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 오래 살기도 또한 어렵다. 세상에서 부처님 만나기 어렵고 부처님 법을 듣기도 어렵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해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칠불통게) 거룩한 삼보에 귀의하라. 그것은 가장 길하고 가장 으뜸 되나니 오직 홀로 그것만이 있어서 일체의 괴로움을 건널 수 있느니라.(법구경)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대로 진실만을 말하며 주고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편안과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 할때 과감히 행동하라 제 몸 위해 턱없이 악행하지 말고 핑계대어 정법을 어기지 말며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 내거나 질투하지 말라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 부려 만용 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며 지혜롭게 중도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모습이니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 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중도를 지켜라 벙어리 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임금처럼 위엄을 갖추고 구름처럼 한가로워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 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때와 처지를 살필 줄 알고 부귀와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이것이 지혜로운 불자의 삶이니라. (잡장경제4)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도는 안정에서 생기고 명은 화창에서 생기나니,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며, 허물은 경만에서 생기고, 죄는참지 못하는데서 생기느니라.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입을 조심하여 착한 말 바른 말 부드럽고 고운말을 언제나 할 것이며, 몸을 조심하여 나쁜 친구를 따르지 말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히 하라. 이익 없는 말을 실없이 하지 말고 내게 상관없는 일을 부질없이 시비치말라. 어른을 공경하고 덕있는 이를 받들며, 지혜로운 이 미거한 이를 밝게 분별하여 모르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라. 오는 것을 거절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내 몸 대우 없음에 바라지 말고 일이지나갔음에 원망하지 말라. 남을 손해하면 마침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재화가 따르느니라 불자여| 이글을 읽고 낱낱 깊이 새겨서 영원을 살아갈지어다.(법구경)
허술하게 지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양이 없는 마음에는 탐욕의 손길이 스며든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계율을 지키지 않고 방탕한 사람은 남의 소를 세고 있는 목자와 같아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계율은 감로(甘露)의 길이 되고 방일은 죽음의 길이 되나니 탐하지 않으면 죽지 않고 도(道)를 잃으면 스스로 죽게 된다.(법구경)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다루고 배 만드는 사람은 배를 다루며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지혜 있는 사람은 자신을 다룬다. 마치 저 큰 바위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뜻이 굳세어 비방과 칭찬에도 흔들림 없다.(법구경)
이 몸을 물거품 같다고 보면 모든 법은 스스로 허깨비일 것이요 악마의 꽃 화살을 꺾어 버리면 나고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몸이 병들면 곧 시드는 것은 마치 저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같고 죽음이 눈 앞에 닥치는 것은 폭포 물이 빨리 떨어지는 것 같다(법구경).
그 악이 아직 때가 되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받는다. 그러나 그 악이 때가 이르면 스스로 혹독한 죄를 받는다. 그 선이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禍)를 당한다. 그러나 그 선이 때가 이를 때에는 반드시 그 복을 받을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두려워하니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없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을 거울 삼아 죽이지 말고 때리지 말라. 살아있는 존재는 폭력을 두려워하고 모든 생명은 안락한 삶을 좋아한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을 거울 삼아 죽이지 말고 때리지 말라.(법구경)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웃으랴. 목숨은 언제나 불타고 있나니 그윽하고 어두움에 둘러싸여도 등불을 찾을 줄을 모르는구나
천하고 더러운 법 배우지 말라. 게으름 피우며 시간을 보내지 말라. 그릇된 소견을 따르지 말라. 세속의 근심 거리를 만들지 말라.
이 세상 모든 것 물거품 같고 사람의 마음은 아지랑이 같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사람은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 임금의 화려한 수레 같다고 이 세상을 그렇게 보라. (법구경)
모든 부처님 나오신 것 유쾌하고 바른 도의 설법이 유쾌하며 수행자들 모여 화합한 것 또한 유쾌하나니 화합하면 언제나 편안하느니라. 진리를 보아 마음이 깨끗하고 생사의 깊은 바다 이미 건너서 부처님 나셔서 세상 비춤은 중생의 모든 고통 건지시기 위함이다.(법구경)
뜨거움은 음욕보다 더한 것 없고 독하기는 성냄보다 더한 것 없다. 괴로움은 몸보다 더한 것 없고 즐거움은 열반보다 더한 것 없다.(법구경)
사랑하는 것에로 달려가지도 말고 미워하는 것을 두지도 말라. 사랑하는 것은 못보면 근심하고 미워하는 것은 보면 근심스럽다. 그러므로 사랑을 짓지 말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미움이 생기나니 이미 그 얽매임을 벗어난 사람 사랑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네 사랑하고 기뻐하는 데 근심이 생기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데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하거나 또 기뻐 할 것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법구경)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자나깨나 한 생각으로 부처님을 생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자나깨나 한 생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자나깨나 한 생각으로 부처님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무리를 생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자나깨나 한 생각으로 육신의 덧없음을 생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자나깨나 한 생각으로 자비를 생각하며 즐긴다.(법구경)
사람의 집에 어머니가 있어서 즐겁고 아버지 또한 계시면 더없이 기쁘다. 세상에 사문이 있어서 즐겁고 천하에 도가 있어 기쁘다. (법구경)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는 수행자는 이 세상(이승)과 저 세상(저승)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속으로 노려움을 모르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숫타니파아타)
모든 중생에 대하여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중생의 어느 하나도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두려고 원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발생한다. 사랑과 그리움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숫타니파아타)
마치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 다리듯이, 슬기로운 사람은 독립된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동반자와 함께 있으면, 몸을 쉬거나 일어서거나 걸어가거나 여행하는 데 언제나 참견하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숫타니파아타)
동반자와 함께 있으면 유희와 환락이 있고 자녀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진다. 사랑하는사람과 헤어지기 싫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지 말고, 무엇이든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온갖 고난을 견디며, 두려움을 갖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숫타니파아타)
실로 욕망은 화려하고 감미로우며 유쾌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교란시킨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런 우환이 있음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성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 하지 말고, 남의 덕을 덮어두지 말라. 혼탁과 미망을 버리고 세상에서 일체의 애착을 버린 자가 되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숫타니파아타)
여러 가지 맛에 탐닉하지 말고 욕구하지 말며, 남을 부양하지 말며 문전마다 결식하며 어느 집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숫타니파아타)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버리고, 집착의 매듭을 끊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 하지 말며,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숫타니파아타)
신앙은 내 씨앗이고,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쟁기이고, 부끄러운 마음은 쟁깃대며, 의지는 밧줄이고 사념은 내 쟁깃날과 고무래다. 나는 몸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는 일이 없다. 나는 진실을 김 매듯 가꾸고, 온유함은 내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숫타니파아타)
잠꾸러이기 이며 여럿이 모이는 것을 즐기며 애써서 노력하는 일이 없이 게으르고 곧잘 화내는 것을 능사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파멸에 이르는 문이다. 풍족하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늙고 쇠약하는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것이 파멸에 이르는 문이다.(숫타니파아타)
혈통을 자랑하고 재산을 자랑하며 가문을 자랑하되 자기의 친척을 경멸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파멸에 이르는 문이다. 주색에 빠지고 도박을 즐기며 얻는 대로 번번이 잃어 버리는 자가 있으니 이는 파멸에 이르는 문이다. 자기 아내에게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어울리며 남의 아내와 가까이하는 것은 파멸에 이르는 문이다.(숫타니파아타)
화를 잘 내며 원한을 품고, 흉악하여 남의 미덕을 덮어 버리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남을 술책하는 자--이는 천한 자임을 알라.(숫타니파아타)
한번 태어나는 것이나 두 번 태어나는 것을 막론하고, 생명있는 것을 해치고 이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을 갖지 않는 자 이는 천한 자임을 알라. 폭력을 사용하거나, 서로 사랑하여 친척이나 친구의 아내를 가까이 하는 자 이는 천한 자임을 알라.(숫타니파아타)
상대방이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물었을 때 해로운 것을 가르치며 거짓말을 하는 자 이는 천한 자임을 알라. 악한 일을 하고도 내가 한 일을 아무도 몰라 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속임수가 있는 자 이는 천한 자임을 알라.(숫타니파아타)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경멸하여, 자만심으로 비굴해 진 자 이는 천한 자임을 알라. 날 때부터 천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날 때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한 자도 되며, 행위에 의해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숫타니파아타)
어떤 생물이든, 즉 겁이 많은 것이든 담이 큰 것이든 또 덩치가 길든 크든 짧든 중간쯤 되든, 그리고 섬세하게 생겼든 육중하게 생겼든.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다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지키듯 일체 중생에 대하여 무한한 자비심을 베풀라.(숫타니파아타)
이 세상에서 신앙은 인간에게 가장 큰 재산이다. 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온다. 실로 진실은 맛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맛이다.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훌륭한 생활이다.
이미 일어난 번뇌의 싹은 잘라 버리고 이를 다시 심는 일이 없으며, 또 현재 일어나는 것을 키워 나가지 않고 혼자서 걸어가는 자를 성자라 한다. 저 위대한 선인은 평안의 경지를 본 것이다.(숫타니파아타)
생물을 죽이는 것, 그리고 때리고 자르며 결박하는 것,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하는 것, 속이는 것, 그릇된 것을 배우고 남의 아내를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이 비린 것이다. 육식은 그렇지 않다.(숫타니파아타)
성내고, 교만하며, 고집 세고, 반항심.거짓.질투.허풍, 극단의 오만함, 불량배와의 사귐 이것이 비린 것이다. 육식은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자들과 친하지 말고, 현자 와 가까이 하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받드는 것 이것이 최상의 복이니라.(숫타니파아타)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며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복이니라. 악을 싫어해서 멀리하며 술을 금하고 덕행에 소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최상의 복이니라.(숫타니파아타)
탐욕과 혐오는 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 즐거움과 고통과 소름 끼치는 일들도 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 갖가지 망상도 자신으로부터 일어나 마음을 방황케 한다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놓아 보내듯이.(숫타니파아타)
일어나라. 그리고 단정히 앉아 선을 행하라. 잠만 자면 그대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화살에 맞아 고뇌 속에 있는 자들이 잠에 빠지다니. 일어나라. 그리고 단정히 앉아 선을 행하라.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오직 배우라.(숫타니파아타)
죽음의 왕은 그대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힘에 굴복한 것을 알고 있다. 그대를 미혹에 빠지게 하지 말라.(숫타니파아타)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화엄경)
신심은 도의 근본이고 공덕의 어머니라 모든 선한 법을 길러내며 의심의 그물 끊고 애정 벗어나 열반의 위없는 도 열어 보이도다.(화엄경)
믿음은 썩지 않은 공덕의 종자 믿음은 보리수를 생장케 하며 믿음은 수승한 지혜 증장케 하고 믿음은 온갖 부처 시현하도다.(화엄경)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有心造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모든 것 오직 마음이 지어냄이로다.(화엄경)
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難妄想及諸取 令心所向皆無碍만약 부처경계 알고자 하면 그 뜻을 맑히기 허공과 같이하라 망상과 모든 집착 멀리 여의고 마음의 향하는 바가 걸림 없도록 하라.(화엄경)
刹塵心念可數知 大海中水可飮盡 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 사바세계 모든 먼지 몇개 인가 센다 해도 큰 바다 모든 물을 남김 없이 마시어도 허공의 무게 재고 바람 묶는 재주라도 부처님의 크신 공덕 말로하지 못하리라.(화엄경)
應修十種廣大行願이니 何等 爲十고 一者는 禮敬諸佛 二者는 稱讚如來 三者는 廣修供養이요 四者는 懺悔業障이요 五者는 隨喜功德이요 六者는請轉法輪이요 七者는 請佛住世요 八者는 常隨佛學이요 九者는恒順衆生이요 十者는 普皆廻向이니라.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요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요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요 아홉째는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요 열째는 지은 바 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니라.(화엄경)
부처님 세존들은 다만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때문이다. 부처님 세존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는[示]연고로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는[俉]연고로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도에 들게 하려는[入]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법화경)
여래는 다만 일불승(一佛乘)만을 위하여 중생들에게 말 하는 것이지 다른 이승(二乘)이나 삼승(三乘)은 없느니라 사리불아 모든 시방 세계 여러 부처님의 법도 역시 그러하니라.(법화경)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億阿僧祗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법화경)
수행자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을 이익되게 하면 나아가 모든 생명 을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다.(유마경)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어떠한 잘못도 용서해 줄수 있는 넓은 마음(四無量心)이 가득찬 세상이 보살이 추구하는 이상세계이다.
이미 생긴 나쁜 것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없애고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쁜 것은 생기지 않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 한 것은 생기게 하며 이미 생긴 착한 것은 더욱 더 성 하도록 노력하는 이러한 마음이 가득찬 세상이 보살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이다.(유마경)
若菩薩 欲得淨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則佛土淨 보살이 이상 세계를 실현하려면 먼저 그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마음이 깨끗하면 우주는 저절로 깨끗해지고 그 속에서 이상 세계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루어진다.(유마경)
무명으로부터 애착이 생겨서 이 몸에 병이 난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병이 들었으므로 나도 병이 들었으니 만일 일체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내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유마경)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 죄악은 본래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을 비울 때 죄악 또한 사라지네. 죄악도 마음도 모두 다 사라지면 이것을 진실로 참회라 이름하네. (천수경)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을 지닌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금강경중 제일 사구게)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결코 색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되며 결코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것 이며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금강경중 제2 사구게)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그 까닭은 아상이 곧 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금강경 중에서)」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應生無所住心 마땅히 색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어서도 안된다. 마땅히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금강경중에서)
須菩提 如來 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이 법은 실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금강경 중에서)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법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보살이 법에 머무르는 마음없이 보시하면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밝은 햇빛 아래서 모든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금강경)
須菩提 如來所得阿褥多羅三邈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수보리야, 부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는 실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이 다 불법>이라고 여래가 설하는 것이니라.(금강경 중에서)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했다면 여래는 <이야말로 진실한 보살> 이라고 일컬을 것이다.(금강경 중에서)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수보리야, 왜 그러냐 하면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금강경 중에서)」
爾時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러자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만약 형상을 통해 나를 보거나 음성을 통해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가질 뿐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리라.(금강경중 3 사구게)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 不解我 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혹은 온다, 간다, 앉는다,눕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본래 여래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며,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래라 일컫는 것이니라.(금강경중에서)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그러면 남들을 위해 어떻게 설할 것인가?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본래 모습 그대로 흔들리지 말지니라. 일체의 현상계는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같고, 번개불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금강경중 4 사구게)
善男子 若有無量百千萬億衆生 受諸苦惱 聞是觀世音菩薩 一心稱名 觀世音菩薩 卽時 觀其音聲 皆得解脫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곧 그 음성을 관찰하고 다 해탈케 하느니라.(관음경중에서)
是觀世音菩薩摩訶薩 於怖畏急難之中 能施無畏 是故 此娑婆世界皆號之 爲施無畏者 관세음보살마하살은 무섭고 급한 재난가운데서도 두려움을 없게 하나니 그러므로 사바세계에서 모두 그를 이름하여 두려움을 없애주는 분이라 하느니라(관음경중에서).
衆生被困厄 無量苦逼身 觀音妙智力 能救世間苦 중생들이 곤액과 핍박을 받아 한량없는 괴로움 닥치더라도 관세음의 기묘한 지혜의 힘이 세간의 모든 고통 구하여 주네.(관음경중에서)
具足神通力 廣修智方便 十方諸國土 無刹不現身 種種諸惡趣 地獄鬼畜生 生老病死苦 以漸悉令滅 신통하고 묘한 힘 두루 갖추고 지혜의 여러 방편 널리 닦아서 시방의 모든 세계 어디서든지 갖가지 몸 나투지 않는데 없어 가지가지 험하고 나쁜 갈래인 지옥과 아귀 축생들까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차츰차츰 모두다 없애버리네(관음경중에서)
妙音觀世音 梵音海潮音 勝彼世間音 是故須常念 念念勿生疑 觀世音淨聖 於苦惱死厄 能爲作依好 具一切功德 慈眼視衆生 福聚海無量 是故應頂禮 미묘한 음성이신 관세음보살 범천왕의 음성 과 조수의 음성 세간의 음성보다 뛰어나시니 갈수록 사무침이 더해만 가네 거룩하고 청정하신 관세음보살 중생들은 조금도 의심치 말고 세상사 고뇌속의 등대이시니 능히믿고 의지할 어버이시네. 여러 가지 공덕을 다 갖추시고 자비한 눈길로 중생을 보시며 중생의 원함따라 복덕 주시니 그 공덕 한량없어 예배합니다.(관음경중에서)
舍利弗彼土 何故 名爲極樂 其國衆生 無有衆苦 但受諸樂 故名極樂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간 곳에 극락 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저 세계를 어째서 극락이라 하는 줄 아는가? 거기에 있는 중생들은 아무 괴로움도 없이 즐거운 일만 있으므로 극락이라 하는 것이다.(아미타경중에서)
舍利弗 於汝薏云何 彼佛 何故 號阿彌陀 舍利弗 彼佛光明 無量 照十方國 無所障碍 是故 號爲阿彌陀 又舍利弗 彼佛壽命 及其人民 無量無邊阿僧祗劫 故名阿彌陀 아미타불 부처님의 광명이 한량없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인민의 수명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므로 아미타불이라 한다.(아미타경중에서)
마하리쉬 : 둘 다 결국은 같은 것이 됩니다. 탐구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명상을 해야 합니다. 명상에서는 수행자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나는 브라만이다'나 '나는 쉬바다'(I am Siva)를 명상하며, 이렇게 브라만이나 쉬바를 계속 착파하는 것입니다. 결국 브라만 또는 쉬바로서의 존재(being)가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이것이 순수 존재, 즉 진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기탐구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착파하는 것으로써 시작하며,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음으로써 진아가 그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존재-의식-지복으로서 빛을 발하는, 지고의 실재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마음을 진아 안에 고정하여 비실재적인 망상의 씨앗이 사멸되도록 하는 것이 탐구입니다. 누가 어떤 보심保心(bhava)[마음에 그리는 모습]으로써 진아를 명상하든지 그 모습으로만 진아에 도달합니다. 그런 보심 없이 고요히 안주하는 평온한 사람들은, 드높고 온전한 독존獨存(kaivalya)의 상태, 즉 형상 없는 진아의 상태(formless state of the Self)에 도달합니다.
질문자 : 명상과 자기탐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명상은 외부적인 대상이나 기타 어떤 대상에 대해서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 다릅니다. 자기탐구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같은 자기(진아)입니다.
명상은 에고가 유지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즉, 에고가 있고 명상하는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간접적입니다.1) 반면에 진아(자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고의 근원(ego-source)을 파고들게 되면, 이 에고는 사라지고 진아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1) 이 방법이 간접적이라는 것은 나중에 다시 에고를 소멸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질문자 : 명상이 탐구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진리를 (직접) 착파하는 데 반해, 후자는 비진리로부터 진리를 걸러내기 때문입니다.
마하리쉬 : 초심자에게는 어떤 형상에 대한 명상이 더 쉽고 편합니다. 그렇게 수행해 가다 보면, 비실재로부터 실재를 걸러내는 방식인 자기탐구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대가 모순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진리(실재)를 착파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자기탐구는, 그대로 하여금 진아가 아직 깨달아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해 줌으로써,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불초(不肖)하고 어리석으며 낮고 평범한 중 실현(實賢: 진실로 현명하다는 뜻의 법명)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마를 조아려 눈앞의 대중과 현세의 모든 정신남(淨信男: 淸信男·우바새)·정신녀(淨信女: 淸信女·우바이)들께 구슬피 말씀드립니다. 오직 자비로이 조금만 귀 기울여 듣고 살펴 주시길 원합니다.
일찍이 듣잡건대, 도(道: 진리)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은 마음을 내는 것[發心]이 으뜸이고, 수행에 시급한 일은 서원을 세우는 것[立願]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서원이 서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며, 마음이 나면 부처님의 도[佛道]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커다란 마음을 내지 않고 견고한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설령 우주의 모든 티끌 수만큼의 겁(劫)이 지나더라도 여전히 생사 륜회를 헤매며, 비록 제 아무리 수행에 정진할지라도 결국 보람 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보리심(菩提心)63)을 잊거나 잃어버리면, 온갖 착한 법[善法]을 닦아도 악마의 업[魔業]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보리심: 보리(菩提)는 도(道) 또는 깨달음[覺]으로 번역되는데, 진실한 도를 구하는 마음 또는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구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다.]
잊거나 잃어버려도 오히려 그와 같거늘, 하물며 보리심을 아예 내지도 않은 경우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여래승(如來乘: 佛乘)64)을 배우려면, 반드시 먼저 보살의 서원을 지체 없이 발해야 합니다.
[여래승(如來乘): 보통 불승(佛乘)이라 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화엄경』에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도를 설한 교법(敎法)으로, 유일한 성불의 법이기에 유일승(唯一乘)이라고도 한다. 또 삼승(三乘) 가운데, 보살승을 성문승 및 연각(벽지불)승에 대해 불승으로 일컫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과 서원은 서로 차별이 있고, 그 모습이 다양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가리켜 알려 주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로 향하여 나아가겠습니까? 이제 대중들을 위해 대략 말씀드릴까 합니다.
마음과 서원의 모습에는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삿되고[邪] 올바른[正] 것, 진실하고[眞] 거짓된[僞] 것, 크고[大] 작은[小] 것, 편협하고[偏] 원만한[圓] 것이 그것입니다. 삿되고 올바르며, 진실하고 거짓되며, 크고 작으며, 편협하고 원만하다는 명칭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自心]은 참구하지 않고 단지 바깥 일에만 정신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러는 이익이나 공양 얻기만 구하고, 더러는 명성이나 평판을 좋아하며, 더러는 현세의 욕망과 쾌락에 탐착하고, 더러는 미래(세)의 좋은 과보(果報)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면 삿된 발심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이익이나 공양이나 명성이나 평판을 전혀 구하지 않고, 또 현세의 욕망·쾌락이나 미래의 과보에도 탐착하지 않으며, 오직 생사(生死) 해탈을 위해서, 보리(菩提: 道·깨달음)를 위해서 마음을 내어야, 올바른 발심이 됩니다.
생각생각마다 위로 불도(佛道)를 추구하고, 마음마음마다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불도(부처님 길)가 멀고 험한 줄 듣고도 겁내어 물러서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기가 정말 힘든 줄 보고서도 싫증이나 짜증을 내지 않으며, 마치 만 길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반드시 정상을 밟고야 말고, 구 층 가파른 탑을 오르는 것처럼 기필코 꼭대기에 올라서겠다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진실한 발심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죄악이 있어도 참회할 줄 모르고, 허물이 있어도 제거하지 않으며, 속으로는 혼탁하면서도 겉으로는 청정한 척하고, 처음에는 부지런 떨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지며, 설사 좋은 마음을 품더라도 대부분 명예나 이익을 꾀하는 불순한 생각에 뒤섞이고, 비록 선량한 법이 있더라도 흔히 죄악과 업장에 오염되기 일쑤인 사람이 많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면 거짓 발심이라고 합니다.
중생계(衆生界)가 다해야 바야흐로 내 서원이 다하고, 보리도(菩提道)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내 서원이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마음을 내어야 정말 큰 발심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견고한 감옥과 같은 줄 알고, 생사 륜회를 악독스런 원수처럼 여기면서, 단지 자기만 해탈하길 꾀하고 남을 제도하려고 하지 않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면 작은 발심이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 밖에 따로 중생과 불도가 있는 걸로 보고, 그 중생을 제도하고 그 불도를 이루려고 발원하면서, 그 공덕을 잊지 못하고 알음알이 지견(知見)이 스러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발심은 편협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만약 자기 성품[自性]이 중생인 줄 알고 제도·해탈시키길 발원하며, 또 그 자기 성품이 바로 불도인 줄로 알아 성취하길 발원하면서, 어떠한 한 법도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있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허공 같은 마음으로 허공 같은 서원을 발하고 허공 같은 수행을 행하여 허공 같은 과보를 증득(證得)하면서도, 또한 허공이라는 모습조차 얻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이와 같은 발심이 바로 원만한 것입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 차별을 알아야 잘 살펴볼[審察] 줄 아는 것이고, 잘 살펴볼 줄 알아야 제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 제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음을 낼[發心] 수 있습니다.
잘 살펴본다[審察] 함은, 내가 내는 마음이 이상의 여덟 가지 가운데, 삿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진실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편협한 것인지 원만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또 취사선택이라 함은, 삿되고 거짓되고 작고 편협한 마음을 내버리고, 올바르고 진실되고 크고 원만한 마음을 내세우는 걸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만, 비로소 진정(眞正) 보리심을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보리심은 모든 선(善) 중의 왕인지라, 반드시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바야흐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인연을 대략 열 가지로 추려 볼까 합니다. 어떻게 열 가지가 되는가 하면,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스승과 웃어른[師長]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시주(施主)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중생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고, 여섯째는 생사 륜회의 고통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자기의 영혼[己靈]을 존중하기 때문이고, 여덟째는 죄악 업장을 참회하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구하기 때문이고, 열째는 정법(正法)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있길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우리 석가모니여래께서 맨 처음 보리심을 내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보살도를 행하면서 무량겁에 걸쳐 온갖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업을 지을 때, 부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슬퍼하며 온갖 방편으로 교화하셨건만, 우리가 멍청하고 어리석어 그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일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면, 부처님께서는 더욱 비통(悲痛)한 마음으로 우리의 고통을 대신 받고자 하셨으나, 우리의 죄업이 하도 크고 무거워 도대체 건져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인간 세상[人道]에 태어나자, 부처님께서는 방편 법문으로 우리에게 착한 뿌리[善根]를 심도록 이끄시면서, 세세생생에 걸쳐 우리 곁을 따라다니며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세상에 나셨을 때는, 우리가 아직 악도(惡道)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친견할 수 없었고, 이제 우리가 다행히 인간 몸을 받고 태어나자 부처님께서는 이미 녈반에 드시어 또 친견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죄악으로 말법(末法)시대에 태어나고, 그나마 무슨 복덕으로 출가 수행자[부처님 정법을 듣고서 믿는 불자]가 되었겠습니까? 또 무슨 업장으로 부처님의 황금 신체[金身]를 친견하지 못하고, 그나마 무슨 행운으로 부처님 사리(舍利)나마 몸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유해 본다면, 가령 우리가 당초 착한 뿌리를 전혀 심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부처님 법을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우리가 항상 부처님 은혜를 받고 있는 줄 알기나 하겠습니까? 이러한 은혜와 공덕은 태산으로도 비유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스스로 커다란 마음을 내고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님 법을 우뚝 세우고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면, 설사 몸을 부수고 뼈를 빻을지라도, 그 은혜와 공덕을 어떻게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첫 번째 인연입니다.
둘째 ,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애처롭고 구슬프신 부모님께서 우리를 낳아 기르신 노고가 어찌 한량 있겠습니까? 열 달을 임신하고 삼 년을 젖 먹이시며, 젖은 자리 걷어 내고 마른 옷을 갈아 입히며, 쓴 것은 당신께서 삼키시고 단 것을 뱉어 우리 입에 넣어 주시어, 가까스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기대한 유일한 희망은, 집안의 대를 잘 이어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어 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미 출가하여, 외람되이 석자(釋子: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라고 일컬으면서 사문(沙門)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공양 올리지도 못하고, 제사와 성묘도 하지 못합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는 입(음식)과 옥체(의복)도 봉양할 수 없는데, 돌아가신 뒤에 정신 영혼[神靈]마저 좋은 데로 인도할 수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세간의 윤리를 크게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출세간(출가)의 도덕에도 전혀 실질 이익이 없게 될 터이니, 두 길 모두 잃고 맙니다. 그 무거운 죄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유해 본다면, 오직 백겁(百劫) 천생(千生) 동안 항상 부처님 도를 수행하며, 시방 삼세의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금생 한 번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과거 모든 전생의 부모님들이 다 함께 제도 받을 수 있으며, 또 단지 나 한 사람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부모님들이 죄다 좋은 곳에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두 번째 인연입니다.
셋째, 스승과 웃어른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부모님께서 비록 우리 몸을 낳아 길러 주셨지만, 만약 세간의 스승과 웃어른이 안 계셨더라면 예의(禮義)를 몰랐을 것이며, 출세간의 스승과 웃어른이 아니었다면 부처님 법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의를 모르면 짐승과 같게 되며, 부처님 법을 알지 못하면 세속 사람들과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거칠게나마 예의를 알고, 간략하게나마 부처님 법을 이해하여, 가사(袈裟)를 몸에 걸치고 계품(戒品)을 받아 지녔습니다. 이러한 크나큰 은혜는 모두 스승과 웃어른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만약 조그만 과위(果位)를 추구한다면, 단지 자신만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승(大乘)을 지향하여 모든 사람들을 두루 이롭게 하려고 발원하면, 세간과 출세간의 두 종류 스승과 웃어른들이 다 함께 그 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세 번째 인연입니다.
넷째, 시주(施主)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매일같이 쓰는 온갖 물자와 비용은 하나도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아침 점심 두 끼니의 죽과 밥은 말할 것도 없고, 사계절의 의복이나 질병에 필요한 의약이나 몸과 입에 들어가는 것 등, 이 모두가 남들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가 얻어다 쓰고 있습니다. 저들은 뼈빠지게 힘을 다해 농사 짓고도 오히려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데, 우리는 편안히 앉아서 받아 먹고 있으면서 도리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립니다. 저들은 쉴새없이 베를 짜면서도 오히려 옷을 제대로 못 입어 헐벗기 일쑤인데, 우리는 넉넉히 남아돌 만큼 따뜻하게 입으면서 도리어 아낄 줄도 모릅니다. 저들은 사립문에 초가지붕 밑에서 한평생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널찍한 방사(房舍)에서 일년 내내 한가롭고 여유롭게 지냅니다.
저들의 수고로움으로 우리의 안락함이 얻어지는데,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남들의 이익을 가져다가 우리 몸을 윤택하게 공양하니, 리치에 순조롭겠습니까? 스스로 자비와 지혜를 함께 나란히 운용하고 복덕과 지혜를 장엄하게 갖추지는 못하고서, 단지 시주의 신심 있는 은혜를 입고 중생들의 공양을 받기만 한다면, 쌀 한 톨이나 실 한 올도 모두 되돌려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마니, 죄악의 과보를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네 번째 인연입니다.
다섯째, 중생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나와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세부터 대대로 매 생애마다 서로 부모 자식이 되어 왔기에, 피차간에 은정(恩情)이 두텁습니다. 지금은 비록 전생(前生)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혼미를 거듭하기 때문에 서로 잘 알아 보지 못하지만, 리치로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어찌 그 은혜를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이 달린 짐승들이 예전에 우리 자녀가 아니었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꿈틀꿈틀 기어다니고 파닥파닥 날아다니는 곤충들이 일찍이 우리 부모님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어릴 때 부모 곁을 떠난 사람들을 보면, 커서는 부모님의 얼굴 모습조차 깡그리 잊고 마는 자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숙세의 친족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지금 김씨인지 이씨인지 기억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한 숙세의 친족들이 지금 지옥 속에서 울부짖거나 아귀(餓鬼) 가운데 나뒹군다고 해도, 그 고통을 누가 알아 주며, 그 굶주림을 어디에 하소연하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그 모습을 못 보고 그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할지라도, 저들은 틀림없이 건져 주고 구제해 주길 애타게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경전이 아니면 이런 사실을 기술할 수도 없거니와, 부처님이 아니시면 이런 말씀을 설하실 수도 없습니다. 다른 온갖 사견(邪見)에 빠진 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개미를 보더라도, 모두 과거의 부모님이자 미래의 부처님으로 여기면서, 항상 그들을 이롭고 유익하게 도와주어 그 은혜에 보답하기만을 생각한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다섯 번째 인연입니다.
여섯째, 생사 륜회의 고통을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나와 중생은 모두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세부터 항상 생사 륜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천상, 이 세계와 저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향상과 타락을 반복해 왔습니다. 금방 천상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새 지옥·축생·아귀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암흑의 문[黑門]을 아침에 나섰다가 다시 저녁에 되돌아 들어가기도 하고, 철벽의 굴[鐵窟]을 잠시 떠났다가 또 끌려 들어가기도 합니다. 칼날의 산[刀山]에 오르면 온몸에 성한 살갗이 하나도 없고, 칼날의 나무[劍樹]를 타다 보면 한 치의 살점도 성한 데 없이 베이어 갈라집니다. 달군 쇠[熱鐵]는 굶주림을 채워 주지도 못하면서, 삼키면 오장륙부가 다 문드러지고; 끓는 구리쇳물[吻銅]은 목마름을 풀어 주지는 못하면서, 마시면 살과 뼈까지 모두 녹아 버립니다.
날카로운 톱이 쓸고 가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고, 교묘한 바람이 불고 지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는 성(城) 안에서 새어 나오는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차마 들어야 하고, 지지고 볶는 가마솥 안에서 흘러 나오는 오직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얼음이 막 얼어 엉길 때면, 그 모습이 마치 청련(靑蓮)의 꽃봉오리가 벙그는 듯하며;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 나올 때면, 그 몸은 마치 붉은 련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죽었다 살아나는 게 지하에서는 매양 만 번을 되풀이하고, 하루아침 고통 속에 시달려도 인간 세상에서는 이미 백 년이 훌쩍 지나고 맙니다.
번번이 옥졸(獄卒)을 귀찮고 피로하게 만들면서도, 누가 염라대왕의 훈계와 경고를 믿을 것입니까? 지옥에서 벌을 받을 때면 고통스러운 줄 알지만, 아무리 후회하고 한탄해도 어떻게 되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지옥을 벗어나면 곧장 도로 잊기 일쑤이니, 또 다시 죄업을 짓기가 예전과 다름없고 맙니다.
당나귀를 채찍질하여 피가 흥건히 흐른다 해도, 누가 우리 어머니의 비참한 모습인 줄 알겠으며; 돼지를 끌어당겨 도살장에 들어가면서도, 어떻게 그대 아버지의 고통스런 마음일랑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을 먹으면서도 자식인 줄 모른 것은 문왕(文王) 같은 성인도 그러했거늘, 부모인 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다 그러합니다.
그 당시 은혜와 애정을 주고받았던 사이가 지금은 원수 집안을 맺기 일쑤이고, 옛날 원수 척졌던 관계가 지금은 혈육을 나눈 친족이 되기 십상입니다. 옛날 어머니였던 분이 지금 아내가 되기도 하고, 예전에 시아버지였던 분이 지금 남편이 되기도 합니다. 숙명통(宿命通)으로 안다면 정말 낯뜨겁고 부끄러운 짓이며, 천안(天眼)으로 본다면 진짜 우스꽝스럽고 불쌍한 꼴입니다.
더러운 똥오줌 무더기 속에서 열 달간 갇혀 지내기도 정말 어렵지만, 피고름 뒤범벅된 통로에서 한 순간에 거꾸로 빠져 나오는 것도 진짜 불쌍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동쪽과 서쪽도 구분 못하는데 무얼 알겠습니까? 커서 철이 들기 시작하면 곧장 탐욕이 생겨나고, 그러다가 잠깐 사이에 늙음과 질병이 잇달아 찾아오며,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덧없음[無常; 죽음]이 닥쳐 옵니다.
바람[風: 寒氣]과 불[火: 熱氣]이 번갈아 볶아대면, 그 가운데 우리 신식(神識: 정신, 영혼)은 무너져 내려 어지러워지고, 정기(精氣)와 피(血)가 밭아 가면 피부와 살이 안팎에서 바싹 메말라 붙습니다. 그러면 어느 터럭 하나 바늘로 찌르는 듯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구멍 하나 칼날로 도려내는 듯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거북을 삶아 요리할 때 그 등가죽을 산 채로 벗기기는 오히려 쉬워도, 우리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 그 신식(神識)이 몸을 떠나가기는 그보다 배 이상 어렵답니다.
마음은 항상스런 주체가 없는지라 장사꾼처럼 도처에 분주히 나돌아다니고, 몸은 일정한 형상이 없는지라 집이나 방처럼 빈번히 옮겨 다닙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티끌 수로도 우리가 그렇게 들락날락 옮겨 다닌 몸을 다 헤아리기 어려우며, 사해(四海)의 바닷물로도 우리가 그렇게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을 셈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랗게 쌓인 뼈 무더기는 태산보다 훨씬 높고, 사방 천지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대지(大地)보다 훨씬 많습니다.
가령 우리가 애당초 부처님 말씀을 못 들었다면, 이러한 사실을 누가 보고 누가 들을 수 있으며; 또 부처님 경전을 보지 않았다면, 이러한 리치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여전히 탐욕에 연연하며 예전처럼 어리석음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직 천만겁의 생애가 지나도록 한 번 잘못이 천만 번 잘못으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사람 몸은 받기는 어려우면서도 잃기는 매우 쉬우며, 좋은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려 뒤쫓을 수가 없습니다. 갈 길은 아득하고 어둑어둑한데, 이별은 끝도 없이 길기만 합니다. 삼악도(三惡道: 지옥·아귀·축생)의 고통스런 과보가 자신에게 닥치면 스스로 받아야 하는데, 그토록 말할 수 없이 엄청난 고통을 누가 대신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하는데도, 마음이 오싹 춥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까?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생사 륜회의 흐름을 끊어 버리고 애욕(愛欲)의 바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남들을 다 함께 건져 내어 피안(彼岸: 녈반 언덕)에 나란히 올라가야 합니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 이래로 가장 큰 특별한 공훈이 바로 이 한 가지 수행에 있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여섯 번째 인연입니다.
일곱째, 자기 영혼을 존중함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현재 한 마음[一心]도 지금 있는 그대로 석가여래와 전혀 둘이 아니고 다름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석가세존(世尊)께서는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일찌감치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셨으며,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뒤죽박죽 혼미(昏迷)를 거듭하는 평범한 중생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또 부처님 세존께서는 무한한 신통력과 지혜를 두루 갖추어 공덕이 장엄하신데, 우리는 단지 무한한 업장과 번뇌에 사로잡히고 생사 륜회에 얽매여 옴짝달싹도 못합니다.
마음과 성품[心性]은 부처님과 우리 중생이 하나로되, 미혹과 깨달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러니 차분히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값으로 칠 수 없는[無價] 보배로운 구슬이 진흙탕 속에 묻혀 있어, 마치 흔한 자갈처럼 여기고 전혀 애지중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한량없이 많은 착한 방법[善法]으로 번뇌망상을 마주 대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후천적인 수행의 덕[修德]의 공부가 쌓여야, 선천적인 성품의 덕[性德]이 비로소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진흙탕 속에 묻혀 있던 보배로운 구슬을 건져 깨끗이 씻은 다음 높다란 깃대 위에 걸어 놓으면, 그 눈부신 광명이 찬란히 빛나며 모든 사물을 뒤덮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가 헛되지 않고, 자기 영혼도 저버리지 않는 게 됩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일곱 번째 인연입니다.
여덟째, 업장(業障)을 참회(懺悔)함은 이렇습니다.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한 길라(吉羅)65)를 범해도 사천왕(四天王) 수명으로 5백 년 동안 지옥(地獄)66)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길라(吉羅): 돌길라(突吉羅)의 준말로, 계률을 범하는 죄·나쁜 짓·나쁜 말을 가리킴]
[지옥(地獄): ‘니리(泥梨)’의 번역으로, 즐거움이 전혀 없다, 갈 곳이 없다는 뜻이라고 함.]
한 길라 같은 자그만 죄도 오히려 이처럼 엄청난 악보(惡報)를 받거늘, 하물며 무거운 죄의 과보는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 하는 말 한 마디나 몸짓 하나도 늘상 계률에 어긋나고, 또 밥 한 숟갈 물 한 모금도 모두 빈번히 시라(尸羅)67)를 범하고 있습니다.
[시라(尸羅): ‘청량(淸凉)’ 또는 ‘계(戒)’로 번역되며, 몸·입·뜻으로 지은 잘못 때문에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을 막아 시원히 식혀 준다는 뜻이라고 함.]
하루 동안 범하는 계률만으로도 그 죄악 한량없이 많을 것인데, 하물며 종신토록 지은 죄와 무량겁 동안 전생에 쌓아온 업장은 더욱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가불자의 기본 오계(五戒)로만 말해도, 열 사람 가운데 아홉은 계률을 범하고, 또 잘못을 드러내는 이는 적고 감추는 자가 훨씬 많습니다. 오계는 우바새(優婆塞)의 계률로 두루 갖춰진 것[具足]이 아닙니다. 하물며 사미(沙彌)나 비구(比丘)나 보살(菩薩) 등의 계률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름(신분)을 물으면, ‘나는 비구다’라고 자부심을 갖고 말하는데, 실질(수행)을 물으면 오히려 우바새에도 턱없이 못 미치곤 합니다. 그러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계률은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받으면 깨뜨리거나 어김이 없이 단단히 지녀야 합니다. 또 받은 계률은 깨뜨리거나 어김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깨뜨리거나 어기면 끝내는 틀림없이 (나쁜 곳에) 타락하고 맙니다.
그러니 마땅히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남들도 불쌍히 여기며, 자신을 마음 아파하고 남들도 마음 아파하며, 입으로나 몸으로나 다 함께 간절하게 소리도 내고 눈물도 흘리면서, 모든 중생과 두루 함께 애처롭게 참회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천만 겁의 생애가 지나도록 죄악의 과보를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여덟 번째 인연입니다.
아홉째,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구함(발원함)은 이렇습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수행함에도 도(道)에 정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 극락정토에 왕생하면 부처님 되기가 진짜 쉽습니다. 거기에서는 부처 되기도 쉽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생애에 뜻을 이룰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정진하기도 어려운 까닭에 오랜 겁토록 도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보다 앞서 오신 성현들께서 누구나 한결같이 극락정토를 향해 가셨으며,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설(論說)이 모두 다 도처에서 극락 왕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세(末世)의 수행으로는 이보다 나은 법문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경전(佛說阿彌陀經)에 보면, 적은 선행 가지고는 왕생하지 못하고, 많은 복덕을 갖추어야 비로소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복덕으로 말하자면 ‘나무 아미타불’의 거룩한 명호를 꽉 지니고 염송하는 것보다 뛰어난 게 없으며, 많은 선행으로 말하자면 넓고 큰 마음[廣大心]을 내는 것보다 훌륭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이나마 ‘나무 아미타불’의 거룩한 명호를 지니고 염송하는 것이 백 년 동안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한 번 큰 마음을 내는 것이 오랜 겁 동안 수행하는 것을 크게 앞지릅니다.
무릇 념불(念佛)이란 본디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큰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비록 입으로 념불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마음을 내는 것[發心]은 원래 수행하기 위함인데,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않는다면, 비록 큰 마음을 낸다 하더라도 쉽게 물러나고 맙니다.
그러한즉, 보리(심)의 씨앗을 뿌린 뒤 념불이라는 보습으로 가꾸어 주면, 도의 열매[道果]가 자연스럽게 저절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여기다 큰 원력의 배[大願船]에 올라 타 정토 법문의 바다에 들어간다면, 서방 극락세계는 틀림없이 왕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아홉 번째 인연입니다.
열째, 정법(正法: 진리)이 오래 머물도록 함은 이렇습니다.
우리 세존께서 무량겁 이래로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보리도(菩提道)를 닦으시면서, 수행하기 어려운 걸 능히 수행하시고 참기 어려운 걸 능히 참으시어, 원인 자리와 과보 지위를 다 함께 원만히 갖추심으로써, 마침내 도를 이루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되신 다음 인연 있는 중생들을 두루 다 교화하시고 나서 녈반에 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법(正法)·상법(像法)은 모두 이미 다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겨우 말법(末法)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68)
[정법(正法)은, 비록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부처님 당시처럼 가르침[敎]과 수행[行]이 이루어져 과위(果位)를 증득하는 시기로, 정(正)은 증(證)의 뜻이다. 상법(像法)은 부처님 법이 점차 와전(訛傳)되고 본래 진면목이 변질되어, 가르침[敎]과 수행[行]은 이루어지지만 과위를 증득하지는 못하는 시기로, 상(像)은 사(似; 비슷함)의 뜻이다. 말법(末法)은 부처님 법이 말단지엽으로 흐르고 아주 희미해져, 가르침[敎]의 이름만 겨우 명맥을 이을 뿐, 진실한 수행이나 증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기로, 말(末)은 미(微)의 뜻이다.
세 법의 시기에 관해서는, 말법은 대비경(大悲經)에서 말한 1만 년 하나뿐인데, 정법과 상법의 시기는 ① 각각 1천 년, ② 각각 5백 년, ③ 정법 1천 년 상법 5백 년, ④ 정법 5백 년 상법 1천년의 네 설로 나뉜다. 예로부터 고승대덕들이 주로 취한 다수설은 정법 5백 년 상법 1천 년이다. 어쨌든 지금은 말법시대가 분명하다.]
그래서 가르침의 이름만 겨우 있을 뿐, 진실로 수행하여 증득하는 사람은 없으니, 삿된 이단과 정통이 뚜렷이 구별되지 못하고, 시비 선악을 분간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나 나와 남을 나누어 앞 다투기 일쑤이고, 죄다 명예와 이익을 좇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눈을 들어 살펴보면, 천하의 도도한 흐름이 모두 다 이러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법(法)이 무슨 뜻이며, 스님[僧]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릅니다. 불법의 쇠퇴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더 이상 차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매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자기도 모르게 절로 눈물이 흘러 내리곤 합니다.
저는 부처님 제자[佛子]로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없습니다. 안으로는 자기에게도 이익됨이 없고, 밖으로는 남들에게도 이익을 줌이 없으며; 살아서는 현세에 이익됨이 없고, 죽어서는 후손들에게 이익을 줌도 없습니다. 하늘이 비록 높다 한들 나를 덮어 감싸 줄 수도 없으며, 땅이 비록 두텁다 한들 나를 안전히 실어 줄 수도 없습니다. 지극히 중대한 죄인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을 머금고, 빠져 나갈 궁리가 없음을 생각해 보니, 문득 내 자신이 비천하고 고루한 것조차 까맣게 잊고서, 갑자기 큰 마음을 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시대의 말법 운수를 완전히 돌이켜 세우지는 못할지라도, 다가올 후세에 정법이 이어질 수 있도록 보호해야겠다는 의지는 결연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착한 벗들과 함께 도량에 모여 참회를 고백하고 이 법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48개의 큰 서원을 발하여 한 서원 한 서원마다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로 했으며, 백천 겁의 깊은 마음을 기약하여 마음마음마다 부처를 이루기로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 한 몸 다 마치면 안양(安養: 극락) 국토에 돌아가길 서원합니다. 극락정토의 구품 련화(九品蓮華)에 오른 다음, 다시 이 사바세계에 되돌아와 부처님의 햇살[佛日]이 새롭게 빛나고 법문(法門)이 다시 드날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승가 대중이 맑고 깨끗해져, 우리 동방에서 인민 중생이 교화의 혜택을 입으며, 그로 말미암아 재앙의 운수가 바뀌거나 연기되고, 올바른 법[正法]이 오래도록 머물러 유지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이는 비록 하찮고 보잘것없지만, 진실하고 간절한 저의 고심(苦心)입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열 번째 인연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인연을 모두 인식하고 여덟 가지 방법[마음 내는 모습]을 두루 알면,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문이 보이고 무엇을 어떻게 닦아 펼쳐야 할지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이렇게 사람 몸을 받아, 부처님 법이 전해지는 문화의 중심지에 살면서, 육근(六根: 눈·코·귀·혀·몸·뜻의 여섯 감각 기관)이 탈없이 두루 갖춰지고 사대(四大)69)가 가뿐하니 편안하며, 신심(信心)도 굳게 지녀 다행히 특별한 마장(魔障)도 없습니다.
[사대(四大): 우선 진짜[實]와 가짜[假]로 나뉘는데, 흔히 말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은 가짜 사대이다. 진짜 사대는, 첫째 땅은 만물을 떠받쳐 주는 단단한 성질, 둘째 물은 만물을 윤택하게 거두어 들이는 축축한 성질, 셋째 불은 만물을 뜨겁게 달구는 따뜻한 성질, 넷째 바람은 만물을 낳아 길러주는 움직이는 성질을 각각 가리킨다.
또한 안과 밖으로 나뉘기도 한다. 우리 중생이 기본 과보[正報]로 받는 사람 몸[人身]을 안의 사대 또는 의식 있는[有識] 사대라 하고, 부수 과보[依報]로 받는 주변 환경[諸色]을 밖의 사대 또는 의식 없는[無識] 사대라고 한다.여기서는 사람 몸을 가리키는 안의 사대 또는 의식 있는 사대이다.
성암(省庵) 대사(?~1734) 휘(諱: 본명)는 실현(實賢)이고, 자(字)는 사제(思齊)이며, 성암(省庵)은 호(號)이다. [옮긴이: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가지런해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자기는 그러지 않은지) 안으로 스스로를 살핀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省也: 論語 里仁 편).”라는 공자 말씀에 본명과 자와 호가 모두 담겨 있음이 특히 눈에 띈다]. 강소성(江蘇省) 상숙현(常熟縣)의 시(時)씨 아들로 태어났는데, 대대로 유교(儒敎)를 공부한 집안이었다. 어려서 출가하여 엄격하게 비니(毘尼: 毘奈耶, 계률)를 배웠고, 곧 강연(講筵: 강원)에 들어가 법성(法性)과 법상(法相)의 학문을 연구하셨다. “념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者是誰]?”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넉달이 지나면서 홀연이 크게 깨닫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지혜 근기(根機)가 발랄하고 날카롭게 번득였으며, 변론 재주가 막힘없이 종횡무진하셨다. 낮에는 대장경을 열람하고, 날이 저물면 부처님 명호를 지송(持誦)하셨다. 아육왕산(阿育王山: 절강성 寧波시 동쪽 소재, 東晋 때 慧達 스님이 창건한 아육왕사가 유명함)의 부처님 앞에서 손가락을 불사르며[燃指] 48대원(大願)을 세우시자, 그에 대한 감응으로 부처님의 사리가 찬란한 빛을 내셨다[放光].
이에 「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을 지어 사부대중을 격려하셨는데, 독송하는 이마다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청나라 옹정(雍正: 世宗 연호, 1723~35 재위) 12년(1734) 4월 14일 서쪽을 향해 고요히 입적하셨다. 장례를 모시러 대중들이 몰려 들자, 갑자기 눈을 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갔다가 곧 다시 온다. 생사(生死) 해탈은 아주 큰 일인데, 각자 스스로 마음을 맑히고 념불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두 손을 합장한 채, 계속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며 가셨다.
대사를 찬탄하는 게송에 이르기를:
“자비로운 마음 크고 넓으시어 보리심 내기 권하는 글을 쓰시고,
48가지 서원을 세우시니 그 원력 크고도 깊어라.
수행과 깨달음 모두 진실하여 상서로운 감응이 특별히 뛰어나시니,
련화 정토종의 법맥이 대사의 은덕으로 길이 전해지네.”
]
더구나 지금 우리들은 출가(出家)도 하고 구족계(具足戒: 비구·비구니계)까지 들었으며, 또 다시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참회의 법문까지 닦고 있으며, 게다가 착한 친구[善友·道伴]들을 만나는 등, 훌륭한 인연들이 두루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러한 큰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또 어느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여러 대중께서는 저의 우직한 정성을 어여삐 여기고, 저의 고뇌스런 뜻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 함께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다 함께 이러한 마음을 내십시다. 그래서 아직 내지 않은 분은 지금 내고, 이미 낸 분은 더욱 키워 가며, 이미 키운 분은 지금 더욱 굳건히 하여, 앞으로 계속 이어가도록 합시다.
험난함을 두려워하여 겁먹고 물러나지는 말며, 쉽다고 가볍게 보아 붕 들뜨지도 말고, 성급하게 욕심 내어 덤비다가 꾸준히 오래하지 못하지도 말며, 게으름과 늑장 부리느라 용맹정진을 안 하지도 말고, 유들유들 맥없이 늘어져 정신을 분발하지 않지도 말며, 구태의연한 습관에 얽매여 더 이상 미루며 기대하지도 말고, 어리석고 둔하다고 줄곧 목석(木石)처럼 무심(無心)하지도 말며, 근기가 얕고 보잘것없다고 열등감에 빠져 스스로 자격 없다고 포기하지도 맙시다.
원을 세우고 마음을 내는 것은, 예컨대 나무 심는 일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뿌리가 얕아도 시일이 오래 지날수록 날로 뿌리가 깊고 단단히 활착(活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칼을 숫돌에 가는 일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무딘[鈍] 칼날도 오래 갈다 보면 점차 날카롭게 서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처음에 나무 뿌리가 얕다는 이유로 아예 심지도 않고 말라 죽게 놔두며, 또 어찌 칼날이 무디다고 숫돌에 갈아 보지도 않고 쓸모없이 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만약 수행을 괴로움으로 여긴다면, 이는 게으름 피우는 게 더욱 큰 괴로움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행이란 잠시(인생 몇 십년) 수고롭게 닦아 영원토록 편안하고 즐거운 것인 반면, 게으름 피우면 금생의 몇십 년 구차하게 편안을 누리는 듯하지만, 내세에 오랜 생애 동안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옮긴이 보충 해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고행하고, 어리석은 자는 고생한다[智者苦行, 愚者苦生].”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물며 극락정토를 항공모함으로 삼으면, 어찌 물살에 휩쓸려 밀려날 근심이 있겠습니까? 또 무생법인(無生法忍)으로 법력을 얻는다면, 무엇이 힘들고 어려울까 염려되겠습니까? 지금 지옥에 갇혀 있는 죄인도 과거 겁(劫)에는 일찍이 보리심을 낸 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륜 도덕을 갖춘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금생에 큰 원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작도 없는 전생부터 혼미를 계속해 왔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는 따지거나 타이를 수도 없습니다. 또 지금 당장 깨닫고 뉘우친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아직 새롭게 쫓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혹되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슬프고 불쌍한 일입니다. 또 알아차리고서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더욱 비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지옥의 고통을 두려워한다면, 용맹스런 정진(精進)이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또 만약 덧없음[無常: 죽음]이 아주 신속히 닥칠 것을 생각한다면, 게으름이 생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부처님 법으로 채찍을 삼고 착한 벗[도반]들과 서로 손잡고 도와, 잠깐 동안도 떠나지 않고 한평생토록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보리심이 물러나거나 사라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일념(一念: 한 순간 생각)이 보잘것없이 가볍고 미세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또 마음으로만 내는 빈 서원[虛願]은 별 이익이 없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진실하면 일도 실제로 이루어지며, 서원이 크고 넓으면 수행도 깊어지는 법입니다. 허공이 큰 게 아니라 마음의 왕[心王]이 진짜 크며, 금강(金剛: 다이아몬드)이 굳센 게 아니라 원력(願力)이 가장 굳셉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대중 여러분께서 정말로 제 말씀을 내팽개치지 않으신다면, 보리(菩提)에 딸린 사람[도반]들이 지금부터 모두 한 가족이 되어 련화정토결사(蓮華淨土結社)를 이루고 돈독한 우호 관계 속에 튼실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직 원하는 바는, 우리 모두 다 함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다 함께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다 같이 중생들을 교화하여, 똑같이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세에 우리가 얻게 될 부처님의 32상(相)과 온갖 복덕 장엄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을 내고 서원을 세우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쪽에 한 이년이 넘도록 가뭄이 들어 난리였다고 합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그때 가뭄을 다 기억하시더군요. 참고로 이곳은 일년중 겨울 3달정도만 비가 옵니다. 원래 물이 부족한 곳이죠.
그때 우리 교수님께서는 유카야라는 곳에서 스님으로서 수행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본토에서 건너오신 '성화'대선사라는 분이 백인들 포교를 많이하여 중국스님과 모두 합쳐 한 100명정도 함께 생활을 했답니다. 우리 교수님도 백인이신데 스님 생활을 20년 넘게하셨습니다.
끝날 것 같지않는 그 혹독한 가뭄속에서 어느날 성화선사께서 대중스님들에게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를 마친 우리 교수님, 그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종교인 불교에서 어떻게 그런 미신같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실까하며 불만이 생겼답니다. 그래도 성화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 스승님의 뜻을 따라 기우제를 지내는데 동참하기로 했답니다.
근데 성화선사께서 기우제 지내는 장소를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금문교(골든게이트 브릿지)'로 정하셨다네요. 당황한 우리교수님,,,왜 기우제를 그렇게 사람들 많은데서 눈에 띄게 지내려고할까... 만약 비가 오지않으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창피일까.... 암튼 온 대중스님들과 함께 금문교로 가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답니다. 아침부터 저녁 5시까지...
그 중간에 여러분들 어떤 일이 일어나겠나요? 그시절만 해도 미국 일반인들에겐 스님들이 잘 알려져있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대다수가 석사학위이상을 지식층들입니다.
미국에서 불교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죠. 암튼, 이상한 복장에다 삭발까지한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루종일 서서 그러니까 급기야 방송국에서 출동.... 우리교수님 내심 불안하고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방송국 기자가 그 중 한 스님과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 당신들은 누구며 무엇을 하고 있나요?
한 스님: 불교의 수행자들이며 비오라고 용왕님께 기우제를 지내고 있지요.
기자: 용왕이라고???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며.... 방송국 기상대를 연결하여 '척스(일기예보하는 사람) 조만간 비가 올 것 같나요?
척스: 아니요. 전혀 기미가 없습니다. 구름도 한 점 없읍니다.
기자 무시하는 듯 어이없어 하며 농담을 합니다: 척스 하늘에 용이 보입니까?
척스: 무슨 말인지???
기자 여차 저차 일기예보자와 농담을 하며 신이 났습니다. 속으론 그랬겠죠... 이런 얼빠진 사람들이 다 있나... 정말 불교란 미신이구만....
우리교수님: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방송에까지 나왔는데 비가 안오면 이 일을 어째....
그런 우리 교수님의 걱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비가 올 기미는 전혀없이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은 계속되고.. 드디어 절로 돌아오셨죠.
불만과 허탈감에 차서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했습니다. 밤 9시쯤이었습니다.
'
'
갑자기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소리가.... 울 교수님 너무 놀라 창문을 여니 이게 웬일입니까.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얼론 내려가 티비를 틀어 일기예보를 보니 그 척스라는 사람 눈이 둥그래서 흥분해서 말하더랍니다.... 아까 금문교에서 스님들이 비오라고 기도를 하던데 이런 신기한 일도 다 일어나는 군요. 아까는 믿지 않았는데 정말 구름도 한점 없었는데 이렇게 비가 오네요...... 흥분... 흥분...
울교수님: 나도 기우제 같은 건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암튼, 오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가 나와 그 일기예보하던 사람은 효과가 있다고 확신을 시켰네....
일타 스님이 쓰신 '기도(도서출판 효림)'에서 스님의 출가 이야기를 읽었는데 매우 신비로웠습니다.
"1944년 일본의 대판의전에 다닐 때 학도병으로 태평양 전쟁에 끌려 갔다가 다리에 중상 을 입었습니다. 해방 후 다리가 아파서 요양차 범어사에 갔었는데 그 길로 출가를 하게 되 었지요.
처음엔 스님이 뭔지도 몰랐어요. 다만 다리가 너무 아파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수 주를 외우면 다리가 나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범어사 미륵암에서 그저 일구월심 천수 주를 외웠습니다. 그런데 한 6개월 천수주를 외우니 지리천문 알게되고, 7개월째, 8개월째 에는 수천리 밖이 보이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이었는데, 법당의 신중탱화에서 신장이 튀어나오더니 환부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꿈속에서도 아파서 아이구 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보니 법당 바닥에 파 편이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 전까지 신비한 경계를 대할 때 하고는 또다른 무엇이 가슴을 확 내리치더군요. 아하, 이게 마음의 힘이로구나, 마음을 깨치면 이 몸을 조복받는 것은 물론이요,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부처가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2)
이 화엄노스님의 천수주력 영험담은 울산 학성선원 선원장님이신 우룡 큰스님께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40년 조금전에 겪은분이 부산 옆 김해 동림사에 화엄노스님이 계시는데, 70이 훨씬 넘으셨습니다. 이 화엄 노스님이 직접 격은 사건입니다.
화엄스님은 일제때 일본 오사카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졸업무렵 2차대전으로 일본에서 학병으로 일본군대 소위계급장을 달고 집에 오지도 못하고 일본의 학교에서 필리핀으로 가서 삶과 죽음사이에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2차대전이 끝나자, 일본으로 가지않고 부산으로 오셨기 때문에 전쟁중에 넓적다리에 들어간 쇠조각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큰 수술은 미군 야전병원에서 다 뽑았는데 콩알만한 파편조각은 미처 수술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왔습니다. (후방은 아마 6.25전쟁때 참전 하셨는데 그때를 가르킨말 같습니다.)
전쟁중에 쓰러져서 미군들에 의해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습니다.
깨어나니 미군 야전병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여 몸속에 쇠조각이 있는줄 모르고 살다가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오고 나중에 척추가 야단이 나서 목발을 딛고 다녔습니다.
자기몸이 그렇게 되다보니 남이 존경해주는 것도 필요없고 선생님 선생님 하고 대접해주어도 소용없고 월급도 소용없고 자기몸이 망가져가니 어떻게 합니까.
스님된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어디가서 조용히 몇 달 수양하다가 몸이 회복되면 다시 나온다는 생각으로 찾아간곳이 범어사였습니다.
범어사에서 동산 노스님을 만나서 몸뚱이가 망가져가는데 그래서 어떡하냐고하여 동산스님에게 처음배운 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였습니다.
"다라니를 지극히만 하면 몸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 하라"했습니다.
본래 기운이 있던 분이어서 텅 비어있는 암자에 혼자가서 오른쪽다리는 마비되어 무릎이 구부려지지않아 다리를 쭉 펴고 살고있는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열심히 했어요.
혼자사는 암자니 큰소리로 해도 방해하는 이가 없어요.
몇 달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음해 추석날 암자에서 내려와 범어사 큰절에서 점심을 먹고 떡,과자, 과일을 가지고 암자로 가서 다리를 뻗어놓고 누각 마루에서 다라니를 하는데,앞을 쳐다보고 다라니를 하는데, 얼굴을 돌려야 쳐다 보일 신장탱화가 그냥 보이더랍니다.
그림속에 신장님이 마루로 척 뛰어내리는데 그 갑옷이 철커덕거리고 칼이 철커덕거리고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랍니다.
그러더니 신장님이 긴 칼로 오른쪽 넓쩍다리를 쑤셔서 도려냈습니다. 순간 뜨끔하더랍니다. 순간적으로눈을 떠서보니 쇠조각 세 개가 마루에 있더랍니다.
근세의 고승중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대선사(鏡虛大禪師)의 가장 큰 법제자인 수월스님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나이 서른에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성원(性圓) 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 밥을 짓는 공양주(供養主)등의 소임을 3년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기도승)이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송(頌)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스님은 이를 한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42글자의 천수대비주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천수대비주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땅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대비주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비주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비주를 외워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수대비주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마침내 7일째 되는 날, 수월스님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습니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잠을!'"
이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중득하여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중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지방 등에서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숭산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2) 천수대비주 대다라니 (안제이 스텟즈 지도법사)
숭산선사는 우리에게 스승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제자입니다.
선사님의 장례식 비디오 상영 직전에, 우리는 천수대비주 즉,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하였습니다.
숭산선사는 "나는 특별한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모를 뿐'을 가르친다."고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다라니는 선사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수행이었고 , 대다라니를 염송하는 것으로 깨우치셨고, 그 후에도 언제나 대다라니를 염송했습니다.
폴란드나 미국, 한국, 어느 선원이나 어느 절에 머무를 때에도, 선사님께선 그 곳에서 가장 열심히 수행하는 분이었습니다. 화계사에서는 새벽 3시 20분이 기상시간이지만, 우리들중 많은 이들이 이보다 약간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숭산선사의 창문을 보면, 언제나 불이 켜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중 몇 명이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새벽 2시 30분에, 선사님의 창문은 이미 불이 켜져있었고, 불은 새벽 2시에도 켜져 있었습니다. 선사님께서는 화계사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수행하는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선사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제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절을 얼마나 하고 있나요?"
"네, 100배, 200배 정도 하고 있습니다."
"그건 충분하지 않아. 난 60살이지만 매일 1000배를 합니다."
그 분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제일 먼저 1000배를 했습니다. 숭산선사는 우리들의 스승이었을 뿐아니라 그 자신이 위대한 수행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수행을 하고자 했으며, 우리에게 정규적인 수행이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제가 선사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도 수행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사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호텔방에서 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난 뒤, 선사님과 단 둘이 방에 남았습니다.
선사님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 분은 제게 먼저 얘기를 시작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물론 자신의 다라니를 외우시면서요.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5분이나 10분쯤 앉아계셨습니다.
마침내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할 지 생각하다가 물었습니다.
"대선사님, 지금도 다라니를 외우고 계십니까?"
"그럼, 물론이지. 나는 언제나 다라니를 하고있지."
"주무시는 동안에도요?"
선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잠을 자는 동안에도 외우지. 심지어 지금 얘기하는 동안에도 하고있어."
선사님께서는 피곤하지 않을 땐 다라니를 1분에 세 번 외울 수 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피곤하실 땐, 1분에 두 번 외우셨습니다.
선사님께선 이렇게 24시간 공백없이 하셨습니다.
선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50년동안, 난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일생동안, 나는 한 번도 뒤돌아 본 적이 없다. 단 일초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선사님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할 때마다, 저는 그 분이 어디에선가 대다라니를 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선사님을 뵙고 싶다면, 그저 대다라니를 한 번 더 염송하십시오.
배움이 짧기도 하지만, 사는 일이 바빠서 부처님 법을 공부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40중반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남겨진 삼남매를 보란 듯이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내가 일을 해야 살 수 있었으므로, 절에는 그저 초파일에 등이나 달러 갈 수 밖엔 없었지요. 제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기 전 까지는 참 살아온 세월이 힘이 들었습니다.
3년 전 시댁 쪽에 산소를 이장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보통 산소를 이장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들 하지만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뭐 별일이 있겠나 싶었습니다.한데, 무슨 일인지 산소 이장 이후 집안에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자꾸 풀리지 않는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온 마음을 바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건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좋다는 방법을 모두 찾아 다녔습니다.그러다가 어느 스님과의 인연으로 제가 사는 곳은 서울인데 거제도까지 가서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천도재를 마치자 스님은
“여기 거제도까지 오실 수는 없으니 댁에 돌아 가셔서 마음에 드는 도량을 찾아 백일기도를 하십시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았지만 왠지 마음에 끌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 만난 곳이 제가 천수대비주 기도를 하게 된 이 도량 이었습니다.요즘 생각하니 그래도 제가 전생에 조금 덕을 지어 놓았나 싶기도 합니다. 거제도에서 돌아와 저는 이 도량에 나와 백일을 아들과 열심히 108배와 광명진언, 천수대비주 21편을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 했습니다.그 후에 다시 천수대비주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스님께 무어라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부처님을 열심히 공경하는 일 만이 스님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이었습니다. 백일을 스님께서는 목탁을 치시며 저를 위해 108편 천수대비주 기도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 말입니다. 그런 스님의 법력에 힘입어, 저 역시 백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목욕으로 몸을 정히 하고 음식도 가리며, 먼 길을 마다 않고 새벽길을 헤치며 법당에 와 청수를 갈고 공양을 올리며 기도 하였습니다.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가정에도 안정이 찾아 왔습니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던 것도 다 물리치고, 오직 일념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제게 급박한 일이 많았습니다. 돈 보다는 기도를 해야 했으니까요.
백일이 지나자 이제는 스님께서 매일 108독씩 다라니기도를 계속하라시면서 이제부터 금요일에는 1000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이었습니다.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분들과 함께 바로 1000독 독송에 들었습니다.말이 천 독이지 혀도 잘 안돌아가는 제게 처음에 천 독은 참 힘들었습니다.아침 10반에 시작해서 다음날 9시에 마쳤으니 그 시간이 어땠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저는 참 죽을 맛이었습니다. 스님! 저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씀 들여도, 앞에서 스님은 꼼짝없이 같이 독송을 하시니, 어쩌지도 못하고 온몸을 꼬아 가며 꼬박 날밤을 새어가며 22시간만에 1000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고 합니다.그렇게 해서 지금은 25만독이라는 숫자를 채우고 있습니다.스님께서는 숫자를 꼭 챙기라고 하십니다.목표를 세워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지요. 물론 숫자에 매이는 것은 아닙니다.그렇지만 숫자를 챙기시라는 말씀의 이유를 이제는 다 알 것 같습니다. 또 10만독, 20만독을 독송하고 나니, 이제는 또 글을 쓰라고 하십니다.글도 제대로 모르는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지요.
“그냥 느낀 대로만 쓰시면 됩니다. 그래야 글 못 쓴다는 마음에서 벗어 날 테니 쓰십시요.”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또 말도 안 되지만 글을 씁니다.
* * * *
신묘장구 대다라니 십만독을 끝마칠 무렵 -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어찌 십만독을 내가 해 내었는지 이건 나의 힘이 아닐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그후 3000독 ,7000독 10000독을 거듭 독송하며 나는 많은 경험들을 했습니다.조상들의 영가와 만나는 시간도 있었고, 오래도록 소원하게 지내던 친척과도 화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이루었고, 자식들의 문제들도 수월히 풀려 나갔고, 일하면서 마음에 응어리 졌던 사람과도 웃으며 만나며 아무런 미운 마음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또한 환희심이 일어 언제나 웃는 낯 이 되어 주의 사람들에게 뭐 좋은 일이 많은 가보다 라는 좋은 말을 자주 듣기도 했습니다. 또 혈색도 좋아지니 미인이 되었다는 농담도 듣게 되니, 나는 이 기도 만큼 나를 변화 시킨 것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어쨋던 나는 이 기도가 평생 나를 지탱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지요.이렇게 기도의 횟수가 십만독에 가까워오는 때 독송을 하는데 흰나비가 살랑살랑하고 날아와 앉을 듯 말듯 하면서, 신묘장구 대다라니가 노래 소리로 들렸습니다.그러더니 마음이 갑자기 설레고, 기분이 너무 좋아 춤이라도 덩실 덩실 추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십만독을 하고 나니 제 마음은 그저 흐믓하고 행복한 마음 뿐 입니다.이제 십만독은 다시 처음의 일독으로 돌아가는 것 일뿐이라 생각합니다.
-20만독 독송을 하고나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5만독 쯤 독송하였을 때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 것일까? 자식을 위해 울리려 하는 것일까?아님 내 자신을 위해서 종을 울리려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냥 여기서 그만둘까” 하는 마음을 고민하면서 잠시 잠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희한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나의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아셨는지 꿈속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책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아!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구나.” 하면서 내가 여기서 끝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 열심히 정진하여 20만독을 독송하게 되었습니다.3차 백일기도 회향하는 날, 스님께서 천수대비주 21편을 독송하시는 중간에 다시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열심히 기도하는 제 머리위로 까치가 ‘까악까악’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편지를 물고 부처님 전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아들의 직장문제로 걱정을 하던 때 였습니다.그런데 이것이 무얼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환희로운 마음에이 모습을 보고 저는 이게 독송의 즐거움이구나! 하고 더 큰소리로 독송하였습니다.그런데 며칠 후에 아들의 직장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저절로 저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게 되고 더욱 힘차게 기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얼마 전 4차 백일기도를 시작하며 바로 가행정진 열흘을 했습니다.가행정진 열흘 동안 저는 너무도 벅차게 환희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그 날은 가행정진 7일째 이고 음력 7일이라 산신기도 법회가 있는 날 이었습니다.그날도 일찌감치 집을 나서 법당에 도착했습니다.저는 지금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25만독이 가까워 오고 있으며가행정진시에는 지금 까지는 1000독씩을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한계를 넘어 보라는 스님의 권유에 하루에 1500 ~2000독을 했습니다.
며칠 전 스님께서 하신 법문을 듣고, 정말 이번에는 '내가 죽었다' 하고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정진하고 있었습니다.정성껏 마음을 모으고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다라니 21편을 소리 높여 독송하는 중이었습니다.중반쯤 되었는데 내가 그만 죽었습니다.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니나는 관속에 누어있고, 아이들은 관속에 있는 나를 보며 빙 둘러 울고 있었습니다.산신각 앞에 내가 누워 있는 관은 누런 금빛이고, 내 머리맡에는 머리에 노란 관을 쓰신 분이 주장자를 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더니 그분은 사라지고 다시 머리에 하얀 관을 쓰신 분이 너울너울한 흰옷을 입고 나타나 다시 머리맡에 서 계십니다.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죽은 것이 너무 슬퍼 마구 소리를 내어 울며 다라니 독송을 했습니다.다라니 21편이 끝나니 온 정신으로 돌아오며, 순간 온 몸에 힘 이 다 빠져 그만 '스님 저 쓰러지겠습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억지로 참았습니다.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스님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진언에 일어섰습니다.
이번 백일기도에 괜히 처음부터 가행정진을 하고 싶었습니다.물론 이루고저 하는 바도 있거니와, 스님께서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다 좋은 일이 있다 '라는 말씀에 뒤 돌아 볼 것도 없이 그저 기도하기로 마음먹었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스님께 여쭈니 빙그레 웃으시며 계속 일심으로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7일쯤 되니 머리가 휭하니 붕붕 떠 있는 느낌도 들고, 어지러운 듯 정신이 몽롱하였습니다. 가행정진하는 동안 눈에는 피부병처럼 무엇이 났는데 보살들이 우스게로 '우담바라' 가 피었다고 놀립니다. 정말 내 몸에 우담바라가 핀다면? 그럴 일은 조금도 없지만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좋은 일일까 하기도 했었습니다.그날 겪은 일은 저도 너무 신기한 경험이라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다보니 모든 것이 좋은 일로 바뀌더군요.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면서 간간히 아이들에게도 화를 잘 내던 나의 습관도 사라졌습니다. 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아는 일이니까요.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환희로운지 경험을 해 보셔야만 아실 것 입니다.저는 그저 천수대비주 기도로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만 어려운 일이 있으신 분 들이나 마음고생을 하시는 분들, “모두들 기도 열심히 하세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기도 열심히 하셔서 소원성취하시고 성불 하십시요.
덕양선원 원명화합장
2)
“타는 불꽃같은 삶의 고통 다라니로 녹였지요”
매일 대비주 1000독
김 순 자 씨
암으로 남편 먼저 보내고
아들까지 병고로 고통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의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 견뎌
하루 넘던 다라니 1000독
이제는 4시간 만에 마쳐
“위암 말기입니다. 수술을 하면 1년을 살 수 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못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수술해서 어떻게든지 남편을 살리겠다고 말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나갔다. 이를 꽉 깨물고 떨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꼭 잡았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는데 그제서야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난히 몸이 부쩍 마르고 먹는 음식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남편이 이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남편의 삶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니…. 의사는 믿을 수 없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단 한 마디 말로 그녀를 천 길 낭떠러지로 떠밀었다.
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그녀를 보자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반기듯 활짝 웃었다. 남편의 삐쩍 마른 몸, 검어져 버린 얼굴 빛. 가슴이 미어졌다. 왜 진작에 병원에 오지 않았을까. 금방이라도 콸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참아야 한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울어버리면 이 모든 게 현실이 되어 버릴 테니까.
꽃다운 나이 20대 초반에 남편을 만나 토끼 같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알콩달콩 살아가던 김순자 씨에게 검은 구름은 그렇게 다가왔다.
오로지 집과 회사 밖에 모르는 자상한 남편과 엄마를 끔찍하게도 위해주는 착한 두 아들과 딸. 콩나물 값 한 푼이라도 아끼며 사는 평범한 삶이었지만 그녀는 크게 욕심내지 않았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다섯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저녁 먹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그녀는 착한 아내, 좋은 엄마였다. 그런 그녀에게 하늘이 두 쪽나는 시련이 닥친 것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가 남편에게 거짓말을 시작했다.
“당신, 위에 탈이 났나 봐요. 수술만하면 금방 나을 수 있다네요. 진작에 병원에 왔으면 됐을 것을. 예전부터 병원 한 번 가보자고 했죠. 정말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오히려 화를 내버렸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다. 별일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허허’ 웃는 남편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버스 창밖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예정대로 수술을 마쳤지만 의사의 말대로 남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남편이 의사를 찾아갔다.
그제서야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남편. 그 때문이었을까. 예정보다 더 빨리 남편은 떠나버렸다. 그녀가 47살이 되던 1987년이었다.
이미 예고된 일이었지만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남편의 따뜻한 그늘 아래서 20여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다.
고2의 큰아들과 중학생 된 아들과 딸. 남편을 따라 가고 싶은 마음도 여러 번 들고는 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마련했지만 여자 혼자 아이 셋을 키워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도 세상 앞에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렇게 아픔이 서서히 아물 무렵. 어느 덧 장성해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바르게 자라준 큰아들이 갑자기 이상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남편의 산소를 이장한 이후부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심장이 멈춰버리는 듯 했다. 결국 아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그녀는 또 한 번 몸서리를 쳐야했다. 떠난 남편을 대신해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던 큰아들이었기에 그녀의 충격은 더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생계였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아들 간호에만 전념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으로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수술로도 고칠 수 없다는, 원인과 병명조차도 알 수 없는 ‘무병’이라는 답변뿐이었다. 또 한 번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끝내는 무당도 찾아가 보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봤지만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버리는 듯 했다.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그때 덕양선원 법상 스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스님의 권유대로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을 하기 시작했죠. 스님과 아들과 셋이서 법당에 앉아 낮과 밤 구분도 없이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정말 내가 지금 당장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첫 100일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김순자(원명화·65)씨의 주력수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100일 정진이 끝나면 또 다시, 또 다시.
200일, 300일, 400일, 500일…. 끝도 없이 그녀는 주력수행을 계속 이어나갔다.
일산에 위치해 있는 덕양선원과 살고 있는 집까지의 거리는 2시간.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두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집안 일을 마무리한 뒤 아들과 함께 오전 8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컴컴한 밤이 될 때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또 매주 금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3시간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다. 그렇게 해서 10만독을 마치고 20만독을 해냈다.
“기도 중에 조상님과 만나기도 하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시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까치가 머리 위에서 ‘까악까악’ 울기도 하는 신비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었죠. 또 어떤 날은 죽어있는 내 모습을 보기도 했었고요. 그럴수록 스님은 더 정진해야 한다며 1000독도 모자라 하루 2000독을 하라고, 더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그땐 정말 ‘나 죽었구나’ 했었죠.”
그렇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내가 쓰러지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정진을 시작했다.
“어느 날은 하다하다 정말 죽을 듯이 힘이 들어 ‘스님 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그래, 차라리 내가 죽자’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모든 괴로운 마음들을 부처님께 맡기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서 촉촉히 이슬이 맺힌다. 하루하루가 길고 긴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는 것처럼 힘에 겨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기도할 때 저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어요. 힘겨워하는 제 곁에서 저 보다 더 간절하게 목탁을 치며 독송하는 스님이 계셨고 도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죠.”
그리고 거짓말처럼 서서히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언제그랬냐는 듯 큰아들도 대비주 독송으로 병을 이겨내고 예전의 든든한 아들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녀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대비주 87만독을 이루어 내고 매일 1000독을 계속해 오고 있는 김순자 씨.
하루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모자랐던 신묘장구대다라니 1000독을 이제는 단 4시간 만에 마칠 정도로 그녀에게 수행은 몸의 일부처럼 하나가 되어버렸다.
“내 목숨이라도 바꿀 각오로 수행으로 나와 맞서다보면 어느 순간 힘든 모든 일들이 콩알만큼 작아지고 내가 큰 우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비가 훨훨 날아가다 향기로운 꽃에 다가가 살포시 내려 앉는 그런 기분이죠. 수행을 만나고 정진의 마음이 한 층 한 층 탑을 이루면서 세상 모든 일들이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수행을 하면 할수록 가슴에서 느껴지는 맑은 빛이 하늘의 태양보다 더욱 빛나는 것 같다’는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죽기보다 힘든 일 있으면 죽을 각오로 기도해보세요. 그렇게 죽기 살기로 정진하면 소원하는 한 가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저도 해냈는걸요.”
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www.beopbo.com)
9-2
안선희님(자금광)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
안선희씨 (법명:자금광, 47세, 충남 계룡시, 주부)
잠자는 4시간 빼고 20시간 정진
가행정진 후 환희심·희열 솟구쳐
나는 오랫동안 불자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시절을 살펴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하기 전에는 거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수준에서의 신행이었다.
남편이 잘되길 바라고 자식이 건강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기원하고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전부였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텅빈 법당에서 홀로 3000배를 하기로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배 절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 공덕의 힘으로 많은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 시기에 덕양선원을 알게 되었고 법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을 시작하였다. 독송목표는 100만 독으로 잡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108독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108독을 하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이렇게 4개월간의 수행을 진행하던
중 일주일 동안 매일 1000 독을 하는 가행정진을 하기로 하였다. 천 독을 하는데 20시간이
들었으니 잠을 자는 4시간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시간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얼중얼 거리면서 지냈다.
걸으면서도 중얼중얼, 밥을 하면서도 중얼중얼, 심지어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중얼중얼
거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람 만나는 일도 줄이고 바깥일도 최소화하면서 오로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는 일에 매달렸다. 드디어 이레째 되는 날 무려 7000독을
마치고 나니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희열이 솟구쳤다. 일단 해냈다 하는 환희심에 젖어 들었다.
한 차례의 가행정진을 하면서 얻은 성과는 환희심 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한 번 독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니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면서도 독송에 전념해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시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다. 일주일 입원 치료를 하는 기간 중에 늘 곁에 붙어 간호를 하면서도
독송은 놓지 않고 계속 하였고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머님을 향한 지극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참으로 환희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독송 중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지난 시절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업장들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힌다. 흔히 말하는 탐진치 삼독심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그것에 빠져있는 줄 모르고 헤매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슴이 울컥하고
답답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스님께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타나는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오직 마음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에 집중해라고 할뿐이다. 그래도 어쩌랴.
스님의 분부는 지엄하니 그대로 하는 수밖에. 다시 독송에 들어 가본다. 어렵게, 어렵게
독송이 진행된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힘들게 피워 올리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 털어내 버리고 독송에 전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제야 스님께서
그렇게 짧게 한 마디 하신 그 말씀, 오직 독송에만 집중하라고 한 그 말씀의 힘이 느껴졌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들에게 던지는 짧은 한마디 말씀에 불성을 깨닫는 것처럼 스님께서
하신 그 한 마디 가르침이 참으로 커다란 위신력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라니 108독 15분 만에… 하루 3천독
100일 10만독 후 자신감-위신력 체감
가행정진을 거듭 할수록 내면의 힘이 세어진다. 독송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 독을 하는데 이제는 15분이면 족하다. 입으로 내는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함께 내 안에서 굴러가면서 염불삼매에 빠져 든다. 하루에 3,000독이 가볍게
이뤄진다. 하루에 3,000 독을 하고 나면 한량없는 성취감에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진을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10만 독을 돌파하였을 때에는 환희심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이 밀려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높은 길이었다.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탄탄대로가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기쁨이 있어 수행을 하는 것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10만 독을 하고 나니 독송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라졌으며. 100일 기도 한 번에
10만 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속도만 빨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 속도가 빨라진
것과 더불어 기도에 빠져든 나의 마음자리도 깊어져 갔다. 한없이 깊어지는 나의 내면을
살펴보면서 나에 대한 믿음과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나와 남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며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또한 오늘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무한한 공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밝고 맑은 기운이 나를 밝고 맑게 할 뿐 아니라
나의 주변을 역시 밝고 맑게 해 준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은 나의 삶의 지침이 되었고 내 삶이 전부가 되었다. 문득문득 스쳐가는 위기의
순간들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 수행의 위신력을 체감한다. 또한 오고가는
길에서 유정들에게도 무정들에게 읊어주는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공덕이 온 우주를 밝혀준다.
독송이 거듭 될수록 마음이 환해지고 지혜가 생기며 현실의 문제에도 겁을 내거나
피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고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강한 긍정의 힘이 생겨
튼튼한 울타리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힘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행복이 내안에서 찾아야 하듯이 밖으로 향하는 나의 눈을 내안으로 돌려 오는데 여태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내안의 힘과 내안의 행복을 찾았으니 이 힘과 행복을 밖으로 쏟아내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받은 이 많은 복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주교도소
후원을 하게 되었으며 단 한사람이라도 맑고 밝은 마음자리 찾아 자신의 올바른 삶과
이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게 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고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416자의 게송을 통해 나의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념으로 독송을 하면서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강하고 이타적이며 행복한 삶으로 거듭 태어났다
출처: 법보신문(www.beopbo.com) 나의 발심수행
9-3
오윤미(법명 수선화) 님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
스님 권유로 철야 1000독에 도전
자신감 얻어 올해엔 10만독 회향
매주 금요 철야기도 시간 어김없이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이어진다.
그 열기는 금요 철야기도에 직접 참석해 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에어컨과 여러 대의 선풍기를 작동해야 할 정도의 열기다. 내가 결혼도 뒤로 하고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다.
2001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어릴 적, 부모님 따라 가끔 절에 다닌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었다.
물론 “부처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금강경 사경하고, 독송하기도 하고, 엄마 따라 그 추운 겨울날 조계사 법당에서 손과 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도 21일 기도도 했었고, 또 인연 있는 다른 도량에서도 60일 새벽 기도에 참여도 했었다. 무엇인가 엉성하기는 했지만, 열심히 부처님과의 인연의 끈은 놓지 않고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그 기도 공덕으로 20대 후반에 지금의 스승님을 뵐 수 있게 된 것 같다.
“기도를 하면, 바늘 하나 꽂을 곳도 없이 작은 내 마음 그릇이 무한대로 커져서, 내 주변의 인연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스님의 가르침이 내 안에서 늘 맴돈다.
2004년 가을쯤으로 기억 된다. 덕양선원을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도량으로 만드시려는 스승께서는 금요 철야기도를 해보라 하신다.
하루 1000편 하루에 1000편이라니…. 천수경만 읽기 시작하면, 몸이 꼬이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편만 하면 잠이 쏟아지는 내가?
자신이 없었다. 아니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님께서 한번 해 보라고 권하신다. 하다보면, 그 다음부터 힘이 붙어서 좀 쉬워지니까 다시 한 번 해 보라 하신다.
그래서 도전 했다. 철야에 신묘장구대다라니 1000독을 말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야 야야...”
그때는 정말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꼬박 24시간 걸렸고, 다음날 엄마와 함께 졸면서 집에 간 기억 뿐.
한번 해 보니, 그다음부터 철야 할 때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번에도 했는데, 이번에는 왜 못해!” 라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금년 백중기도 회향 때, 신묘장구대다라니 10만 독을 마무리 했다.
10만 독. 언제 할 수 있을까 했는데, 한 편 한 편 하다 보니 어느새 10만 독이 넘었다.
백중 기간에 가행정진을 하면서, 나는 가족들 모두 불심이 일어나길 기도 했고, 조상 천도재를 발원했다. 결국 이 두 가지 원은 바로 이루어졌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만 독을 먼저 성취하신 엄마와 함께 하는 수행 길이라서 더 힘이 난다. 집안의 문제가 하나씩 풀리고, 가족에 대한 나의 발원들이 이뤄지면서, 이 기도에 대한 믿음은 더 확고해졌다.
10만 독 후 탐·진·치 삼독심 점차 소멸
2010년 5월까지 다라니 100만 독 발원
나에게도 기도의 힘이 생기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여동생도 지금은 매주 금요 철야에 함께 수행한다. 부모님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며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았다. 조상님께도 온 식구가 참석하여 여법하게 천도재를 모셔드렸다. 재를 지내며 나는 끝없이 우러나는 환희심으로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처음 이 기도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잠과의 싸움, 게을러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들이 무한히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기도가 계속되면 될수록 그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발원하는 마음도 예전에는 “부처님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변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 후에 달라진 점은 또 있다.
전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탓’으로 돌렸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금방 “그래, 이것은 내 잘못이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당연하게 생각 했던 것들도 다르게 보인다.
한 끼의 밥을 먹을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던가. 물을 마실 때, 전기를 쓸 때,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수행일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란 것을.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들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신묘장구대라라니 10만 독을 하고 나니 내 주변의 환경이나 사물들이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10만 독을 이룬 후에 느끼는 전과는 다른 마음들은 아마도, ‘탐·진·치 삼독심과 업장’이 조금씩 소멸 되면서, ‘내 마음을 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일게다.
물론 지금도 ‘닦을(수행) 거리’는 나의 생활 속에 많이 존재한다.
“수행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가장 보람된 길·행복의 길이다” 라고 스승께서 말씀 하셨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세상의 깊은 이치를 젊은 나이에 느끼면서, 수행하고 있으니까 나는 정말 행복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 행복감을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닌 모든 이들이 이 같은 마음을 느껴보기를 간절히 발원하게 됐다.
언젠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 선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 중에 이 한마디가 나의 수행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같이 남산의 계단을 오르는 체력 훈련을 할 때 계단 꼭대기를 보면, 몇 계단 오르지 못하고 지친다. 그러나 바로 앞 계단을 보면서, 한 계단만 더, 한 발작만 더 라는 마음으로 훈련하다 보면, 어느새 남산 정상에 올라가 있다”
이 말은 수행하는 이들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또 수행을 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말인 것 같다. 나 역시 이 말을 되새기면서 하루하루 수행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난 앞으로 2010년 5월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100만 독을 향해, 한 독 한 독 정성스런 마음을 담아 독송할 것이다.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 나를 상상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정법 만나서 공부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오늘도 나는 대비주력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감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 스님은 천수대비주를 외워 수행의 기틀을 바로잡은 고승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이었다. 꿈속에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했고,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16세 때 해인사로 찾아가 화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식으로 출가하였으며, 17세 때 의성 고운사의 수월 스님을 찾아가서 소년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당대의 대고승인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를 외울 것을 권하였다.
"지금은 숙업이 무겁고 장애가 많아 견성법을 너에게 일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비주를 부지런히 외우면 업장도 소멸되고 마음도 맑아져서 저절로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대비주만 외우도록 하여라."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님은 대비주를 10만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웠다.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번 외워 마쳤을 때 스님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의문을 일념으로 생각한 지 엿새가 되었을 때, 마치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혀지듯 그 근원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용성스님은 '무'자 화두를 꾸준히 참구하여 확철대오하였으며, 일제의 대처불교에 대응하여 대각교운동을 전개하고 역경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지금은 어디로 가셨는지 확실치 않은데, 신행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1970년대 중반쯤 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전라남도 장성에 가면 백양사라는 절에 서옹 큰스님이 방장스님으로 게셨는데, 그 스님의 상좌입니다. 이 분이 66년도에 서울에서 동국대학교에 다녔는데 학생회에서 해인사로 관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고속버스가 다니지 않을 때라, 국도로 서울에서 9시간이 걸린다고 했을 정도로 장시간 걸리는 그런 여행이었답니다. 그분 성격이 상당히 활달하고 어디 가서 노는 걸 보면 아주 재미있게 잘 노는 분이예요. 노는 데는 꼭 중심 역할을 하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날은 친구들끼리 해인사로 가니까 술도 먹었을 테고, 차 안에서 노래도 부르고 아주 신나게 놀았는가 봐요.
그런데도 그 날따라 그 분은 전혀 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놀든 말든, 열심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다는 겁니다. 그 분이 16살 때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했는데, 그날따라 다라니가 그렇게 잘 되더라는 거예요. 김천을 조금 지나서 계속 앉아서 오니까 다리가 뻐근하고 안 좋더랍니다.
그때만 해도 버스에 안내양이 있을 때인데, 그 안내양 한테 “내가 좀 설 테니까, 이 자리에 좀 앉으세요.” 하고 안내양을 자기 자리에 앉히고는 안내양이 서는 그 출입구에 서서 갔답니다. 가다가 불과 한 20분쯤 지났는데, 차가 그냥 언덕 아래로 구르더라는 겁니다. 한 50미터 가량 되는 언덕에서 차가 굴러버린 겁니다.
차가 몇 바퀴 굴러 가지고 그냥 떨어졌는데, 완전히 납작하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때 45명이 타고 갔는데, 44명이 죽었다는 거예요. 저도 훗날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 신문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버스 사고로는 가장 큰 교통사고였답니다. 1명 남고 다 죽었다는 거예요. 그 한 명이 누구냐, 바로 신행이라는 그 스님입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상처도 거의 안 났더라는 겁니다. 머리에 상처가 조금 나고 팔다리가 좀 뻑적지근한 그런 정도지 거의 상처가 안 난 거예요. 그때 매일신문의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는데, “이건 기적이다. 이렇게 거의 상처가 안 날 정도로 한 사람이 살았다. 이건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다.”는 그런 내용의 기사를 썼습니다.
신행이라는 그 스님은 훗날 월남전에 청룡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는데, 월남에 가서도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는 겁니다. 한번은 전 중대원이 세 명을 남기고 다 몰살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 세 명 중에 그 신행 스님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훗날 하는 얘기가 자기는 불사신(不死身)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 번 사선(死線)을 넘어도 안 죽고 이렇게 멀쩡하니, 이것은 자기 명(命)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야 말로 참으로 염불 공덕이자 주력(呪力)의 공덕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주력을 해서 좋은 공덕을 얻었는데 그냥 있을 수 있느냐, 스님이 되자.” 해서 출가한 그런 스님이었습니다. 그후 강원에 조금 다니다가 일본 유학 갔는데, 그 뒤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괴로움이나 근심 걱정도 신묘장구대다라니만 잘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다라니(진언, 주력) 뿐만 아니라 염불이든 참선이든 참으로 지극하면 그런 대단한 공덕이 있습니다. 참으로 지극하면 그 이상의 공덕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그런 말을 합니다. 염불의 공덕은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려면 일념으로 지극하게 정진해야 됩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염불하는 사람을 침노하지 못해요. 해치질 못해요. 그래서 화살도 오다가 비껴간다고 했어요. 그런 공덕이 바로 염불 공덕입니다.
진언, 주문, 신주의 세가지를 다라니라 하죠... 이러한 구분은 석가 세존께서 다라니를 설하실 때의 신명상서의 이적을 보고 구분하죠. 모든 대승경전이 설해지는 곳은 석가 세존의 몸에서 나오는 금빛 세계 (빛으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화장세계) 라 하죠.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장소이죠.
이러한 법계에서 부처님의 가슴의 만자에서 설해진 것을 진언 (광명의 소리), 부처님의 입에서 설해진 것을 주문(광명의 말씀), 부처님의 머리 정수리 육계에서 설해진 것을 신주(육계에서 화생한 부처님의 광명인 의밀) 로 분류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수경이라는 경전의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수지 독송 공덕에 대해서 석가 세존과 관세음 보살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이 다라니가 수행자를 보호하며 몹쓸 병의 고통으로 부터 해탈케 하며 갖가지 고뇌로 부터 자유롭게 하며 수행이 완전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온전한 수행으로 이끈다.`
이 다라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 언어로 창작된 신비하고 미묘한 힘을 가진 언어이죠.
신묘장구대다라니 뿐만 아니라 모든 다라니는 미묘한 신비를 가지고 있으며 부처님과 불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죠.
저는 처음에 일타스님의 가르침대로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염하는 것 부터 시작했죠.
그 일이 저에게 행운이었죠. 내 자신의 힘이었다기 보다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우연하게도 기본적인
불교 사상과 교리를 접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감합니다. 다라니를 외워지니는 자는 모든 경전을 구해 볼 수 있다는 말씀을. 속으로 이런 부분이 알고 싶다고 생각만하고 이 경전 해설서는 한 권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만하면 얻게 되고 보게 되죠.
제 주관적인 판단과 생각보다는 사실의 서술을 위주로 하겠습니다. 판단은 여러분들이 하세요. 저의 경험을 올립니다.
군대 복무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죠.
어느 겨울 눈내리던 새벽이었습니다. 가끔씩 사고가 나고 하던 부대 내리막길로 차를 몰고 내려오고 있던 중이었죠.
이 정도의 눈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차를 운전하고 내려 왔죠. 그러나 판단과 달리 차는 옆으로 미끄러진 채 한없이 속력이 붙어 도저히 제어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길 끝에는 10 미터 높이의 절벽이 있었고 절벽 앞으로는 조그마한 면회실이 있었죠. 그 짧은 순간에 드는 생각으로도 저 면회실을 부딪히고 절벽 밑으로 떨어져 운이 좋아도 내가 다치고 차가 박살이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짧은 순간이 지났습니다.
제어가 불가능하던 차가 순간 조그마한 사이길로 핸들이 돌려지며 차가 멈추어 섭니다.
시간이 지나고 알았습니다.
그런 기적적인 일 뒤에는 늘 부처님전에서 아무 탈없도록 자식을 지켜주십사하고 기도하던 어머님이 있었음을....
천수경(千手經)에는 관세음보살님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을 찬탄한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가 있는데 예로부터 이 다라니를 주력하여서 신통가피(神通加被)를 얻은 분이 많이 계신데 구한말 동학사 조실(東鶴寺 祖室)로 계시던 경봉 강백(鏡峯 講伯) 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들으신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얻으셔서 항상 책 없이 강의를 하셨다고 합니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무엇인들 못 이루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이 꼭 떡 설게 쪄놓고 밥 설게 쪄놓고 상대에게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 받으려는 것과 같으니 성취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처음 시작하는 그 마음으로 끝까지 해야 되는데 높은 사다리에서 처음에는 조심조심 내려오다가 한두 칸 남겨놓고 홀짝 뛰어내려서 발목 삐고 뒤로 홀랑 자빠지듯이 뭔가 좀 잘 되어간다 싶으면 그만 안일에 빠져 기도를 쉬어서 스스로 장애를 일으켜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기도란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면밀히 이어서 해야지 조금 하고서 ‘이만하면 되겠지’하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떡이 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법(法)도 통하고 모든 세계의 관세음보살님과도 다 통하게 되어 있으니 나의 정성이 부족함을 항상 살피고 걱정해야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고 없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고파 울 듯이 전후사정 생각 없이 기도만 하십시오.
BBS불교방송과 대성사 주지 법안 스님이 함께 이끌고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이 불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철야정진에 참가한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면서 기적처럼 시력을 회복한 주인공은 법명이 의륜(52·서울)인 김 모씨.
김 씨는 지난 92년 포도막염에 의해 시신경이 죽는 병을 얻어 시력을 상실했다.
지난 2월까지 꼬박 13년 넘게 시력을 잃은 채 살아가면서 때론 좌절하고, 때론 상실감에 쌓이기도 했던 김 씨는 우연히 불교방송을 청취하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 소식을 듣고
2월 10일 경북 예천 서악사와 3월 18일 강화도 적석사에서 진행된 제14차·제15차 철야정진에 참가했다.
꿈에 관세음보살님을 현몽했던 터라 무엇인가 삶의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철야정진에 참가해 법안 스님의 지도에 따라 일념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송을 했다.
그리고 철야정진을 다녀온 후 차츰 눈이 밝아지더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각장애 1급으로 장애인증까지 소지하고 있는 김 씨는 자신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변화에 놀라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았으나, 의학적으로 시신경이 회복된 상황은 아니었다. 병원 측 역시 기적 같은 일이라며 의아해 할뿐이다.
이에 김 씨는 “불교방송과 법안 스님이 주관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에 참가한 덕에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며 자신의 시력회복이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 덕분임을 굳게 믿었다.
김 씨는 특히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 준 불교방송 사장님께 감사드린다”며 철야정진 프로그램 운영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5. 언제 어디서나 발심한하면 할 수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수행
홍정화(일지행)/법계사 신도
부처님과 인연이 닿아 불교를 믿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한 15년 전부터였다. 집안에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우환이 그치질 않았는데 부처님께 절하고 『법화경』을 사경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러다 3년 전부터는 전적으로 다라니 수행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천수경』을 108독 한 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읊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다라니 수행은 하루 종일 계속된다.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도, 외출을 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다라니의 한 구 한 구가 지나간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는 소리 높여 외지만 사람들이 있을 때는 속으로 왼다. 또 어떨 때는 사경과 병행할 때도 있다. 그리고 역시 『천수경』을 108번 독송한 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런 식으로 다라니를 염하면 보통 하루 300독 이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 1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가서 부처님 전에 108배를 드린 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21독 하는 식으로 철야 기도를 하고 있다.
절이나 사경을 하다가 다라니로 수행법을 바꾼 데는 이유가 있다. 절이나 사경이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는 데 반해 다라니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발심하기에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다라니를 외는 것도 모자라 꿈에서도 다라니를 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간혹 스님들이 화두를 주며 권하기에 참선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맞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 근기가 모자란 탓인지 참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잡념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다라니를 수행할 때면 5분만 지나도 깊은 삼매경에 빠지곤 한다. 아무런 사념 없이 어디론가 빠져들어가는 느낌, 충만함과 황홀함을 느끼며 집중이 잘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모든 악업을 참회하고 뭇 중생의 안위를 기원하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읊으면 불망염지(不忘念智)를 얻는다고 한다. 경전 공부를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수월 스님이 다라니만 주력한 결과 불망염지를 얻어 절을 찾는 신도들의 신상명세를 일일이 외웠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라니 수행이 다른 수행과는 달리 매우 영험하고도 위험한 것이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 개의치 않는다.
불교 수행에서 어떤 것이 더 영험하고 어떤 것이 위험하다는 식의 말은 옳지 않다. 단지 자신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수행법이 따로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선택해서 전문가의 지도를 받는다면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가끔은 나도 소위 마장이라는 것에 꺼둘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님들께 가르침을 청한다. 그렇게 고비를 넘기면 한 단계 성숙된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느낀다.
다라니를 외고 있을 때만이 아니다. 실생활로 돌아와서도 다라니 수행의 효과는 없어지지 않는다. 얼마 동안 다라니를 수행하고 나니 타인을 대할 때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를 대하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웬만한 일에는 화도 잘 내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처음에는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다라니를 외던 것이 어느덧 남을 위한 수행이 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좋은 수행법을 포교해야겠다는 원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중심이 서면서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진 것이다.
그렇듯 내가 다라니 수행에 전념하며 밝고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되자 주위 사람들도 감화를 받았는지 다라니 수행을 하겠다고 하나 둘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그런 분들과 함께 신묘회(신묘장구다라니회)라는 모임을 갖고 정기적으로 다라니 수행을 한다.
다라니 수행으로 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한다. 이를 회향하기 위해서라도 다라니 수행을 통한 포교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다.
출처: 월간 불교와 문화 (www.buddhistculture.co.kr) 2007년 12월호
마침 제가 쉬고 있는 중에 오셨기에 다담을 나누던 중, 본인이 기도의 명훈가피를 입고 있음을 제게 말씀하면서 누누이 감사함을 표하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법회 때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십만 독을 하시면서 가피를 입으셨다는 거사님 말씀을 드렸던 걸로 아는데 바로 그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다라니 주력을 하고 계시는데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지셔서 주변사람들이 자기를 보더라도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입술도 안 움직이면서 다라니 주력을 하고 계신다며 현재 19만 2천송을 하셨다면서 기도 중에 당신이 얻은 명훈가피에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주신 스님께 일차로 이 기쁨을 말씀을 드리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거나 방생을 갈 때 버스에서 기사님들이 틀어주는 모든 독경테이프가 바로 이 거사님의 회사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제가 묻기를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묻자, 신묘장구 대다라니 19만송을 끝내는 날 새벽에 비몽사몽에 어떤 노스님이 가까이 오시기에 큰스님을 뵙는 것만 같아서 자신이 하고 있는 다라니 주력을 자랑스럽게 노스님께 들려드렸더니 “그만하면 잘한다!” 하시면서 사라진 후, 거사님의 조부님께서 산에서 잡아왔다면서 산짐승 두 마리를 마당에 내려놓고 먹으라는 몸짓을 하고는 사라지시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서도 참 이상하다? 하고 있었는데, 함께 사업하던 사람이 경쟁하는 사람을 견제하고자 거사님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해서 서준 적이 있었는데 그 증거가 그 사람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증거로 서로 감정이 안 좋았을 거라고 여겼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지금 당신 법인 등록 상표가 재등록 신청을 하지 않아서 말소되어 있는데 그 상표를 당신이 절친하게 여기는 동업자가 당신도 모르게 자신이 상표등록을 하려고 한다면서 관계되는 모든 서류를 보내 줄 터이니 조사해보라며” 귀띔을 해주더란 것입니다.
설마? 하면서 관계기관에 문의해봤더니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이었다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장과 회사가 하마트면 문을 닫게 될 뻔 했고, 심지어 사업을 계속하려면 자신의 로고를 자기도 모르게 재등록한 동료였던 사람에게 사용료를 지불해가면서 하게 되는 아찔한 상황이었다면서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고 모든 일을 정상화 시켜 자신의 권리를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절친했던 친구의 빚보증을 서주고 부도 처리되어 생전에 알지도 못하는 음반사업에 뛰어들게 되어 집도 날리게 되고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저를 만나 제가 시키는 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다라니를 염송하던 중 갈마터널을 지나는 순간에 십만 송을 마무리 하자 분당에 집이 시세보다도 더 많이 받으면서 매매가 이루어지고 아들은 고려대에 편입을 하더니 그토록 입사가 어렵다는 기숙사에 입사하고 알오티시 훈련에 5등으로 마치고 딸은 교육대학에 재입학해서 입학 장학금을 받더니 이번에는 성적으로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스님 덕분이라서 제게 젤 먼저 인사를 하러 왔다기에 제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기도하는 신심을 심어주시는 것이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 같으면 아마 간증하러 다닌다고 난리를 피웠을 것입니다.
거사님은 자신의 사무실에 제가 관을 해주었던 불상을 모시고 출퇴근 시마다 지극하게 발원을 하고 길거리를 지나다 차에 깔려 죽은 축생들이 있으면 혼자서 염불을 하면서 치워주고 가기를 여러 번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상표를 훔쳐가려던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포용하려 애쓰고 원칙을 지키며 서로 잘 살아보자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지극하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두려울 것이 없고 언젠가는 발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곳 주지 임기가 내년 3월에 끝나게 됩니다만, 이젠 저도 당간을 걸어둘 회상을 마련하려는데도 아직은 인연이 닿질 않고 있으나 조급하거나 답답한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왜냐?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지극하게 하고, 부처님 밥값을 하고 있는 저에게 아직까지 인연도량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제가 가야할 인연처가 있음을 암시 하는 것만 같고 제가 할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저와 인연된 여러분들께서는 새로운 불교를 접하셨으리라 스스로 자위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만의 생각입니까?
이곳에서 저와의 인연이 아직은 남아있으니 부처님께서 2552년이 지난 후대의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셨던 “일체가 마음 한 번, 생각 한 번에 행복과 불행이 나누어지고 내 마음 안에서 내가 끝없는 윤회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깨달아 스스로가 윤회를 벗어나고 행복의 주인이 되는 지혜로운 방법을 함께 공부해 나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Most Sacred Heart of Jesus, have mercy on us.
<예수 성심 공경의 중요성>
예수 성심을 믿는 마음으로 열성을 갖고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적 신심으로서의 정신적 측면이다.
(1) 그리스도를 깨닫고 알기 위해 주님의 생애, 수난, 성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의 성심을 사랑하도록 힘써야 한다.
(2) 예수 성심을 사랑해야 한다. 성심의 사랑은 특별히 성체성사에 담겨 있으니 성체 앞에서 조배드리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공경해야 할 것이다.
예수 성심을 믿고 생활하는데 있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심이다. 외적 신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몇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 성심 대축일 : 성체성혈대축일 후 금요일을 축일로 정하고 배반당하신 성심을 위로한다.
(2) 첫 금요일: 매달 첫 금요일에 미사에 참여하면서 예수의 수난과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팽개쳐져 있는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보상하는 지향을 두고 영성체하기를 아홉 달 동안 계속한다.
(3) 성시간 : 죽음의 고통에서 고민하신 예수님의 수난에 관하여 묵상하거나 합당한 기도를 바친다.
(4) 예수 성심 성월에는 특별히 예수 성심께 자신과 가정을 봉헌하고 기도를 바친다. 예수 성심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 성심을 공경해야 한다. 특별히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할 수 있는 생활을 하도록 주님께 청한다.
<예수 성심의 약속>
1674년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이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성심을 열어 보이시고 죄인들의 냉담과 배은망덕을 탄식하시면서 "적어도 너는 온갖 힘을 다하여 죄인들의 배은을 보속하라"고 부탁하시면서, 그 방법으로 자주 영성체하고 매달 첫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성시간을 가질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다음의 약속을 하셨다.
- 내 성심을 공경하는 자들의 지위에 요긴한 은총을 준다. - 저들의 가정에 평화를 준다. - 저들의 모든 근심 걱정 중에 위로를 준다. - 저들이 살아 있을 때와 특히 임종시에 저들의 의탁이 될 것이다. - 저들이 경영하는 모든 사업에 풍성히 강복할 것이다. - 죄인들은 내 성심에서 무한한 인자의 샘과 바다를 얻을 것이다. - 열심한 자는 빨리 완덕에 나아갈 것이다. - 내 성심 상본을 모시고 공경하는 집안에 강복할 것이다. - 사제들에게는 극히 완악한 마음이라도 감화시키는 은혜를 줄 것이다. - 내 성심 공경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내 마음에 새겨 없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 누구든지 9개월 계속하여 첫 금요일에 영성체하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통회의 은혜를 주어 은총 지위에서 죽게 할 것이다.
<예수 성심 호칭기도>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늘에 계신 천주 성부님
● 자비를 베푸소서.
(다음은 같은 후렴)
○ 세상을 구원하신 천주 성자님
천주 성령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영원하신 성부의 아들이신 예수 성심
동정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성심
영광과 위엄이 가득하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성전이신 예수 성심
지존하신 이의 장막이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신 예수 성심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나눔과 베풂의 그릇이신 예수 성심
자비와 인정이 넘치시는 예수 성심
모든 덕행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
지극한 찬미를 받으실 예수 성심
모든 마음의 중심이요 임금이신 예수 성심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신 예수 성심
천주성이 충만하신 예수 성심
성부의 기쁨이신 예수 성심
풍부한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 성심
죽은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 성심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는 예수 성심
모든 이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예수 성심
생명과 성덕의 샘이신 예수 성심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성심
극도의 모욕을 당하신 예수 성심
저희 죄로 찢기신 예수 성심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성심
창에 찔리신 예수 성심
모든 위로의 샘이신 예수 성심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 성심
평화요 화해이신 예수 성심
죄인들의 제물이 되신 예수 성심
주님께 바라는 이들의 구원이신 예수 성심
주님을 믿으며 죽는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 성심
모든 성인의 즐거움이신 예수 성심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용서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의 성심을 보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바친
성자의 찬미와 보속으로 마음을 푸시어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예수 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기도>
○ 지극히 어지신 구세주 예수님,
주님 앞에 꿇어 경배하오니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 저희는 이미 주님의 백성이오니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나이다.
주님과 하나 되고자
오늘 저희를 주님의 성심께 봉헌하나이다.
○ 주님을 일찍이 알아 모시지 못한 사람도 많고
주님을 알고도 주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주님을 떠난 사람도 많사오니
● 지극히 인자하신 예수님,
이런 사람들도 다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성심께 이끌어 들이소서.
○ 주님께서는 목자이시니
주님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살피시고
이미 주님을 떠난 사람들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어
굶어 죽는 일이 없게 하소서.
●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나
불목하여 갈린 사람들도 부르시어
저희가 모두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한 우리에서 한 목자 밑에 살게 하소서.
○ 주님, 거룩한 교회를 평화의 깃발로 세우시고
모든 나라에 참된 평화를 주시어
온 세상 어디서나 입을 모아
저희를 구원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원히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드리게 하소서.
◎ 아멘.
○ 예수 성심,
●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예수 성심께 바치는 봉헌기도>
○ 지극히 어지신 구세주 예수님, 주님 앞에 꿇어 주님의 성심께 저희 성당 (병원, 학교…… ) 을 봉헌하나이다.
●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희 성당 ( 병원, 학교…… ) 을 보살펴주소서. 저희는 온전히 성심께 의지하고 바라오니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다스리소서.
○ 예수님, 저희가 하는 일에 강복하시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게 하소서.
● 온 세상 어디서나 모든 이가 입을 모아 예수 성심을 찬미하며 사랑과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 아멘
<예수 성심이 받으신 모욕을 갚아 드리는 기도>
○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의 예수 성심,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나 그들은 주님 사랑을 잊고 소홀히 여기며 주님 사랑을 배반하나이다. 이제 저희는 주님 제대 앞에 엎드려, 악인들이 곳곳에서 주님 사랑의 성심을 가볍게 여기고, 모욕하는 바를 특별한 공경으로 갚아드리기를 원하나이다.
● 하오나 주님, 저희도 그런 죄가 없지 않겠기에 먼저 주님 앞에 뉘우치며 주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나이다. 저희가 지은 죄를 보속할 뿐 아니라, 구원의 길을 멀리 떠나 방황하는 자들과, 주님을 목자와 으뜸으로 섬기지 않고 믿지 않는 죄를 고집하는 자들과, 세례 때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주님 계명을 잊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이 범한 죄를 진심으로 갚아 드리고자 주님 앞에 나왔나이다.
○ 주님을 거슬렀던 부정한 행위와, 무죄한 영혼들을 나쁜 길로 이끄는 악한 표양들과, 주일과 축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함과, 주님과 주님의 성인들을 모욕하는 말들과, 사랑의 성사를 가볍게 여김과, 주님이 세우신 거룩한 교회의 권리와 가르침을 무시하였던 모든 죄를 눈물로 흘리며 갚아 드리려 하나이다.
● 이제 저희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킨 모든 죄를 갚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성부께 드리신 보속과, 날마다 제대 위에서 다시 드리시는 희생을,성모님과 모든 성인과 함께 주님께 바치나이다. 저희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배반한 죄를 대신하여 믿음을 굳건히 하고 바른 행동을 하며,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애덕을 닦으며,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주님 은총에 힘입어, 죄인들이 주님을 모욕할 것을 힘써 막으며, 그들을 회개시켜 주님을 따르게 하겠나이다.
○ 청하오니 지극히 인자하신 주 예수님, 복되신 성모님의 보속과 전달을 보시어, 저희가 자원하여 바치는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또한 저희들로 하여금 죽기까지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게 하시며, 끝까지 항구할 수 있는 특은을 주시고, 마침내 저희와 모든 이들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예수 성심께 마음을 드리는 기도>
(자신의 마음을 공손히 드려 주님의 마음에 합하기를 구하라.)
○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주님은 사랑의 샘이시며, 성삼의 궁전이시고, 부활의 근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하시려는 열정으로 피를 다 쏟으시고, 그 뜻은 늘 새로워 영원히 그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희생되시어 만민을 구하시고, 음식이 되시어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십니다.
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그 누가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불은 불을 가져오고 정은 정을 부른다고 하였는데,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주님의 정은 불과 같이 뜨거우신데 저의 마음은 얼음같이 차갑기만 하고, 주님의 마음은 옥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우시나, 저의 행실은 더럽고, 주님께서는 가시관을 쓰이며 희생하시지만, 저는 고운 베개에 평안히 쉬기만을 원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시지만, 저는 작은 괴로움도 견디지 못하니, 제 마음은 어떡해야 할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옵니다.
주님, 주님의 마음이 돌이 아니신데 어찌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은 진정 성심의 사랑을 저버린 마음이옵니다.
● 지극히 선하신 예수님, 주님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마음은 마음이라 할 수 없고,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밝으신 예수님, 제 마음을 보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주님의 성심은 알고 계십니다. 온전히 아름다우신 예수님, 저는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기로 맹세하오나, 저의 사랑이 부족하오니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제 마음이 차오니 주님 성심의 불로 뜨겁게 해주소서.
○ 주님, 제 힘으로는 아무일도 할 수 없사오니, 주님 마음에 의지한다면 불가능할 일이 없습니다. 이제 저의 소망은 제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같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좋아하시는 것을 저도 좋아하고, 주님의 마음이 싫어하는 것은 저도 싫어하며, 주님의 마음이 생각하시는 것을 저도 생각하고, 주님의 마음이 원하시는 것을 저도 원하게 하여 주소서.
사랑의 성실함은 말에 있지 않고 오직 행위에 있사오니, 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성심의 빛으로 비추시어,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살게 하시고, 성심의 사랑의 불로 뜨겁게 하시어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죽게 하소서. 주님의 가시관을 저에게 씌워 주시어 세속의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고, 주님의 괴로움을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로 저를 덮어주시어 그 값을 알고 그 맛을 맛 들여 품에 안고 놓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의 쇠못으로 저를 신, 망, 애 삼덕에 못 박으시어, 굳은 믿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항상 바라고 변하지 않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이 그치지 않게 하소서.
● 거룩하신 예수 성심,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상처를 받으셨나이까. 죄 많은 제가 상처 받아야 마땅하오나 저를 위하여 성심께서 상처를 받으셨으니,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같이 상처받아 늘 간직하게 하시고, 아픔을 사랑하여 항상 떠나지 않게 하소서.
○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 제 마음이 이미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마음도 이미 제가 얻었사오니, 이제부터 주님의 성심은 제 행위의 근원이요, 근심의 위로요, 병의 나음이요, 즐거움의 원천이요, 마지막 희망이요, 죄의 사함이요, 덕의 영광으로 삼겠사오니, 저를 도와주시어, 주님과 함께 착하게 살고 착하게 죽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상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 아멘.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공경하며 성심 공경 전파를 위하여>
○ 예수 성심, ●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다섯 번 반복)
† 예수 성심께
○ 온갖 선과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예수 성심 ● 제 마음의 악을 없애 주시고 선으로 채워 주소서 ○ 사랑으로 공경 받으실 예수 성심 ● 저희에게 당신께 향한 열정으로 살게 해 주소서 ○ 마음이 선하신 예수 성심 ● 제 마음을 선하게 해 주소서. ○ 마음이 겸손하신 예수 성심 , ● 제 마음도 겸손하게 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