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허 바바(Meher Baba, 1894-1969. 근대 인도의 성자)는 위대한 일을 했다. 그는 뿌나poona 근교에 살던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예전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는 수년 동안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직 이 일에 전념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미친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 미친 사람들은 그대보다 낫다.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학교가 없다면, 도움을 주는 스승이 없다면 그대는 이 중간 지점에서 헤맬지 모른다. 스승이 그대를 도와 끌어내 준다. 이 황무지 같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능력으로 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대만의 힘으로는 어렵다. 때로는 우연히 빠져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미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은 내게 올때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럴 때 나는 측은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이 문제다. 강요하면 할수록 그는 도망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심 나는 측은함을 느낀다. 나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
신神은 에너지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 에너지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신神은 엄청나게 활발하고 무한한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대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러므로 신神을 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제게 오십시오” 하고 신을 초대하기 전에 어떻게 준비를 갖추느냐 하는 것이다.》
그대는 아주 작지만 신神은 말할 수 없이 광대하다.
《이것은 물방울 하나가 바다 전체를 초대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언제 밀려올지 모른다. 물방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물방울은 바다를 수용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다면 무한한 바다가 밀고 들어와도 물방울은 깨지지 않는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종교, 요가, 탄트라 등 뭐라고 이름 붙여도 좋다.
《그대의 관념에 따라 신神을 보지 마라.》
《유태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따위는 버려라.》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지식의 차원에 매달린다. 그대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신神은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신神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
《미묘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신神에 대해 직접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그 모두가 가르침을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대에게 개념과 이론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신神은 개념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신은 가설이 아니다. 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신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려라. 그래야만 첫걸음일 뗄 수 있다. 아무런 개념도 없이, 아무 옷도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채 신에게로 가라.
《아무런 관념도 없이 텅 빈 가슴으로 신神을 향해 나아가라.》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텅 비었을 때 그대는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된다. 필요한 것은 수용성뿐이다. - 오쇼 라즈니쉬
자비·지혜·생명이 최고, 불교 3개 경전의 가르침 영원 불멸의 가치 지닌 생명이야말로 으뜸 보물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2019.12.24 18:59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고민할 때마다 불교의 세 가지 경전을 곱씹는다. 첫째는 유마경(維摩經)이다.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 거사는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비판적인 정신을 대표한다.
유마힐 거사가 병이 든 것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기(同苦) 위함이었다. 이는 자비 정신의 실천이다. 유마힐 거사는 문수보살과 대화하면서 “어리석음·탐욕과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모든 중생의 병이 나을 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고 했다.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 삶의 덕목과 지향 가운데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서술한 경이 유마경이다.
둘째는 반야경(般若經)이다. 반야는 ‘공(空)’을 ‘관(觀)’하는 데서 얻는 지혜이다. 공은 아공과 법공으로 나뉜다. 아공은 중생을 색·수·상·행·식의 5가지 요소가 임시로 조합되어 이루어진 존재라고 본다.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중생은 오온의 일시적인 화합에 불과하다는 뜻)의 인간에게 ‘나’라고 주장할 만한 영원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이라고 한다. 법공은 오온 등 법의 근거가 공(空)함을 뜻한다.
공이란 있다고 보면 없고, 없다고 보면 있는 교묘한 우주의 법칙이다. 반야경의 핵심 경문 중 하나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삼라만상 모두 생로병사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색은 물질을 의미한다. 인간도, 지구도, 태양도, 은하도, 우주도 생로병사를 거역할 수 없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사멸한 별의 잔해에서 새로운 별이 중력의 작용으로 재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死)에서 생(生)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부증부감(不增不減)하므로 창조보다는 진화에 가깝다. 반야경의 핵심 경문인 ‘부증부감’은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공이라고 본다. 이는 우주는 생멸(生滅)을 반복할 뿐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들려준다. 우주는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생멸·변화를 계속할 뿐 증감이 없다는 의미다.
현대 천문학계에서 주장하는 빅뱅이론(우주는 갑자기 대폭발로 탄생했다는 이론)과는 명백히 배치된다. 어쨌든 과학의 발전에 따라 더 많은 것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셋째는 법화경이다. 법화경을 살펴보면 테마는 생명이다. 묘법연화경에서 부처는 머나먼 과거부터 미래 영겁에 걸쳐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다. 그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모든 인간이 부처의 깨달음을 열 수 있다는 대도(大道)를 보이기 위함이다. 그 대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경전의 핵심이다.
법화경은 생명의 영원함을 최고 가치로 상찬한 경이다. 법화경에서 설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내용을 생각해보자. 제법(諸法)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을 의미한다. 그 현상의 이면에 모두 묘법연화경이라는 생명의 실상(實相)이 있다는 내용이다. 생명의 가치는 우주에 가득한 보배로도 바꿀 수 없는 숭고하고 존엄한 것이라고 상찬한다. 모든 현상은 묘법연화경이라는 생명의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생명의 다른 이름(異名)이 묘법연화경이라는 뜻이다.
특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는 ‘석존이 구원부터 부처였다’는 획기적인 선언을 하며 생명의 영원함에 대하여 설한다. 석존은 카필라성에서 출가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부처가 되었다고 대중에 알려진 것과 달리, 구원부터 부처였다는 것이다. 핵심은 생명이야말로 영원불멸의 보석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의 뜻을 풀어보면 여래의 수명이 무량하다는 뜻이다. 경문 내용 중 ‘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 阿僧祗劫(내가 진실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아승기 겁이니라)’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아(我)는 석존이며 또 십법계의 아(我)이다. ‘我本行菩薩道 所成壽命 今猶未盡 復倍上數’는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바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으며 다시 위의 수보다 배이니라”는 의미다. 이는 생명의 영원함을 표현하고 아(석가)는 구원 때부터 부처였고 현재도 부처이며 미래에도 부처라는 뜻이다.
생명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며 본래 존재하며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구원원초부터 영겁의 미래까지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며 이 생명 자체가 부처이고, 그것이 실상이며, 석존이 깨달은 최고의 지혜라는 것이다.
자비와 지혜와 생명의 가치를 따져보자면 모두가 최고의 중요한 보물과 같지만, 필자는 그중에서도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법화경》의 해석에 의하면 《법화경》은 본문과 적문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경우 본문의 중심은 여래수량품이고, 적문의 중심은 방편품이 된다.
현대의 《법화경》 연구가들과 달리 중국의 《법화경》 연구가들이 본문의 핵심을 여래수량품에 둔 것은 시공을 초월해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여래가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근본이나 주축을 지칭한다면 적문은 현상이나 방법을 의미한다.
본질이란 언어나 감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현상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본질의 움직임과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언어나 개념에 의해 파악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양한 현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항상 드러내고 있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적 수행을 통해 체험하거나 통찰력을 개발해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들이 그러한 본질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규격화된 언어나 개념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어느덧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나 개념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교운동가들은 이러한 본질을 알려주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세속제와 진제로 설명되거나 아니면 삼매를 통한 교감 등이 강조된 배경이다.
“본질이란 언어나 감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종교적 세계를 논리나 개념에 의해 파악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그러한 점에 적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세계는 이미 논리적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만일 종교의 궁극적 세계가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면 그때는 종교의 차원이 아닌 철학적 차원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의 입장이 다른 것은 여기에 있다.
불교에선 궁극적 본질의 세계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진여, 불성, 법성, 실제, 일승, 불승 등등이다.
서양에선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를 神(신)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유일자나 절대의 세계 등으로 말하거나 야훼, 神(신) 등으로 표현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 역시 궁극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만 그의 존재는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독특한 언어나 기호에 의해 교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서양 근대의 실존철학자 하이데커의 기호론도 동일한 맥락에서 신을 설명하고자 한다. 일상 신과 교감하기 위한 특별한 언어는 바코드를 비롯해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이미 오염되어 있으며, 특별한 개념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종 역시 송나라 시대에 들어오면 특별한 기호에 의해 절대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서양에서 말하는 기호론 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미 유사한 사고의 유형이 등장하고 있다.
《법화경》의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오랜 시간 이전에 이미 성불했으며, 무수한 시간을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성불한 지는 이 보다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겁이나 더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비유적으로 “산수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부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적인 속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생명의 가치나 생명의 빛을 ‘불성’이나 ‘부처님’으로 말하기도 한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자기의 몸을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거나 다른 이의 일을 보이나니, 설하는 모든 말은 다 허망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며, 다양한 존재들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래의 부처님이 드러낸 다양한 모습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된다.
혹자는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유신론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그러한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래수량품의 부처님은 구제불이며, 창조불은 아니다. 세상을 창조한 근원자로서의 부처의 속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을 실체론적으로 접근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길고 긴 불교의 역사 속에서 부처님에 대한 이상은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교사로서의 부처님, 그리고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인격화 내지 신격화된 부처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신불이나 반야지를 상징하는 부처님 등이 그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반야지의 속성이나 법신불의 속성이 융합된 부처님이다.
반야지나 법신을 하나로 융합한 여래수량품의 부처님을 《법화경》에선 일승이나 불성으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의 부처님은 실체적인 본질은 아니다. 만일 실체적인 본질이라 말한다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설과 배치될 것이다.
그러나 실체적인 속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생명의 가치나 생명의 빛을 불성이나 부처님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것을 인격적인 표현으로 부처님이라 말하며, 물리적으로는 빛이라 표현하는데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한다는 종교적 감성을 전해준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이념이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인도 당시의 다양한 사상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이 구제불로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힌두교의 권화(權化)사상을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질은 요지부동이지만 다양한 권화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 구제한다는 논리의 전개가 그렇다.
그러나 중국의 법화사상가들은 다른 입장에서 여래수량품을 중시하고 있다. 즉 중국에는 도(道)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고 있었으며, 그 도는 우주 만물의 근원자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개념이나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도는 우주를 창조하기도 하며, 보편적 존재로서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비슷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런 도를 중국 사람들은 본질이란 의미에서 체(體)라고 표현하고, 모든 현상은 본질의 작용이란 의미에서 용(用)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본질은 작용에 의해 파악이 가능하며, 작용에 의거하지 않으면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로 체와 용을 설명했다.
그런데 《법화경》이 중국에 소개되었을 때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말하는 도의 개념과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중국인들은 여래수량품을 중시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법화경》을 해석하는 고전적인 방식인 본적론은 중국 전통의 체용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미 견보탑품이나 종지용출품에서 말했듯이 부처의 본질적 속성인 진여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며,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하나일 수 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영원한 부처는 “생사를 초월해 존재하고, 짧고 길다는 범주를 초월해 있으며, 법신은 형태나 시간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길장의 설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국적인 해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법화경 그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보살들과 일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께서 진실하게 밝히시는 말씀을 믿고 이해하라." 다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께서 진실하게 밝히시는 말씀을 믿고 이해하라." 또 다시 부처님께서는 여러 대중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께서 진실하게 밝히시는 말씀을 믿고 이해하라." 이 때 그 보살 대중 가운데 미륵보살이 상수가 되어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나니 설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받으오리다. 이렇게 세 번이나 여쭈오니 세존이시여, 설하여 주시면 저희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받으오리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보살들이 세 번이나 청하여 그치지 않을 것을 아시고,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여래의 비밀한 신통력을 자세히 들으라.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 그리고 아수라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은 석씨 왕성을 나와 가야성 가까운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선남자들아, 내가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비유하면,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 삼천대천세계를 어떤 사람이 모두 가는 티끌로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동방으로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티끌씩을 떨어뜨림과 같으니라. 이렇게 동방으로 행하여 그 많은 티끌이 다했다면 선남자들이여,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와 같이 많은 국토를 사유하고 헤아려서 그 수를 알 수 있겠느냐?" 미륵보살 등이 대답하여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 국토는 한량없고 가없어 산수(算數)로도 알 수 없고 생각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일체 성문과 벽지불이 번뇌[漏] 없는 지혜로 사유하더라도 그 한계의 수를 알 수 없으며, 저희들이 아유월치(阿惟越致)에 머물지라도 이런 일은 알 수 없으니,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많은 국토는 한량없고 가이없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보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하겠노라. 만일 티끌을 떨어뜨린 국토나 그렇지 않은 국토를 다 합하여 티끌로 만들고 그 하나하나의 티끌을 1겁이라 하여도, 내가 성불한 지는 이보다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겁이나 더 오래되느니라. 그로부터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하여 교화했고, 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 국토에서 중생을 인도하여 이익되게 하느니라. 선남자들이여, 이 중간에서 내가 연등불(燃燈佛)63) 등에게 설하였고, 또 그의 열반을 설하였으나,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방편으로써 분별함이니라. 선남자들이여, 만일 어떤 중생이 나를 찾아오면, 나는 부처의 눈으로 그의 신심과 모든 근기의 날카롭고 둔함을 관하여 제도할 바를 따라 곳곳에서 설하되, 이름이 같지 아니하며, 연대가 많고 적으며, 또다시 나타나 열반에 든다 하고, 또 가지가지 방편으로 미묘한 법을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환희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리라.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모든 중생들이 작은 법을 즐겨 덕이 엷고 업장이 무거운 것을 보고, 이런 사람을 위하여 나는 젊어서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성불한 지는 이와 같이 오래이고 멀지만,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해서 부처님 도에 들게 하려고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여러 선남자들이여, 여래가 설한 경전은 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니, 자기의 몸을 설하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의 몸을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거나 다른 이의 일을 보이나니, 설하는 모든 말은 다 허망함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참답게 알고 보아 나고 죽음에 물러나거나 나옴이 없으며, 또 세상에 있거나 멸도함도 없으니, 진실도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삼계를 삼계 같지 않게 보나니, 이런 일을 여래는 밝게 보아 그릇됨이 없건만, 중생들이 다만 가지가지 성품과 가지가지 욕망과 가지가지 행과 가지가지 생각하는 분별이 있으므로, 모든 선근을 내게 하려고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 가지가지 법을 설하며, 부처님의 일을 하되 일찍이 쉬어 본 일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나는 성불한 지가 매우 오래되어 수명이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느니라. 선남자들이여,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지금도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위에서 말한 수의 배나 되지만, 참 멸도가 아닌 것을 방편으로써 멸도를 취한다고 말하나니, 여래는 이런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왜냐 하면 만일 여래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것을 말하면, 박덕한 사람들은 선근을 심지 않아 빈궁하고 하천하며, 5욕을 탐착하여 생각하는 것들이 허망한 그물에 걸리게 될 것이며, 만일 여래가 멸하지 않고 항상 있음을 보면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어 싫증을 내고 게으름을 피워 만나기 어려운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므로 여래는 방편으로써 설하느니라.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라. 여러 부처님들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심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우니라. 왜냐 하면 이런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 여러 비구들아, 여래를 만나 보기가 어렵다고 하면 중생들이 이 말을 듣고 부처님 만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마음에 연모하는 생각을 품고 부처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여 곧 선근을 심으리라. 그러므로 여래는 비록 멸도하지 않지만 멸도한다고 말하느니라. 또 선남자들이여,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이 다 이와 같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모두 진실이요 허망함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어떤 의사가 지혜 총명하고 통달하여 좋은 처방과 좋은 약을 만들어 여러 가지 병을 잘 치료했느니라. 그 의사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으니, 열, 스물 내지 백 명이나 되었다. 아버지가 볼일이 있어서 다른 나라에 간 뒤, 여러 아이들은 독약을 잘못 마시고 약 기운이 번져서 정신이 어지러워 땅에 쓰러져 있었다. 이 때 그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니, 여러 아이들이 독약을 마시고 본심을 잃기도 하고 혹은 아직 본심만은 잃지 않은 이도 있었다. 멀리서 아버지가 오는 것을 보고 다 크게 환희하여 무릎 꿇고 절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안녕히 다녀오십니까? 저희들이 어리석어 독약을 잘못 마셨으니 구원하시어 다시 생명을 얻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는 자식들의 고통이 이와 같음을 보고 여러 가지 처방으로 좋은 약초의 빛과 향과 맛을 다 갖추어 방아에 찧고 체로 쳐서 아이들에게 먹이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좋은 약이다. 빛과 향과 맛을 아주 잘 맞추었으니 너희들이 먹으면 그 고통이 빨리 낫고 다시는 다른 병에 걸리지 않으리라.' 그 가운데 본심을 잃지 아니한 아들은 그 약이 빛과 향이 갖추어 있음을 보고 좋아하면서, 곧 이 약을 먹어 병이 나았다. 본심을 잃은 아이들은 아버지가 오는 것을 보고 비록 환희하고 문안드리며 병 치료를 원했으나, 그 약을 먹지 않았으니, 왜냐 하면 독기가 깊이 들어 그 본심을 잃었으므로 이같이 좋은 빛과 향으로 갖춘 약을 좋지 않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아버지는 생각하였다. '이 자식들이 참으로 불쌍하구나. 독약 중독으로 마음이 다 뒤집혀 나를 보고 기뻐하며 병의 치료를 원하지만 이렇게 좋은 약을 먹지 않으니, 내가 이제 방편을 베풀어 이 약을 먹게 하리라.'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하였느니라.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내 이제 늙고 쇠약하여 죽게 되었거늘, 이 좋은 약을 여기에 남겨 두니 이것을 먹을 때 차도가 없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타일러 놓고 다시 다른 나라에 가서 사자를 본국의 아이들에게 보내어 그대들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였느니라. 이 때 그 여러 아들들이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 하며 생각하였다. '만일 아버지께서 계시면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여 구원해서 보호하시련만, 이제 우리를 버리고 멀리 타국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우리는 외롭구나. 이제는 다시 모실 수도 없도다.' 그러면서 항상 슬픔에 잠겨 지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음이 깨어나 이 약의 빛과 맛과 향기가 좋은 것을 알고 곧 먹으니 병이 다 나았느니라. 그 아버지가 아이들이 약을 먹고 다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와 이들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여러 선남자들이여,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누가 이 의사를 허망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이와 같아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겁이지만, 중생을 위하여 방편의 힘으로 멸도를 말하고 있으나 능히 법과 같이 설하였으므로, 나를 허망하여 허물이 있다고 하지 않으리라."
힌두교의 신.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중요한 신이다. 인도가 아닌 외국에도 유명한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 발라라마의 이복동생이다.
2. 상세 힌두교의 비슈누파(派)에서 비슈누 신은 여러 개의 권화(權化)의 형태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크리슈나로, 현대에 와서도 많은 신자가 있다. 아예 비슈누의 아바타라 중 하나가 아니라 아바타라의 근원인 비슈누 그 자체, 혹은 비슈누를 화신으로 거느리는 진정한 최고신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크리슈나를 최고신으로 섬기는 종파를 바가바티즘이라고 하며 이후 비슈누를 섬기는 바이슈나이즘과 융합되었다.
크리슈나는 다른 힌두신과는 달리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꽤 높은 인물이다.[1][2] 다른 설에는 기원전 7세기 인도의 한 부족에서 태어나, 태양신을 숭상하고 신을 바가바트(Bhāgavat)[3]라 하여, 실천윤리를 중시하는 통속종교를 창도(唱導)했다고 보기도 하는 듯하다.
인도 신화의 많은 영웅들이 그렇듯이 '신들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신들에 의해 태어난 영웅'이라는 면에서 그리스 신화에서의 헤라클레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 4대 종교의 최고신의 분신이자 그 자신이며 종교의 창시자라는 점에서 예수와도 유사점이 있어 '인도의 그리스도'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독립적인 영웅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비슈누 신앙에 동화되어 비슈누의 화신이 되었다.
형제로 쉐샤의 화신 발라라마와 이후 아르주나의 아내가 되는 수바드라가 있다. 수바드라의 아들 아비만유는 크리슈나의 조카가 된다. 자식으론 야다바의 멸망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인 삼바[4]와 카마데바의 환생 프라듐나 등이 있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루크미니[5]를 비롯한 여인 1만 6천여 명과 혼인했다. 이 아내들에도 비화가 있는데, 아수라 나라카가 죽자 그의 포로였던 여인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6] 그래서 크리슈나가 이 여인들을 돕기 위해 모두 자신과 혼인시켜 있을 곳을 마련해준 것.
힌두교의 신들 중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특히 민중들에게 매우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신격이다. 반면 사제들은 그런 부도덕한 자를 섬기면 안 된다면서 대안으로 비슈누의 또 다른 화신인 라마찬드라를 밀기도 했다.
풍부한 전설과 여러 가지 성격을 갖고 있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요소가 부여된 사실을 짐작케 한다. 중세 이후에는 애인 라다(Radha)와[7]의 사랑을 중심으로 에로스적(的) 신앙이 강조되어 문예·회화·조각·종교시 등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보통 크리슈나가 비슈누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즉, 선先 비슈누, 후後 크리슈나) '하레 크리슈나' 등 일부 크리슈나 종파에서는 오히려 비슈누가 크리슈나에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즉, 선先 크리슈나, 후後 비슈누) 관련 종파의 언급에 의하면 먼저 크리슈나가 있고, 크리슈나로부터 마하비슈누가 나오는데 이 마하비슈누가 자면서 숨을 내쉴 때마다 모공에서 수없이 많은 우주가 쏟아져 나오고 숨을 다시 들이쉬면 그 많던 우주가 다시 모공으로 들어간다고 하며, 각 우주마다 우리가 아는 비슈누와 브라흐마, 시바 등이 들어있다고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과업을 행하는 비슈누의 화신 대부분이 신의 면모를 지닌 강력한 인간 영웅 정도의 묘사에서 그치는 반면, 크리슈나는 그냥 비슈누 그 자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양어머니가 그가 진흙을 손으로 떠먹는 줄 알고 입을 열어 들여다봤는데 우주가 펼쳐져있었다거나, 후술할 두르바사와의 일화라던가. 마하바라타에서도 이따금 비슈누로서의 전지전능한 본모습을 드러내며 온 우주가 자기 안에 있고 모든 운명이 결정지어져 있으며 세계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코스믹 호러.
미국과 유럽에서는 1960년대에 크리슈나교(ISCKON)가 들어가서 소수의 신자들이 생겼는데, 대표적으로 조지 해리슨이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변발을 하고 "하레 크리슈나 하레 라마~"라고 외치며 다니는 승려들의 특이한 모습 때문에 곧잘 희화화되곤 한다.
3. 행적 생애의 모든 시기가 각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힌두교 신으로 시기별로 신앙의 특성이 다르다. 아기 시절의 크리슈나를 섬기는 것을 발라 크리슈나 신앙, 청소년 시기의 크리슈나는 애인 라다와 함께 숭배되어 라다-크리슈나 신앙, 장성한 시기의 크리슈나 신앙 등으로 나뉘며 각각 인도 전역에서 열렬한 숭배를 받는다.
3.1. 유소년기 힌두교 경전에 의하면 악마 캄사를 쓰러뜨리고 지상의 악인을 벌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캄사는 야다바 일족의 왕위를 찬탈한 인물로 크리슈나의 어머니 데바키의 사촌이였지만, 데바키의 여덟 번째 자식이 자신을 죽일 거란 예언을 두려워해 발라라마[8]를 제외한 크리슈나 이전의 아이를 모두 죽였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 바수데바가 크리슈나와 발라라마를 빼돌렸고, 형제는 브린다반에서 양치기 부족의 족장인 양부모 손에 자라게 된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캄사가 크리슈나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다. 첫번째로 보내진 자객인 락샤사 푸타나는 여성으로 변신해 아기 크리슈나에게 독을 탄 젖을 먹이려 했지만 크리슈나는 엄청난 힘으로 푸타나의 젖을 빨아먹었고 아예 목숨까지 빨려버린 자객은 사망했다. 또 한때는 트리나르타라는 악마가 회오리바람으로 변해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크리슈나는 악마의 등에 올라타고 서서히 몸집을 키워 그를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어 물리친다.
그러면서도 크리슈나는 장난꾸러기 소년으로 자라났으며, 특히 버터를 좋아해 양어머니가 항아리에 넣어 둔 버터를 훔쳐먹다[9] 혼이 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기 크리슈나의 입안을 들여다 본 양어머니가 입속에서 온 우주를 보았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덤.
3.2. 청년기 수려한 목동 청년으로 자라난 크리슈나는 이후에도 여러 모험을 한다. 어느 날 야무나 강에 나가족의 왕 칼리야가 둥지를 틀고 강을 오염시키자, 크리슈나는 사람들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칼리야를 퇴치한다. 게다가 신들의 왕 인드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인드라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인드라 대신 주변의 산에 제사를 지내라고 설득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분노한 인드라가 폭우를 쏟았는데 크리슈나는 손가락 하나로 산을 들어올려 폭우를 막았고, 이에 인드라는 크리슈나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10]
이렇듯 청년기의 크리슈나는 온갖 괴물과 악인을 물리칠 뿐 아니라 여러 신들을 압도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언젠가 한 번 자신에게 도전한 브라흐마의 콧대를 눌러주려고 브라흐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우주의 브라흐마들을 모두 소환해보인다. 힌두 신화에서의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원우주 개념인 경우가 많은데, 각 우주마다 있는 브라흐마란 브라흐마는 전부 소환해 이 우주의 브라흐마를 놀라게 한 것이다. 결국 크리슈나에게 도전한 브라흐마는 그의 앞에 부복하게 되고, 크리슈나는 그 브라흐마에게 너는 이 수많은 우주의 브라흐마 중 단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상히 알려준다. 시바와도 1대 1 대결을 벌여서 승리하고 시바에게서 자신보다 크리슈나가 더 위의 신이라는 항복선언까지 받아내는, 그야말로 무쌍의 영웅이다. 인드라쯤되면 그냥 크리슈나에게 털리는 게 일이다. 사실 베다 시대의 이후의 인드라는 그냥 전투력 측정기 정도에 가깝다 물의 신 바루나는 자신의 부하가 실수로 크리슈나의 양아버지를 잡아가는 바람에 크리슈나에게 응징당하곤 사죄하기도 한다. 불쌍한 바루나... 라마한테도 털리더니...
아름다운 외모와 무용담으로 마을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크리슈나는 이들 중 여목동 라다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라다는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지만 그와 소유를 초월한 사랑을 나눴고, 특히 12세기 창작된 연애 서사시 '기타고빈다'에서 이 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서사시에선 라다에게 점점 집착하게 되는 자신 때문에 고민하는 등 다른 설화에선 드문 크리슈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기타고빈다는 '연인을 사랑하듯 신을 사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해석되며 크리슈나 신앙의 경전이 되었고, 라다는 지고자와 합일을 열망하는 인간 영혼의 상징이 된다.
다만 크리슈나가 주역인 마하바라타에선 라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는데, 시간대 상으론 라다 이야기가 마하바라타 이전이지만 창작 시기는 마하바라타가 먼저라서 그렇다.
3.3. 성년기 계속해서 자객을 보내오던 캄사는 시바신 축제 때 크리슈나를 왕성에 초대해 죽이려 계획한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발라라마와 함께 그들을 공격해 오는 자객을 모두 쓰러뜨렸고, 마침내 분노한 캄사가 직접 크리슈나를 상대했지만 크리슈나는 캄사에게 승리해 그를 죽인다. 크리슈나는 캄사에게 잡혀 있던 부모와 재회하고, 야다바족의 수도가 안전하지 않다 생각해[11] 바다 옆의 도시 드와르카로 천도한다.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선 성인이 되어 야다바에 복귀한 모습으로 등장. 형과 함께 드라우파디 공주의 신랑감 고르기 대회에 참석하는데, 변장한 채 대회에 우승한 브라만이 사촌동생 아르주나란 것을 꿰뚫어본다. 이를 계기로 아르주나 형제들과 만나 지원을 해주는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아르주나와는 절친한 친구가 된다. 이뿐 아니라 크리슈나는 나라야나[12]으로 묘사되는데, 아르주나는 그 쌍둥이 나라의 환생으로 여겨지며 서사시 내내 둘의 깊은 관계를 볼 수 있다. 이렇듯 깊은 관계이기 때문인지 크리슈나는 본래 두료다나에게 시집갈 예정인 여동생 수바드라와 아르주나가 사랑에 빠지자 둘을 충동질해 합의 납치혼을 성사시켰고 성공해 조카까지 본다. 아르주나와 함께 강변에 놀러갔을 때 아그니 신의 부탁으로 둘이서 숲을 불태우기도 했고[13] 이를 본 신들이 격분해 달려오자 아르주나와 함께 그들을 모두 물리치며 무용을 과시한 적도 있다.
아르주나뿐 아니라 그 형인 유디슈티라에게도 든든한 빽이 되어줬는데 왕이 되었음을 천명하는 라자수야 의식도 도와줬다.[14]
또한 아르주나를 비롯한 판다바들의 아내가 된 드라우파디와도 의남매를 맺고 절친하게 지냈다. 드라우파디와 판다바들의 결혼을 중매해 주며 인연이 시작되었고 크리슈나가 손을 다치자 드라우파디가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치료해준 일화가 유명. 그 보답으로 크리슈나는 판다바들의 숙적 두료다나 일행이 판다바를 함정에 빠뜨리고 드라우파디의 옷을 벗겨 모욕하려 들자 벗겨도 벗겨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옷을 선사해줘 구해준다.
다만 캄사의 친척과 전쟁을 하던 중이라 바빠 두료다나의 음모로 인해 판다바들이 유배되는 것을 막진 못했다. 하지만 두료다나의 계략으로 성선 두르바사가 유배 중인 판다바들에게 찾아가 음식을 요구하자, 밥알 하나와 야채 찌꺼기를 우주의 자격으로 먹음으로써 (성자와 제자들을 포함한) 온 우주를 배부르게 하며오병이어 상위 호환 [15] 일을 해결한다.
3.4. 쿠룩셰트라 전투와 바가바드 기타 판다바들의 유배가 끝나자 크리슈나는 여러 왕들을 소집했고, 이 모임에서 유디슈타리에게 왕국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며 사기 주사위 도박으로 왕국을 강탈한 두료다나에게는 합당한 응보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크리슈나는 먼저 협상을 하여 평화롭게 왕국을 돌려받기를 시도할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때 비로소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크리슈마의 형이자 비마와 두료다나의 철퇴술 스승이었던 발라라마 또한 이에 동의하여 평화를 바라는 카우라바 측의 원로들과 함께 협상으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크리슈나는 평화 사절로서 직접 두료다나를 방문하지만, 두료다나는 거절하다 못해 그를 납치하고 죽이려는 시도까지 한다. 물론 크리슈나는 이를 간단히 제압하고 돌아가지만 평화 교섭은 결렬된다.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자 두료다나와 아르주나 두 사람은 힘을 빌리려 크리슈나를 찾아가는데 타이밍이 딱 맞아 동시에 찾아간 꼴이 된다. 이에 그는 양측 모두 친분이 있으니 한 쪽만을 편들 수 없다면서 자신의 강력한 군대와 자기 한 명 중에서 하나만을 고르라고 제안하고는, 자신은 어느 쪽에 가담하더라도 직접 싸우지는 않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선택의 우선권은 연소자인 아르주나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당연히 크리슈나를 선택했고, 이렇게 해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로서 쿠룩셰트라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물론 두료다나도 백만 대군을 얻고서 의기양양해했고.
그렇게 쿠룩셰트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 밤이 되는데, 상대가 친지들이란 것을 마주한 아르주나의 전의가 꺾이고 만다. 차라리 친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우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는 전쟁의 목적이 단지 왕권을 찬탈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맞서 정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에게 부과된 의무(전쟁)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그런 사명을 아르주나인 너가 가지고 있다.’ 라고 설교를 하고, 이 부분이 바로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유명한 '바가바드 기타'다.
하지만 이런 비정한 조언에도 아르주나가 고뇌하자, 크리슈나는 자신의 절대자이자 비슈누 신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 아르주나를 고무시킨다.
전쟁 중엔 약속대로 비무장으로서 아르주나의 전차를 몰지만[16] 뒤에선 절대자답게 전쟁의 모든 것을 조종한다. 사실 판다바군의 비열한 책략은 모두 이 크리슈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으로, 시크한디를 앞세워 비슈마를 공략한 것도 거짓말로 드로나를 죽인 것도 모두 크리슈나의 책략. 그리고 전쟁 마지막 날이 되자 비마에게 두료다나의 약점을 귀띔해 반칙을 쓰도록 유도한 것도 크리슈나다.
그렇게 판다바를 승리로 이끌지만 그가 전쟁을 방조한 것[17]과 반칙을 쓴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두료다나의 어머니 간다리 왕비에게 저주를 받는다. 크리슈나는 자신의 일족이 교만해져 징벌받을 것을 알았기에 '야다바는 골육상쟁을 벌여 멸망할 것이다'라는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3.5. 최후 그러나 위대했던 그조차 결국에는 죽음을 면하지는 못한다. 쿠룩셰트라 전투 이후 36년이 지난 어느 날, 크리슈나의 일족 야다바들의 도시인 드와르카에 여러 현자들이 방문하였다. 이때 장난기가 발동한 야다바 소년들은, 크리슈나의 아들 삼바에게 여장을 시키고[18] 임산부처럼 꾸미게 한 뒤 현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오, 성자들이시여, 이 아낙이 아들을 낳을까요, 딸을 낳을까요?"
그러나 무례한 장난을 간파한 현자들은 대답했다. "이 소년은 아들도 딸도 아닌 몽둥이[19]를 낳을 것이며 그 몽둥이는 야마가 되어 너희 전부를 죽이고야 말 것"이라고.
현자들이 떠난 뒤, 당황한 야다바들의 공포는, 삼바가 실제로 몽둥이를 낳자(!) 극에 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야다바의 왕 우그라세나는 몽둥이를 고운 가루로 갈아서 바닷가에 뿌려버리도록 명령했다. 안심한 야다바들은 현자들의 저주에 대해서 완전히 잊게 되었고, 몽둥이 가루를 뿌린 바닷가에서는 그저 골풀[20]이 탐스럽게 자라날 뿐이었다.
그렇게 불길한 조짐들이 날이 갈수록 짙어지던 어느 날, 야다바들은 전부 모여 문제의 바닷가에서 제사를 지낸 뒤 그 곳에서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술이 몇 차례씩 돈 뒤, 사티야키와 크리타바르마가 예전에 전쟁터에서의 서로의 잘못들[21]을 비난하며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고 곧 야다바 전체가 이 싸움에 끼어들어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사티야키가 크리타바르마의 목을 베어 버리자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야다바들은 전부 두 편으로 나뉘어진 채 패싸움이 벌어졌다. 크리슈나는 마침 자라고 있던 골풀을 꺾어들고 자신의 적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이를 본 다른 야다바들도 똑같이 골풀을 꺾어서 하나씩 잡아들고 서로를 죽을 때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현자들의 저주는 과연 거짓이 아니었으니, 몽둥이 가루 하나하나에서 비롯된 골풀이 위력을 발휘하는 몽둥이가 되어 야다바들을 죽이게 된 것이다. 이 추태를 보다 못한 발라라마는 요가 자세를 취한 뒤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고 크리슈나도 아수라장을 조용히 떠나서 혼자 황야를 떠돌게 되었다.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 크리슈나는 나무 밑에 누워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한 사냥꾼이 그를 보고, 짐승으로 착각하여 화살[22]을 날려 발바닥을 꿰뚫었는데, 그렇게 위대한 크리슈나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