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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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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mandala, 曼茶(陀)羅


밀교(密敎)에서 발달한 상징의 형식을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


신성한 단(壇:성역)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으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원래는 ‘본질(ma만다라)을 소유(la)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컬었다.
그래서 윤원구족(輪圓具足)으로 번역한다. 윤원구족이란, 낱낱의 살[輻]이 속바퀴측[轂]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圓輪]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만다라는 크게 《대일경(大日經)》을 중심으로 하는 태장계(胎藏界)만다라와,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계(金剛界)만다라로 나뉜다. 태장의 세계는 모태(母胎) 중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듯이, 만물을 내장(內藏)하는 진리 자체의 세계를 석가로 구현화한 것이고, 금강계는 석가의 인식은 경험계를 초월한 인식이지만 그같은 인식을 근거로 하여 경험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체계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모습을 그린 정토변상(變相)을 흔히 정토만다라라고 부른다. 이러한 만다라는 관상(觀想)의 대상이기도 하며,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정의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眞髓)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의 하나.

내용
범어로 Mandala라고 한다. Manda는 ‘진수’ 또는 ‘본질’이라는 뜻이며 접속어미 la는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다라의 본래 의미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불화를 뜻한다. 또한 만다라는 다양하게 전개된 각종 신앙형태를 통일하는 원리에 입각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불화를 뜻하기도 한다.

만다라의 성립은 밀교(密敎)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사회 구제를 표방하며 이전의 불교가 용인하지 않았던 재래신앙의 요소를 불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사상체계를 갖추고 탄생한 밀교는 보다 많은 보살(菩薩)을 출현시키고 인도 재래의 신들까지 수용하여 그들의 상(像)을 만들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신앙현상을 단순히 다신교적인 현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원리로 통일되면서도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불화로서 만다라가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만다라는 관념적인 밀교 미술품인 동시에 밀교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만다라는 크게 양계만다라(兩界曼茶羅)와 별존만다라(別尊曼茶羅)로 나뉜다. 양계만다라는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와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를 지칭하는데, 이 둘은 밀교의 2대 경전인 ≪대일경 大日經≫과 ≪금강정경 金剛頂經≫을 근거로 하여 그리는 불화로서 만다라의 양대 기둥을 이룬다.

≪대일경≫에 근거를 둔 태장계만다라는 태장계의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여성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이(理)의 세계이며 물질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만다라의 중심부인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 안에는 대일여래상을 중심으로 하여 4불(佛)과 4보살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조금 상을 작게 하여 많은 보살상을 나란히 배치하며, 그 바깥쪽에는 더욱 작은 천신상을 많이 묘사하게 된다. 그리고 4방의 외변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일렬로 배치하고 있으며, 각 변의 중앙에는 만다라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구별하는 것을 상징하는 문(門)을 묘사하고 있다.

중대팔엽원의 4보살은 보현보살·문수보살·관음보살·미륵보살이며, 여기에 지장보살과 허공장보살을 첨가하여 6존을 이루게 되고, 이들이 중심적인 보살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중대팔엽원 주변에는 지장원·허공장원·관음원·문수원·석가원·금강수원(또는 보현원) 등 6원이 있다.

팔엽원의 4불과 4보살은 태장계만다라의 중심이 되는 대일여래의 여러 가지 기능을 분담하여 맡고 있으며, 주위의 6원은 대일여래의 기능을 나타냄과 동시에 각 보살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태장계만다라에는 4백 수십의 존상이 배열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한 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태장계만다라가 여성적인 원리에 의한 이(理)의 세계를 표방한 것이라면 금강계만다라는 남성적 원리에 의한 지(智)의 세계, 정신적 세계를 표방한 것이다. 이는 ≪금강정경≫을 기초로 하여 그린 불화로서 태장계만다라와는 구도적인 면에서 연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대립적인 불화이다. 금강계만다라는 금강계의 세계를 표현함에 있어 구체적인 방형(方形)으로 묘사하지 않고 가로와 세로 3개씩의 선을 그어 전체를 9등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만다라를 구회만다라(九會曼茶羅)라고도 한다. 이 만다라의 중심에는 태장계만다라의 중대팔엽원에 해당하는 성신회(成身會)가 있고, 성신회의 하단에는 오른쪽으로부터 강삼세삼매야회(降三世三昧耶會)·삼매야회·미세회(微細會)가 있으며, 성신회의 오른쪽에는 강삼세갈마회(降三世羯磨會), 왼쪽에는 공양회(供養會), 성신회의 상단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이취회(理趣會)·일인회(一印會)·사인회(四印會)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이들 9회 중 성신회 상단에 있는 3회에는 존상이 많이 묘사되고, 나머지 성신회 좌우 2회와 하단의 3회에는 존상보다는 상징적인 것을 많이 묘사하고 있다. 즉, 추상적인 것과 구상적인 것을 상하로 나누어 그 중심에 성신회를 두어 이들을 통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별존만다라의 구성은 매우 다양성을 띠고 있다. 그 중에는 양계만다라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정토적(淨土的) 표현방식인 것도 있고, 양계만다라적 구성과 정토적 구성을 혼합한 것도 있다. 그리고 양계만다라에서 분화된 별존만다라가 있고, 양계만다라와는 맥을 달리하는 현교적 불화로서 별존만다라가 있다. 따라서 양계만다라 이외의 만다라는 모두 별존만다라라고 할 수가 있다.

불화가 발전해온 과정에서 볼 때 극락의 정경을 묘사한 정토도(淨土圖)와 같은 크기의 상을 무수히 배열하여 그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천불도(天佛圖) 등이 별존만다라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별존만다라는 현실적인 공간배열보다는 상징적이고 이념적인 면에서 도식화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밀교의 본격적인 만다라라고 할 수 있는 양계만다라는 전해오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 밀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 명랑(明朗)에 의해서였고, 그 뒤 혜통(惠通)·혜일(惠日) 등에 의하여 여러 차례 밀교가 전해왔으나 양계만다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을 인도 밀교 중기 이후에 발생한 순밀(純密)이라고 하는데, 현재 우리 나라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밀교는 인도 밀교 초기에 발생한 잡밀(雜密) 계통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만다라는 초기 밀교에 바탕을 둔 불화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밀교는 잡밀 중에서도 화엄밀교(華嚴密敎)에 속하기 때문에 만다라 또한 양계만다라가 아닌 화엄만다라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 까닭은 만다라의 일차적 원리가 다양한 신앙형태를 체계적으로 통일한다는 기본 원리에 입각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불화는 다양한 신앙형태를 화엄의 원리에 입각하여 통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석가의 성도상(成道相)·설법상(說法相)을 묘사한 불화는 만다라적인 성격을 지닌 우리 나라 특유의 독창적인 불화이다. 성도상을 나타낸 불화를 화엄변상도(華嚴變相圖) 또는 화엄만다라라고 하며, 설법상을 나타낸 불화를 법화변상도 또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 한다. 화엄만다라는 ≪화엄경≫에 기록된 8회의 설법내용을 묘사한 불화이다. 8회의 설법 중 앞의 2회와 뒤의 2회는 지상의 설법이고 중간의 4회는 천상의 설법이다.

이 8회의 설법 내용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경지에서 본 세상의 근본 도리로서, 그 세계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의해서 통합된 세계이다.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이와 같은 무수한 세계를 나타내면서 고대 인도의 재래신들을 모두 수용하여 불교의 호법선신(護法善神)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화엄만다라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무수한 불보살과 호법신들이 묘사된다. 이것은 우주 삼라만상에다 인격을 부여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화엄만다라에 그려지는 호법선신은 다시 호법신에 대한 신앙이 강조됨에 따라 독립된 신중도(神衆圖)로 분화되었는데, 이는 양계만다라와 별존만다라와의 관계와 같다. 또한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법회장의 모습을 묘사한 불화로서, 석가모니의 설법에 의하여 그 세계가 정토가 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영산회상도는 석가 정토의 광경을 묘사한 불화이며,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많은 보살과 승려, 호법신인 사천왕(四天王)이 그려져 있어 만다라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posted by 有然(유연)

https://sacredart.tistory.com/m/48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의 신성화 Sacred Art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에너지 그림 설명 : 1. 귀에서 귀로 금색의 강한 원형의 에너지 흐름이 드러났다. 2. 영적 중심선이 머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1번의 금색 에너지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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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의 의미있는 연결은 명백한 인과 관계가 없는 우연의 일치를 통해 나타난다는 그의 ‘동시성’ 이론은 그의 영적 중심을 통한 직관이다.

”동시성은 우리 의식의 일상적인 차원과 근원적인 차원, 즉 두 정신적 차원의 순간적인 연합이다.”

이와같은 칼 융의 동시성에 대한 정의는 그의 관점이 영적 차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그는 심리학자로 알려져있지만 기독교, 불교, 힌두교, 도교, 영지주의, 연금술, 점성학, 동서양 철학, 문학 등등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나타냈다. 라마크리슈나와 라마나 마하리쉬에 대한 비교 글도 썼던 그의 영적인 관심은 신성화에서 드러난 영적 중심의 발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에너지가 흐르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성향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58년 10월 어느 날 꿈에서 나는 렌즈 형태의 빛나는 두 금속성 원반을 보았다.
그것들은 내 집을 넘어 날아가 호수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두 대의 UFO였다.
이윽고 또 다른 물체가 나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그것은 완전한 원형의 렌즈였다. 꼭 망원경의 렌즈 같았다. 사 오백 야드 앞에서 잠시 정지하더니 이내 날아가 버렸다. 그 직후 또 다른 물체가 공기를 가르며 재빨리 날아왔다. 그리고 그 렌즈 형태의 금속성 물질이 확장되더니 박스 모양이 되었다.
마치 환등(幻燈) 같았다.
그것은 나를 똑바로 향한 채 육 칠십 야드 떨어진 허공 중에 멈추어 섰다.
깜짝 놀란 나는 잠에서 깨었다.
비몽사몽간에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우리는 항상 UFO가 우리의 투영이라고 생각해왔어.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가 UFO의 투영이구나.
나는 환등에 의해 C. G. 융으로서 투영되고 있는 거야.
그러면 대체 그 환등을 조종하는 것은 누구지?”


일전에 나는 자기(self)와 자아(ego)의 문제에 대해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도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구릉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고 있어 주위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이윽고 나는 길옆의 작은 성당으로 다가갔다. 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제단 위에는 성모 마리아의 상(像)도 십자가도 없었고 단지 아름다운 꽃 장식만 있었다. 그때 나는 제단 앞마루 위에 한 요기(요가 수행자)가 연화좌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니 바로 내 얼굴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난 나는 잠에서 깨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하, 그래. 그는 나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 존재로구나.
그는 꿈을 꾸고 있다. 바로 나에 대한 꿈을.”
나는 알았다.
그가 깨어나는 순간 나는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C. G. 융 (스위스 심리학자. 그의 전기 “회상, 꿈, 그리고 사상 Memories, Dreams, Reflections” 중에서. 심리학 용어에서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튼 인간 존재의 핵을, 자아ego는 표면적인 의식을 말한다. 쉽게 말해, 전자는 고급자아, 후자는 저급자아라 할 수 있다. 꿈속의 요기는 융의 고급자아, 즉 ‘자기’를 상징한다.)


융이 주역에 집중한 이유 중에 하나는 64괘로 분류된 상징적 이미지 때문이다. 이미지 즉 상(象)은, 언어가 일의적(一義的)인 것과 달리,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중요한 것은 현상을 관찰하는 주체가 동시에 그 현상의 공시적 체험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인과율의 경우에 주체는 현상 밖에 있으면서 관찰할 뿐이지만, 공시성의 입장에서 주체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공시적 감응으로서 무의식에 잠재하는 일종의 직관지의 능력을 통해서 인지된다.

posted by 有然(유연)

https://sacredart.tistory.com/31

 

데이비드 호킨스 David R. Hawkins 의 에너지 그림. 신성화

데이비드 호킨스 David R. Hawkins 에너지 그림 설명 : 영적 중심: 빛의 상징이 드러났지만 다각형의 무거운 에너지가 겹쳐있다. 다각형의 에너지에서 하나의 선이 흘러나와 발에 연결되는 것은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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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과학 운동역학

-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blog.daum.net/comate77/17566029 (현재 비공개 블로그)
- 운동역학에 대한 본 글은 데이비드 호킨스의 <호모스피리투스>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 그의 빛과 어둠


1. 라메쉬 발세카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번역자이면서 그와 20년 이상 가깝게 교우한 결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지요. - P.351 15장 까르마

발세카는 마하라지의 번역자였다 -------------- 거짓

20년이상 ------------------------------------ 거짓

교우하였다 ----------------------------------- 거짓


* 마하라지는 자신이 직접 책을 저술한 바 없으며 그러므로 번역일을 할 사람이 필요치 않다. 그의 가르침에 관한 최초의 책 이나 그뒤에 나온 몇권의 책들은 마하라지와의 대화내용을 녹음한 후 편집하여 마라티어나 영어로 출간된 것이다. 여기엔 번역자가 없다. (편집자만 있다) 발세카는 런던 대학을 나온 은행 CEO 출신으로 마하라지가 오직 뭄바이(봄베이) 현지 토속어인 마라티어 밖에 할 줄 모르므로 이를 영어로 통역한 사람중의 한명이다.

* 발세카가 마하라지를 처음 알게된 것은 마운틴 패스(The Mountain Path: 라마나 스라맘의 정기간행물) 1978년 10월호에 실린 마하라지에 관한 글을 보고 부터이지만, 실지로 만나게 된 것은 이후 책을 읽고 나서였다. 그러므로 관계한지 20년 이상이라니 터무니없다. 설사 마하라지라는 이름을 인지한 그날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다치더라도 마하라지께서 돌아가신 1981년 9월까지 계산하면 3년도 채 안된다. (이 진술은 발세카가 직접 책 서문에 쓴 것이다.)

* 발세카는 마하라지와 교우한 것이 아니다. 마하라지는 발세카에게 큰 스승이었다. 그는 마하라지 앞에선 너무도 겸손하고 진지한 제자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가장 잘 소화한 수제자였다. 의 인도 출판사 사장인 딕쉬뜨가 그가 눈을 감고 마라티어를 영어로 통역할 때는 마치 마하라지가 영어로 말하는 것과 같다고 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장은 진실도가 999.9 이다.



2. 헌신자가 만족스러운 진보를 이루는데 실패하면 마하르시는 그들을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에게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마하라지는 그때 당시에 여전히 가르침을 펴고 있었고...... - P.385 16장 최후의 문

----------------------------------------------- 거짓


* 인도 전통에서 자신에게 헌신한 제자를 다른 구루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보내는 일은 없다. 더구나 마하르시는 완전한 진아 깨달음을 얻은 진아 그 자체인 분인데 만족스러운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다른 이에게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잘못된 진술이다.

제자는 오직 한 스승에게 몸과 마음 일체를 귀의한다. 스승은 진아가 육신으로 현현된 분으로 진아이자 참부모이다. 오직 한 스승에게만이 순복하며 결코 다른 스승을 찾지 않는다. 만일 다른 스승을 찾는 제자가 있다면 이는 그 스승에게 완전히 귀의한 제자가 아니고 이곳 저곳 영적 스승을 쇼핑하는 유랑 구도자일 터이다. 하물며 스승이 자신에게 귀의한 헌신자를 다른 스승에게 보내다니!

영적 헌시자의 스승에의 순복은 세상사에서 '내 기술로 부족하니 내 약점을 보완해 주는 다른 동료 스승에게 보내 추가적인 조련을 맡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마하라지는 그를 찾아오는 여러 구도자들에게 한결같이 이미 스승이 있다면 거기에 순복하고 자신을 찾아와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두분은 결코 만난 적도 없다. 연배나 깨달음의 시기 또한 맞지도 않는다. 라마나 마하르시님이 71세로 타계하신 때가 1950년 4월이고 라마나님이 타계하신 이 당시는 마하라지님은 깨닫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다. 마하라지님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73년 그 불멸의 대담집 초판이 출판된 이후 부터이다. 이때는 마하리쉬님이 입적한지 이미 23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그러니 "마하라지는 그때 당시 여전히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란 진술은 전혀 사리에 맞지않는다. 뜬금없이 그때 당시라고 하니 언제를 말하는지는 몰라도 마하리쉬님이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것이 21세가되던 1900년도 부터이니 이때는 마하라지님은 아직 아이(3살)일때다. 마하라지님은 1936년도에 깨달았으며 이후 담배장사 일과 순례 여행으로 오랜 시간뒤에야 자신의 다락방에서 하나둘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이 장은 진실도가 1000 이다.



3. 마하라지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호킨스는 의식수준 700으로 측정한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 봄베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읍니다. P.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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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의식수준이 700이 아니라 720으로 측정되었다 - <내안의 참나를 찾아서>
어느 측정이 맞을까?

* 깨달을 당시 그는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살고 있었다. 봄베이 사는 사람이 봄베이를 향해 걷다니? 전혀 있을 수 없는 희안한 진술이다. 깨닫고 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담배장수 일을 계속하다가 어느날 홀연 인도 전역과 히말라야로의 순례여행을 떠났다.

이 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4. 마하라지는 1986년 경에 사망했읍니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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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라지는 1986년이 아니라, 1981년 9월 8일 저녁 7시 32분에 봄베이 자택에서 열반에 들었다. 임종을 지켜본 그의 열렬한 헌신자인 발세카의 기록이다.

이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5. 흥미롭게도 그의 번역자로서 오랜세월 가깝게 교우했던 라메쉬 발세카는......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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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발세카는 번역자가 아니라 봄베이 지방 언어인 마라티어를 영어로 통역했던 통역자였다. 그리고 오랜세월 가까이 교우한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관계였으며, 3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에도 불구하고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발세카였다.

* 라메쉬 발세카(의식수준: 760)님은 마하라지 생전에 깨달았으며, 마하라지 사후 봄베이 자택에서 그의 스승처럼 전세계에서 그를 찾아오는 구도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여러명의 깨달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많은 저작들을 남겼고 현존하는 최고의 아드바이타 스승이시다.

이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6. (깨달은 후 2년간 침묵했고) 남은 생동안 라마나 마하르시는 아쉬람을 떠난적이 없습니다. 그는 1958년 경에 사망했읍니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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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르시는 아쉬람에 깨달은 2년 뒤에 부터 거처해 온 것이 아니고 아쉬람이 처음 생긴 것은 1916년 37세되던 해이며, 이때는 진아 깨달음을 얻은지 무려 2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최초의 아쉬람인 스칸다쉬람으로 거처를 옮기기 까지 20년 동안은 인근의 사원들과 과수원, 산굴등을 전전하며 가르침을 폈고, 제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이후 1922년에 새 아쉬람인 라마나스라맘으로 옮겼다.

* 라마나 마하르쉬는 1958년이 아니라 1950년 4월14일 저녁 8시 47분에 범열반에 들었다. (공식 연보로 확인)

이 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 2번부터 6번까지는 제16장 최후의 문에 나온 거짓 진술에 대한 그 교정이다.

이 16장 최후의 문은 의식수준 측정치 1000이다!!!

그런데 이 지상 지고의 진리안에 어떻게 이런 거짓들이 춤추고 있는가.

누가 이 거짓으로 얼룩진 가짜 진실을 최고 완전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느뇨!!!



7.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등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암살당한 것에 주목합니다...... - P.481 제20장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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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는 암살 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이 장의 진실도는 994.1이다.



8. 네팔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 고타마는...... - P.540 제23장 호모스피리투스

-------------------------------------------------- 거짓

* 고타마 싯달다는 네팔에서가 아니라 인도 북동부 미하르주에 있는 부다가야에서 깨달으셨다.

이 장의 진실도는 999.6이다.



9. 깨달음과 '깨달음의 수준들' 제9장

깨달음 (600)

나는 있다 I AM (650)

존재로서의 참나 (680)

뚜리야-존재가 그 의미: 이 앎 (750)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 P. 268

아라한 (800)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 P. 149

예수, 붓다, 크리슈나, 브라만 (1,000)


가장 낮은 수준으로 측정된 깨달음(600)은 무엇이며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또 아라한(800)이란 이 깨달음 이후 계속 진보하여 이르게 되는 더 높은 경지인가?

당최 무엇을 두고 깨달음이라 하는가...


사람마다 영적 배경과 환경, 처한 상황, 그 이르는 과정이 다르므로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깨닫는 과정엔 정형이 없다.

즉, 호박사 말대로 반드시 '최후의 문'을 통과하여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란 에고가 멸절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에고(마음)가 그 나온 뿌리인 진아 속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다시는 생겨지지 않는 상태이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마음이 없다,

에고가 없으므로 완전한 진아로서 존재하며, 남은 육체는 타고난 운명에 따라 남은 생을 살아가는 유기체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이렇게 완전히 마음이 멸절된 진아 깨달음의 상태를 니르구나(Nirguna-구나가 꺼짐)라고도 하고, 이렇게 된 사람을 냐니(Jnani진인; 냐나Jnana진아知를 얻은 이)라고 한다. 이 냐나(jnana 진아지)를 얻는 수행이 바로 냐나 요가(975)이다. 마하라지, 마하리쉬 이 분들은 바로 이 냐나 요가의 최고 스승들 이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남방불교(근본불교)에선 마음의 탐진치가 완전히 뿌리까지 뽑혀 나가 아라한뜨 도과에 든 이를 아라한(800)이라 한다. 최상승의 진리에 이른 분으로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란 뜻이다.

아라한뜨 도과에 들기 전 도과의 첫 단계인 수다원(예류), 사다함(일례), 아나함(불환)의 도와 과의 과정을 차례로 통과한다. 최종적으로 아라한뜨 道에 들고 果로 나와 닙빠나(Nibbana, Nirvana니르바나)에 이른다. 불이 꺼진(적멸) 것이다.

그러면 아라한이 된 이(800)와 깨달은 이(600)는 수치 200만큼 엄청한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어서 깨달은 이는 깨닫고 나서도 계속 아라한과 더 이상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나?

남방불교에서는 단순히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도과에 들었다고 깨달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아라한이 되어 완전히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깨닫지 못한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

이는 흔히 말하는 견성했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의 본래 성품은 알았으나 아는 내가 남아 있는데 무슨 깨달음이겠는가.

성불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히 완전히 불이 꺼져야한다. 즉, 열반(Nirvana의 음역)해야한다.

열반이 고승들이 죽었을 때 높혀 부르는 말이 아닌 진짜 '나'의 확실한 죽음이어야 한다.


완전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내가 있다(I AM)'는 것을 아는 앎(750)도 되고 나아가 '내가 있다'(650)도 되지만

최종적인 것은 '나라는 생각' 즉, 에고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내가 있다'(650)는 '내가 있다 앎'(750)이 있은 뒤에 나타나는 더 높은 경지이다.

'내가 있다 앎'은 앎은 아는 자가 있지만

그 아는 앎이 없어지고 존재와 하나가 되는 일시적 일원성 상태가 '내가 있다'이다.

이것은 앎이 없으므로 모름이라 한다. 이 상태가 더 깊어지면 개념적 깨달음이 온다..

하지만 깨달음은 아니다.

그 '내가있음'이 뿌리에 까지 이르러 그 '있음'이 나온 근원으로 함몰되어야 한다.


그 근원에 잠시 빠져 진아의 광휘를 맛본들 여전히 마음은 살아있으며. 그 근원인 진아에 영구히 완전히 가라앉아야 한다.

이를 마하리쉬와 그 제자분들은 본연적 무상(사하자 니르비갈파) 삼매로 부른다.

마하라지는 빠라브라만 빠라마트만으로 칭하지만 그 이름은 어떤들 상관없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이에게는 마음이 완전 사라졌기에 까르마도 윤회도 없다.

이 존재내의 어떤 것에도 (호모스피리투스가 출현하든 말든, 우주가 폭발하든 말든) 관심 가질 개체가 사라진 것이며, 오직 진아로서 존재만 한다.


라마나 마하르쉬의 제자 락쉬마나 스와미는 라마나님과의 친견만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며, 락쉬마나 스와미의 어린 여제자 사라담마가 스승의 보호아래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의 자세한 과정을 읽어보면 에고가 진아 안으로 꺼져가는 그 마지막 여정은 실로 경외롭다.



10. 깨달음과 '최후의 문' 제10장

책에 서술된 바, 최후의 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깊은 헌신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흔들릴 수도 있읍니다. (호모스피리투스 P. 379)

기꺼이 죽음을 경험하려고 하라. 죽음을 경험하려고하는 자발성을 강하게 해줍니다. 수행자는 뛰어듦에 내맡긴다...... (P.376)

깨달음에 이르는 최후의 문에 도달한 이의 84%가 이행에 실패한다......

마하라지와 마하리쉬 이 두 현인은 성공적으로 살아 남았읍니다...... (P.386)

......

루시퍼나 마라의 유혹을 이겨내고 마침내 최후의 문을 통과하는(까르마 P. 353) 자는 누구이겠는가?

그런 유혹을 이겨내는 석가나 예수 혹 화신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있기는 할까?


모든 마음과 느낌과 생각들이 오고감을 '나'의 것으로 붙잡은 것이 바로 에고다.

내가 유혹을 뿌리친다. 내가 신께 생명을 내맡긴다, 내가 최후의 문에 뛰어든다 하는 그 '내'가 에고다....

죽음을 경험하는 '자'는 누구이겠는가- 바로 에고다.


유혹을 받는 자가 있고 유혹을 뿌리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돈에 미련남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며, 갈등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 것이며, 유혹을 뿌리쳤다는 생각이 생겨나고 사라진 것 뿐이다.

거기에 어떠한 독립된 개별적 행위자는 없다.


그러면 내가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위에서 말한 그 앎이 있기 때문이다. 앎이 있다는 것은 아직 깊어진 경지가 아니란 얘기다.

설령 내가 온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해도 내가 곧 우주라해도 내가 우주임을 아는 '내'가 있는 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내'가 있는 한,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해 온 그 어떤 인물도 에고가 스스로 '최후의 문'을 향해 뛰어든 예는 없다.

깨달은 스승과의 친견에서 그냥 저절로 깨달아진 사람들의 사례는 위의 예들 말고도 많다.

왜냐하면 깨달은 스승이 바로 진아이기 때문이며, 준비가 된 제자가 스승을 만날때

그 제자의 에고는 스승인 진아의 흡인력에 의해 소멸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오직 에고를 있게 한 그 근원인 진아에 의해서만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에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에고는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에고가 사라지면 실재인 진아만이 원래대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아는 스스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일원성의 하나이다. 그래서 절대이다 상대의 반대 개념인 절대가 아니다.

항아리의 물이 대양에 풍덩 던져져서 항아리의 물을 대양의 물과 구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근원인 진아와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깨달은(600) 이후에도 무수한 잔챙이 과정(650, 680, 700, 750 등등)을 통과하고 아라한의 800 고지도 넘어야 하고, 인간의 한계 1000까지 계속 도전해야 한다.

이 책에선 황벽선사는 깨달은 후도 계속 진보하여 960 까지 갔다고 한다.

호박사와 부처, 예수도 더이상 나아 갈 수 없는 1000까지 도달하신 분들이라고한다.

웃긴다.


깨달음이 일어나면(600) 앎을 아는(750) 자는 당연히 없다.

또 아라한이 되어야 할 자도 없다.

아라한(800)도 깨달음(600)도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1000으로 진보를 계속해 나가야 할 자도 없다.


항아리의 물은 바닷물과 이미 섞여 버렸고, 예전에 담겼던 항아리물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 어느 바닷물을 다시 퍼올려서 그 바닷물더러 다시금 바닷물이 되기 위해 진보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으리오.

이 장(깨달음의 수준들)에서 말하는 (P. 229외) 내용들은 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완전히 깨닫고 나서도 진보해야 할 '내'가 있어1000까지 나아가야 한다면, 깨달은 이후에도 여전히 유혹받는 내가 있다면, 그건 진짜 깨달음이 아니다.

이치가 그러 하지 아니한가?



11. 대천사 50,000 + 의 진실 (호모스피리투스 - P. 485)

이 어마어마한 수치, 정말 상상될 수 없는 수치의 대천사란 무엇인가. 아마 호박사가 기독교 배경이라 이런 개념에 익숙하였으리라.

힌두교나 불교에 기반한 사람들은 그 의미하는 바를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생경한 용어다.

가톨릭에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등 세명의 공식 인정된 대천사가 있다. 대천사는 기독교, 천주교뿐아니라 이슬람교,유대교, 조로아스터교에도 광범하게 등장하는데 천사의 품계를 보면,

상급 천사로 치품 (熾品, Seraphim)

지품(知品, Cherubim)

좌품(座品, Thrones) 천사

중급 천사로는 권품(權品, Dominates)

능품(能品, Principatus)

역품(力品, Potestates) 천사

하급 천사로는 주품(主品, Virtus)

대천사(大天使, Archangelus)

천사(天使, Angelus)가 있다.

즉, 대천사란 천사의 9계급 중에서 하급에 속하며 전체 서열 8번째에 해당되는 천사계급이다. 그렇다면 대천사 이상의 품계들의 측정치는 50,000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최상위 치품천사인 세라핌이라면 한 5,000,000 이상 정도 되려나? 상상불가이다.

그러면 지구에서의 수 많은 생을 전전하며 온갖 유혹 다 뿌리치고 피터지는 수행후 겨우 얻어진 깨달음이 기껏 600인데, 이 무슨 절망 허탈감을 안겨주는 수치란 말인가. 깨닫고 나서도 또 인간 한계인 부처되는 1000까지 계속 진보해야 하는데,지금껏 부처가 최고 경지인줄 알았더니 이건 뭐 50,000이상 되는 대천사에다가 그 위로 줄줄이 끝도없는 단계가 있으니 부처도 그에 비하면 세발의 피가 아닌가.

부처에서 천사 수준에 도달하려면 다시 또 까마득한 무궁한 정진을 해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거기다 더해서 세람핌에 이르자면 또 얼만큼이나 기약없는 고행을 해야만 하는고. 또 혹시나 세라핌 더 이상은 없을까? 왜 없기는 무한이라는 것도 있던데.

그럼 죽자고 깨닫고나서도 다시 부처도 되어야 하고 대천사 되고 세라핌 되고 그리고 나서도 또 무한을 향해 나아가야 되고, 무량겁의 끝없는 전진만 있네... 휴식도 즐거움도 없이.

그럴까...?

근데 가만....

깨달았으면 내가 사라져 나는 더 이상 없는게 분명한데 누가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누구에게 그런 진보의 필요가 요구되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한가.

먼저 어떤 계급의 천사라 하더라도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싶다.

천사 또한 하나로 아직 합쳐지지 않고 분리 되어있는 개체성의 의식이며(물론 육체 의식은 아닌), 단지 의식이 아주 높은 수준이지만(미카엘이니 하는 이름도 있다!) 이도 분명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니 절대로 참인 것은 아니다.

하나 안에 속해 있지만 분리되어 있는 의식체의 상태라 해야 하겠다. 즉, 그 의식체가 나온 바탕인 둘없는 하나인 절대 의식과 아직 하나되지 못한 의식이다

그러면 그 하나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절대진아인 우리의 본래 면목이며, 모든 생겨나는 존재의 근원이다. 진아는 태어남이 없고 그래서 죽음도 없으며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이 바로 이 뜻이다. 육체가 죽어도 온 우주가 생멸을 거듭해도 진아에겐 티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홀로 존재하므로 스스로의 존재조차 아지 못하는 절대의 초월자이다.

그러니 천사가 아무리 높은 의식 수준이라하더라도 천사또한 그 천사를 있게 한 바탕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별적 존재일 뿐이며, 이땅을 거쳐간 수많은 스승들이 가르침을 주시는 바대로 600점짜리 깨달음이라도 학실하게 깨쳐서 진아 깨달음을 얻는다면, 50,000 점짜리 개념적 천사가 되려 부러워하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그 깨달음 600이란게 진짜 무한인지도 모르지.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님의 스승 싯다라메시와르 마하라지님은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나는 매일 한시간씩 나의 진아에서 걸어나와 강의를 한다. 그리고 나머지 23시간동안은 나의 진아안에 존재한다"


깨달은 이는 살아서도 늘 완전한 하나 속에 깊히 머물러 언제나 진아로 존재하며 이 현상계가 꿈인 것을 안다. 이 꿈속에서는 50,000의 대천사나 200대의 인간이나 1000의 호박사나 그저 꿈속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기에 이 꿈속에서 제아무리 높아봤자 꿈 깨면 일시에 사라지는 꿈속 존재들이니 숫자의 높고 낮음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모두가 똑같은 꿈 속의 객체일 뿐이다.



12. <호모스피리투스> 의 진실


이 책 전체의 의식수준은 999.8이다. 그리고 16장 최후의 문은 1000이다!!!

도데체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이 되길래 소숫점까지 측정되었을까 하고 그 정밀성에 찬탄하였었다.

1000보다 0.2가 모자란 이 정확도에 더 무서운 신뢰감이 가지 않았던가.


전망 994.1 호모스피리투스 999.6 카르마 999.9 그리고 최후의 문 1000 -

이 지구상에서 더이상 높아질 수 없는 진실의 최고 지점

인간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극한의 임계지수 1000.


도처에 거짓 진술을 품고 있는 이 책이 999.8이며 불과 0.2가 모자란 1000이란데 너무나 놀란다.

또 각장에서 완전의 수치 1000에서 불과 0.1, 0.4, 5.9 가 모자라는, 소수점을 다투는 극미의 정확한 측정치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거짓 진술이 있음에도 그 진실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여러 거짓된 진술을 알고나서도 무슨 변명으로 덮으며 읽어야 할까.

거짓은 진실이 전혀 아닌 것이며, 이는 빛이 없는 원초적 어둠과 같다.

1000이란 수치가 이 지구상 최대의 진실 수치라면 아마 1000이면 온 구석 구석을 찬란한 빛으로 환히 완전히 밝힐 수 있는 그런 조도의 진리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짙은 어둠을 도처에 깊히 품고 있는 1000이란 완전의 진실 수치는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칠흑같은 어둠이 드리워진 곳에 온전한 진리는 결코 없으리라.

또한 책 뒤에 나와 있는 수많은 참고 문헌들은 무엇에 쓰이는가. 거기서 인용한 문장들은 이 책에서 옮겨오기만 하면 최소한 990대 이상으로 환골탈태되어 지는가. 젖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 호박사가 인용하기만 하면 300대 400대의 저술들이 갑자기 990대로의 초고속 승차를 하게 되는 것인가?

이미 1000이라 자타가 인정한 호박사 자신께도 여전히 세상의 잔지식으로 짜깁기할 필요가 남아 있으신건가.

마하라지나 마하리쉬 라마크리슈나 등등 많은 영적 스승들 처럼(그들은 700대에 불과하시지) 진아 그 자체이시라면 개념에 불과한 이런 진세의 잡식들을 다 버리고 참존재로부터 우러나오는 무한한 진리의 감로를 부어주실 수는 없었을까.

마하리쉬나 마하라지님은 교육조차 제대로 못 받은 분이지만 온갖 지식과 논리로 중무장한 세상의 숱한 석학들을 그의 발아래 조아리게 한 위대한 진아의 힘을 보여 주셨는데 왜 그분보다 더 고결하신 분이 한점 기록, 한점 기억에 불과한 타인의 지식들을 그렇게나 많이 인용하여야만 했을까.

세상의 지식은 의식내의 거품이요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실체인 진아에서 나오는 것은 불멸의 진리이니 어찌 단순한 그림자가 태양빛을 감당하겠는가.



운동역학의 진실과 거짓


1. 진실을 측정치 못하는 위험한 도구

운동역학이 호박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그 누구도 정확한 측정으로 신뢰할 만한 측정치를 내어놓은 이는 없다. 운동역학은 단순히 정확도를 가리는 통계상의 확율 게임이 아니다.

단 1%의 부정확한 측정이라도 그 부정확함은 바로 진실과 거짓을 뒤바꾸는 것이니 실로 섬짓한 도구가 아닐수 없다.

만일 아래와 같이 그 1%의 부정확성이 재수없게 한 인생과 나아가 이 지구 전체에 영향 주는 질문에 맞춰져 버린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아찔하다.

"이 핵폭탄 발사의 단추를 누르는 일은 인류에 바람직하다." ............... [예스]

수 십년간 이 운동역학을 일상화하며 업으로 살아온 호박사마저도 그의 저서들에서 숱한 거짓 진술들이 진실을 위장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대중들이 안심하고 사용하기엔 너무나 위험하고 무용한 도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호박사같은 그 특수한 위치와 권위로 인해 결과치를 무의식적으로 강요받고 받아 들이며 믿고 따른다.

어째서 한국의 한 무명씨가 지적낼 수 있는 숱한 오류들을 출판된지 수년이란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왜 어디서도 거론되지도 않고 여전히 호박사의 세미나는 이어지며 그의 저작들은 수정없이 판을 거듭하고 있는가.

예수 부처와 같은 수준의 위대한 존재 완벽한 영적 저작이라는 반복적 주입은 높은 지성의 사람에게조차 이러한 냉정한 객관적 비판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언행은 신격화되고 점점 사이비의 길을 걷는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구와 결과 수치를 맹신하여 잘못 측정된 거짓된 진실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때 세상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얼룩지고 헝클어진 혼란상은 얼마나 자심하겠는가. 누구나 배우고 익혀 사용함에 모두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면 그건 세상을 해치고 결국 자신을 해치는 또 다른 살상무기와 다름이 없다.

그간 운동역학의 진실측정이 일상 여러 부분에서 진실 수준을 알려주고 사이비 스승과 부정적인 저작들을 가려주는 바로미터가 아니라 오히려 무수한 영적 저작과 영적 스승들을 평가하고 서열 매기고 심지어는 추락한 영혼으로 난도질하여 이 꿈의 세상에 더욱 더 깊은 혼란과 갈등, 분별을 조장하는 그릇된 무기가 되지는 않았는가.


2. 운동역학은 원시적 수준의 채널링

사소한 질문에도 운동역학으로 측정해 보시는 그분의 모습은 마치 공수를 의뢰하는 무녀의 신들림과 오버랩되어 안타깝다. 누가 누구에게 진실과 거짓을 물어본단 말인가.

그분은 곧 진아가 아니었던가?

운동역학의 질문에 답을 주는 그 힘은 질문자와 분리된 외부에서 나오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측정시 금속테 안경이나 화학섬유 모자를 착용하면 안된다고 명시했다. 인체 안테나가 수신에 장애를 받기 때문이란다. 인체의 근육은 그 외부의 힘으로 부터 수신받은 신호에 자극받아 2진법의 반응(답)을 낸다.

1. 근육에 강한 반응......... [예스] 아니면

2. 근육에 약한 반응......... [노]

모르스 부호보다 못한 이 얼마나 아메바적인 교신인가 말이다. 그나마도 일방통행이고 교신 상태도 엄청 불량하여 수신 내용을 믿을 수도 없다. 예스/노로 답이 불가한 주관식은 아예 질문도 못한다.

그에 비하면 채널링이나 무속인의 접신같은 건 쌍방향의 최첨단 위성 통신급이다. 또 에드가 케이시같은 영능력자를 운동역학에 비교하자면 요즘의 음질좋은 국제전화와 중세의 봉화만큼의 수준 차이라고나 할까. 그의 리딩은 개인은 물론 인류역사 우주의 숱한 비밀을 시공을 초월하여 다 읽어내었다. 아니 묻고 답받았다. 그는 아주 이타적이고 영적인 분이었다.

이 분의 리딩(Reading)에 답을 주는 원천은 일체 우주의 모든 의식이 영구히 각인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Akasic Record)이다. 운동역학의 질문에 답을 준다는 원천과 같은 소스이다.(<나의 눈> P. 413) 운동역학이 얼마나 석기시대의 장비로 첨단 현대를 희롱하는 원시적인 도구인지가 짐작 될 것이다.

운동역학이 결국 지극히 원시적인 수준의 채널링이나 무속인의 접신과 하등 다를 바가 무엇인가. 뛰어난 영매는 의사소통뿐아니라 비쥬얼, 그것도 칼라 동영상으로 교신한다. 호박사가 거주하는 세도나란 곳 자체가 볼텍스라는 자기장이 특히 강하게 형성된 유명 지역이라 많은 초상능력자들 기능력자들이 모인 곳이다. 마치 한국의 무속인들이 밀집한 계룡산처럼.

매순간 결정의 시기마다 더 좋은 결과를 바라고 운동역학을 이용하는 것은 질문자 호박사 스스로를 독립된 행위자로 치부하는 것이며 질문하는 자와 질문되는 대상으로 나누게되는 이분법적 행위이다. 이 분리가 실재하는 한 진리와는 요원하며 모든 현상계는 꿈이 아닌 실재로 환각된다.


3. 추락한 영혼으로 추락한 오쇼

<의식혁명>을 비롯한 호박사의 모든 저작들 전편에 걸쳐 수 없이 등장하는 운동역학의 의식측정, 그리고 이 진실도 수치를 기반으로 하는 호박사의 이론과 설명은 이제 결코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을 조심스레 그러나 힘주어 말해야겠다.

우연히 실수에 의해 오류된 한두가지도 아니고 한 평범한 독자로서 책을 읽는 도중에 발견한 치명적 거짓이 이 정도인데 만일 책 세부적인 내용 하나 하나를 작심하여 진실성 진위 여부를 점점해 들어간다면 얼마나 많은 진실을 가장한 거짓 진술들이 또 숨어 있을 지는 알 수없다.

측정된 의식수준에 기반한 모든 호박사의 말을 이제는 믿지 않으련다. 아니 무엇을 믿겠는가.

그가 낮은 수준으로 측정하여 폄하시킨 숱한 영적 저작들과 영적 스승들, 그리고 의식수준의 높낮이에 따라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대하였던 이 세상의 모든 측정 대상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실로 한사람의 영향이 전 우주를 진리의 빛으로 이끌게도 하고 그 빛을 가려 어둠을 만들고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운동역학이 참스승과 사이비 스승을 가려주는 훌륭한 도구가 될 거라고 호언하였지만 자신 스스로가 자신이 비난했던 사이비 스승들보다 더 큰 우를 혹 범하지는 않았는가.

오쇼 라즈니쉬(180),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75), 에크하르트 톨레(240)는 정말 그의 말대로 추락한 영혼 사이비 스승이었던가?

또 미얀마(155)는 미국(421)보다 훨씬 영적 수준이 낮은 나라인가?

영화 벤허(475)는 펄프 픽션(25)보다 월등히 더 진실한가?



에필로그

모든것은 헛된 개념일 뿐, 개념이 사라지면 진아는 여여하다.

꿈 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꿈을 꾸는 자가 꿈울 깨어버리면 한줄기 바람에 촛불이 후욱~ 꺼지듯이 사라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 참된 진리는 결코 문자나 말, 생각으로 표현되어 질 수도 없는 것인 즉, 아무리 1000의 호박사가 1000의 저작들에서 그 어떤 화려한 수사와 난해한 조어로 진리를 표현코저 했다 쳐도 진리는 객관적 대상이 될 수 없기에 표현되는 즉시 개념이 되어버린다.

그는 진리에 이르는 곧고 좁은 길을 설명하려했지만 겨우 길의 특성을 복잡하고 장황하게 그리고 아주 부실하게 설명한 꼴이 되었다. 진리의 그림자를 어려운 용어로 복잡하게 글쓴다고 진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난해한 영적 저작을 잘 썼다 잘 해독했다 하는 특정인 특정그룹의 영적 만족은 채워줄 수 있으되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에고가 개념을 이해한 것 외에 다름 아니다.

진리를 표현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다 헛된 일이며 자칫 참된 구도자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깨친 이는 침묵으로 가르치며 침묵으로 일깨우는 것이며, 그래서 이심전심인 것이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진리를 표현할 때 그 방법이 없음을 알고 다만 주장자로 법상만 쳤을 따름이다. 부처님은 단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셨다. 이 사람의 이 글 또한 개념 덩어리임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진리의 입장에선 호박사도 그 책의 진실도 다 한낮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호박사와 그의 저작들은 자신이 설정한 지상 최고의 진리수준인 1000에 와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측정하신 바 자신의 말씀, 자신의 저작들을 지상 최고의 진리로 측정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계속 그 저작들의 출판은 이어진다.

참된 진리는 실로 언어와 마음너머의 것이고, 이 일체 현상계가 진아가 드리워낸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니 그 현상계내의 극히 작은 일부이자 피조물인 객체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감히 창조주 진아의 주체성을 참칭하여 스스로가 주체인양하며 진아가 스스로 현상으로 드러난 이 일체 우주에 대해 그 얄팍한 지성으로 사량하고 수치로 또 평가할 수 있으리오.

추락한 영혼도 없고 상승하는 영혼도 없다... 추락은 상승과 쌍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며 추락하거나 상승하는 행위자 주체란 있을 수가 없다. 또 더 나은 것도 없고 더 모자란 것도 없다. 또 더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분별하는 에고일 뿐,

이 현상계 어디에도 진아와 분리된 개별적이고 독립된 행위자는 없다. 오직 진아의 지고한 움직임만 있을뿐. 구도자도 또한 없다. 단지 구도의 행위만 있을 뿐. 깨달은 자도 없다. 깨달음만 있을 뿐.

개별적 자아인 에고란 본시 존재치 않는 것이니 분별하는 에고가 사라지면 있는 그대로가 참자아의 현현이요, 이대로가 완벽하며, 모두가 하나인 진아의 나툼일 뿐인저.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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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사라지다>의 개리 레너드 Gary Renard 신성화 Sacred Art

개리 레너드 Gary Renard 에너지 그림 설명 : 1. 빛의 상징이 오방으로 드러났다. 오방이라는 것은 다섯 방향으로 에너지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방의 다섯 꼭지점을 선으로 그으면 오각형이 된다. 오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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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유(everything)와 무(Nothing)의 게임이다,
이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무(nothing)안에서
우리는 갇혀서 남아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경지들 사이를 통과하는 여행시간은
한 경지에서 다른 경지까지의 평균 기간이
약 1천년이 걸린다.


일곱가지 깨달음의 경지들(7경지의 깨달음)

이 모든 상승 깨달음의 차례를 통해서
최후의 완전한 깨달음(Fana-Fillah)으로 향하는 진보의 연속성이 있으며,
각각은 어떤 특별한 특징이 있다.

순례자가 첫 번째 경지에 도착할 때,
그는 첫 번째 깨달음 또는 에고의 작은 소멸을 경험한다.
​순례자는 자신의 제한된 개체성을 일시적으로 잃고 지복을 경험한다.
그렇게 합일된 많은 순례자들은 그들이 신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첫 번째 경지에 갇히게 된다.(집착)

순례자가 자신을 자기망상(착각)에서 자유롭게 하거나
자신의 성취가 실제로 그의 여정에서
한 변환 단계인 것을 깨달으면,
그는 영적인 길로 더 나아가서 두 번째 경지에 도착한다.

두 번째 경지에 합류하는 것은 (fana-e-batili)
또는 거짓의 소멸이라고 불린다.
순례자는 이제 지복과 무한한 빛에 흡수된다.
그들은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두 번째 경지에서 좌초된다, 그러나
자신을 자기망상에서 자유롭게 한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서 세번째 경지에 들어간다.

세번째 경지에 합류하는 것은 (fana-e-zahiri)
또는 보이는 것의 소멸이라고 불린다.
순례자는 며칠 동안
그의 몸과 세상에 대한 모든 의식을 잃고 무한한 파워를 경험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이 파워를 표현할 기회가 없다.
이것은 사마디(videh samadhi) 또는
신성한 혼수(divine coma) 상태이다.
의식은 이제 전 세계에서 완전히 거두어졌다.(철회)
.......
.......
.......
.......

- 메허 바바

Videha mukti (Sanskrit, "liberation after death or literally liberation from the body")
Videhamukti may signify the liberation while alive as the state beyond turya.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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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H 호오포노포노 대표인 카마일리 라파엘로비치 'KR 여사'의 신성화 The Sacred Art of Kamaile Rafaelovich 'KR'. (Ho'oponopono)

SITH 호오포노포노 대표인 카마일리 라파엘로비치 'KR 여사'의 신성화 The Sacred Art of Kamaile Rafaelovich 'KR' 에너지 그림 설명 : 1. 머리로부터 영적 중심을 향하는 영적 중심선Spiritual Centerli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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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여사 인터뷰

고대 하와이에서 내려오는 지혜 호오포노포노로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간다...

호오포노포노를 통한 셀프 아이덴티티란
고대 하와이언에게 전하는 치유와 문제 해결법을, 누구라도 혼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우리들을 둘러싼 현상은 상황과 상대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자신 안에 있는 방대한 기억의 재생에 있고, 그 기억을 '정화'함으로써 '제로'의 상태로 돌아가 더더욱 깊게 알아차리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정화란 무엇입니까
이번에 처음으로 호오포노포노의 정화를 실천해보았습니다.
제대로 정화가 되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오늘까지 한번 해보았습니다.

KR : 잘하셨습니다. 어떤 정화를 하셨나요?





저는 어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집에 대해서 네 가지 말을 반복했습니다.

KR : 충분히 정화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정화를 하고 나서 일을 진행시켰다"는 점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무엇이 변했는가? 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화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실감과 결과를 원하면,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끝이 없는 여행이 됩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도 늘 무언가를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행동인가 하고 있습니다.
호오포노포노에서는 그것이 우리들 안에 있는 기억의 재생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잠재의식은 방대한 기억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의 기억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표면적인 의식(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의식=현재의식)을 자극함으로써
우리들은 판단을 하거나 감정을 느낍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과 사고가
원인이 되는 기억을 정화하기 위한 열쇠가 됩니다.

그러니 우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근본인 기억을 정화해, 리셋된 상태를 만들어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을 통합시킨 다음,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모르게 '정화를 했으니 이 집에서의 생활은 쾌적할 거야'라고 기대를 하기 쉬운데요, 그게 아니군요. 정화의 실천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거군요. 정화함으로써 자신이 정화된 상태가 되면, 받아들이는 감정과 인식의 방법도 변하고, 눈에 비치는 세계도 변한다는 걸까요?

KR :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로지 정화를 계속 할 뿐입니다. 이사가 정해지면 새로운 집에 대한 기억을 정화합니다. "이 집에 관해 지금까지 몰랐었으니까 기억이 있을 리 없어"가 아닙니다. 당신과 그 집이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무언가의 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그 연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하나의 건물로서가 아닌, 의지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대합니다. 대하는 가운데 항상 정화를 실천합니다. "정화했으니까, 잘될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번엔 그 생각을 정화합니다.

기억의 연장선에서 집을 대하는 게 아니라, 정화를 통해 리셋된 상태로 돌아가,
제로에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네요.

KR : 그렇습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신의 기억에서 오는 생각으로 색을 입히지 말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정화란 매순간의 일. 알아차릴 때마다 정화합니다. 그러니까 우선 매순간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들의 경우, 현재의식이 "이렇게 해야 해"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얽매고 있습니다.

이런 얽매임 속에서도 잠재의식은 여러 가지 자극을 보내, 이걸 정화해주세요, 저걸 정화해주세요, 라고 기억의 정화를 촉구하지만, 현재의식이 너무 강하다 보니,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하나하나를 정화하는 것으로, 인생을 기억으로서가 아닌 영감으로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앞에는 잠재의식에 따라 자신을 통제했던 때에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자유롭게 펼쳐지는 풍경이 있을 것입니다.






정화를 반복하는 하루

여사님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십니까?

KR : 아침에 일어나 먼저 화장실에 갑니다만, 저는 화장실 거울에, 그때그때 제가 사용하는 정화도구('아이스블루'와 같은 말 등)를 종이에 써서 붙여두기에 그것을 보는 것으로 정화를 시작합니다.

또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도, 특수하게 정화된 콩과 블루 워터로 끓이기 때문에, 커피를 즐긴다는 행위가 정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그 날 하루를 정화해둡니다.

만나기로 돼 있는 사람과 잡혀 있는 스케줄을 생각해, 일어나는 이미지와 감정을 정화합니다.
제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또, 아침에 손자들을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줄 일이 있을 때는 손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을 정화합니다. 차와 도로도 정화합니다.
그 후에도 무언가 알아차릴 때마다 정화를 반복합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정화하는 거네요.

KR :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가끔 잊어버리기도 하고, 정화의 존재조차 제 안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루를 마무리할 때도 그날의 행동과 감정을 총점검하고, 하나하나 정화합니다.
리셋된 상태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을 정말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정화가 아름다움으로 연결된다

미용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것이나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KR : 와, 저에게 미용법을 물으시는 겁니까? (웃음) 얼굴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미용법은 슬프거나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을 때 바로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도 정화합니다.

나이까지 정화해버리는군요!
KR : 네. 왜냐하면 나이에 대한 잠재의식의 기억이, 우리의 호르몬과 내장을 움직여 그 나이에 맞는 심신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거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이에 대한 잠재의식을 정화하는 것으로 나 스스로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상식과 같은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현대의 풍조는 일반적으로는 '젊어 보이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안티 에이징'에 대한 정보가 넘쳐흐르는 가운데, 나이와 젊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정화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

KR : 만약 당신이 30세로 남성으로부터 30세로 보여 30세 취급을 받고 있다면 그 경험을 정화합니다. 만약 당신이 50세로 지금은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정화합니다.

젊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여러분 안의 기억이 그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즉 기억의 노예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기억의 반복에 대해 몇 번이라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나이를 정화를 것으로, 아마도 여러 생각이 떠오르겠지요.
"20대는 좋았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정화합니다.
이어서 "꽤 나이를 먹어버렸네"라는 생각이 든다면 또 그것을 정화합니다....
저는 그런 기억을 앞으로도 갖고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몇 번이고 정화합니다. 정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내 안에서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KR여사님의 앞으로는 꿈은 어떻게 되십니까?

KR : 음, 모르겠습니다. (웃음)
저는 스스로의 생각에 의존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감이 스스로 움직인다면 거기에 따라 행동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것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도 기억의 재생이기 때문에, 먼저 정화합니다.
정화한 결과, 역시 그것을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고, 전혀 새로운 것을 할지도 모르고, 혹은 그것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재생된 기억을 정화합니다.

정화한 다음 일어나는 행동은 어떤 것이라도 스스로 생각해서 일어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목표와 결승점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정화한 결과에 따라 일어나는 행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표를 갖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목표를 갖는 것으로 정화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목표를 세운 다음에 목표를 한번 정화하고, 그리고 나서 앞으로 전진해나가길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행동하는 것과 영감을 받아 행동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행동을 했다고 치더라도, 분명 의식과 내용물은 변해 있겠네요.

KR : 호오포노포노는 강한 실감이 오거나, 결과를 예상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신을 여러 기억과 생각으로부터 해방시켜 인생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우리들은 기억을 정화하는 것으로, 영감을 받기 쉬워집니다.
영감에 의해 행동하는 것으로, 보다 자신답게 되고,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앞으로도 반드시 정화를 지속해,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여행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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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 여사
<호오포노포노를 통한 셀프 아이덴티티(SITH)> 창시자, 모르나 여사의 첫 번째 제자로 19세부터 지금까지 거의 40년에 걸쳐 호오포노포노를 실천해왔다. 호오포노포노를 사용한 컨설팅, 바디워크, 강연활동을 하는 한편, 하와이에서는 부동산을 경영해, 경영자와 컨설턴트로서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호오포노포노 라이프 진정한 자신을 찾아, 풍요롭게 산다>가 있다.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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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의 신성화 Sacred Art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에너지 그림 설명 : 1. 녹색과 은색의 2겹을 이룬 빛의 상징이 드러났다. 2. 머리에서 발산되고 방광하는 에너지장, 에너지 회전체이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두뇌가 비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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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러시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외모는 부모조차도
실망할 정도로 못생겼습니다.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큰 손과 발...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세요.
제 외모를 아름답게 해 주신다면 제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날마다 자기 전에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소년의 외모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은 자라면서 자신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대한 소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는
자신을 계속 괴롭혀 온 외모 콤플렉스를
해결할 만한 답을 얻었습니다.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는 게 아니라
내면에 있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과 깨끗한 인격이 모여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전쟁과 평화',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집필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입니다.





어느 사람도 톨스토이를 못생긴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가득 품은 아름다운 작가,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적인 작가로
기억할 뿐입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이 만든 굴레에 갇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가 아니라
다른 이를 향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담긴
'마음'에 진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나와 똑같은
영혼을 알아보았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 톨스토이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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