하다. 암각화는 인류 문화사에서도 최고 원조에 해당한다. 예술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건 원조다.”

성파 스님은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예로 들었다. “장 화백의 그림은 서툴다. 대단히 화려하거나, 대단히 세련된 작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순수미가 있다.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다. 궁극의 순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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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를 나전 기법과 옻칠로 되살린 작품에는 7000년 전에 그린 동물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자리와 궁극의 순수미는 통한다. 그러니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띄우며 성파 스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는 순수의 결정체가 아닐까. 그림을 통해 우리의 어깨를 ‘톡! 톡!’치며 “인제 그만 깨어나라”고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Q : 반구대 암각화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나.

A : “사람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거북이도 있다. 특히 고래가 많다. 그 당시에 이미 고래잡이를 했다는 기록이다. 고래를 잡는 그물도 그려져 있고, 고래를 가두는 목책도 그려져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이다.”

성파 스님 작품에는 고래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바닥도 모를 우주 공간을 색색의 고래가 헤엄친다. 원시의 순수가 7000년 만에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손으로 고래를 만졌더니 반질반질하면서도 딱딱하다. 알고 보니 전복 껍데기를 쪼개서 붙이는 나전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 위에 천연 색 염료를 녹인 옻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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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천정리 각석을 나전 기법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선사 시대의 그림 외에도 화랑의 이름 등 삼국시대에 가미된 그림과 글들이 새겨져 있다. 서운암 장경각 앞에서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물속에서 상설 전시된다.


Q : 왜 전복 껍데기를 이용한 나전 기법을 썼나.

A : “고려 시대의 나전칠기는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중국과 일본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나전으로 자개를 붙여서 그림으로 표현했다. 나전은 광산에서 캐는 보석이 아니라 물에서 캐는 보석이다. 물은 무르지만, 이건 굉장히 야물다. 어변성룡(魚變成龍)이라고 하지 않나. 물고기가 변해서 용이 된다. 나전은 물이 변해서 옥이 된 거다. 그러니 대단한 거지.”


Q : 작품의 배경은 왜 우주인가.

A : “불교에서는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우주라고도 한다. 이 우주에 삼라만상이 다 있지 않나. 요약하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거다. 반구대 암각화, 그 한장에 시ㆍ공간을 다 넣고자 했다. 그래서 우주 허공에 암각화 문양을 띄운 거다.”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는 조그만 풀장이 둘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풀장이 아니었다. 작품 전시 공간이었다. 풀장처럼 생긴 액자인 셈이다. 거기에 물을 가득 담고, 반구대 암각화 작품을 물속에 눕혀서 전시한다. 바로 옆에는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있는 울산 천정리 각석(3.3m×9.7m, 국보 제147호)을 나전으로 되살린 작품이 전시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회화의 수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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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은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나전은 무른 물에서 나온 여문 옥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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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는 풀장이 둘 있다. 사실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정리 각석 작품을 전시할 수중 액자다. 물을 가득 채운 뒤 두 작품을 눕혀서 전시한다. 24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Q : 왜 물속에서 전시하나.

A : “모든 것이 물에서 났다. 생명체도 처음에는 물에서 나왔다. 물이 아니면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댐을 막아 수위가 높아지자 물에 잠긴다, 안 잠긴다 논란이 많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마. 통째로 물에 담겨 있는 걸 함 봐라, 이거다. 하하”


Q : 물속에 넣으면 작품이 손상되지 않나.

A : “서양에는 옻칠이 없다. 동양에만 있다. 옛날에는 집안에 옻칠한 장롱 하나만 있어도 부자라고 했다. 옻칠은 천년이 흘러도 안 변한다. 물 속에 넣어도 변하지 않는다. 회화의 수중 전시는 이게 최초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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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이 맨발로 반구대 암각화 작품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다. 우주에 띄워진 그림의 색상이 선명하다.


Q : 그래도 뜻밖이다. 통도사 방장 스님이 손수 작품을 만드신다. 그것도 차원이 다르다. 누가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에 띄울 생각을 하겠나. 세간의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다.

A : “아, 이게 이상하다고 하면 방장을 사람들이 잘못 뽑은 거지. 나는 방장 되기 전에도 내 멋대로 했고, 방장 되고 난 뒤에도 내 멋대로 가는 거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계속 내 멋대로 가는 거라.”

성파 스님이 늘 강조하는 슬로건이 하나 있다.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다. “‘일하며’가 먼저 온다. 일을 해야 공부를 할 수 있지, 일 안 하면 공부를 할 수 있나. 그래서 공부하며 또 일하는 거다. 그게 내 좌표다.” 그래서 성파 스님의 불교는 생산 불교다. 신자들에게 기대는 불교가 아니라, 신자들이 찾아오게 하는 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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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은 원래 색깔이 없다. 여기에 천연 염료를 녹여 넣어 옻칠을 한다. 옻칠한 삼베 위에 그려진 나전의 색색이 무척 아름답다. 성파 스님의 작품은 한반도에 깃들어 있는 고대사의 생생한 기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부산과 울산 등 전국에서 이미 유명해진 서운암의 들꽃축제와 시문학회, 전통방식으로 직접 담은 된장과 고추장 장독들, 옻칠로 되살린 우리나라 불화만 총 32종, 152점에 달한다. 이 모두가 성파 스님의 작품이다. 팔만대장경을 모두 650톤의 도자기로 구운 도자대장경, 천연염색, 옻칠 민화 등 끝도 없이 피어나는 생산 불교다.

성파 스님은 “진리의 이론만 알고 사물에 어두우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격물치지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성파 스님은 “그 반대도 곤란하다. 사물에만 밝고 진리에 어두워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뿌리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둘이 달라 보이지만 서로 통한다. 진리도 굴리고 사물도 굴릴 때, 선사라도 대선사가 된다.”

마지막으로 성파 스님은 “새가 숲에 있을 때는 극락세계인 줄 모른다. 새장에 갇히면 ‘저 숲이 극락이구나’ 깨닫는다. 그러니 극락이 어디 있겠나.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이 극락세계다. 그걸 고통의 바다라고 착각하지 마라. 여기가 극락임을 알면 날마다 좋은 날이 펼쳐지고,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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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이 우주 허공에 띄운 반구대 암각화. 고래와 거북,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가운데에 고래 잡는 그물과 목책이 보인다.

서운암 밖으로 나왔다. 세상이 푸르다. 성파 스님은 지금 여기가 극락이라 했다. 그러니 우주 허공이 따로 있을까. 7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 모두가 우주 허공을 헤엄치는 고래다. 이 극락의 주인공이다.

양산=글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 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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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5:00 오늘의 정보/오늘의 여행


조계종 새 종정에 성파 스님 추대
입력2021.12.13. 오후 2:55


조계종 15대 종정으로 추대된 성파 스님이 지난 5월 통도사 서운암 앞 공터를 가득 채운 장독대 사이에 선 모습. 성파 스님은 1980년대부터 버려진 장독을 수집해 간장 된장을 담갔다. /김동환 기자

대한불교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제15대 종정(宗正)에 통도사 방장 성파(性坡·81) 스님이 추대됐다. 조계종은 13일 오후 서울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종정 추대회의를 갖고 성파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종정은 ‘조계종의 신성을 상징하고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 권위와 지위를 가지는’ 자리다. 새 종정의 임기는 내년 3월부터 5년이며,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다.

성파 스님은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80년대 조계종 총무원 사회·교무부장과 통도사 주지를 지냈다.

통도사 내 암자인 서운암(瑞雲庵)에 머물며 이곳을 중심으로 된장·간장을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보급했으며 옻칠, 도자기, 한지(韓紙) 등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보존·발전시켜왔다.

8만 대장경을 도자기판으로 굽기도 했으며 100짜리 한지를 제작하기도 했다. 본인의 작품전도 여러 차례 열었다.

성파 스님은 수행하는 스님이 예술 분야까지 영역을 넓힌 데 대해 “과거 전통 사찰은 건축, 미술, 공예의 산실이었다”며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사찰이 앞장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불리는 영축총림 통도사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을 맡아오다 이날 종정에 추대됐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hansu@chosun.com

https://isness.tistory.com/m/208

'무엇을 근거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인가?' 한국참선지도자협회 세미나 / 불교수행법 현황 -

三光(삼광) - 精光(정광), 氣光(기광), 神光(신광) - 이 뜬다. 이것이 後光(후광) 또는 光背(광배)이다 신성한 빛과 에너지의 모든 것(오라와 후광 비율) https://m.cafe.naver.com/divinesoulenergy/3169 죽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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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4:54 오늘의 정보/오늘의 여행


조계종, 내일 종단 최고 지도자 ‘종정’ 선출 절차 착수
입력2021.12.12. 오후 2:05 수정2021.12.12. 오후 2:08
정연욱 기자


대한불교조계종이 내일(13일)부터 종단 최고 지도자인 종정(宗正) 선출에 들어갑니다.

불교계에 따르면 조계종 현 종정인 진제스님의 임기가 내년 3월 만료됨에 따라, 내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비공개 회의를 통해 10년 만에 새 종정 추대 절차가 시작됩니다.

종정추대 회의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전원과 중앙종회 의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호계원장 등 20여명이 참여하며, 새 종정 추대는 재적 과반의 찬성으로 결정됩니다.

새 종정 후보로는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스님,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세민스님,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조계종은 제15대 종정이 추대되면 조계사 대웅전에서 고불식을 열고, 새로운 종정의 선출을 알릴 예정입니다.

종정은 종단 행정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종헌·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 및 경감, 복권 권한을 행사하며, 원로회의 제청을 받아 종단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를 해산할 수 있습니다.

종정은 승려 나이인 승납이 45년 이상, 세속 나이로 70세 이상, 수행 계급을 뜻하는 법계가 대종사 이상이어야 하고, 임기는 5년이며 중임이 한 차례 가능하다.

2011년 제13대 종정으로 추대된 진제스님은 2016년 제14대 종정으로 재추대 됐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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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근거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인가?' 한국참선지도자협회 세미나 / 불교수행법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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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종정 추대..성파 스님은 누구인가?

조계종, 10년만에 제15대 종정 추대..성파 스님은 누구? 이수지 입력 2021. 12. 13. 15:54수정 2021. 12. 13. 16:06 만장일치로 추대...임기는 5년 1960년 출가 통도사 주지·방장 역임 28년간 도자삼천불·1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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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oonastro.com/babyname/baby%20name%20meher%20meaning.aspx

Meher - meaning | Baby Name Meher meaning and Horoscope

Baby Name : Meher Gender : girl Origin : Bengali, Hindu, Indian, Gujarati, Hindi, Kannada, Malayalam, Marathi, Muslim, Oriya, Punjabi, Sikh, Tamil, Telugu Meher Meaning: Benevolence; Grace Variant: Meher Number : 3 Moon Sign (Rashi) : Leo (Simha) Star (Nak

www.moonastro.com


이름 메허Meher 바바의 의미들

사용자가 제출한 의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사용자는 Meher라는 이름이 인도(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 했으며 "인애, 친절, 독특함을 나타내는 해와 달"을 의미 한다고 말합니다 .

인도네시아의 한 사용자는 Meher라는 이름이 페르시아/이란에서 유래 했으며 "달, 친절"을 의미 한다고 말합니다 .

인도의 한 사용자는 Meher라는 이름이 힌두교에서 유래 했으며 "신의 축복"을 의미 한다고 말합니다 .

싱가포르의 한 사용자에 따르면 Meher라는 이름은 "친절함"을 의미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제출한 제출물에 따르면 Meher라는 이름은 "돈, 태양, 자비 및/또는 그 이상"을 의미하며 인도(산스크리트어) 기원 입니다.

미국 코네티컷에서 제출한 제출물에 따르면 Meher라는 이름은 "착하고 친절한"을 의미하며 힌디어 기원 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제출된 2개의 제출물은 Meher라는 이름이 "축복"을 의미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인도에서 제출한 제출물에 따르면 메허라는 이름은 "신의 은총"을 의미하며 아랍어 출신 입니다.

인도의 한 사용자는 Meher라는 이름이 인도(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 했으며 "직물을 짜는 사람"을 의미 한다고 말합니다 .

인도의 한 사용자에 따르면 Meher라는 이름은 "도움"을 의미합니다.


https://www.names.org/n/meher/about

What Does The Name Meher Mean?

What is the meaning of Meher? How popular is the baby name Meher? Learn the origin and popularity plus how to pronounce Meher

www.na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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