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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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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춤추고 있었다"
- 북미 원주민 Cree 족
"전쟁의 여신 발키리가 전사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때 방패에서 반사된 빛"
- 바이킹
"신의 계시", "하늘에서 타오르는 촛불"
- 중세 유럽



오로라(Aurora)란?

오로라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자연현상중 가장 멋진것으로 꼽힐겁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자연의 쇼가 지구 내부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오로라는 생명의 근원인 태양으로 부터 비롯되며 지구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게 되는것이니까요

오로라는 태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태양에서 방출된 전기를 띈 입자들이 태양풍에 의해
지구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때 지구는 하나의 자석처럼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자기장의 경로를 따라 이 입자들이
극지방에 모여들게 되지요 이때 그 현상이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오로라입니다.

posted by 有然(유연)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posted by 有然(유연)


이단에 빠졌다가 우리 교회 출석하는 어떤 자매님의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자매님은 24년간이나 어떤 이단사설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이단교주가 메시아요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구세주라고 믿었습니다. 잘못된 허리띠를 묶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받아서 우리 교회 나오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교회에 앉아서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목이 획 돌아가 버립니다. 또 십자가를 바라보면 또 목이 획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와서 예배를 드릴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매님을 전도한 지역장, 구역장이 함께 오산리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기도하며 악령을 끈질기게 대적하고 내어 쫓았는데 귀신이 “안 나간다~ 내가 왜 나가느냐? 너희들이 나를 쫓아내지 못 한다~”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저항했습니다.

잘못된 허리띠를 띠면 귀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허리를 띠면 성령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귀신이 반항하고 안나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나 우리 지역장, 구역장들이 인내를 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대적하니까 소리치며 귀신이 나가고 자매님은 해방을 얻게 되고 그때 이후로부터 자매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와 의를 얻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십시오. 어떠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로 허리띠를 띠면 진리의 영, 성령이 여러분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허리띠를 띠면 세상에 악령이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 때도 주님은 항상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해서 기록하였으되 하나님 말씀하기를 기록하였으되 마귀를 대적하니 마귀의 모든 참소와 유혹의 화살은 부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방패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방패를 삼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공격하고 마귀의 염통을 찌르는 말씀의 검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성경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권능의 말씀인데 말씀을 이용하면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쫓겨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양천대교구의 박말선 집사님의 간증을 듣고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은 14살에 일본에 건너가서 결혼했는데 시댁 영향으로 무당이 되었습니다.

후에 경주로 와서 사는데 경주에서 박보살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굿을 해주면서도 정작 집사님의 마음은 늘 답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집사님에게는 시집 간지 17년이 된 큰 딸이 있는데 그때까지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큰 굿을 몇 번이나 해줘도 소용이 없고 동창생인 점쟁이를 불러다가 아무리 점을 쳐도 효과가 없어요. 그런데 딸이 교회 나가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자 얼마 안 되어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집사님이 속으로 “아따~ 예수신이 용하기는 용하구나!” 감탄은 했지만 30년 동안 무당 생활을 하고 유명한 박보살이 되었으니 그 생활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딸들이 무당 그만두고 무당 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 믿으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러던 하루 집사님이 손자가 보고 싶어서 서울에 큰 딸네 집에 왔는데 딸들과 사위 네 명이 붙잡고 우리 교회로 강제로 끌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끌려 나와서 이 대성전에 앉아 있었습니다.

대성전 1층에 앉아서 제 설교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데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무당귀신이 그 속에서 떠나갔습니다.

집사님은 그날 이후로 변화되었습니다. 담배가 탁 끊어지고 난 다음에 무당귀신이 떠나가니까 아무런 점도 쳐지지 않아요. 무당의 계시가 사라져 버렸어요. 완전히 중생하고 만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 믿어야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검인 말씀이 그 마음에 부딪혀 오자 집사님을 30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마귀의 세력이 해체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거짓을 해치는 하나님의 메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위에 서야지 말씀에 서지 않으면 마귀는 쫓겨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능력있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뜨거운 마음으로 한서린 마음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되든지 우리가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본 사람은 이것이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은 기도를 응답받는 그 아름다운 체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 있는 기도는 목표를 두고 간절히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가 있고 간구가 있는데 간구는 목표를 두고 간절히 창자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는 것이 간구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요.





존낙스가 스코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당시 통치자였던 메리 여왕은 열심있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낙스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목표를 정하고 애끊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저에게 주십시오. 아니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가 기도하던 방의 창문으로는 메리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 보였는데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같은 기도를 몇시간씩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자 메리여왕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여왕은 죽기전에 “존낙스 한사람의 기도가 백만대군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존낙스의 기도를 통해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마귀가 치를 떨고 무서워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만 할 뿐 아니라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는 방언기도인 것입니다.

일반기도를 하고 또 간구를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부엌에서 밥하면서도 할 수도 있고 시장가면서도 할 수가 있습니다.

자다가도 할 수가 있어요.

바울선생은 여행하면서 천막 만들면서 매를 맞으면서 감옥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고린도교인 모두가 합쳐서 하는 방언보다 더 많이 방언기도함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방언은 신령한 기도인 것입니다. 영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점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수시로 방언기도를 많이 합니다.

방언기도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운동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걸어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서라도 방언은 내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기도하고 또 목표를 가지고 간구도 하고

또 성령안에서 무시로 기도하여 믿음을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posted by 有然(유연)

호모 룩스, 사랑의 빛
새전북신문 - 2021년 11월 24일 13시35분


인간의 학명은 호모 속 사피에스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이 깊고 슬기롭고 현명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 ‘호모’ 속의 뒤 종 이름을 창의적으로 붙인 몇몇 이름들이 있다.

‘호모 루덴스’를 붙이면 ‘유희하는 인간’이 된다. 네덜란드 문화사학자인 요한 호이징하가 1938년에 제창한 개념이다. 인간의 본질을 유희라고 정의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 말에서 파생된 신조어가 생겨났다. 바깥보다 집에서 놀고 휴식하는 사람들을 가리며 ‘홈 루덴스’라고 일컫는다. 2009년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라는 책에서 나온 ‘호모 엠파티쿠스’도 있다. 공감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는 21세기가 인간의 공감 본능이 이끌어 가는 ‘공감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았다. 과도하고 과몰입된 경쟁 시대에 절실한 것이 바로 ‘공감’인 것이다. 2016년 생물학자 최재천은 ‘호모 심비우스’라고 했다. ‘심비우스(Symbious)’는 생물학적 용어로 ‘공생’을 말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다른 생물들과 공존하기를 염원하며, 지구촌 모든 이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17년에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라고 새롭게 명명했다. 데우스(Deus)는 ‘신(God)’란 뜻이니, 이 말은 신이 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류의 재앙, 전쟁, 역병을 진압하고 신의 영역인 불멸, 신성까지 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인류가 신한테서 구원을 찾기보다 사회 안에서 해결책을 찾고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에 창안하여 명명한 것이다. 호모 데우스는 찬란한 바벨탑인 셈이다.

이에 전면적 대응으로 ‘데우스 호모(인간이 되신 하나님)’라는 책이 올해 9월에 최준식이라는 기독교 학자에 의해 발간되기도 했다.

이제 다른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인간 영혼의 핵심은 ‘빛’이다.
이 빛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에너지, 신과 합일을 이룬다. 망각하고 있거나 부인하는 이한테도 이 ‘빛’은 존재한다.
빛은 살아있는 실체이고, 생명의 원동력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대로 지금은 어렴풋이 알지만, 육체의 지배를 벗어나서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빛’의 속성은 ‘사랑’이고, 그 영향력은 ‘긍정 에너지’다. ‘빛’은 라틴어로 ‘룩스(Lux)’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의 빛을 가진 치유의 인간을 ‘호모 룩스’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호모 룩스’라는 말을 쓴 것은 이번 해 1월 13일, 이 공간을 통해서다. 인간은 ‘마음의 빛’을 가진 채 영혼의 성장을 목적에 담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오쇼 라즈니쉬에 의하면 신, 삶, 진리, 사랑은 한 뿌리에서 나온 네 가지 이름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으로 의미를 갖는다. 철학자 레비나스도 이를 ‘빛’이라고 표현했다. ‘호모 룩스’는 신과 연결된 사랑으로 치유의 에너지를 지닌 인간을 말한다.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많이 아플수록 빛은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호모 룩스’는 치유가 절실한 현시대에 가장 적합한 명명일 것이다.

/박정혜(심상 시치료 센터장·전주대 겸임교수)

posted by 有然(유연)

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교수)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등불을 전했다(傳燈). 깨달음의 등불을 전했다. 그러나 사실은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아무것도 전달한 것이 없다. 다만 스승의 현존에 힘입어 제자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 표면으로 올라온다. 진정한 스승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제자 앞에 현존하는 것이다. 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스승이 하는 일의 전부다.

스승의 발 아래 앉아 스승을 친견하는 것을 삿상(satsang)이라고 부른다. 삿상은 스승의 현존에 동참하는 것, 스승의 조화로움과 함께하는 것을 뜻한다. 스승이 거기에 있고 우리는 그의 곁에 앉는다. 아무런 말도 행위도 없다. 그러나 서서히 나는 스승의 분위기와 스승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전달된다. 고요한 각성 속에 있는 스승의 곁에 앉음으로써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스승은 내게 침묵으로 가르친다. 그 순간 나는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진다. 내가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니다. 미지의 어떤 것을 맛본 바로 이 앎은 나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제자도(disciplehood)의 상징이며 은유다. 태양이 어디로 움직이건 해바라기는 그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제자도란 '저는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하고 스승에게 입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결단이다. 왜냐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체적인 귀의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 나의 인생 전체를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는 것은 도박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진실로 제자 된 사람은 극히 적다.

가르침은 중요하지 않다. 선생이 중요하다. 요즈음 교육에서는 수요자 중심이라고 해서 선생보다 학생을 중요시한다. 학생이 아닌 제자는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는다. 배운다는 것은 수용적이어야 하고 스승을 신뢰하며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현대 교육 이전에는 학생이 아니라 항상 선생이 중심이었다. 선생은 모든 것을 경험한 현자였다. 우파니샤드의 시절에는 삶을 학생기(學生期), 가장기(家長期), 임서기(林捿期), 유행기(遊行期)로 나눠 살았다. 임서기가 되면 사람들은 숲으로 가서 작은 학교, 즉 구루꿀을 세우고 선생이 되었다. 삶을 다 살아본 사람만이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가 숲속으로 스승을 찾아와서 배워야 할 첫 번째는 듣는 법이었다. 듣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때때로 듣는 법을 배우는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나의 마음이 완전히 침묵했을 때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 파도와 마찬가지로 물고기는 바다의 일부다. 그러나 물고기는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물고기가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은 낚시꾼에 의해 뜨거운 모래밭에 던져졌을 때뿐이다. 그때 물고기는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 사람도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낚시꾼처럼 우리를 삶의 바다 밖으로 건져 올리기 때문이다. 삶의 바다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맙소사, 나는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왔구나. 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스승은 낚시꾼과 같다. 좋은 낚시꾼을 만나면 우리는 죽기 전에 바다 밖을 경험해 볼 수 있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posted by 有然(유연)

이차크 벤토프의 우주심과 정신물리학 180~182쪽에서 발췌


육체보다 높은 배수 진동체로 이루어진 일련의 신체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신체들은 우리의 육체 안에 서로 침투해 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차원의 의식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예를 몇가지 들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육체나 다른 진동체(신체)는 기본적으로 외부의 신호나 자극을 받아서 처리하고 반응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이 네다섯 군데의 방송을 동시에 수신하는 라디오같은 장치라고 상상해보자. 그중에 전파의 세기가 제일 강한 방송이 있을 것이고, 나머지 다른 방송들 간에도 전파의 세기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장 강한 방송을 육체적 존재에 비교할 수 있다.


이 경로를 통하여 들어오는 방송은 가장 크게 들리고, 반면에 아스트랄, 멘탈, 인과 및 영적 존재들을 대표하는 방송은 차례로 더욱 약하게 들린다.


그리하여 귀가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육체적인 방송만을 듣게 될 것이고, 반면에 보다 예민한 청각을 가진 사람은 더 약한 방송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꼭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는 이 모든 방송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더 약한 방송의 청취 감도는 소리가 큰 육체 방송국을 끄기만 하면 상당히 개선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잠을 잘 때, 명상을 행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하여 느끼는 갑작스런 매력이나 적대감을 예로 들어보자.


갑자기 매력을 느끼는 경우는 육체 너머까지 퍼져있는 아스트랄체끼리 조화롭게 공명하는 경우라 할 수 있고, 적대감을 느끼는 경우는 아스트랄체 사이에 강한 불협화음이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가장 약한 방송이 영계(인과계 너머의 차원)의 방송이다.


이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말하는 작은 목소리, 우리의 더 높은 자아인 양심의 소리이다.


가끔 우리는 사고방식이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정신 차원(멘탈계)에서 공명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한 예로, 어떤 계획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에 대한 직관적인 <감>은 직관계(인과계)의 영역에서 얻어진다.


여러명의 예술가, 과학자 및 발명가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 모두가 인과계(직관계)의 영역을 방문했다가 그 아이디어를 우연히 만나 그 아이디어와 공명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부연설명: 위에서 인과계너머의 차원을 '우리의 더 높은 자아 (Higher Self)'로 표현했는데, 사실 그러한 자아는 본질적으로 시공간 너머에 있고, 무한히 퍼져나가는 속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아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tycheh/221640910270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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