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회 중앙종회 임시회에서 ‘불지종가 국지대찰’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성파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사에 힘쓰면서도 단절된 불교문화 복원이라는 한 길을 묵묵히 걸어 문화포교에 큰 족적을 남긴 선지식으로 꼽힌다. 수행과 방편 넘나들며 선농일치 실천한 스승
사그라진 불교문화 복원 잠시도 쉬지않고 ‘한 길’
종단 어려울때 소임생활 화합위해 멸사봉공 헌신
출가 이후 58년 동안 수행과 방편을 넘나드는 개차(開遮)법을 펼쳐온 조계종 원로의원 성파스님이 3월20일 열린 제210회 중앙종회 임시회에서 제4대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영축총림 통도사 산중총회에서 총림대중 만장일치로 방장으로 모셔달라고 추천한데 따른 것이다.
영축총림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대가람을 형성한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이다. 근현대 구하스님과 경봉스님, 벽안스님, 월하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이 주석하며 불법을 펼쳤으며,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방포원정상요청규(方袍圓頂常要淸規)’의 가르침으로 육화(六和)와 청규에 따라 종문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대도량이다.
불보종가의 상징이라 할 만한 영축총림의 방장 성파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사에 힘쓰면서도 단절된 불교문화 복원이라는 한 길을 묵묵히 걸어 문화포교에 큰 족적을 남긴 선지식으로 꼽힌다.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통도사 전문강원을 졸업한 후 1970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봉암사 태고선원을 시작으로 제방의 선원에 방부를 들이는 등 치열한 정진을 이어갔다. 제방의 여건이 열악했던 당시 통도사 서운암에 무위선원을 열어 납자들을 맞아들여 선풍 진작에도 힘을 기울였다.
서운암에 주석하면서 성파스님은 수행과 방편을 넘나들었다. 사그라진 불교문화를 다시 꽃피우는 길도 이 때 시작됐다. 지화(紙花)로 전해져오는 사찰의 염색문화를 전통 쪽 염색법을 재현해 한 단계 발전시켰다. 쪽 염색을 한 감지, 각종 색지, 들기름을 바른 유지 등을 되살려냈고, 각종 식물의 꽃과 잎, 뿌리, 열매를 사용한 초목 염재를 개발해 단순했던 천연염색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을 열었다.
사경과 선서화의 대가로도 유명한 성파스님은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아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수행은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았다. 닥나무로 직접 한지를 제작하고 쪽물을 들여 감지를 만들어 사경과 서예를 곁들였다. 불화를 그릴 때에는 옻칠도 서슴지 않았다. 쉽고 편한 방식 대신 전통문화를 잇기 위한 스님의 고집스런 열정이 만들어낸 명성이다.
영축총림 방장 성파스님.
성파스님을 중심으로 발전한 서운암 도예는 문화예술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 도예를 병행하며 일찍이 서운암을 중창한 것은 물론 1985년부터 5년여에 걸쳐 흙을 구워 불상을 조성한 도자삼천불과 1991년부터 10년여에 걸쳐 고려대장경의 조성 정신을 잇는 십육만도자대장경 봉안이라는 대작불사를 일궈냈다. 2013년 도자대장경을 봉안한 장경각 불사를 마무리하기까지 28년의 세월을 하루처럼 헌신했다.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성공한 도자삼천불과 도자대장경 불사는 성파스님의 대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월이 되면 들꽃 가득한 서운암이 되는 것도 성파스님의 ‘선농일치’ 작품이다. 부처님에 올리는 공양 중 꽃공양이 공덕이 으뜸이라며 2000년부터 서운암 주변에 야생화를 심었다. 서운암의 꽃밭은 불자들에게 토종 야생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학습장인 동시에 모든 종교인이 어우러진 종교화합의 축제마당이 됐다.
산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성파스님은 시조문학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왔다. 1984년 성파시조문학상을 제정해 최근까지 시조시인들을 격려해온 것이 대표적이다. 1985년부터 영남시조백일장을 개최해오다가 부산시조문학회와 힘을 합쳐 전국시조백일장으로 확대해 운영하고 있다.
수행자로서 일탈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일들에 대해 성파스님은 수행과 일상을 구분하지 않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임을 늘 강조해왔다. 사람들을 수행으로 이끌고자 사찰이 무한대의 학습장을 펼쳐 보이고,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라보는 심연(深淵)의 공부를 일러주는 것이다. 이사(理事)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스님의 지난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성파스님은 선원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납자의 길을 고집하거나 주지와 중앙종회의원 등 소임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선원에서 정진대중과 함께 하면서도 언제든 소임을 맡아야 할 때는 기꺼이 대중 앞에 섰다. 통도사 주지와 제5,8,9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고, 종단이 어려울 때는 총무원 교무부장과 사회부장을 맡아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종단화합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수행의 길을 걸을 때나 방편을 열어보일 때나 그 바탕에 출가본분사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계종 종정추대회의는 13일 오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종정 추대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성파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임기는 5년이며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
종정은 조계종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의 전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갖는 자리다. 조계종 헌법인 종헌에 따르면 종정은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통을 승계하며 계율을 관할하는 전계대화상을 위촉할 수 있다. 종헌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경감·복권을 행할 수 있다. 종단 비상시에는 원로회의 재적 3분의 2이상의 제청으로 중앙종회를 해산할 수 있다.
한편 종정 임기 시작일은 현 진제 종정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26일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종정(宗正) 스님에 추대된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이 1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고불식에 참석하여 예불을 드리고 있다. 2021.12.13. pak7130@newsis.com
조계종 신임 제 15대 종정 성파스님은 누구? 1939년 경상남도 합천 출신으로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1970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제5·8·9대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교무부장,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통도사 서운암에 주석하며 28년간 민족통일의 원력을 담은 도자삼천불과 16만 도자대장경을 조성했다.
옻칠불화, 민화, 서예, 천연염색 등 전통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7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18년 희귀병 소아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우들을 위해 5000만 원 기부로 통도사 방장 추대법회를 대신하기도 했다. .
한국 고유의 전통미술을 계승한 민화, 특히 옻칠민화을 알리고 있다. 1983년 옻을 이용한 개인전을 처음 연 후 국내외에서 전통 옻과 불교미술을 접목한 전시를 10여 차례 열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반구대 암각화, 옻칠로 되살렸다···통도사 방장스님 수중 회화전 입력2021.04.23. 오전 5:00 수정2021.04.23. 오전 6:54 백성호 기자
통도사에 당대의 선지식 경봉 스님(1892~1982)이 주석할 때였다. 당시 30대였던 성파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 시를 써서 보냈다. 그냥 시가 아니었다. 마음공부 자리, 수행의 견처를 담은 시였다. 하루는 경봉 스님에게서 편지로 답이 왔다. 답장에는 ‘능문능시(能文能詩)’라고 적혀 있었다. 능히 글을 쓰고, 능히 시를 쓴다. 마음에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원본보기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의 슬로건은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이다. 스님은 "일해야 공부할 수 있지, 일하지 않고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느냐"며 생산 불교를 강조했다.
선가(禪家)의 어법으로 보면 선사가 후학의 마음자리에 고개를 끄덕인 셈이다. 일종의 인가다. 경봉 스님은 이어서 ‘속불혜명(續佛慧命)을 희옹희옹(希顒希顒)하노라’라고 썼다. ‘부처의 법을 잇기를 바라고 또 바라노라’는 의미다. 당시만 해도 절집에서 경봉 스님과 젊은 성파 스님 사이는 층층시하였다. 그런데도 80대 경봉 스님은 30대 성파 스님에게 ‘능문능시’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성파 스님은 통도사 영축총림의 방장이 됐다. 선원ㆍ강원ㆍ율원을 두루 갖춘 총림의 최고 지도자가 방장이다. 14일 푸릇한 신록이 파도치는 통도사 서운암에서 성파(82) 스님을 만났다. 맞은 편에 서 있는 영축산의 산세가 오롯하고 당당했다. 성파 스님은 요즘 각별한 작업을 하고 있다. 7000년 전 선사시대의 예술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주인공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국보 제285호)다.
원본보기 성파 스님이 맨발로 올라가 반구대 암각화를 옻칠로 되살린 작품을 손으로 닦고 있다. 원본보기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심해 직접 찾아가도 선명한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중앙포토]
선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선사시대 암벽에 새겨놓은 그림에 오늘날 생기를 불어넣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직접 찾아간다 해도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다. 하천 건너 절벽에 새겨진 그림에다, 풍화작용으로 마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물 건너편에서 망원경으로 본다 해도 그다지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성파 스님이 이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다시 그려놓았다. 제작 기간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24일 오후 3시부터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상설 전시된다. 그것도 물속에 잠긴 채 전시되는 전례 없는 수중전이다. 작품 크기는 7.8m×4.4m다. 반구대 암각화와 100% 똑같은 실물 크기다. 누구나 와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마구 올라오는 물음을 마주 앉은 성파 스님에게 던졌다.
Q :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옮겼다고 들었다. 어떤 식인가.
성파 스님은 대답 대신 등 뒤에 서 있는 커다란 도자기를 만져보라고 했다. 조심스레 만졌다가 깜짝 놀랐다. 도자기가 아니었다. 모양은 영락없는 도자기인데, 정체는 삼베였다. 이건 마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원본보기 도자가 아니다. 삼베에 옻칠을 해서 만든 작품이다. 성파 스님은 아무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A : “삼베에 몇 차례나 옻칠해서 겹으로 붙이면 저렇게 된다. 고려청자가 깨졌을 때 무엇으로 붙이는지 아나. 접착제가 아니다. 옻칠이다. 접착제는 세월이 가면 산화돼서 힘이 없어진다. 물에 들어가도 접착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Q : 그럼 옻칠은 어떤가.
A : “옻칠은 썩지 않고 방부가 된다. 접착력도 강하다.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옻칠로 한번 접착되면 물에 넣고 팔팔 끓여도 안 떨어진다. 게다가 옻칠은 수천 년 가도 색이 안 변한다.”
성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와 동일 크기의 삼베에 옻칠을 했다. 열두 번 넘게 칠한 뒤에 다시 삼베를 붙이고, 다시 칠하고 다시 삼베를 붙이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작품의 바탕을 만들었다. 그러자 도자기처럼 단단한 바탕이 생겨났다.
원본보기 통도사 서운암에 마련된 작업실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되살린 작품의 크기가 너무 커서 반출할 때 작업실 정문을 떼어내야 했다.
참 묘했다. 까맣게 칠한 옻칠 바탕이 영락없는 우주였다. 그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색깔 입은 옻 안료는 하나하나가 별이었다. 한눈에 봐도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우주였다. 성파 스님은 그 위에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을 띄웠다. 그것도 우리 고유의 나전칠기 기법에 옻칠로 색을 입혔다. 그러니 성파 스님의 암각화는 우주 허공에 띄운 그림이다.
원본보기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에는 궁극의 순수미가 있다. 삼국시대의 마애불도 이런 암각화를 보고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Q : 왜 ‘반구대 암각화’인가.
A : “7000년 전 선사시대 때 절벽에 새긴 그림이다. 신석기 시대의 그림이다. 그걸 봤는데 ‘아!’하는 순수미가 있더라. 요즘 문화는 세련되고 편리하다. 그런데 조작미라 백 배, 천 배 꾸미고 부풀릴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그것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정신도 순수하고, 그림 그리는 장비도 순수하고, 모든 생활이 순수하다. 암각화는 인류 문화사에서도 최고 원조에 해당한다. 예술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건 원조다.”
성파 스님은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예로 들었다. “장 화백의 그림은 서툴다. 대단히 화려하거나, 대단히 세련된 작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순수미가 있다.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다. 궁극의 순수미가 있다.”
원본보기 반구대 암각화를 나전 기법과 옻칠로 되살린 작품에는 7000년 전에 그린 동물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자리와 궁극의 순수미는 통한다. 그러니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띄우며 성파 스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는 순수의 결정체가 아닐까. 그림을 통해 우리의 어깨를 ‘톡! 톡!’치며 “인제 그만 깨어나라”고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Q : 반구대 암각화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나.
A : “사람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거북이도 있다. 특히 고래가 많다. 그 당시에 이미 고래잡이를 했다는 기록이다. 고래를 잡는 그물도 그려져 있고, 고래를 가두는 목책도 그려져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이다.”
성파 스님 작품에는 고래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바닥도 모를 우주 공간을 색색의 고래가 헤엄친다. 원시의 순수가 7000년 만에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손으로 고래를 만졌더니 반질반질하면서도 딱딱하다. 알고 보니 전복 껍데기를 쪼개서 붙이는 나전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 위에 천연 색 염료를 녹인 옻칠을 했다.
원본보기 원본보기 원본보기 울산 천정리 각석을 나전 기법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선사 시대의 그림 외에도 화랑의 이름 등 삼국시대에 가미된 그림과 글들이 새겨져 있다. 서운암 장경각 앞에서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물속에서 상설 전시된다.
Q : 왜 전복 껍데기를 이용한 나전 기법을 썼나.
A : “고려 시대의 나전칠기는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중국과 일본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나전으로 자개를 붙여서 그림으로 표현했다. 나전은 광산에서 캐는 보석이 아니라 물에서 캐는 보석이다. 물은 무르지만, 이건 굉장히 야물다. 어변성룡(魚變成龍)이라고 하지 않나. 물고기가 변해서 용이 된다. 나전은 물이 변해서 옥이 된 거다. 그러니 대단한 거지.”
Q : 작품의 배경은 왜 우주인가.
A : “불교에서는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우주라고도 한다. 이 우주에 삼라만상이 다 있지 않나. 요약하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거다. 반구대 암각화, 그 한장에 시ㆍ공간을 다 넣고자 했다. 그래서 우주 허공에 암각화 문양을 띄운 거다.”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는 조그만 풀장이 둘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풀장이 아니었다. 작품 전시 공간이었다. 풀장처럼 생긴 액자인 셈이다. 거기에 물을 가득 담고, 반구대 암각화 작품을 물속에 눕혀서 전시한다. 바로 옆에는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있는 울산 천정리 각석(3.3m×9.7m, 국보 제147호)을 나전으로 되살린 작품이 전시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회화의 수중전이다.
원본보기 성파 스님은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나전은 무른 물에서 나온 여문 옥이다"라고 설명했다. 원본보기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는 풀장이 둘 있다. 사실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정리 각석 작품을 전시할 수중 액자다. 물을 가득 채운 뒤 두 작품을 눕혀서 전시한다. 24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Q : 왜 물속에서 전시하나.
A : “모든 것이 물에서 났다. 생명체도 처음에는 물에서 나왔다. 물이 아니면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댐을 막아 수위가 높아지자 물에 잠긴다, 안 잠긴다 논란이 많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마. 통째로 물에 담겨 있는 걸 함 봐라, 이거다. 하하”
Q : 물속에 넣으면 작품이 손상되지 않나.
A : “서양에는 옻칠이 없다. 동양에만 있다. 옛날에는 집안에 옻칠한 장롱 하나만 있어도 부자라고 했다. 옻칠은 천년이 흘러도 안 변한다. 물 속에 넣어도 변하지 않는다. 회화의 수중 전시는 이게 최초일 거다.”
원본보기 성파 스님이 맨발로 반구대 암각화 작품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다. 우주에 띄워진 그림의 색상이 선명하다.
Q : 그래도 뜻밖이다. 통도사 방장 스님이 손수 작품을 만드신다. 그것도 차원이 다르다. 누가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에 띄울 생각을 하겠나. 세간의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다.
A : “아, 이게 이상하다고 하면 방장을 사람들이 잘못 뽑은 거지. 나는 방장 되기 전에도 내 멋대로 했고, 방장 되고 난 뒤에도 내 멋대로 가는 거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계속 내 멋대로 가는 거라.”
성파 스님이 늘 강조하는 슬로건이 하나 있다.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다. “‘일하며’가 먼저 온다. 일을 해야 공부를 할 수 있지, 일 안 하면 공부를 할 수 있나. 그래서 공부하며 또 일하는 거다. 그게 내 좌표다.” 그래서 성파 스님의 불교는 생산 불교다. 신자들에게 기대는 불교가 아니라, 신자들이 찾아오게 하는 불교다.
원본보기 옻은 원래 색깔이 없다. 여기에 천연 염료를 녹여 넣어 옻칠을 한다. 옻칠한 삼베 위에 그려진 나전의 색색이 무척 아름답다. 성파 스님의 작품은 한반도에 깃들어 있는 고대사의 생생한 기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부산과 울산 등 전국에서 이미 유명해진 서운암의 들꽃축제와 시문학회, 전통방식으로 직접 담은 된장과 고추장 장독들, 옻칠로 되살린 우리나라 불화만 총 32종, 152점에 달한다. 이 모두가 성파 스님의 작품이다. 팔만대장경을 모두 650톤의 도자기로 구운 도자대장경, 천연염색, 옻칠 민화 등 끝도 없이 피어나는 생산 불교다.
성파 스님은 “진리의 이론만 알고 사물에 어두우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격물치지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성파 스님은 “그 반대도 곤란하다. 사물에만 밝고 진리에 어두워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뿌리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둘이 달라 보이지만 서로 통한다. 진리도 굴리고 사물도 굴릴 때, 선사라도 대선사가 된다.”
마지막으로 성파 스님은 “새가 숲에 있을 때는 극락세계인 줄 모른다. 새장에 갇히면 ‘저 숲이 극락이구나’ 깨닫는다. 그러니 극락이 어디 있겠나.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이 극락세계다. 그걸 고통의 바다라고 착각하지 마라. 여기가 극락임을 알면 날마다 좋은 날이 펼쳐지고,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원본보기 성파 스님이 우주 허공에 띄운 반구대 암각화. 고래와 거북,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가운데에 고래 잡는 그물과 목책이 보인다.
서운암 밖으로 나왔다. 세상이 푸르다. 성파 스님은 지금 여기가 극락이라 했다. 그러니 우주 허공이 따로 있을까. 7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 모두가 우주 허공을 헤엄치는 고래다. 이 극락의 주인공이다.
조계종 15대 종정으로 추대된 성파 스님이 지난 5월 통도사 서운암 앞 공터를 가득 채운 장독대 사이에 선 모습. 성파 스님은 1980년대부터 버려진 장독을 수집해 간장 된장을 담갔다. /김동환 기자
대한불교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제15대 종정(宗正)에 통도사 방장 성파(性坡·81) 스님이 추대됐다. 조계종은 13일 오후 서울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종정 추대회의를 갖고 성파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종정은 ‘조계종의 신성을 상징하고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 권위와 지위를 가지는’ 자리다. 새 종정의 임기는 내년 3월부터 5년이며,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다.
성파 스님은 1960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80년대 조계종 총무원 사회·교무부장과 통도사 주지를 지냈다.
통도사 내 암자인 서운암(瑞雲庵)에 머물며 이곳을 중심으로 된장·간장을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보급했으며 옻칠, 도자기, 한지(韓紙) 등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보존·발전시켜왔다.
8만 대장경을 도자기판으로 굽기도 했으며 100짜리 한지를 제작하기도 했다. 본인의 작품전도 여러 차례 열었다.
성파 스님은 수행하는 스님이 예술 분야까지 영역을 넓힌 데 대해 “과거 전통 사찰은 건축, 미술, 공예의 산실이었다”며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사찰이 앞장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불리는 영축총림 통도사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을 맡아오다 이날 종정에 추대됐다.
세븐 컬러즈(7 Colores)는 칠레 중앙의 넓은 우림에 서식하는 홍방울새를 부르는 칠레식 표현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일곱 가지 색의 깃털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홍방울새로 표현되는 7 컬러즈는 칠레의 매력을 담은 와인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와인과 사랑 - 메허 바바
고대의 위대한 수피 시인들(Sufi Master-Poets)은 흔히들 사랑을 와인(술)에 비교한다. 와인이 사랑의 가장 적절한 비유가 된 이유는, 둘 다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인은 부주의한 자기망각을 일으키는 반면, 사랑은 참나를 깨닫도록 인도한다. 주정뱅이와 러버(lover)의 행동은 비슷하다. 둘 다 사회적 기준을 무시하며, 남의 의견에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 둘의 목표와 과정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심중에 어두움과 부정을 가져오며, 다른 하나는 영혼이 자유로이 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준다. 주정뱅이의 취기는 한 잔의 술로 시작하여 그의 흥을 북돋우고 마음을 느슨하게 해주며, 삶의 온갖 걱정거리들이 잊혀질 거라고 기약하는 새로운 인생관을 제시한다. 그는 한 잔으로 시작해서 두 잔, 두 잔에서 한 병으로 이어간다. 그는 함께함에서 고립의 상태로, 건망증에서 망각의 상태로 간다. – 실재 안에서의 망각은 신의 원래상태(Original State of God)이지만, 주정뱅이의 취함은 텅빈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 그리고 그는 침대든 길바닥이든 아무데서나 잔다. 공허한 아침을 맞이하는 그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놀림의 대상이 된다. 러버의 취함은 한 방울의 신의 사랑에서 시작되어, 결국 그로 하여금 세상을 잊게 한다. 신성한 사랑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비러벳(Beloved)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다가가면 갈수록 비러벳의 사랑을 받고있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비러벳의 발 아래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픈 갈망이 생긴다. 러버 역시 주정뱅이처럼 침대에서 자든, 길바닥에서 자든 관심이 없다.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복(Bliss)안에서 평안히 쉬며, 비러벳인 신은 병이나 재난으로부터 그의 몸을 보호하고 돌봐주신다. 이렇듯 수많은 러버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신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 그의 갈망은 무한해진다. 그는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물고기와 같다. 어디를 보건 무엇을 보건 그의 눈에는 신밖에 보이질 않지만, 합일의 문(gate of union)은 찾을 수가 없다. 그가 마시는 와인은 불로 변하여, 그를 계속되는 지복의 고통 속에서 태운다. 그 불은 결국 무한한 의식의 바다가 되고, 러버는 그 속에 빠져 죽고 만다.
판교에 150억 예배당 세웠다가 빚 감당 못 해 상가로 간 교회…담임목사는 30억 전원주택 거주
예장합동 총회 재판국장 남서호 목사 "하나님 성전 지은 것만으로도 만족"…"논란 있는 교회에 예배당 넘긴 데다가 지역 비하까지"
기자명 최승현 기자 승인 2021.11.19 16:55
신도시 종교 용지 건축 현황과 문제점을 다룬 '교회와 신도시' 기획 기사를 봤다는 교인이 며칠 전 회사에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경기 성남시 대장동에 사는 이 교인은, 10년 전 판교신도시에 예배당을 지었다가 불과 4년 만에 건물을 되팔고 나간 판교 동산교회(남서호 목사)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서호 목사가 너무 괘씸하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듣자 하니 "판교에 예배당을 지은 후, 몇 년 만에 교회를 되팔았는데, 새로 들어온 교회가 논란이 많다. 이단이라는 소문도 있다.
교회는 빚 때문에 건물을 청산하고 떠났지만 정작 담임목사는 판교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 그가 사는 집은 30억 원대 호화 빌라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다른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자기가 사는 전원주택 단지를 자랑하는 한편, 판교 지역과 교인들을 비하하는 게 괘씸했다"고 합니다.
<뉴스앤조이>가 올해 6월 보도한 대로, 동산교회는 2007년 판교신도시 종교3블럭을 25억 원에 사들이고 이 부지에 지하 3층 지상 7층 연면적 1200평 건물을 지어 2010년 입당했습니다. 하지만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60억 원을 받고 순복음서울진주초대교회(전태식 목사)에 건물을 넘기고 지역을 떠났습니다. 이후 동산교회는 서울 양재동의 한 상가 건물을 임차했습니다. 동산교회 남서호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배광식 총회장) 소속으로, 현재 총회 재판국장과 총신대 이사회 감사를 맡은 교단 중진 목사입니다. 한편, 예장합동은 2005년 90회 총회에서 전태식 목사의 구원관·예배관에 문제가 있다며 '집회·예배 참석 금지'를 결의한 바 있습니다. 교단 중진 목사가, 교단이 신학적으로 문제 있다고 결의한 교회에 예배당을 매각한 셈입니다.
판교신도시 순복음서울진주초대교회는 과거 동산교회 건물이었습니다. 150억이 들었지만, 은행 부채를 감당 못하고 결국 매각됐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교인들 헌금 100억에 장로들은 연대보증까지 "부자들은 예수 안 믿고, 교회에 엄청난 데미지"
사실관계를 확인하던 중 남 목사의 설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예배당을 짓는 데 총 150억 원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교인 300명 다니는 교회에서 단행한 건축이었습니다. 100억 원은 교인들 헌금과 교회 재산 등으로 충당했습니다. 장로들은 연대보증까지 섰습니다. 은행에서 60억 원의 빚을 내기도 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로또 터진다'는 신도시에, 그것도 15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교회를 지었는데, 그는 왜 실패했을까요? 여기서 잠깐 2015년 남 목사가 한 설교 내용을 소개합니다.
"내가 봐도 이 정도 목사면 괜찮은 줄 알았다. 한 교회에서 30년간 목회했고, 장로가 4명, 교인이 300명이었다. 판교에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는데 문제가 나타났다. 판교 개발이 굉장히 늦어졌다. (정부가) 아파트 짓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문화시설이나 교회 시설은 (건축)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 (아파트) 다 짓고 난 다음에 입주할 쯤에 교회 건축 허가를 내줬다. 1년 반 정도 건축하고 나니까 교인들은 이미 다른 교회로 갔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원로)가 입주자를 다 데리고 갔다.
막상 예배당을 건축하고 나니까 교회 오시는 분이 대체로 어떤 분이냐면, 차 없는 분, 연세 많은 할머니·할아버지, 정신병자들, 이런 사람들만 오니 교회가 큰일 난 거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부자들은 예수를 안 믿는다. 판교는 정말 살기가 좋다. 돈도 있고 이렇게 살기 좋은데 뭐 또 천국이 다른 데가 있겠나. 이러니 교회가 엄청난 데미지가 오기 시작하더라. 우리 집(사택) 바로 뒤에 노소영 관장(아트센터 나비미술관)이 최고로 비싼 연립 빌라를 지었다. 거기 분양했던 집들은 평균이 70억이다. 자기가 살 집은 120억짜리로 지어 놨다.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 씨도 우리 동네에 산다. 영화배우들도 산다. 우리가 사는 블록에는 나만 국산 자동차 타고 다닌다. 그만큼 대단한 곳이다."
제보자는 판교 주민(대장동은 판교신도시와 1km 떨어져 있어 남판교로 불리기도 합니다)이자 기독교인으로서, 남 목사가 판교 주민을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치부해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교회에 찾아오는 교인을 정신장애인 내지 돈 없는 사람으로 비하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남 목사 주장대로 헌금 낼 만한 교인이 없었기 때문에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매달 이자만 4000만 원이나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남 목사는 "강단에 서면 '교인들이 왜 돈을 안 낼까' 싶고 교인들 얼굴이 돈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건물이 경매에 나오려 하던 차에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하나님의교회세계복음선교협회(하나님의교회)가 접근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교회는 막대한 현금 보유력을 앞세워 기성 교회 예배당을 공격적으로 매입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50억 원에 건물을 사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고민이 깊어진 남 목사는 인근 목회자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함께 판교에서 목회하던 김 아무개 목사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 아니냐. 이단이고 삼단이고 무슨 문제냐"라며 팔라고 권유했지만, 남 목사는 차마 그렇게 못 했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교회 제안을 거부하고, 전태식 목사 측에 60억 원을 받고 건물을 팔았다고 합니다.
남 목사가 예배당을 매각한 전태식 목사는, 예장합동이 2005년 '예배 참석 금지'를 결의한 바 있습니다. 2019년에 재검토 청원이 올라왔지만 예장합동은 2005년 결의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150억 털어먹었지만 너무 행복, 자유하고 나니 너무 편안해" 남 목사는 교회 건물을 팔고 후회했을까요? 그의 2015년 설교를 계속 들어 보면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한테 따졌다. 내 꼴이 이렇게 됐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좋으냐고 따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었다. '이제 네가 자유해야 된다'고 그러시더라. '리버티해야 된다' 이 말이다. 집착을 버리니 그다음부터 마음이 너무 편하더라. 150억을 털어먹어도 너무 행복했다. 우리가 (그냥) 준 거지 않나.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부유한 사람인가.
전에는 150억을 털어먹고 난 목사 얼굴이 꼴이 말이 아니지 않겠나. 그런데 지금 어떤가. 환하지 않나. 뻔뻔해져서 이 얼굴에 150억을 발랐다(웃음). 우리 장로님도 처음에는 속으로 욕했을지 모르지만 똑같이 미쳐 간다. '목사님 맞습니다. 우리 교인들 대단합니다. 300명이 150억 건물을 공짜로 갖다 바치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있으니 보통 교인들이 아닙니다' 한다. 자유하고 나니 얼마나 편한지 알 수 없다."
예배당은 팔렸지만, 남 목사는 아직 판교에 삽니다. 그가 거주하는 전원주택은 시세 30억 원대로 추정됩니다. 일대에는 부자들이 즐비하다고 합니다. 카카오맵 갈무리
남서호 목사는 지금도 판교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사는 전원주택은 판교에서도 부자들만 산다는 부촌입니다. 빌라 하나에 30억 원을 호가하는데, 이름난 부촌이어서 매물이 잘 나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를 조회해 봐도 올해 실거래는 10건 남짓했고, 거래는 대부분 30억 원 내외로 이뤄졌습니다. 교회는 엄청난 부채를 감당할 수 없어 건물을 팔고 상가를 전전하는데, 담임목사는 최고의 부촌 판교 전원주택단지에 살고 있는 게 의아할 따름입니다. 11월 18일 총신대학교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남 목사를 만났습니다. 총회 재판국장과 총신대 감사 등을 맡은 교단 중진 목사로서 교단이 참여 금지 결의를 한 전태식 목사에게 예배당을 판 것은 부적절하지 않은지, 교회는 부채로 어려움을 겪는데 담임목사가 부촌 전원주택에 사는 게 합당한지, 무리하게 예배당 건축을 추진한 걸 후회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우선 남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전태식 목사 측에 건물을 넘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단 목사들한테 넘기려 노력해 봤지만 안 오더라. 오히려 예배당이 경매에 나오면 더 싸게 사려고 목사들이 줄을 서 있더라. 그중에는 우리 교단 목사도 둘이나 있었다. 괘씸했다. 추가 대출을 받아서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지만 빚을 더 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전태식 목사에게 팔았다"고 말했습니다.
사택은 '안 팔려서' 지내는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설교 때 홍익대 교수를 불러다 설계한 집이라고 자랑했던 집입니다. 남 목사는 "30억 원대 시세는 맞지만, 내가 거기 계속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라 집이 안 팔린다. 껍데기만 좋은 집이다. 10억 대출을 받아 예배당 짓는 데 보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자도 내가 내고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주택이 팔리면 다시 교회가 있는 양재동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교회에 넘기기는 했지만 예배당 건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감사한다. 교인들이 모든 신앙을 다 쏟아부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물론 전태식 같은 사람이 안 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처음에는 했다. 그러나 아무도 안 오니까. 그때 은행 이율이 9%였는데 도무지 감당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남 목사 이야기를 들으며 '교회와 신도시' 기사를 취재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많은 교회가 신도시에 수십억~수백억 원을 들여 무리하게 예배당을 지었고, 종국에는 헐값에 팔려 나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교인들이 낸 헌금은 공중분해가 됐지만, 이 과정에서 목회자 개인이 손해를 보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판교 동산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바친 헌금 100억여 원이 증발한 셈이 됐지만, 남 목사는 고급 주택에 살고 교단 요직을 맡으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남 목사는 '하나님 성전을 지은 것에 만족한다'고 눙쳤는데,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