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대비주(=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 영험담 모음
1.
천수대비주기도로 지리산 칠불사를 복원하신 통광스님(現 지리산 쌍계사 승가대학장)의 법문입니다. 지극한 일념의 기도는 운명을 초월하고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通光스님 法門))
願力을 잘 세워라
『세상을 살다보면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럴 때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절대자에게 빌고자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환경에 처하지 않고서는 그런 생각이 잘 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는 기도라는 것을 따로 하지 않아도, 모두 기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바라는 것이 있어서 잘 됐으면 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태를 살펴볼 때 모두 자기의 목적, 희망, 원력에 따라서 생활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하는 사람이 조그마한 생각을 가지면 조그마한 사업밖에 하지 못하고,큰 원을 세우고 사업을 하면, 큰 사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시간과, 공간을 허비하는 시간은 똑같지만은 초등학교선생을 원하면 초등학교 선생이 되지만, 대학선생을 원하면 교수가 됩니다.
이렇게 자기의 원에 따라 실천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원을 어떻게 세우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인생과 수행의 결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원을 세우고, 실천한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폐허가된 칠불사 대웅전 터에 천막을 쳐놓고, 혼자서 천일기도를 했는데 이때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어떤 때는 12시간 어떤 때는 밤샘..
이렇게 기도를 하던 어느 날 몽중일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몸은 곤하게 쓰러져자는데 정신은 천수경 다하고, 문수보살 정근을 하고있었습니다.
생멸하는 몸가운데 생멸을 하지 않는 몸이 있음을 체험한뒤 기도가 신심이 붙어 세월가는 줄 모르고 했습니다.
혼자 공부할 때라서 관심 있는 경을 보다가 막히면, 이말은 선방 수좌스님들에겐 한방망이 맞는 소리이지만 그날 꿈속에 불보살님이나 노인의 가르침을 받곤했습니다.
그리고 꼭 참선만해서 도통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지 일념으로 하게되면 마음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밝아지면 통하게 됩니다. 』
『1978년부터 복원을 시작했는데, 그전에 탄허스님께 칠불사 이야기를 하면
"통광수좌는 관상학적으로 보면 복이없어 절대 칠불사를 복원하지 못하니
내 밑에서 경학연구만 해라" 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이룰수 있는 것을 기도로 해서 이루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관상학적이나 운명이나 그 사람 재질이나 그 사람의 모든 역량으로 봐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불보살님께 지극정성으로 기도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천수경이 아닌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에 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을 하면, 현세에 원하는 것을 다 이룬다하여
칠불암에서 3.7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고 나서는 좌선을 하는데, 어느날 기도를 마치고 좌선한다고 앉았는데
깜빡 졸았는 모양인데 그 정신상태로 어디를 가니까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걸 보고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어떻게 하면 칠불사를 빨리 복원할수 있겠습니까?" 하고
절을 자꾸 하니까 관세음보살님께서 무엇을 한주먹 주시길래 이리보니까
열쇠꾸러미였습니다.
그리고는 뭐라고 말씀하는가 "네가 아무리 빨리 복원을 하려해도 10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이 들어 눈을 번쩍 뜨니 깜빡 졸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주에사는 허00 씨에게 그때 돈 어음 천만원을 빌려서 나무를 계약하고 복원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틀림없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서 몽중가피도 없고 아무일 없으면
"이거 헛기도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에 보면 기도는 현가(顯加) 명가(冥加로 나타난다고했습니다.
현가는 나타나게 가피를 받고, 명가는 가만히 가피를 받는 것이다.
내가 관세음보살님께 꿈에 열쇠꾸러미를 받는 것이 현가인 것입니다. 』
『그러면 기도가 틀림없이 성취되고 마는데 왜 성취되는가... ?
풀지 못할 일이나 소원이 있으면 원(願)만 세우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원이 왜 이루어지는가... 기도를 하면 왜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첫째는 "불심 충만의 법계" 화엄경에 나오는 말인데 불보살 인행시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이루겠다는 원으로 지극정성으로 염을 한다던가
또는 관을 하면 바로 (불,보살님의) 원 때문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근데 왜 원을 세워도 빨리 성취되지 않는가.. ?
그것은 허공의 달이 일천 강을 비추지만은 흙탕물이 있는곳에는
비추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흙탕물로 인하여
달빛이 들어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기도할때에 망념이 없어질 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체널을 맞추어야 T.V를 볼 수 있듯이
번뇌망상이 없어질 때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조사어록에보면 기도를 할 때는 온갖 반연을 다 놔버리고
오직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했습니다.
또 간절히 불러야합니다. 중생감제불응 (衆生感諸佛應)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중생들이 불보살을 감동시킬 때 모든 불보살님들이
중생의 원에 응해준다는 말입니다.
간절히 끊임없는 정진을 할 때에 불보살님들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님과는 말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생각으로
같은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기 때문에 마음가운데 딴 생각이 있어서는
기도 성취가 안되는 것입니다.
불심충만의 세계지만 성취가 안되는 것은
마음가운데 모든 번뇌망상이 가려져서 그렇습니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많은 신도님들이 오셔서 기도를 하지만
더러 어째서 성취가 안되냐고 물으면 달리 할말도 없지만
어머님들이 기도하며 염불할 때 마음속으로는 "대학" ,"대학"하고만 있지
정말로 불보살님을 염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절집안에 내려온 이야기 인데 다 짤라버리고 한 학인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같은 도반이 시다림(망자를 위한 염불)을 하고있더랍니다. 근데 한 스님은 목탁을 치면서
"은행바루떼"는 내것이다 "은행바루떼"는 내 것이다... 하고있고
요령을 흔드는 스님은 "제경행상만"은 내것 제경행상만은 요즘말로 불교사전인데
"제경행상만"은 내것 하더랍니다.
염불을 하면서 마음으로는 죽은 스님 유품중 자신들이 가지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있으므로 죽은 스님에게는 염불소리는 안들리고 그 소리만 들렸던 것입니다.
기도는 반연도방하라 일체 원까지 놔버리고 간절히 일념으로 염불한 뒤
마지막 마칠 때 절 세 번하고 발원하고 이렇게 간절해야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원이 성취되지 못한 것은 기도 중 급한 마음에 또는 느슨해져 번뇌망상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며, 성취가 되려면 모든 인연, 자신의 원마저 놔버리고 지극정성으로 일념되게 기도하라는 말씀이였습니다.
출처: 인터넷 불교연대(cafe.daum.net/ibr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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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룡큰스님께서 들으신 신묘장구대다라니 영험담
『효성스님은 13세에 경남 하동 쌍계사로 출가하여 대웅전 노전스님의 상좌가 되었습니다.
전등을 밝히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저녁예불이 끝난 다음부터
새벽 예불 때까지 법당 안에 등불을 밝혔습니다.
둥근 그릇 모양의 등잔에 참기름을 가득 붓고 종이 심지를 달아 밤마다 불을 밝히면
3일은 쓸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해 가을, 법당 청소를 하다가 등잔을 살펴본 노전스님은
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분명히 어제 기름을 넣었는데 왜 한 방울도 없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노전스님은 기름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살펴보니 또 기름이 없었습니다. 등잔을 살펴보았으나 깨어진 흔적은커녕 구멍 하나 없었습니다.
괴이하게 여기며 스님은 또다시 등잔에 참기름을 채웠고,
그 이튿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자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밤마다 등잔에 손을 대는 것이 틀림없구나.'
그날 밤 노전스님은 13세의 효성사미를 데리고 법당의 신중단 탁자 밑으로 들어가
밤을 세웠습니다. 탁자는 천으로 가리워져 있어 밖에서는 그 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탁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효성사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은사스님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놈, 게 섰거라!"
깜짝 놀란 효성사미가 눈을 떠보니,
법당 가운데 문 앞에 키가 9척이나 되고 검은 옷을 입었는지 검은 털이 났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괴물이 서 있었습니다.
머리와 팔다리와 몸뚱이가 모두 있고 우뚝 서 있었지만, 사람은 아닌 듯 하였습니다.
고함을 치며 신중단 탁지 밑을 나간 노전스님은 그에게 앉도록 한 다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람이냐? 짐승이냐?"
"사람도 짐승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목신입니다."
"목신이면서 어찌 감히 부처님 전에 올리는 등잔의 기름을 훔치는 것이냐?
그 과보가 얼마나 큰 지를 모르느냐?"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저는 이 절 밑의 화개마을 이판서댁 뒤뜰에 서 있는 은행나무입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 발등이 땅 밖으로 나와 있는데,
무식한 머슴들이 제 발등에 나무를 올려놓고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팹니다.
판서댁에서 겨울 내내 쓸 장작을 여러 머슴들이 계속 준비하다 보니,
제 발등의 이곳 저곳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이 상처와 아픔을 달랠 약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께 올리는 이 등잔의 기름을 발라야만 하룻밤 사이에
아픔도 사라지고 딱지가 앉습니다. 그런데 머슴놈들이 매일 장작을 패기 때문에
며칠동안 계속 부처님의 기름을 바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네가 진짜 목신이라면 인간보다 힘이 셀 것이 아니냐?
얼마든지 보복을 할 수 있을 텐데?"
"보복을 하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집의 운이 다하지 않았는지,
이판서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면 정좌를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번 읽습니다.
그 힘 때문에 지기를 비롯한 어떤 기운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이판서가 앞으로 얼마나 살겠습니까?
이판서가 죽고 나면 보복을 할 생각입니다."
"내가 가서 앞으로는 머슴들이 너의 발등 위에서 장작을 패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니,
보복을 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인간들이 해를 가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가 먼저 해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그렇게만 해주시면 그 이상 고마울 일이 있겠습니까?"
목신은 절을 한 다음 사라졌고, 노전스님은 날이 밝기가 바쁘게
이판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이판서는 머슴들을 불러모아 땅 위로 노출된 은행나무의 뿌리를
부드러운 흙으로 덮도록 하고, 허리 높이 정도의 울타리를 만들어
누구도 나무에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을 차려 은행나무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뒤 쌍계사 대웅전의 등잔 기름은 훼손 당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13세의 사미 시절에 이와 같은 일을 경험한 효성스님은 노년에
나(우룡스님)를 비롯한 여러 승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수백년된 목신은 힘이 없어 보복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늙은 이판서가 날마다 외우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가피력 때문에
어떠한 보복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어떠한 삿된기운도 이판서의 집안을 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명훈가피요. '누구라도 감히 해칠 수 없다' 는 시실불감해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는 것이나,
'관음경'의 염피관음력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이판서는 아주 특별한 신심을 갖춘 분이 아니었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많이 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아침, 오직 한 차례만 외웠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목신은 '이판서가 살아있는 이상 절대로 보복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입니까?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의 명훈가피를 입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는 힘! 곧 염피관음력이 있으면 됩니다.
하루에 관음경 한편의 독송, 매일 단 10분의 '관세음보살'염불이나
몇 차례의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통하여 능히 명훈가피를 입을 수 있습니다.
당부드리건데, 꾸준히 염피관음력을 키워가십시오.
꾸준하게만 하면 틀림 없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나찰, 독룡, 아귀 등의 해침은 물론이요.
모든 재난이 저절로 피해가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원출전: 우룡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도서출판 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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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때가 1976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쪽에 한 이년이 넘도록 가뭄이 들어 난리였다고 합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그때 가뭄을 다 기억하시더군요. 참고로 이곳은 일년중 겨울 3달정도만 비가 옵니다. 원래 물이 부족한 곳이죠.
그때 우리 교수님께서는 유카야라는 곳에서 스님으로서 수행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본토에서 건너오신 '성화'대선사라는 분이 백인들 포교를 많이하여 중국스님과 모두 합쳐 한 100명정도 함께 생활을 했답니다. 우리 교수님도 백인이신데 스님 생활을 20년 넘게하셨습니다.
끝날 것 같지않는 그 혹독한 가뭄속에서 어느날 성화선사께서 대중스님들에게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를 마친 우리 교수님, 그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종교인 불교에서 어떻게 그런 미신같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실까하며 불만이 생겼답니다. 그래도 성화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 스승님의 뜻을 따라 기우제를 지내는데 동참하기로 했답니다.
근데 성화선사께서 기우제 지내는 장소를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금문교(골든게이트 브릿지)'로 정하셨다네요. 당황한 우리교수님,,,왜 기우제를 그렇게 사람들 많은데서 눈에 띄게 지내려고할까... 만약 비가 오지않으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창피일까.... 암튼 온 대중스님들과 함께 금문교로 가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답니다. 아침부터 저녁 5시까지...
그 중간에 여러분들 어떤 일이 일어나겠나요? 그시절만 해도 미국 일반인들에겐 스님들이 잘 알려져있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은 대다수가 석사학위이상을 지식층들입니다.
미국에서 불교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죠. 암튼, 이상한 복장에다 삭발까지한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루종일 서서 그러니까 급기야 방송국에서 출동.... 우리교수님 내심 불안하고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방송국 기자가 그 중 한 스님과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 당신들은 누구며 무엇을 하고 있나요?
한 스님: 불교의 수행자들이며 비오라고 용왕님께 기우제를 지내고 있지요.
기자: 용왕이라고???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며.... 방송국 기상대를 연결하여 '척스(일기예보하는 사람) 조만간 비가 올 것 같나요?
척스: 아니요. 전혀 기미가 없습니다. 구름도 한 점 없읍니다.
기자 무시하는 듯 어이없어 하며 농담을 합니다: 척스 하늘에 용이 보입니까?
척스: 무슨 말인지???
기자 여차 저차 일기예보자와 농담을 하며 신이 났습니다. 속으론 그랬겠죠... 이런 얼빠진 사람들이 다 있나... 정말 불교란 미신이구만....
우리교수님: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방송에까지 나왔는데 비가 안오면 이 일을 어째....
그런 우리 교수님의 걱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비가 올 기미는 전혀없이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은 계속되고.. 드디어 절로 돌아오셨죠.
불만과 허탈감에 차서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했습니다. 밤 9시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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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소리가.... 울 교수님 너무 놀라 창문을 여니 이게 웬일입니까.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얼론 내려가 티비를 틀어 일기예보를 보니 그 척스라는 사람 눈이 둥그래서 흥분해서 말하더랍니다.... 아까 금문교에서 스님들이 비오라고 기도를 하던데 이런 신기한 일도 다 일어나는 군요. 아까는 믿지 않았는데 정말 구름도 한점 없었는데 이렇게 비가 오네요...... 흥분... 흥분...
울교수님: 나도 기우제 같은 건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암튼, 오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가 나와 그 일기예보하던 사람은 효과가 있다고 확신을 시켰네....
출처: 나무아미타불카페 불교의 영험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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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나라 홍만(洪滿)스님은 어려서 세상에 있을 때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는데 이렇게 폐인이 되자 부모 형제간도 모두 불쌍하게만 여겼지 그 당시 불치병인 소아마비를 고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화주를 나왔다가 이 아이의 딱한 사정을 보고 대비주를 읽어보라 권했다.
홍만은 그로부터 3년 불철주야 대비주를 독송했다. 그런데, 하루 밤에는 어떤 스님이 병하나를 손에 들고 꿈에 나타나 서 있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가 항상 정성스럽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대비주 주력을 하여 약을 가지고 왔다. 어디 아픈 발을 이리 내 놓으라. 내가 치료하여 주리라."
홍만은 너무도 기뻐 두 다리를 내놓으니 스님은 두 무릎 위에서 두개의 못을 빼 버리고 약병을 기울여 약을 발라주었다.
홍만은 너무도 시원하여 한참동안 누웠다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하도 희한하여 일어나 두 다리를 만져보고 걸어보니 병은 간 곳이 없고 보통 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출가하여 대비보살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대비주를 많이 읽어 여러가지 기적이 많았다.
(천수경 영험록)
출전: 불교영험설화 (한 정섭저, 法輪社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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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화엄큰스님의 출가계기 이야기 (월간불광 일부전재)
일타 스님이 쓰신 '기도(도서출판 효림)'에서 스님의 출가 이야기를 읽었는데 매우 신비로웠습니다.
"1944년 일본의 대판의전에 다닐 때 학도병으로 태평양 전쟁에 끌려 갔다가 다리에 중상 을 입었습니다. 해방 후 다리가 아파서 요양차 범어사에 갔었는데 그 길로 출가를 하게 되 었지요.
처음엔 스님이 뭔지도 몰랐어요. 다만 다리가 너무 아파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수 주를 외우면 다리가 나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범어사 미륵암에서 그저 일구월심 천수 주를 외웠습니다. 그런데 한 6개월 천수주를 외우니 지리천문 알게되고, 7개월째, 8개월째 에는 수천리 밖이 보이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이었는데, 법당의 신중탱화에서 신장이 튀어나오더니 환부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꿈속에서도 아파서 아이구 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보니 법당 바닥에 파 편이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 전까지 신비한 경계를 대할 때 하고는 또다른 무엇이 가슴을 확 내리치더군요. 아하, 이게 마음의 힘이로구나, 마음을 깨치면 이 몸을 조복받는 것은 물론이요,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부처가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2)
이 화엄노스님의 천수주력 영험담은 울산 학성선원 선원장님이신 우룡 큰스님께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40년 조금전에 겪은분이 부산 옆 김해 동림사에 화엄노스님이 계시는데, 70이 훨씬 넘으셨습니다. 이 화엄 노스님이 직접 격은 사건입니다.
화엄스님은 일제때 일본 오사카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졸업무렵 2차대전으로 일본에서 학병으로 일본군대 소위계급장을 달고 집에 오지도 못하고 일본의 학교에서 필리핀으로 가서 삶과 죽음사이에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2차대전이 끝나자, 일본으로 가지않고 부산으로 오셨기 때문에 전쟁중에 넓적다리에 들어간 쇠조각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큰 수술은 미군 야전병원에서 다 뽑았는데 콩알만한 파편조각은 미처 수술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왔습니다. (후방은 아마 6.25전쟁때 참전 하셨는데 그때를 가르킨말 같습니다.)
전쟁중에 쓰러져서 미군들에 의해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습니다.
깨어나니 미군 야전병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여 몸속에 쇠조각이 있는줄 모르고 살다가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오고 나중에 척추가 야단이 나서 목발을 딛고 다녔습니다.
자기몸이 그렇게 되다보니 남이 존경해주는 것도 필요없고 선생님 선생님 하고 대접해주어도 소용없고 월급도 소용없고 자기몸이 망가져가니 어떻게 합니까.
스님된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어디가서 조용히 몇 달 수양하다가 몸이 회복되면 다시 나온다는 생각으로 찾아간곳이 범어사였습니다.
범어사에서 동산 노스님을 만나서 몸뚱이가 망가져가는데 그래서 어떡하냐고하여 동산스님에게 처음배운 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였습니다.
"다라니를 지극히만 하면 몸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 하라"했습니다.
본래 기운이 있던 분이어서 텅 비어있는 암자에 혼자가서 오른쪽다리는 마비되어 무릎이 구부려지지않아 다리를 쭉 펴고 살고있는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열심히 했어요.
혼자사는 암자니 큰소리로 해도 방해하는 이가 없어요.
몇 달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음해 추석날 암자에서 내려와 범어사 큰절에서 점심을 먹고 떡,과자, 과일을 가지고 암자로 가서 다리를 뻗어놓고 누각 마루에서 다라니를 하는데,앞을 쳐다보고 다라니를 하는데, 얼굴을 돌려야 쳐다 보일 신장탱화가 그냥 보이더랍니다.
그림속에 신장님이 마루로 척 뛰어내리는데 그 갑옷이 철커덕거리고 칼이 철커덕거리고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랍니다.
그러더니 신장님이 긴 칼로 오른쪽 넓쩍다리를 쑤셔서 도려냈습니다. 순간 뜨끔하더랍니다. 순간적으로눈을 떠서보니 쇠조각 세 개가 마루에 있더랍니다.
그때부터 다리가 나았답니다.
지금은 휴유증인지 나이드시면서 오른쪽 다리가 약간 잘슨잘슨하다더군요.
이것을 머리깍기전에(출가하기 전에) 기적이라고해야할지 신비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
인터넷불교연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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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천수다라니로 도를 이룬 수월스님
근세의 고승중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대선사(鏡虛大禪師)의 가장 큰 법제자인 수월스님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나이 서른에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성원(性圓) 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 밥을 짓는 공양주(供養主)등의 소임을 3년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기도승)이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송(頌)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스님은 이를 한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42글자의 천수대비주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천수대비주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땅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대비주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비주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비주를 외워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수대비주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마침내 7일째 되는 날, 수월스님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습니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잠을!'"
이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중득하여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중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지방 등에서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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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숭산스님의 천수대비주 100일 정진 이야기 (화계사 홈페이지에서 옮김)
숭산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2) 천수대비주 대다라니 (안제이 스텟즈 지도법사)
숭산선사는 우리에게 스승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제자입니다.
선사님의 장례식 비디오 상영 직전에, 우리는 천수대비주 즉,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하였습니다.
숭산선사는 "나는 특별한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모를 뿐'을 가르친다."고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다라니는 선사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수행이었고 , 대다라니를 염송하는 것으로 깨우치셨고, 그 후에도 언제나 대다라니를 염송했습니다.
폴란드나 미국, 한국, 어느 선원이나 어느 절에 머무를 때에도, 선사님께선 그 곳에서 가장 열심히 수행하는 분이었습니다. 화계사에서는 새벽 3시 20분이 기상시간이지만, 우리들중 많은 이들이 이보다 약간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숭산선사의 창문을 보면, 언제나 불이 켜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중 몇 명이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새벽 2시 30분에, 선사님의 창문은 이미 불이 켜져있었고, 불은 새벽 2시에도 켜져 있었습니다. 선사님께서는 화계사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수행하는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선사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제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절을 얼마나 하고 있나요?"
"네, 100배, 200배 정도 하고 있습니다."
"그건 충분하지 않아. 난 60살이지만 매일 1000배를 합니다."
그 분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제일 먼저 1000배를 했습니다. 숭산선사는 우리들의 스승이었을 뿐아니라 그 자신이 위대한 수행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수행을 하고자 했으며, 우리에게 정규적인 수행이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제가 선사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도 수행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사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호텔방에서 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난 뒤, 선사님과 단 둘이 방에 남았습니다.
선사님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 분은 제게 먼저 얘기를 시작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물론 자신의 다라니를 외우시면서요.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5분이나 10분쯤 앉아계셨습니다.
마침내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할 지 생각하다가 물었습니다.
"대선사님, 지금도 다라니를 외우고 계십니까?"
"그럼, 물론이지. 나는 언제나 다라니를 하고있지."
"주무시는 동안에도요?"
선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잠을 자는 동안에도 외우지. 심지어 지금 얘기하는 동안에도 하고있어."
선사님께서는 피곤하지 않을 땐 다라니를 1분에 세 번 외울 수 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피곤하실 땐, 1분에 두 번 외우셨습니다.
선사님께선 이렇게 24시간 공백없이 하셨습니다.
선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50년동안, 난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일생동안, 나는 한 번도 뒤돌아 본 적이 없다. 단 일초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선사님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할 때마다, 저는 그 분이 어디에선가 대다라니를 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선사님을 뵙고 싶다면, 그저 대다라니를 한 번 더 염송하십시오.
출처: 관음서울 선그룹 (http://kwanumseoul.org) 안제이 스텟즈 지도법사님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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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흥선 대원군은 중국에 귀양가 물 없는 곳에 유폐되어 갖은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 천수경을 읽고 생수를 얻어 주위 호위병들까지 살리는 기적을 얻었다고 합니다.
2) 이조때 낭파스님은 거금도에 들어가 다라니10만독을 하고 물위로 걸어나왔다 합니다.
3) 서울 사간동 법륜사 계윤스님은 천수경 10만독으로 뇌종증을 치료하였다 합니다.
4) 불광사 광덕 스님은 이 경의 은덕으로 폐결핵을 치료하고 그 보답을 위해 천수경을 수 만권을 출판하여 무상보시(무료로 나눠줌) 하였습니다.
5) 근대의 고승이신 수월(水月)스님께서는 다라니 독송기도를 통하여 ‘불망념지(不忘念知)’ 즉 과거생에 수행하고 공부한 내용을 다 기억하는 지혜를 얻으셨을 뿐만 아니라 삼매(三昧)에 들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출처: 사이버불교대학 (cafe.daum.net/ebuddha) 정엄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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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기도 일산 덕양선원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수행
9-1
원명화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
1)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로 최고의 행복을 얻다
미주현대불교 5월호 / 원명화
저는 부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움이 짧기도 하지만, 사는 일이 바빠서 부처님 법을 공부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40중반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남겨진 삼남매를 보란 듯이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내가 일을 해야 살 수 있었으므로, 절에는 그저 초파일에 등이나 달러 갈 수 밖엔 없었지요. 제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기 전 까지는 참 살아온 세월이 힘이 들었습니다.
3년 전 시댁 쪽에 산소를 이장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보통 산소를 이장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들 하지만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뭐 별일이 있겠나 싶었습니다.한데, 무슨 일인지 산소 이장 이후 집안에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자꾸 풀리지 않는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온 마음을 바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건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좋다는 방법을 모두 찾아 다녔습니다.그러다가 어느 스님과의 인연으로 제가 사는 곳은 서울인데 거제도까지 가서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천도재를 마치자 스님은
“여기 거제도까지 오실 수는 없으니 댁에 돌아 가셔서 마음에 드는 도량을 찾아 백일기도를 하십시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았지만 왠지 마음에 끌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 만난 곳이 제가 천수대비주 기도를 하게 된 이 도량 이었습니다.요즘 생각하니 그래도 제가 전생에 조금 덕을 지어 놓았나 싶기도 합니다. 거제도에서 돌아와 저는 이 도량에 나와 백일을 아들과 열심히 108배와 광명진언, 천수대비주 21편을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 했습니다.그 후에 다시 천수대비주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스님께 무어라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부처님을 열심히 공경하는 일 만이 스님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이었습니다. 백일을 스님께서는 목탁을 치시며 저를 위해 108편 천수대비주 기도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 말입니다. 그런 스님의 법력에 힘입어, 저 역시 백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목욕으로 몸을 정히 하고 음식도 가리며, 먼 길을 마다 않고 새벽길을 헤치며 법당에 와 청수를 갈고 공양을 올리며 기도 하였습니다.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가정에도 안정이 찾아 왔습니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던 것도 다 물리치고, 오직 일념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제게 급박한 일이 많았습니다. 돈 보다는 기도를 해야 했으니까요.
백일이 지나자 이제는 스님께서 매일 108독씩 다라니기도를 계속하라시면서 이제부터 금요일에는 1000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이었습니다.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분들과 함께 바로 1000독 독송에 들었습니다.말이 천 독이지 혀도 잘 안돌아가는 제게 처음에 천 독은 참 힘들었습니다.아침 10반에 시작해서 다음날 9시에 마쳤으니 그 시간이 어땠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저는 참 죽을 맛이었습니다. 스님! 저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씀 들여도, 앞에서 스님은 꼼짝없이 같이 독송을 하시니, 어쩌지도 못하고 온몸을 꼬아 가며 꼬박 날밤을 새어가며 22시간만에 1000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고 합니다.그렇게 해서 지금은 25만독이라는 숫자를 채우고 있습니다.스님께서는 숫자를 꼭 챙기라고 하십니다.목표를 세워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지요. 물론 숫자에 매이는 것은 아닙니다.그렇지만 숫자를 챙기시라는 말씀의 이유를 이제는 다 알 것 같습니다. 또 10만독, 20만독을 독송하고 나니, 이제는 또 글을 쓰라고 하십니다.글도 제대로 모르는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지요.
“그냥 느낀 대로만 쓰시면 됩니다. 그래야 글 못 쓴다는 마음에서 벗어 날 테니 쓰십시요.”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또 말도 안 되지만 글을 씁니다.
* * * *
신묘장구 대다라니 십만독을 끝마칠 무렵 -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어찌 십만독을 내가 해 내었는지 이건 나의 힘이 아닐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그후 3000독 ,7000독 10000독을 거듭 독송하며 나는 많은 경험들을 했습니다.조상들의 영가와 만나는 시간도 있었고, 오래도록 소원하게 지내던 친척과도 화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이루었고, 자식들의 문제들도 수월히 풀려 나갔고, 일하면서 마음에 응어리 졌던 사람과도 웃으며 만나며 아무런 미운 마음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또한 환희심이 일어 언제나 웃는 낯 이 되어 주의 사람들에게 뭐 좋은 일이 많은 가보다 라는 좋은 말을 자주 듣기도 했습니다. 또 혈색도 좋아지니 미인이 되었다는 농담도 듣게 되니, 나는 이 기도 만큼 나를 변화 시킨 것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어쨋던 나는 이 기도가 평생 나를 지탱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지요.이렇게 기도의 횟수가 십만독에 가까워오는 때 독송을 하는데 흰나비가 살랑살랑하고 날아와 앉을 듯 말듯 하면서, 신묘장구 대다라니가 노래 소리로 들렸습니다.그러더니 마음이 갑자기 설레고, 기분이 너무 좋아 춤이라도 덩실 덩실 추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십만독을 하고 나니 제 마음은 그저 흐믓하고 행복한 마음 뿐 입니다.이제 십만독은 다시 처음의 일독으로 돌아가는 것 일뿐이라 생각합니다.
-20만독 독송을 하고나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5만독 쯤 독송하였을 때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 것일까? 자식을 위해 울리려 하는 것일까?아님 내 자신을 위해서 종을 울리려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냥 여기서 그만둘까” 하는 마음을 고민하면서 잠시 잠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희한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나의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아셨는지 꿈속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책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아!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구나.” 하면서 내가 여기서 끝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 열심히 정진하여 20만독을 독송하게 되었습니다.3차 백일기도 회향하는 날, 스님께서 천수대비주 21편을 독송하시는 중간에 다시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열심히 기도하는 제 머리위로 까치가 ‘까악까악’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편지를 물고 부처님 전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아들의 직장문제로 걱정을 하던 때 였습니다.그런데 이것이 무얼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환희로운 마음에이 모습을 보고 저는 이게 독송의 즐거움이구나! 하고 더 큰소리로 독송하였습니다.그런데 며칠 후에 아들의 직장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저절로 저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게 되고 더욱 힘차게 기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얼마 전 4차 백일기도를 시작하며 바로 가행정진 열흘을 했습니다.가행정진 열흘 동안 저는 너무도 벅차게 환희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그 날은 가행정진 7일째 이고 음력 7일이라 산신기도 법회가 있는 날 이었습니다.그날도 일찌감치 집을 나서 법당에 도착했습니다.저는 지금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25만독이 가까워 오고 있으며가행정진시에는 지금 까지는 1000독씩을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한계를 넘어 보라는 스님의 권유에 하루에 1500 ~2000독을 했습니다.
며칠 전 스님께서 하신 법문을 듣고, 정말 이번에는 '내가 죽었다' 하고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정진하고 있었습니다.정성껏 마음을 모으고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다라니 21편을 소리 높여 독송하는 중이었습니다.중반쯤 되었는데 내가 그만 죽었습니다.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니나는 관속에 누어있고, 아이들은 관속에 있는 나를 보며 빙 둘러 울고 있었습니다.산신각 앞에 내가 누워 있는 관은 누런 금빛이고, 내 머리맡에는 머리에 노란 관을 쓰신 분이 주장자를 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더니 그분은 사라지고 다시 머리에 하얀 관을 쓰신 분이 너울너울한 흰옷을 입고 나타나 다시 머리맡에 서 계십니다.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죽은 것이 너무 슬퍼 마구 소리를 내어 울며 다라니 독송을 했습니다.다라니 21편이 끝나니 온 정신으로 돌아오며, 순간 온 몸에 힘 이 다 빠져 그만 '스님 저 쓰러지겠습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억지로 참았습니다.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스님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진언에 일어섰습니다.
이번 백일기도에 괜히 처음부터 가행정진을 하고 싶었습니다.물론 이루고저 하는 바도 있거니와, 스님께서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다 좋은 일이 있다 '라는 말씀에 뒤 돌아 볼 것도 없이 그저 기도하기로 마음먹었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스님께 여쭈니 빙그레 웃으시며 계속 일심으로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7일쯤 되니 머리가 휭하니 붕붕 떠 있는 느낌도 들고, 어지러운 듯 정신이 몽롱하였습니다. 가행정진하는 동안 눈에는 피부병처럼 무엇이 났는데 보살들이 우스게로 '우담바라' 가 피었다고 놀립니다. 정말 내 몸에 우담바라가 핀다면? 그럴 일은 조금도 없지만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좋은 일일까 하기도 했었습니다.그날 겪은 일은 저도 너무 신기한 경험이라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다보니 모든 것이 좋은 일로 바뀌더군요.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면서 간간히 아이들에게도 화를 잘 내던 나의 습관도 사라졌습니다. 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아는 일이니까요.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환희로운지 경험을 해 보셔야만 아실 것 입니다.저는 그저 천수대비주 기도로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만 어려운 일이 있으신 분 들이나 마음고생을 하시는 분들, “모두들 기도 열심히 하세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기도 열심히 하셔서 소원성취하시고 성불 하십시요.
덕양선원 원명화합장
2)
“타는 불꽃같은 삶의 고통 다라니로 녹였지요”
매일 대비주 1000독
김 순 자 씨
암으로 남편 먼저 보내고
아들까지 병고로 고통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의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 견뎌
하루 넘던 다라니 1000독
이제는 4시간 만에 마쳐
“위암 말기입니다. 수술을 하면 1년을 살 수 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못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수술해서 어떻게든지 남편을 살리겠다고 말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나갔다. 이를 꽉 깨물고 떨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꼭 잡았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는데 그제서야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난히 몸이 부쩍 마르고 먹는 음식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남편이 이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남편의 삶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니…. 의사는 믿을 수 없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단 한 마디 말로 그녀를 천 길 낭떠러지로 떠밀었다.
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그녀를 보자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반기듯 활짝 웃었다. 남편의 삐쩍 마른 몸, 검어져 버린 얼굴 빛. 가슴이 미어졌다. 왜 진작에 병원에 오지 않았을까. 금방이라도 콸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참아야 한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울어버리면 이 모든 게 현실이 되어 버릴 테니까.
꽃다운 나이 20대 초반에 남편을 만나 토끼 같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알콩달콩 살아가던 김순자 씨에게 검은 구름은 그렇게 다가왔다.
오로지 집과 회사 밖에 모르는 자상한 남편과 엄마를 끔찍하게도 위해주는 착한 두 아들과 딸. 콩나물 값 한 푼이라도 아끼며 사는 평범한 삶이었지만 그녀는 크게 욕심내지 않았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다섯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저녁 먹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그녀는 착한 아내, 좋은 엄마였다. 그런 그녀에게 하늘이 두 쪽나는 시련이 닥친 것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가 남편에게 거짓말을 시작했다.
“당신, 위에 탈이 났나 봐요. 수술만하면 금방 나을 수 있다네요. 진작에 병원에 왔으면 됐을 것을. 예전부터 병원 한 번 가보자고 했죠. 정말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오히려 화를 내버렸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다. 별일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허허’ 웃는 남편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버스 창밖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예정대로 수술을 마쳤지만 의사의 말대로 남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남편이 의사를 찾아갔다.
그제서야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남편. 그 때문이었을까. 예정보다 더 빨리 남편은 떠나버렸다. 그녀가 47살이 되던 1987년이었다.
이미 예고된 일이었지만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남편의 따뜻한 그늘 아래서 20여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다.
고2의 큰아들과 중학생 된 아들과 딸. 남편을 따라 가고 싶은 마음도 여러 번 들고는 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마련했지만 여자 혼자 아이 셋을 키워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도 세상 앞에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렇게 아픔이 서서히 아물 무렵. 어느 덧 장성해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바르게 자라준 큰아들이 갑자기 이상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남편의 산소를 이장한 이후부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심장이 멈춰버리는 듯 했다. 결국 아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그녀는 또 한 번 몸서리를 쳐야했다. 떠난 남편을 대신해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던 큰아들이었기에 그녀의 충격은 더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생계였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아들 간호에만 전념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으로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수술로도 고칠 수 없다는, 원인과 병명조차도 알 수 없는 ‘무병’이라는 답변뿐이었다. 또 한 번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끝내는 무당도 찾아가 보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봤지만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버리는 듯 했다.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그때 덕양선원 법상 스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스님의 권유대로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을 하기 시작했죠. 스님과 아들과 셋이서 법당에 앉아 낮과 밤 구분도 없이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정말 내가 지금 당장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첫 100일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김순자(원명화·65)씨의 주력수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100일 정진이 끝나면 또 다시, 또 다시.
200일, 300일, 400일, 500일…. 끝도 없이 그녀는 주력수행을 계속 이어나갔다.
일산에 위치해 있는 덕양선원과 살고 있는 집까지의 거리는 2시간.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두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집안 일을 마무리한 뒤 아들과 함께 오전 8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컴컴한 밤이 될 때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또 매주 금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3시간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다. 그렇게 해서 10만독을 마치고 20만독을 해냈다.
“기도 중에 조상님과 만나기도 하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시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까치가 머리 위에서 ‘까악까악’ 울기도 하는 신비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었죠. 또 어떤 날은 죽어있는 내 모습을 보기도 했었고요. 그럴수록 스님은 더 정진해야 한다며 1000독도 모자라 하루 2000독을 하라고, 더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그땐 정말 ‘나 죽었구나’ 했었죠.”
그렇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내가 쓰러지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정진을 시작했다.
“어느 날은 하다하다 정말 죽을 듯이 힘이 들어 ‘스님 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그래, 차라리 내가 죽자’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모든 괴로운 마음들을 부처님께 맡기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서 촉촉히 이슬이 맺힌다. 하루하루가 길고 긴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는 것처럼 힘에 겨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기도할 때 저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어요. 힘겨워하는 제 곁에서 저 보다 더 간절하게 목탁을 치며 독송하는 스님이 계셨고 도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죠.”
그리고 거짓말처럼 서서히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언제그랬냐는 듯 큰아들도 대비주 독송으로 병을 이겨내고 예전의 든든한 아들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녀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대비주 87만독을 이루어 내고 매일 1000독을 계속해 오고 있는 김순자 씨.
하루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모자랐던 신묘장구대다라니 1000독을 이제는 단 4시간 만에 마칠 정도로 그녀에게 수행은 몸의 일부처럼 하나가 되어버렸다.
“내 목숨이라도 바꿀 각오로 수행으로 나와 맞서다보면 어느 순간 힘든 모든 일들이 콩알만큼 작아지고 내가 큰 우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비가 훨훨 날아가다 향기로운 꽃에 다가가 살포시 내려 앉는 그런 기분이죠. 수행을 만나고 정진의 마음이 한 층 한 층 탑을 이루면서 세상 모든 일들이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수행을 하면 할수록 가슴에서 느껴지는 맑은 빛이 하늘의 태양보다 더욱 빛나는 것 같다’는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죽기보다 힘든 일 있으면 죽을 각오로 기도해보세요. 그렇게 죽기 살기로 정진하면 소원하는 한 가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저도 해냈는걸요.”
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www.beopbo.com)
9-2
안선희님(자금광)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
안선희씨 (법명:자금광, 47세, 충남 계룡시, 주부)
잠자는 4시간 빼고 20시간 정진
가행정진 후 환희심·희열 솟구쳐
나는 오랫동안 불자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시절을 살펴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하기 전에는 거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수준에서의 신행이었다.
남편이 잘되길 바라고 자식이 건강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기원하고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전부였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텅빈 법당에서 홀로 3000배를 하기로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배 절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 공덕의 힘으로 많은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 시기에 덕양선원을 알게 되었고 법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을 시작하였다. 독송목표는 100만 독으로 잡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108독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108독을 하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이렇게 4개월간의 수행을 진행하던
중 일주일 동안 매일 1000 독을 하는 가행정진을 하기로 하였다. 천 독을 하는데 20시간이
들었으니 잠을 자는 4시간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시간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얼중얼 거리면서 지냈다.
걸으면서도 중얼중얼, 밥을 하면서도 중얼중얼, 심지어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중얼중얼
거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람 만나는 일도 줄이고 바깥일도 최소화하면서 오로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는 일에 매달렸다. 드디어 이레째 되는 날 무려 7000독을
마치고 나니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희열이 솟구쳤다. 일단 해냈다 하는 환희심에 젖어 들었다.
한 차례의 가행정진을 하면서 얻은 성과는 환희심 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한 번 독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니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면서도 독송에 전념해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시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다. 일주일 입원 치료를 하는 기간 중에 늘 곁에 붙어 간호를 하면서도
독송은 놓지 않고 계속 하였고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머님을 향한 지극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참으로 환희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독송 중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지난 시절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업장들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힌다. 흔히 말하는 탐진치 삼독심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그것에 빠져있는 줄 모르고 헤매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슴이 울컥하고
답답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스님께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타나는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오직 마음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에 집중해라고 할뿐이다. 그래도 어쩌랴.
스님의 분부는 지엄하니 그대로 하는 수밖에. 다시 독송에 들어 가본다. 어렵게, 어렵게
독송이 진행된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힘들게 피워 올리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 털어내 버리고 독송에 전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제야 스님께서
그렇게 짧게 한 마디 하신 그 말씀, 오직 독송에만 집중하라고 한 그 말씀의 힘이 느껴졌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들에게 던지는 짧은 한마디 말씀에 불성을 깨닫는 것처럼 스님께서
하신 그 한 마디 가르침이 참으로 커다란 위신력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라니 108독 15분 만에… 하루 3천독
100일 10만독 후 자신감-위신력 체감
가행정진을 거듭 할수록 내면의 힘이 세어진다. 독송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 독을 하는데 이제는 15분이면 족하다. 입으로 내는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함께 내 안에서 굴러가면서 염불삼매에 빠져 든다. 하루에 3,000독이 가볍게
이뤄진다. 하루에 3,000 독을 하고 나면 한량없는 성취감에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진을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10만 독을 돌파하였을 때에는 환희심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이 밀려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높은 길이었다.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탄탄대로가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기쁨이 있어 수행을 하는 것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10만 독을 하고 나니 독송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라졌으며. 100일 기도 한 번에
10만 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속도만 빨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 속도가 빨라진
것과 더불어 기도에 빠져든 나의 마음자리도 깊어져 갔다. 한없이 깊어지는 나의 내면을
살펴보면서 나에 대한 믿음과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나와 남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며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또한 오늘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무한한 공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밝고 맑은 기운이 나를 밝고 맑게 할 뿐 아니라
나의 주변을 역시 밝고 맑게 해 준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은 나의 삶의 지침이 되었고 내 삶이 전부가 되었다. 문득문득 스쳐가는 위기의
순간들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 수행의 위신력을 체감한다. 또한 오고가는
길에서 유정들에게도 무정들에게 읊어주는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공덕이 온 우주를 밝혀준다.
독송이 거듭 될수록 마음이 환해지고 지혜가 생기며 현실의 문제에도 겁을 내거나
피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고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강한 긍정의 힘이 생겨
튼튼한 울타리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힘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행복이 내안에서 찾아야 하듯이 밖으로 향하는 나의 눈을 내안으로 돌려 오는데 여태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내안의 힘과 내안의 행복을 찾았으니 이 힘과 행복을 밖으로 쏟아내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받은 이 많은 복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주교도소
후원을 하게 되었으며 단 한사람이라도 맑고 밝은 마음자리 찾아 자신의 올바른 삶과
이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게 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고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416자의 게송을 통해 나의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념으로 독송을 하면서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강하고 이타적이며 행복한 삶으로 거듭 태어났다
출처: 법보신문(www.beopbo.com) 나의 발심수행
9-3
오윤미(법명 수선화) 님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
스님 권유로 철야 1000독에 도전
자신감 얻어 올해엔 10만독 회향
매주 금요 철야기도 시간 어김없이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이어진다.
그 열기는 금요 철야기도에 직접 참석해 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에어컨과 여러 대의 선풍기를 작동해야 할 정도의 열기다. 내가 결혼도 뒤로 하고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다.
2001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어릴 적, 부모님 따라 가끔 절에 다닌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었다.
물론 “부처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금강경 사경하고, 독송하기도 하고, 엄마 따라 그 추운 겨울날 조계사 법당에서 손과 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도 21일 기도도 했었고, 또 인연 있는 다른 도량에서도 60일 새벽 기도에 참여도 했었다. 무엇인가 엉성하기는 했지만, 열심히 부처님과의 인연의 끈은 놓지 않고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그 기도 공덕으로 20대 후반에 지금의 스승님을 뵐 수 있게 된 것 같다.
“기도를 하면, 바늘 하나 꽂을 곳도 없이 작은 내 마음 그릇이 무한대로 커져서, 내 주변의 인연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스님의 가르침이 내 안에서 늘 맴돈다.
2004년 가을쯤으로 기억 된다. 덕양선원을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도량으로 만드시려는 스승께서는 금요 철야기도를 해보라 하신다.
하루 1000편 하루에 1000편이라니…. 천수경만 읽기 시작하면, 몸이 꼬이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편만 하면 잠이 쏟아지는 내가?
자신이 없었다. 아니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님께서 한번 해 보라고 권하신다. 하다보면, 그 다음부터 힘이 붙어서 좀 쉬워지니까 다시 한 번 해 보라 하신다.
그래서 도전 했다. 철야에 신묘장구대다라니 1000독을 말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야 야야...”
그때는 정말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꼬박 24시간 걸렸고, 다음날 엄마와 함께 졸면서 집에 간 기억 뿐.
한번 해 보니, 그다음부터 철야 할 때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번에도 했는데, 이번에는 왜 못해!” 라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금년 백중기도 회향 때, 신묘장구대다라니 10만 독을 마무리 했다.
10만 독. 언제 할 수 있을까 했는데, 한 편 한 편 하다 보니 어느새 10만 독이 넘었다.
백중 기간에 가행정진을 하면서, 나는 가족들 모두 불심이 일어나길 기도 했고, 조상 천도재를 발원했다. 결국 이 두 가지 원은 바로 이루어졌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만 독을 먼저 성취하신 엄마와 함께 하는 수행 길이라서 더 힘이 난다. 집안의 문제가 하나씩 풀리고, 가족에 대한 나의 발원들이 이뤄지면서, 이 기도에 대한 믿음은 더 확고해졌다.
10만 독 후 탐·진·치 삼독심 점차 소멸
2010년 5월까지 다라니 100만 독 발원
나에게도 기도의 힘이 생기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여동생도 지금은 매주 금요 철야에 함께 수행한다. 부모님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며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았다. 조상님께도 온 식구가 참석하여 여법하게 천도재를 모셔드렸다. 재를 지내며 나는 끝없이 우러나는 환희심으로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처음 이 기도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잠과의 싸움, 게을러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들이 무한히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기도가 계속되면 될수록 그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발원하는 마음도 예전에는 “부처님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변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 후에 달라진 점은 또 있다.
전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탓’으로 돌렸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금방 “그래, 이것은 내 잘못이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당연하게 생각 했던 것들도 다르게 보인다.
한 끼의 밥을 먹을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던가. 물을 마실 때, 전기를 쓸 때,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수행일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란 것을.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들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신묘장구대라라니 10만 독을 하고 나니 내 주변의 환경이나 사물들이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10만 독을 이룬 후에 느끼는 전과는 다른 마음들은 아마도, ‘탐·진·치 삼독심과 업장’이 조금씩 소멸 되면서, ‘내 마음을 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일게다.
물론 지금도 ‘닦을(수행) 거리’는 나의 생활 속에 많이 존재한다.
“수행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가장 보람된 길·행복의 길이다” 라고 스승께서 말씀 하셨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세상의 깊은 이치를 젊은 나이에 느끼면서, 수행하고 있으니까 나는 정말 행복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 행복감을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닌 모든 이들이 이 같은 마음을 느껴보기를 간절히 발원하게 됐다.
언젠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 선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 중에 이 한마디가 나의 수행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같이 남산의 계단을 오르는 체력 훈련을 할 때 계단 꼭대기를 보면, 몇 계단 오르지 못하고 지친다. 그러나 바로 앞 계단을 보면서, 한 계단만 더, 한 발작만 더 라는 마음으로 훈련하다 보면, 어느새 남산 정상에 올라가 있다”
이 말은 수행하는 이들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또 수행을 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말인 것 같다. 나 역시 이 말을 되새기면서 하루하루 수행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난 앞으로 2010년 5월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100만 독을 향해, 한 독 한 독 정성스런 마음을 담아 독송할 것이다.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 나를 상상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정법 만나서 공부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오늘도 나는 대비주력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감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33·서울 홍제동)
출처: 법보신문 (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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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 스님은 천수대비주를 외워 수행의 기틀을 바로잡은 고승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이었다. 꿈속에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했고,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16세 때 해인사로 찾아가 화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식으로 출가하였으며, 17세 때 의성 고운사의 수월 스님을 찾아가서 소년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당대의 대고승인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를 외울 것을 권하였다.
"지금은 숙업이 무겁고 장애가 많아 견성법을 너에게 일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비주를 부지런히 외우면 업장도 소멸되고 마음도 맑아져서 저절로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대비주만 외우도록 하여라."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님은 대비주를 10만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웠다.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번 외워 마쳤을 때 스님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의문을 일념으로 생각한 지 엿새가 되었을 때, 마치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혀지듯 그 근원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용성스님은 '무'자 화두를 꾸준히 참구하여 확철대오하였으며, 일제의 대처불교에 대응하여 대각교운동을 전개하고 역경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출처: 일타스님의 기도영험담 모음집 '기도'(도서출판 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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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위신력
제가 아는 분 중에 지금은 어디로 가셨는지 확실치 않은데, 신행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1970년대 중반쯤 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전라남도 장성에 가면 백양사라는 절에 서옹 큰스님이 방장스님으로 게셨는데, 그 스님의 상좌입니다. 이 분이 66년도에 서울에서 동국대학교에 다녔는데 학생회에서 해인사로 관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고속버스가 다니지 않을 때라, 국도로 서울에서 9시간이 걸린다고 했을 정도로 장시간 걸리는 그런 여행이었답니다. 그분 성격이 상당히 활달하고 어디 가서 노는 걸 보면 아주 재미있게 잘 노는 분이예요. 노는 데는 꼭 중심 역할을 하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날은 친구들끼리 해인사로 가니까 술도 먹었을 테고, 차 안에서 노래도 부르고 아주 신나게 놀았는가 봐요.
그런데도 그 날따라 그 분은 전혀 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놀든 말든, 열심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다는 겁니다. 그 분이 16살 때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했는데, 그날따라 다라니가 그렇게 잘 되더라는 거예요. 김천을 조금 지나서 계속 앉아서 오니까 다리가 뻐근하고 안 좋더랍니다.
그때만 해도 버스에 안내양이 있을 때인데, 그 안내양 한테 “내가 좀 설 테니까, 이 자리에 좀 앉으세요.” 하고 안내양을 자기 자리에 앉히고는 안내양이 서는 그 출입구에 서서 갔답니다. 가다가 불과 한 20분쯤 지났는데, 차가 그냥 언덕 아래로 구르더라는 겁니다. 한 50미터 가량 되는 언덕에서 차가 굴러버린 겁니다.
차가 몇 바퀴 굴러 가지고 그냥 떨어졌는데, 완전히 납작하게 되어버린 거예요. 그때 45명이 타고 갔는데, 44명이 죽었다는 거예요. 저도 훗날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 신문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버스 사고로는 가장 큰 교통사고였답니다. 1명 남고 다 죽었다는 거예요. 그 한 명이 누구냐, 바로 신행이라는 그 스님입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상처도 거의 안 났더라는 겁니다. 머리에 상처가 조금 나고 팔다리가 좀 뻑적지근한 그런 정도지 거의 상처가 안 난 거예요. 그때 매일신문의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는데, “이건 기적이다. 이렇게 거의 상처가 안 날 정도로 한 사람이 살았다. 이건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다.”는 그런 내용의 기사를 썼습니다.
신행이라는 그 스님은 훗날 월남전에 청룡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는데, 월남에 가서도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는 겁니다. 한번은 전 중대원이 세 명을 남기고 다 몰살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 세 명 중에 그 신행 스님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훗날 하는 얘기가 자기는 불사신(不死身)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 번 사선(死線)을 넘어도 안 죽고 이렇게 멀쩡하니, 이것은 자기 명(命)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야 말로 참으로 염불 공덕이자 주력(呪力)의 공덕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주력을 해서 좋은 공덕을 얻었는데 그냥 있을 수 있느냐, 스님이 되자.” 해서 출가한 그런 스님이었습니다. 그후 강원에 조금 다니다가 일본 유학 갔는데, 그 뒤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괴로움이나 근심 걱정도 신묘장구대다라니만 잘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다라니(진언, 주력) 뿐만 아니라 염불이든 참선이든 참으로 지극하면 그런 대단한 공덕이 있습니다. 참으로 지극하면 그 이상의 공덕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그런 말을 합니다. 염불의 공덕은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려면 일념으로 지극하게 정진해야 됩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염불하는 사람을 침노하지 못해요. 해치질 못해요. 그래서 화살도 오다가 비껴간다고 했어요. 그런 공덕이 바로 염불 공덕입니다.
-축서사 선원장 무여 스님의 법문 중에서
출처: 구도역정 http://cafe.daum.net/kudoyuk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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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www.buruna.org 하성호님의 글中
다라니 독송의 공덕과 가피 체험담
진언, 주문, 신주의 세가지를 다라니라 하죠... 이러한 구분은 석가 세존께서 다라니를 설하실 때의 신명상서의 이적을 보고 구분하죠. 모든 대승경전이 설해지는 곳은 석가 세존의 몸에서 나오는 금빛 세계 (빛으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화장세계) 라 하죠.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장소이죠.
이러한 법계에서 부처님의 가슴의 만자에서 설해진 것을 진언 (광명의 소리), 부처님의 입에서 설해진 것을 주문(광명의 말씀), 부처님의 머리 정수리 육계에서 설해진 것을 신주(육계에서 화생한 부처님의 광명인 의밀) 로 분류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수경이라는 경전의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수지 독송 공덕에 대해서 석가 세존과 관세음 보살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이 다라니가 수행자를 보호하며 몹쓸 병의 고통으로 부터 해탈케 하며 갖가지 고뇌로 부터 자유롭게 하며 수행이 완전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온전한 수행으로 이끈다.`
이 다라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 언어로 창작된 신비하고 미묘한 힘을 가진 언어이죠.
신묘장구대다라니 뿐만 아니라 모든 다라니는 미묘한 신비를 가지고 있으며 부처님과 불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죠.
저는 처음에 일타스님의 가르침대로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염하는 것 부터 시작했죠.
그 일이 저에게 행운이었죠. 내 자신의 힘이었다기 보다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우연하게도 기본적인
불교 사상과 교리를 접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감합니다. 다라니를 외워지니는 자는 모든 경전을 구해 볼 수 있다는 말씀을. 속으로 이런 부분이 알고 싶다고 생각만하고 이 경전 해설서는 한 권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만하면 얻게 되고 보게 되죠.
제 주관적인 판단과 생각보다는 사실의 서술을 위주로 하겠습니다. 판단은 여러분들이 하세요. 저의 경험을 올립니다.
군대 복무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죠.
어느 겨울 눈내리던 새벽이었습니다. 가끔씩 사고가 나고 하던 부대 내리막길로 차를 몰고 내려오고 있던 중이었죠.
이 정도의 눈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차를 운전하고 내려 왔죠. 그러나 판단과 달리 차는 옆으로 미끄러진 채 한없이 속력이 붙어 도저히 제어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길 끝에는 10 미터 높이의 절벽이 있었고 절벽 앞으로는 조그마한 면회실이 있었죠. 그 짧은 순간에 드는 생각으로도 저 면회실을 부딪히고 절벽 밑으로 떨어져 운이 좋아도 내가 다치고 차가 박살이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짧은 순간이 지났습니다.
제어가 불가능하던 차가 순간 조그마한 사이길로 핸들이 돌려지며 차가 멈추어 섭니다.
시간이 지나고 알았습니다.
그런 기적적인 일 뒤에는 늘 부처님전에서 아무 탈없도록 자식을 지켜주십사하고 기도하던 어머님이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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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 관음재일 법문中
천수경(千手經)에는 관세음보살님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을 찬탄한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가 있는데 예로부터 이 다라니를 주력하여서 신통가피(神通加被)를 얻은 분이 많이 계신데 구한말 동학사 조실(東鶴寺 祖室)로 계시던 경봉 강백(鏡峯 講伯) 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들으신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얻으셔서 항상 책 없이 강의를 하셨다고 합니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무엇인들 못 이루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이 꼭 떡 설게 쪄놓고 밥 설게 쪄놓고 상대에게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 받으려는 것과 같으니 성취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처음 시작하는 그 마음으로 끝까지 해야 되는데 높은 사다리에서 처음에는 조심조심 내려오다가 한두 칸 남겨놓고 홀짝 뛰어내려서 발목 삐고 뒤로 홀랑 자빠지듯이 뭔가 좀 잘 되어간다 싶으면 그만 안일에 빠져 기도를 쉬어서 스스로 장애를 일으켜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기도란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면밀히 이어서 해야지 조금 하고서 ‘이만하면 되겠지’하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떡이 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법(法)도 통하고 모든 세계의 관세음보살님과도 다 통하게 되어 있으니 나의 정성이 부족함을 항상 살피고 걱정해야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고 없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고파 울 듯이 전후사정 생각 없이 기도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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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독송하니 광명 가피”
시각장애 1급 장애인 신도 시력 되찾아
BBS불교방송과 대성사 주지 법안 스님이 함께 이끌고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이 불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철야정진에 참가한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면서 기적처럼 시력을 회복한 주인공은 법명이 의륜(52·서울)인 김 모씨.
김 씨는 지난 92년 포도막염에 의해 시신경이 죽는 병을 얻어 시력을 상실했다.
지난 2월까지 꼬박 13년 넘게 시력을 잃은 채 살아가면서 때론 좌절하고, 때론 상실감에 쌓이기도 했던 김 씨는 우연히 불교방송을 청취하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 소식을 듣고
2월 10일 경북 예천 서악사와 3월 18일 강화도 적석사에서 진행된 제14차·제15차 철야정진에 참가했다.
꿈에 관세음보살님을 현몽했던 터라 무엇인가 삶의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철야정진에 참가해 법안 스님의 지도에 따라 일념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송을 했다.
그리고 철야정진을 다녀온 후 차츰 눈이 밝아지더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각장애 1급으로 장애인증까지 소지하고 있는 김 씨는 자신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변화에 놀라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았으나, 의학적으로 시신경이 회복된 상황은 아니었다. 병원 측 역시 기적 같은 일이라며 의아해 할뿐이다.
이에 김 씨는 “불교방송과 법안 스님이 주관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에 참가한 덕에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며 자신의 시력회복이 신묘장구대다라니 1만 독송 철야정진 덕분임을 굳게 믿었다.
김 씨는 특히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 준 불교방송 사장님께 감사드린다”며 철야정진 프로그램 운영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5. 언제 어디서나 발심한하면 할 수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수행
홍정화(일지행)/법계사 신도
부처님과 인연이 닿아 불교를 믿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한 15년 전부터였다. 집안에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우환이 그치질 않았는데 부처님께 절하고 『법화경』을 사경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러다 3년 전부터는 전적으로 다라니 수행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천수경』을 108독 한 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읊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다라니 수행은 하루 종일 계속된다.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도, 외출을 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다라니의 한 구 한 구가 지나간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는 소리 높여 외지만 사람들이 있을 때는 속으로 왼다. 또 어떨 때는 사경과 병행할 때도 있다. 그리고 역시 『천수경』을 108번 독송한 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런 식으로 다라니를 염하면 보통 하루 300독 이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 1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가서 부처님 전에 108배를 드린 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21독 하는 식으로 철야 기도를 하고 있다.
절이나 사경을 하다가 다라니로 수행법을 바꾼 데는 이유가 있다. 절이나 사경이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는 데 반해 다라니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발심하기에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다라니를 외는 것도 모자라 꿈에서도 다라니를 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간혹 스님들이 화두를 주며 권하기에 참선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맞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 근기가 모자란 탓인지 참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잡념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다라니를 수행할 때면 5분만 지나도 깊은 삼매경에 빠지곤 한다. 아무런 사념 없이 어디론가 빠져들어가는 느낌, 충만함과 황홀함을 느끼며 집중이 잘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모든 악업을 참회하고 뭇 중생의 안위를 기원하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읊으면 불망염지(不忘念智)를 얻는다고 한다. 경전 공부를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수월 스님이 다라니만 주력한 결과 불망염지를 얻어 절을 찾는 신도들의 신상명세를 일일이 외웠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라니 수행이 다른 수행과는 달리 매우 영험하고도 위험한 것이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 개의치 않는다.
불교 수행에서 어떤 것이 더 영험하고 어떤 것이 위험하다는 식의 말은 옳지 않다. 단지 자신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수행법이 따로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선택해서 전문가의 지도를 받는다면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가끔은 나도 소위 마장이라는 것에 꺼둘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님들께 가르침을 청한다. 그렇게 고비를 넘기면 한 단계 성숙된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느낀다.
다라니를 외고 있을 때만이 아니다. 실생활로 돌아와서도 다라니 수행의 효과는 없어지지 않는다. 얼마 동안 다라니를 수행하고 나니 타인을 대할 때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를 대하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웬만한 일에는 화도 잘 내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처음에는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다라니를 외던 것이 어느덧 남을 위한 수행이 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좋은 수행법을 포교해야겠다는 원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중심이 서면서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진 것이다.
그렇듯 내가 다라니 수행에 전념하며 밝고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되자 주위 사람들도 감화를 받았는지 다라니 수행을 하겠다고 하나 둘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그런 분들과 함께 신묘회(신묘장구다라니회)라는 모임을 갖고 정기적으로 다라니 수행을 한다.
다라니 수행으로 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한다. 이를 회향하기 위해서라도 다라니 수행을 통한 포교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다.
출처: 월간 불교와 문화 (www.buddhistculture.co.kr) 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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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출처: 광현스님 걸망속으로 카페(cafe.daum.net/kwanghyeon01)
광현스님 글
그제 오후, 인지당이라는 ID를 쓰시는 김동섭 거사님께서 방문을 하셨습니다.
마침 제가 쉬고 있는 중에 오셨기에 다담을 나누던 중, 본인이 기도의 명훈가피를 입고 있음을 제게 말씀하면서 누누이 감사함을 표하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법회 때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십만 독을 하시면서 가피를 입으셨다는 거사님 말씀을 드렸던 걸로 아는데 바로 그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다라니 주력을 하고 계시는데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지셔서 주변사람들이 자기를 보더라도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입술도 안 움직이면서 다라니 주력을 하고 계신다며 현재 19만 2천송을 하셨다면서 기도 중에 당신이 얻은 명훈가피에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주신 스님께 일차로 이 기쁨을 말씀을 드리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거나 방생을 갈 때 버스에서 기사님들이 틀어주는 모든 독경테이프가 바로 이 거사님의 회사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제가 묻기를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묻자, 신묘장구 대다라니 19만송을 끝내는 날 새벽에 비몽사몽에 어떤 노스님이 가까이 오시기에 큰스님을 뵙는 것만 같아서 자신이 하고 있는 다라니 주력을 자랑스럽게 노스님께 들려드렸더니 “그만하면 잘한다!” 하시면서 사라진 후, 거사님의 조부님께서 산에서 잡아왔다면서 산짐승 두 마리를 마당에 내려놓고 먹으라는 몸짓을 하고는 사라지시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서도 참 이상하다? 하고 있었는데, 함께 사업하던 사람이 경쟁하는 사람을 견제하고자 거사님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해서 서준 적이 있었는데 그 증거가 그 사람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증거로 서로 감정이 안 좋았을 거라고 여겼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지금 당신 법인 등록 상표가 재등록 신청을 하지 않아서 말소되어 있는데 그 상표를 당신이 절친하게 여기는 동업자가 당신도 모르게 자신이 상표등록을 하려고 한다면서 관계되는 모든 서류를 보내 줄 터이니 조사해보라며” 귀띔을 해주더란 것입니다.
설마? 하면서 관계기관에 문의해봤더니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이었다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장과 회사가 하마트면 문을 닫게 될 뻔 했고, 심지어 사업을 계속하려면 자신의 로고를 자기도 모르게 재등록한 동료였던 사람에게 사용료를 지불해가면서 하게 되는 아찔한 상황이었다면서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고 모든 일을 정상화 시켜 자신의 권리를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절친했던 친구의 빚보증을 서주고 부도 처리되어 생전에 알지도 못하는 음반사업에 뛰어들게 되어 집도 날리게 되고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저를 만나 제가 시키는 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다라니를 염송하던 중 갈마터널을 지나는 순간에 십만 송을 마무리 하자 분당에 집이 시세보다도 더 많이 받으면서 매매가 이루어지고 아들은 고려대에 편입을 하더니 그토록 입사가 어렵다는 기숙사에 입사하고 알오티시 훈련에 5등으로 마치고 딸은 교육대학에 재입학해서 입학 장학금을 받더니 이번에는 성적으로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스님 덕분이라서 제게 젤 먼저 인사를 하러 왔다기에 제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기도하는 신심을 심어주시는 것이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 같으면 아마 간증하러 다닌다고 난리를 피웠을 것입니다.
거사님은 자신의 사무실에 제가 관을 해주었던 불상을 모시고 출퇴근 시마다 지극하게 발원을 하고 길거리를 지나다 차에 깔려 죽은 축생들이 있으면 혼자서 염불을 하면서 치워주고 가기를 여러 번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상표를 훔쳐가려던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포용하려 애쓰고 원칙을 지키며 서로 잘 살아보자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지극하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두려울 것이 없고 언젠가는 발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곳 주지 임기가 내년 3월에 끝나게 됩니다만, 이젠 저도 당간을 걸어둘 회상을 마련하려는데도 아직은 인연이 닿질 않고 있으나 조급하거나 답답한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왜냐?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지극하게 하고, 부처님 밥값을 하고 있는 저에게 아직까지 인연도량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제가 가야할 인연처가 있음을 암시 하는 것만 같고 제가 할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저와 인연된 여러분들께서는 새로운 불교를 접하셨으리라 스스로 자위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만의 생각입니까?
이곳에서 저와의 인연이 아직은 남아있으니 부처님께서 2552년이 지난 후대의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셨던 “일체가 마음 한 번, 생각 한 번에 행복과 불행이 나누어지고 내 마음 안에서 내가 끝없는 윤회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깨달아 스스로가 윤회를 벗어나고 행복의 주인이 되는 지혜로운 방법을 함께 공부해 나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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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네이버 지식in bitn****님 글
저의 경우는 아주 힘든 상황에 대상 포진으로 입원을 해야하는
경우에도 정신 집중하여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외우기를 하루 이틀 하고나면
자연히 상황이 호전되어 병원에 안가도 되고, 치료비도 줄이게
되었지요.
또한 그렇게 겨울이나 여름이나 골골 감기를 달아놓고, 약봉지
쌓아놓고 살았던 시절이 옛날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신적으로 면역력이 길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실적으로 병원비를 아끼고 아파 누울 시간을 벌게 되었답니다.
꿈은 좋은 꿈이건 찜찜한 꿈이건간에 기도로 환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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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광덕 큰스님 말씀 중 (출처: 월간 불광)
제가 28년 전에 바닷가 근처의 한 시골에서 공부를 하면서 겨울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는 방에 불도 때지않고 냉방에 앉아서 기도를 했는데 천수다라니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방에 있다가 졸음이 오면 나가서 포행(布行)을 했습니다. 방에 앉아있거나 포행을 하거나 끊임없이 염불을 계속했습니다. 한 번은 자정쯤 되었는데 바로 뒤꼍 대밭 아래에서 포행을 하고 방에 들어와
앉으니까 누군가 문을 가만히 열고 내 앞에 나타나서 다소곳이 절을 했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좋은 법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곤 다시 절을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 분의 모습은 밝지가 않았습니다. 순간 저는 제가 포행하던 대밭 뒤에 동네
당집(=신당)이 있었는데, 그 당에 머무르는 주신(主神)이 젊은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일심으로 염(念)을 하면 내 생명에 깃들어있는 진리의 파동을 온 누리에 뿌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집에서 일심으로 기도해도 그 집안에 진리의 광명이 가득해지고 또
인연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육체로 존재하는 듯해도 육체를 넘어서 광명체로서 신령한 생명이 본체이고, 그 본체로서
우리가 살고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단순한 성대의 진동이 아니라 나의 생명의 진리가 진동하는 것이고
독송함으로써 법의 광명이 그를 감싸고 법의 광명을 방사(放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의 스승들 > 아발로키테스바라(관세음보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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