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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반구대 암각화, 옻칠로 되살렸다···통도사 방장스님 수중 회화전
입력2021.04.23. 오전 5:00 수정2021.04.23. 오전 6:54
백성호 기자
통도사에 당대의 선지식 경봉 스님(1892~1982)이 주석할 때였다. 당시 30대였던 성파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 시를 써서 보냈다. 그냥 시가 아니었다. 마음공부 자리, 수행의 견처를 담은 시였다. 하루는 경봉 스님에게서 편지로 답이 왔다. 답장에는 ‘능문능시(能文能詩)’라고 적혀 있었다. 능히 글을 쓰고, 능히 시를 쓴다. 마음에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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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의 슬로건은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이다. 스님은 "일해야 공부할 수 있지, 일하지 않고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느냐"며 생산 불교를 강조했다.
선가(禪家)의 어법으로 보면 선사가 후학의 마음자리에 고개를 끄덕인 셈이다. 일종의 인가다. 경봉 스님은 이어서 ‘속불혜명(續佛慧命)을 희옹희옹(希顒希顒)하노라’라고 썼다. ‘부처의 법을 잇기를 바라고 또 바라노라’는 의미다. 당시만 해도 절집에서 경봉 스님과 젊은 성파 스님 사이는 층층시하였다. 그런데도 80대 경봉 스님은 30대 성파 스님에게 ‘능문능시’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성파 스님은 통도사 영축총림의 방장이 됐다. 선원ㆍ강원ㆍ율원을 두루 갖춘 총림의 최고 지도자가 방장이다. 14일 푸릇한 신록이 파도치는 통도사 서운암에서 성파(82) 스님을 만났다. 맞은 편에 서 있는 영축산의 산세가 오롯하고 당당했다. 성파 스님은 요즘 각별한 작업을 하고 있다. 7000년 전 선사시대의 예술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주인공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국보 제285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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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이 맨발로 올라가 반구대 암각화를 옻칠로 되살린 작품을 손으로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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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심해 직접 찾아가도 선명한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중앙포토]
선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선사시대 암벽에 새겨놓은 그림에 오늘날 생기를 불어넣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직접 찾아간다 해도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다. 하천 건너 절벽에 새겨진 그림에다, 풍화작용으로 마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물 건너편에서 망원경으로 본다 해도 그다지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성파 스님이 이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다시 그려놓았다. 제작 기간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24일 오후 3시부터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상설 전시된다. 그것도 물속에 잠긴 채 전시되는 전례 없는 수중전이다. 작품 크기는 7.8m×4.4m다. 반구대 암각화와 100% 똑같은 실물 크기다. 누구나 와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마구 올라오는 물음을 마주 앉은 성파 스님에게 던졌다.
Q :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옮겼다고 들었다. 어떤 식인가.
성파 스님은 대답 대신 등 뒤에 서 있는 커다란 도자기를 만져보라고 했다. 조심스레 만졌다가 깜짝 놀랐다. 도자기가 아니었다. 모양은 영락없는 도자기인데, 정체는 삼베였다. 이건 마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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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가 아니다. 삼베에 옻칠을 해서 만든 작품이다. 성파 스님은 아무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A : “삼베에 몇 차례나 옻칠해서 겹으로 붙이면 저렇게 된다. 고려청자가 깨졌을 때 무엇으로 붙이는지 아나. 접착제가 아니다. 옻칠이다. 접착제는 세월이 가면 산화돼서 힘이 없어진다. 물에 들어가도 접착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Q : 그럼 옻칠은 어떤가.
A : “옻칠은 썩지 않고 방부가 된다. 접착력도 강하다.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옻칠로 한번 접착되면 물에 넣고 팔팔 끓여도 안 떨어진다. 게다가 옻칠은 수천 년 가도 색이 안 변한다.”
성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와 동일 크기의 삼베에 옻칠을 했다. 열두 번 넘게 칠한 뒤에 다시 삼베를 붙이고, 다시 칠하고 다시 삼베를 붙이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작품의 바탕을 만들었다. 그러자 도자기처럼 단단한 바탕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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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서운암에 마련된 작업실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되살린 작품의 크기가 너무 커서 반출할 때 작업실 정문을 떼어내야 했다.
참 묘했다. 까맣게 칠한 옻칠 바탕이 영락없는 우주였다. 그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색깔 입은 옻 안료는 하나하나가 별이었다. 한눈에 봐도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우주였다. 성파 스님은 그 위에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을 띄웠다. 그것도 우리 고유의 나전칠기 기법에 옻칠로 색을 입혔다. 그러니 성파 스님의 암각화는 우주 허공에 띄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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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은 "반구대 암각화에는 궁극의 순수미가 있다. 삼국시대의 마애불도 이런 암각화를 보고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Q : 왜 ‘반구대 암각화’인가.
A : “7000년 전 선사시대 때 절벽에 새긴 그림이다. 신석기 시대의 그림이다. 그걸 봤는데 ‘아!’하는 순수미가 있더라. 요즘 문화는 세련되고 편리하다. 그런데 조작미라 백 배, 천 배 꾸미고 부풀릴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그것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정신도 순수하고, 그림 그리는 장비도 순수하고, 모든 생활이 순수하다. 암각화는 인류 문화사에서도 최고 원조에 해당한다. 예술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건 원조다.”
성파 스님은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예로 들었다. “장 화백의 그림은 서툴다. 대단히 화려하거나, 대단히 세련된 작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순수미가 있다.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다. 궁극의 순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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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를 나전 기법과 옻칠로 되살린 작품에는 7000년 전에 그린 동물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자리와 궁극의 순수미는 통한다. 그러니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 허공에 띄우며 성파 스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는 순수의 결정체가 아닐까. 그림을 통해 우리의 어깨를 ‘톡! 톡!’치며 “인제 그만 깨어나라”고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Q : 반구대 암각화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나.
A : “사람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거북이도 있다. 특히 고래가 많다. 그 당시에 이미 고래잡이를 했다는 기록이다. 고래를 잡는 그물도 그려져 있고, 고래를 가두는 목책도 그려져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이다.”
성파 스님 작품에는 고래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바닥도 모를 우주 공간을 색색의 고래가 헤엄친다. 원시의 순수가 7000년 만에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손으로 고래를 만졌더니 반질반질하면서도 딱딱하다. 알고 보니 전복 껍데기를 쪼개서 붙이는 나전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 위에 천연 색 염료를 녹인 옻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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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천정리 각석을 나전 기법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선사 시대의 그림 외에도 화랑의 이름 등 삼국시대에 가미된 그림과 글들이 새겨져 있다. 서운암 장경각 앞에서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물속에서 상설 전시된다.
Q : 왜 전복 껍데기를 이용한 나전 기법을 썼나.
A : “고려 시대의 나전칠기는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중국과 일본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나전으로 자개를 붙여서 그림으로 표현했다. 나전은 광산에서 캐는 보석이 아니라 물에서 캐는 보석이다. 물은 무르지만, 이건 굉장히 야물다. 어변성룡(魚變成龍)이라고 하지 않나. 물고기가 변해서 용이 된다. 나전은 물이 변해서 옥이 된 거다. 그러니 대단한 거지.”
Q : 작품의 배경은 왜 우주인가.
A : “불교에서는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우주라고도 한다. 이 우주에 삼라만상이 다 있지 않나. 요약하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거다. 반구대 암각화, 그 한장에 시ㆍ공간을 다 넣고자 했다. 그래서 우주 허공에 암각화 문양을 띄운 거다.”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는 조그만 풀장이 둘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풀장이 아니었다. 작품 전시 공간이었다. 풀장처럼 생긴 액자인 셈이다. 거기에 물을 가득 담고, 반구대 암각화 작품을 물속에 눕혀서 전시한다. 바로 옆에는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있는 울산 천정리 각석(3.3m×9.7m, 국보 제147호)을 나전으로 되살린 작품이 전시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회화의 수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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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은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나전은 무른 물에서 나온 여문 옥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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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는 풀장이 둘 있다. 사실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정리 각석 작품을 전시할 수중 액자다. 물을 가득 채운 뒤 두 작품을 눕혀서 전시한다. 24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Q : 왜 물속에서 전시하나.
A : “모든 것이 물에서 났다. 생명체도 처음에는 물에서 나왔다. 물이 아니면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댐을 막아 수위가 높아지자 물에 잠긴다, 안 잠긴다 논란이 많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마. 통째로 물에 담겨 있는 걸 함 봐라, 이거다. 하하”
Q : 물속에 넣으면 작품이 손상되지 않나.
A : “서양에는 옻칠이 없다. 동양에만 있다. 옛날에는 집안에 옻칠한 장롱 하나만 있어도 부자라고 했다. 옻칠은 천년이 흘러도 안 변한다. 물 속에 넣어도 변하지 않는다. 회화의 수중 전시는 이게 최초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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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이 맨발로 반구대 암각화 작품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다. 우주에 띄워진 그림의 색상이 선명하다.
Q : 그래도 뜻밖이다. 통도사 방장 스님이 손수 작품을 만드신다. 그것도 차원이 다르다. 누가 반구대 암각화를 우주에 띄울 생각을 하겠나. 세간의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다.
A : “아, 이게 이상하다고 하면 방장을 사람들이 잘못 뽑은 거지. 나는 방장 되기 전에도 내 멋대로 했고, 방장 되고 난 뒤에도 내 멋대로 가는 거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계속 내 멋대로 가는 거라.”
성파 스님이 늘 강조하는 슬로건이 하나 있다.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다. “‘일하며’가 먼저 온다. 일을 해야 공부를 할 수 있지, 일 안 하면 공부를 할 수 있나. 그래서 공부하며 또 일하는 거다. 그게 내 좌표다.” 그래서 성파 스님의 불교는 생산 불교다. 신자들에게 기대는 불교가 아니라, 신자들이 찾아오게 하는 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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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은 원래 색깔이 없다. 여기에 천연 염료를 녹여 넣어 옻칠을 한다. 옻칠한 삼베 위에 그려진 나전의 색색이 무척 아름답다. 성파 스님의 작품은 한반도에 깃들어 있는 고대사의 생생한 기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부산과 울산 등 전국에서 이미 유명해진 서운암의 들꽃축제와 시문학회, 전통방식으로 직접 담은 된장과 고추장 장독들, 옻칠로 되살린 우리나라 불화만 총 32종, 152점에 달한다. 이 모두가 성파 스님의 작품이다. 팔만대장경을 모두 650톤의 도자기로 구운 도자대장경, 천연염색, 옻칠 민화 등 끝도 없이 피어나는 생산 불교다.
성파 스님은 “진리의 이론만 알고 사물에 어두우면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격물치지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성파 스님은 “그 반대도 곤란하다. 사물에만 밝고 진리에 어두워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뿌리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둘이 달라 보이지만 서로 통한다. 진리도 굴리고 사물도 굴릴 때, 선사라도 대선사가 된다.”
마지막으로 성파 스님은 “새가 숲에 있을 때는 극락세계인 줄 모른다. 새장에 갇히면 ‘저 숲이 극락이구나’ 깨닫는다. 그러니 극락이 어디 있겠나.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이 극락세계다. 그걸 고통의 바다라고 착각하지 마라. 여기가 극락임을 알면 날마다 좋은 날이 펼쳐지고,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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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 스님이 우주 허공에 띄운 반구대 암각화. 고래와 거북,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가운데에 고래 잡는 그물과 목책이 보인다.
서운암 밖으로 나왔다. 세상이 푸르다. 성파 스님은 지금 여기가 극락이라 했다. 그러니 우주 허공이 따로 있을까. 7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 모두가 우주 허공을 헤엄치는 고래다. 이 극락의 주인공이다.
양산=글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 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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