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의 모든 시기가 각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힌두교 신으로 시기별로 신앙의 특성이 다르다. 아기 시절의 크리슈나를 섬기는 것을 발라 크리슈나 신앙, 청소년 시기의 크리슈나는 애인 라다와 함께 숭배되어 라다-크리슈나 신앙, 장성한 시기의 크리슈나 신앙 등으로 나뉘며 각각 인도 전역에서 열렬한 숭배를 받는다.
물질적인 세상에서는 돈의 총액이 중요합니다. 기운적인 세계에서는 에너지의 총량이 중요합니다. 정신적인 세계에서는 생각의 총력이 중요합니다. 초월적인 상태에서는 오직 신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인간(아바타: 화신)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jap, zikr and mantras(자파, 지크르, 만트라) 신은 염송, 찬송, 진언으로 이루어진 혀의 언어를 듣지 않습니다. 그는 명상과 집중을 통하여 신에 대한 생각들로 이루어진 마음의 언어를 듣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사랑인 가슴의 언어만 듣습니다.
그러니 신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바로 이 삶에서 자유로워지세요. 이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신과의 합일로 이어집니다. 평범한 사람이 일상생활의 의무들을 다하면서도 이 사랑을 표현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계급, 교리 및 지위에 상관없이 각 사람과 모두의 안에 신이 현존한다고 여기면서, 모든 인류에 대해 사랑스럽게 말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불교 중국화 과정서 크게 유행 인기 끌어 사찰은 다양한 신앙과 역사를 품고 있다. 신앙에 따라 관음·약사·나한도량 등으로 구별하며 역사에 따라 능찰·비보사찰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은 사찰의 신앙과 전해오는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기획이다. 화엄십찰에 이어 열반종 사찰을 소개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상, 부처님은 입멸이 아니라 중생 제도 방편으로 열반을 보이시고 법으로 영원하다고 열반경은 말한다. 인도 아잔타 석굴의 부처님 열반상.불교신문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상, 부처님은 입멸이 아니라 중생 제도 방편으로 열반을 보이시고 법으로 영원하다고 열반경은 말한다.
인도 아잔타 석굴의 부처님 열반상. ⓒ불교신문
불교의 궁극 목표는 열반(涅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람은 왜 태어나 늙고 죽는 고통을 당하는가’라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의문을 품고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만나 각종 수행을 배우고 마침내 불과를 증득했다. 불과를 증득했다는 것은 영원히 번뇌의 속박에 벗어나 적멸(寂滅), 열반(涅槃)에 들었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녹야원 5비구 앞에서 행한 최초의 설법, 초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 중도에 의해서 통찰과 인식을 얻었고, 번뇌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적멸과 깨달음과 눈뜸과 열반에 이르렀다.”
➲ 불교 궁극 목표 열반
열반이란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진리를 궁구하여 불생불멸의 경지에 드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비로소 부처가 되었다. 나의 내면적인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은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후에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열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여 불교 사상에 일대 혁신을 불러온 경이 <열반경>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약칭으로 쓰이는 <열반경>은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기 전에 남기신 유교(遺敎)적 내용을 찬술한 경으로 후기 불교의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으며 선(禪), 계율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열반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법신상주(法身常住)와 상락아정(常樂我淨),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一體衆生 悉有佛性)는 사상이다. 부처님은 중생 제도를 위해 방편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진실한 것은 진리의 깨침 그 자체 즉 법신불(法身佛)이다.
보덕화상이 열반종을 창종하고 그 중심 가람으로 삼았던 전주 고덕산에서 바라본 모습. 보덕화상이 열반종을 창종하고 그 중심 가람으로 삼았던 전주 고덕산에서 바라본 모습. 부처님의 열반은 입멸이 아니고 반열반(般涅槃)으로 반열반은 법신 반야 및 해탈을 이룬 상태로 이를 열반의 삼덕(三德)이라고 한다.
이상규 교수는 <열반경 역해>(도서출판 해조음)에서 “법신불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우주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반야라 하며 반야지를 깨달음으로서 모든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고 풀이했다. 부처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법계에 상주한다는 것이 법신상주 사상 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확장하면 열반은 ‘항상하고 즐거우며 깨끗한’(상락아정) 경지다.
부처님의 본질적 성품인 불성이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법신상주) 하므로 모든 중생이 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실유불성론’이다. <열반경>은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一體衆生 悉有佛性)고 선언했다. 이는 대승의 핵심 사상이다. 실유불성론으로 인해 초기불교의 석가모니 일불(一佛)에서 모든 중생이 부처인 다불(多佛) 시대를 연다.
<열반경>이 끼친 영향은 또 있다. <열반경>은 “이 경은 모든 법을 거두어 잡은 것(此經攝一切法)이라고 밝힌다.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모든 불법(佛法)을 총망라한 것이다. 이상규 교수는 ”초기경과 후기경 내용 사이에는 약간 상충되는 듯 하거나, 초기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나 후기경에서 볼 수 있는 법등이 없지 않은데, 이들에 관한 조화를 도모한 것은 크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했다. 불교의 바탕인 연기법과 무상, 고, 무아, 삼법인, 사성제 등 초기경의 핵심 이론이 자주 등장하고 삼보(三寶)와 사성제가 언제나 중생이 귀의할 곳임을 분명히 밝혔다.
특히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말하면서도 정(定)이 앞서고 혜(慧)가 뒤 따라야 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땅을 잘 고른 뒤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는 등 실천론을 제시한 점도 눈길을 끈다.
보덕화상의 제자가 창건한 열반종 사찰 중 대표적인 곳 진안 금당사 모습. ➲ 모든 법 총망라 정리
<열반경>에서 또 놓쳐서는 안 될 가르침이 계율이다.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지만 구름에 가린 태양처럼 무명 번뇌로 말미암아 불성이 가려져 이를 보지 못한다. <열반경>은 불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계율을 굳게 지키고 공을 증득하되 팔정도와 육바라밀 수행에 주력할 것을 강조한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자체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고 불성을 가꾸고 닦음으로써 성불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열반경>의 가르침이다. 불성은 씨앗일 뿐, 뿌리고 가꿔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열반경>은 “중생의 불성은 부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공덕으로 인연이 화합하여 불성을 본 뒤에 부처를 이룰 수 있느리라”고 했다.
<열반경>은 소승 3종, 대승 10여종으로 이를 통칭해 <대반열반경>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 본은 전하지 않고 한역본만 전하는데 북본(北本)과 남본(南本)으로 나뉜다. 북본은 담무참(曇無讖, 385~433)이 414년에서 421년 사이에 번역한 40권 13품의 <대반열반경>이다. 법신상주와 중생실유불성 사상이 들어있다.
북본이 강남으로 전해져 혜엄(慧嚴)과 혜관이 사령운(謝靈運)과 함께 북본을 바탕으로 하되 418년에 법현이 번역한 6권의 소승 열반경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참고하여 완역했다. 이를 남본이라 한다. 남본은 전체 36권 25품으로 가장 널리 읽힌다.
법현이 번역한 소승열반경도 빼놓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 부강한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그 유명한 ‘칠불퇴법(七不退法)’, 순다가 올린 점심 공양을 드신 후 복통을 앓아 이를 대중이 나무라자 부처님께서 순다를 위로하며 부처님을 공양한 큰 공덕이 있을 것임을 축원하는 대목, 반열반에 드신 후 장례법을 여쭙자 전륜성왕의 예를 따르면 된다는 내용, 120세의 수밧다 노인에게 설법을 하시고 마지막 제자를 받아들일 정도로 끝까지 법을 설하셨던 광경, 다비 후 사리 분배 등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열반경> 한문본이 나오면서 중국 남북조 시대에 대 유행하는데, 도생(道生)의 역할이 컸다. 남복본이 나오기 전 여산 동림사 혜원(慧遠)의 문하에 있었던 도생(道生)이 ‘일천제(一闡提) 성불론’을 펴 당시 불교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일천제는 도저히 성불할 수 없는 자를 말한다. <열반경>이 전해지면서 도생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자 이 경이 부처님의 궁극적 교설이라 하여 크게 유행했다. 위진 남북조 시대를 지나 수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혜원 문하의 여러 학승들이 연구하면서 남북 각지에서 <열반경>을 연구 강경하는 등 중국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열반경>이 남북조 시대 중국을 풍미 한데는 이처럼 대승불교의 핵심 교리와 사상이 드러나고 수행론과 실천론, 부처님의 마지막 행장 등이 종합적으로 정리된 불교 경전의 완결판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열반종 본찰 경복사지 모습. ➲ 중국 남북조 시대 유행
여기에다 인도에서 온 불교가 중국 문화와 종교에 맞게 토착화 한 혜원과 도생의 역할이 크다. 인도 출신으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구마라집의 교학을 이은 혜원은 철저한 율사며 중국의 문화와 특성에 맞게 불교를 재해석하고 독창적 체계를 형성한 중국불교사 초기 인물이다. 혜원에 이어 도생은 중국 전통 종교 도교와 불교를 접목했다. <열반경>의 ‘실유불성론’으로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을 이끌어내 중국 선(禪)의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 있다.
<열반경>은 그러나 <법화경>을 연구하고 정치한 이론을 정립한 지의의 천태종에 흡수돼 그 명맥을 상실한다. 사상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대 중국불교가 부패하면서 폐불을 불러와 교세가 약화된 사회 정치적 원인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사상은 화엄 법화 선 등에 스며들었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전해져 연구와 번역 등 학문적 차원에서 신앙과 수행으로 나아가는데 <열반경>이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열반경>의 사상은 동(東)으로 전해져 고구려 보덕화상에 닿는다. 보덕화상에 의해 한국불교사 최초의 종단 열반종을 낳고 원효와 의상이라는 한국불교 1700년사 가장 위대한 두 고승을 배출한다. 그리고 삼한 그 중에서도 옛 백제 땅에서 만개했다. 한국 유가(儒家)에서 문장이 가장 출중하다는 두 학자 통일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김부식이 그를 찬양하는 글을 지었다.
중국에서 법화 화엄 선에 스며들어 피와 살이 되었듯이 한국불교에서도 <열반경>은 같은 길을 걸었다. 희미하나마 남아 있는 그 자취를 찾아 나선다.
다시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참으로 골치아픈 일이 벌어졌다. 어젯밤 나는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밤새 내 방문을 두들겨대는 것이었다. 왜 자기의 책을 빼놓았느냐는 항의 였다. 그중에서도 내 방문을 가장 요란하게 두들겨댄 것은 중국의 현자 승찬이었다. 그는 심지어 문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이 신비주의자들은 아무도 못 말린다. 어느 순간에 그들이 그대의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할지 아무도 예측할수 없다. 그대가 애인과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승찬이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그들은 언제나, 어느 시각에나 찾아올 수 있다. 그들은 에티켓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우리는 섹스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꺼려한다. 왜 그럴까?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더 성에 매달리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다. 섹스에 대해 건전한 담론이 오가야만 비로소 섹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섹스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먼저 섹스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섹스를 아무 거리낌 없이 친숙하게 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섹스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섹스가 갖는 의미와 그 구조를 낱낱이 이해한 다음에야 섹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눈을 감아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눈을 감고서 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막에 사는 타조가 이처럼 행동한다. 타조는 모래에 머리를 박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면 적이 사라졌다고 안도한다. 타조가 그러는 것이야 용납이 되지만 인간이 그런 바보짓을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성 문제에 관한 한 인간은 타조보다 나을 게 없다.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는 섹스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외면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의 삶은 아주 편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문제가 사라지는가? 눈을 감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그것을 정복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눈을 감아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약하다는 증거이다. 섹스에 관해서는 온 인류가 눈을 감아버렸다. 비단 눈을 감고 외면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섹스를 물리치기 위해 온갖 싸움을 일으켰다. 이 섹스와의 전쟁이 얼마나 황폐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남자들이 앓는 정신병 중에 98퍼센트는 섹스를 억압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고, 여자들의 히스테리와 관련된 질병 중에 99퍼센트는 성적인 억압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인간이 불안하고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는 이 강력한 에너지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무작정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우리의 문학작품과 미술품들을 본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우리의 작품들은 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외계인들은 ‘왜 지구인들이 쓴 시와 소설들은 이렇게 성에 탐닉하는 것일까? 왜 잡지마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등장하고, 왜 영화마다 알몸을 내보이는 것이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들은 ‘이 지구인들은 자나 깨나 섹스만 밝히는 종족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당혹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구인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그들은 더 놀랄 것이다. 지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온통 섹스로 가득한데, 막상 지구인들을 만나 보면 신과 영혼, 천국, 구원 등에 이야기할 뿐 섹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어떤 욕망을 채우기 위해 광적으로 매달리면서 그것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다니,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