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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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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이 찾은 발칙한 생물들

물고기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어라. 언제나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서 깨어나 일심(一心)으로 살아라. 그와 같은 삶이라면 너도 살고 남도 살리고, 너도 깨닫고 남도 능히 깨달을 수 있게 하리니······."

절에서 들을 수 있는 법음 한 구절이다. 이 법음처럼 물고기는 잘 때도 두 눈을 뜨고 잔다. 그래서 잠들지 말고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뜻이 의당 목어, 목탁, 풍경에는 스며 있다. 목어(木魚)와 풍경은 언뜻 봐도 물고기와 흡사하지만 목탁은 눈여겨봐야 그 닮음을 알 수가 있다. 목탁에 뚱그런 구멍이 둘 나 있으니 그것이 물고기의 눈이요, 손잡이가 바로 꼬리지느러미에 해당한다. 땅땅땅!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 쉼 없이 맹진하여 도를 닦을지어다!

바람에 '땡그랑땡그랑' 풍경이 때리는 은은함은 산사의 정적을 깨트릴 뿐만 아니라 깜빡 졸고 있는 도승의 낮잠을 쫓는다. 낙명(落命)1)의 그날이 코앞에 다가오는 지금, 나는 뭘 했는가? 소태 같은 쓴 세월을 다 보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마음엔 굳은살이 박히지 못했을뿐더러 평심(平心)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목어는 1미터 길이의 큰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 속을 파내어 아침저녁 예불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리는 도구다. 이는 중국의 절에서, 아침을 먹을 때와 낮에 밥 먹는 시간을 알리는 데에 쓰였던 것으로, 원래의 모양은 길고 곧게 물고기처럼 만들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수행에 임하는 수도자들이 잠을 줄이고 물고기를 닮아 부지런히 깨우침을 위해 정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목어가 차츰 모양이 변하여 지금 불교 의식에서 널리 쓰이는 불구(佛具) 중의 하나인 목탁이 되었다고 한다. 또 목어는 처음엔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츰 용머리에 물고기 몸을 가진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변신했고, 드디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되었으니 이는 잉어가 용으로 변한다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을 표현한 것이다.

목어

이는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등용문(登龍門)'의 고사가 윤색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곧, 복숭아꽃이 필 무렵 황하의 잉어들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오르다가 용문(龍門)의 거칠고 가파른 협곡을 뛰어올라야 하는데, 거의가 실패를 하지만 요행히 성공한 잉어는 용으로 화(化)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이 곧 해탈을 의미한다고 한다. 해탈이란 속박에서 벗어나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마음의 경지요, 그곳이 곧 열반이라 한다.

독자들 중에도 자동차 꽁무니에 붙어 있는 물고기 형상을 자주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차의 주인이 '기독교 신자'라는 것을 알려 주는 상징이다. 기독교와 물고기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초대 교회 시대에 로마는 무척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 등지에서 숨어 지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밝히기 위해 물고기 그림을 보이거나 물고기 모형의 조각품을 지니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몰래 땅바닥에 물고기 그림을 그려 자기 신분을 알리기도 했다고 한다.

필자도 거기를 가 보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순교적인 산물이 바로 카타콤이었다. 지하 카타콤의 미로에 길을 안내하는 그림도 물고기로 표시하였다고 하니 물고기는 일종의 암호였던 것이다.

초대 교회 물고기 상징

장군의 갑옷도 물고기와 연관이 있다. 장수의 갑옷(갑의, 甲衣)에는 의례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쇳조각들이 온통 주렁주렁 달려 있다. 햇볕에 반사되어 번쩍거릴 때는 보는 이를 눈부시게 한다. 물속의 갈겨니도 가끔씩 몸을 기울여 햇살에 몸을 맞춰 번쩍번쩍 은백색을 쏘아 대며 상대를 겁준다. 참고로 물고기 중에 이들처럼 체색이 희거나 밝은 것은 하나같이 주행성이고, 메기, 뱀장어처럼 흐린 것은 야행성이다.

어쨌거나 갑옷 입은 장수는 물고기요, 물고기 중에서도 대장 물고기이다. 역시 밤낮으로 눈을 감지 말고, 적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말며, 많은 병사들을 잘 인도하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어디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만 물고기가 되어야 하겠는가. 녹봉을 먹고사는 우리들 선생들도 모두모두 물고기가 될지어다. 난 월급 타령하는 교수가 제일 밉더라. 무상(無上, 더할 수 없음)의 기쁨은 고통의 심해에 감춰 있다고 하지 않는가.

피카소의 작품 하나가 나의 눈길을 끈다. "예술은 절대로 정숙하지 않아서, 결국 남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갈파한 전설적인 화가가 밥상에서도 익살을 떤다. 그 양반이 입에 물고 있는 물고기 뼈 사진 말이다. 절로 웃음이 난다. 웃음은 가난도 녹인다고 했던가. 아무튼 예술가의 혼은 먹다 버리는 생선 뼈다귀도 파고든다.

그는 생선 한 마리의 살을 일일이 마음 써서 볼가2) 먹고 나서 그것을 진흙 덩어리에다 꼭 눌러 박아 흔적을 남겼으니 그것이 물고기 화석처럼 보인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다. 생선 뼈를 목에 걸리는 가시 정도로 여기지 않고 혼을 불어넣을 작품 소재로 보는 그 유별난 눈을 닮아 보면 좋지 않을까.

그렇다, 물고기는 잠을 자도 눈을 감지 않는다. 땅-땅-땅! 고즈넉한 산사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목탁 소리, 그것은 물고기를 본뜬 목어가 아니던가. 몸통이 큰 복어를 닮았다고 할까. 기독교의 상징이 물고기인 점과 어쩌면 닮았단 말인가.

결국 종교는 공통으로 일맥상통하는 것이니, 불교와 기독교도 불이(不二)의 관계인 셈이다. 엉뚱한 소리지만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 자나 깨나 몸을 씻어 대니 얼마나 심신이 정결할까. 세례가 필요 없는 동물이 물고기렷다. 물고기가 여러 종교와 예술을 아우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有然(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