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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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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가슴으로
황홀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인가 봅니다

저절로 깨어났지만?
아루나찰라 동굴들에서
수년간 사마디에 들어 수행하셨습니다


2017년 3월

8차크라 에너지장은 첫번째 임사체험의 깨달음
9차크라 에너지장은 두번째 임사체험이나 아루나찰라의 합일체험
10차크라 에너지장은 나는 누구인가? 참나 탐구의 깨달음으로 보여진다;
가장 높은 영적 중심의 에너지 흐름인 +x 선들은(+신성, x의지)
신의 뜻에 대한 순복(surrender)의 가르침(법륜)을 의미한다
한국불교 간화선 화두수행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10차크라 에너지장 위에 (*)은 신성한 빛이다
위에 있는 점은 아래의 큰 원들보다 거대한 영역을 의미한다


옴 나마 시바야
((()))

2020.1.6



신이나 스승이 개인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도록 해줄 수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뿐이지,
그들이 직접 개인에게 해탈의 상태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의 입안에 떨어진 먹이가 도망칠 수 없듯이,
스승의 자비로운 눈길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스승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며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노력으로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서 해탈을 얻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의 눈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나는 누구인가




Q: 왜 모든 구도자들은 그런 완전히 깨달은 영혼들의 안내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A: 그 구도자들 자신이 그런 완전한 스승들을 진실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무기력, 무지, 교만 등에 기인합니다.

Q: 당신은 구도자에게는 깨달은 영혼의 스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라마나 마하리쉬에게는 그러한 스승이 결코 없었지 않습니까?
A: 라마나의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특별히 강한 마음을 소유 했었지만
완전히 깨달은 영혼의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많은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으며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범했습니다.
라마나는 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구원됐는데 오직 죽을 때에야 신을 보았습니다.

- 시바푸리 바바


오로지 신만이 유일한 실재다;
그 외에 그대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무(nothing)의 연속에 불과하다.
나는 무한한 지식이며, 무한한 파워, 무한한 지복이다.
만일 내가 그러고자 한다면, 누구라도 즉각 신을 깨닫게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왜 저를 깨닫게 해주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대여야 하는가? 그대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나
길을 거니는 사람, 나무 위의 새나 저 돌은 어떤가?
그들은 모두 본래의 하나가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 뿐이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여태껏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아닌 무엇인가를 자신으로 믿도록
여왔던 거짓행세(falsehood)를 점점 버리게 될 것이다. -
즉 그대가 언제부턴가 그 뒤에 숨어살기로 결정한
자신의 가면을 결국 벗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모두의 안에 있으며,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한다.
나를 위한 그대의 사랑은 그대의 거짓을 닳아 없애고는,
진실로 그대인 참나(Self)를 깨닫게 할 것이다.

단지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신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다.
신을 그대에게 모셔오는 것은 그대의 사랑이지, 그대의 의문이 아니다.
의심은 자만심(pride)과 개별성(separateness)만을 먹여 살린다.
그러니 질문하는 대신에, 완벽한 스승의 ‘노예’가 되려고 노력하라.

그대의 삶이 그대 마음과 가슴의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줄 때,
완벽한 스승의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성령의 강림을 재촉하기에 충분하다.
고대의 그이(Ancient One)인 내가 그대를 껴안을 때,
나는 그대 안에 계속해서 자라날 무언가를 일깨운다.

그것은 내가 심은 사랑의 씨앗이다.
그 씨앗이 발아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사실 그 목표에는 멀거나 가까움이 없으며, 거리나 시간도 없다.

영원에서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야 할 뿐이다.
무한한 존재인 신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메허 바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라마나 마하리쉬의 깨달음 요약

그런 벤카타라만에게, 1895년 11월, 그의 16번째 생일 직전, 이 소년의 남다른 운명을 알리는 첫 번 째 전조(前兆)가 나타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깊은 내면에서 ‘아루나찰라’라는 소리가, 장엄하게 압도하는 그 무엇으로 빛나면서, 고동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소리가 아닌 묘한 진동으로 그의 영혼에 늘 지속되는 것 같았다. 이 고동치는 아루나찰라가 스툴라(stula) 아루나찰라로 그 자신을 드러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오신 친척 어른께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그가 아루나찰라(Arunachala)에서 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벤카타라만은 깜짝 놀라, “무엇이라, 아루나찰라에서 왔다고”라고 소리쳤다. 벤카타라만은 막연하게 아루나찰라가 매우 성스러운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며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친척으로부터 아루나찰라가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라는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 이름이라는 것을 듣고 그는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고동치고 있는 ‘아루나찰라’에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두 번 째 전조도 곧이어 나타났는데, 이것은 책으로부터 왔다. 벤카타라만은 숙부가 빌려온 페리아푸라남(Periapuranam)이라는 제목의 타밀(Tamil) 지방의 63명의 성자에 대한 책을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토록 지고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성스런 열정이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희열에 찼다. 진실로 아름다운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신과 하나가 된 성인들의 이야기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96년 7월 중순 숙부의 집 2층 방에 앉아 있던 벤카타라만은 마침내 생애 최대의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그를 소년에서 성자로, 단 한 순간에, 재빨리, 그리고 영원토록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 절정은 아무런 탐구도, 아무런 노력도, 아무런 의식적 준비도 없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 날 그는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었다. 평소에 그는 거의 아프지 않았으며 그날도 그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공포는, 전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렬하고 불가사의한 체험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무 도움도 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이렇게 죽겠구나”고 느끼고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나,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그때 오직 이 죽음의 문제를 그 스스로 그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죽음의 충격에서 오는 이 공포는 그의 마음을 내면으로 이끌고 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죽음이 왔다. 죽음이 무엇인가? 육체의 죽음으로 오는 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몸은 죽는다.” 그래서 그는 즉시 죽음의 일어남을 드라마틱하게 하였다. 그는 죽음의 탐구를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눕고는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몸을 뻗어 뻣뻣하게 하였다. 그는 소리가 입 밖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은 물론 ‘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몸은 죽었다. 이 몸은 뻣뻣한 채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이 죽는다고 내가 죽는가? 몸이 나인가? 몸은 말이 없으며, 고요하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의 완전한 힘을 느낀다. 내 몸과는 별개인, 나 속에 있는 ‘나’의 소리조차도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몸을 초월한 영(靈:참나)이다. 비록 몸은 죽음에 이르나 몸을 초월하여 있는 영은 죽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죽음을 초월한 영이라는 것이다.”



기쁨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숨에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으로 향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사원의 세 큰 문을 포함한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으며, 안쪽에 있는 성소(聖所) 조차도 그러하였다. 성소에 홀로 들어가 빛의 링가인, 아루나찰레쉬바라 앞에 서자 격정이 소용돌이치면서 그는 링가를 껴안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버지에게 제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도착을 고하였다. 벤카타라만은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불길처럼 소용돌이치던 격정이 가라앉으면서 완전한 엑스터시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다. 마침내 합일의 희열 속에서, 그의 여정은 끝을 맺었다.




모든 의식을 마친 벤카타라만은 일 천 개의 기둥이 있는 만타팜 홀의 한쪽 구석에 앉아 사마디에 들었다.
그는 참나를 발견한 환희에 완전히 잠겼으며 낮이 가고 밤이 오기를 반복해도, 사마디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몇 주 동안을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깊은 환희에 잠겨 있었다. 자기들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말없이 앉아 사마디에 빠진 것을 본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며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티루반나말라이에 온 세샤드리 스와미(Seshadri Swami)가 이제 브라마나 스와미(Brahmana Swami)라고 불렸던 벤카타라만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막아보려는 세샤드리 스와미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브라마나 스와미는 일 천 개의 기둥이 있는 홀 아래의 지하 사원인 파탈라 링감(Pathala Lingam)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둡고 습한 이 지하실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드물었고, 일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개미, 지네, 모기 등 온갖 해충이 우글거렸다. 이곳에서 외부 세계의 모든 것을 잊고 사마디에 몰입한 그에게는 이미 몸에 대한 의식도, 감각도 사라졌다. 벌레들이 그의 몸에 다가와서 허벅지와 발을 물어뜯어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나중에는 이것이 고름과 한데 엉겨서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물린 자국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가장 강렬한 타파스(tapas)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타파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 없었던 몸을 그냥 잊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이미 지반묵타(jivanmukta)였으며 씻어내야 할 아무런 카르마도, 얻어야 할 더 이상의 목표도 없었다.
지하실에서 지낸 약 두 달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러나 참존재를 발견한 환희에 젖어든 그는 어떤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샤드리 스와미가 우연히 지하실 앞을 지나다 아이들이 그곳에 돌을 던지는 걸 보았다. 아이들이 던진 돌은 구석에 앉아 있던 브라마나 스와미에게는 이르지 못하였다. 아이들을 쫓아내고 지하실로 들어선 그 사람은, 주변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는 한 스와미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를 깨우려고 소리를 질렀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으며 몸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사마디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이 그의 몸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그를 안아들었을 때, 바닥의 흙과 뒤범벅이 된 그의 수많은 상처에서 피와 고름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몸을 망각한 깊은 사마디에 빠질 수 있는지 놀라면서 그를 들어서 지하실을 나와 근처의 수브라마니야(Subramanya) 사원으로 옮겼다. 어떤 스와미가 그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사마디에서 깨어나지 않아 도무지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씩 입을 벌려 음식을 떠 먹여 주어야 했으며, 때로는 몇 주 동안 허리 가리개를 묶을 생각도 않고 지낼 때도 있었다. 몇 주가 흐른 뒤, 그는 사원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또 후에는 꽃밭, 바나나 숲 등에 있었다. 어떤 때는 사원의 축제행사 때 쓰는 수레를 보관하는 곳에 있기도 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마디를 계속 했다. 브라마나 스와미가 일루팔(illupal)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부는 바람은 너무 매섭기도 하였다. 내린 이슬이 그의 몸을 하얗게 뒤 덥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추워 두 팔로 가슴을 감싸기도 하였다. 두 팔이 그가 입은 유일의 옷이 된 것이다.

이렇게 거의 6개월 가까이, 그는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에 머물렀고, 그 동안 그의 깊은 사마디는 계속 되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그는 마치 자다(jada)처럼 앉아있다. 그는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즐겼으며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오기를 바랬다. 심지어 그는 사마디 중에 이동하기도 하여, 가끔씩 그가 눈을 뜰 때면, 자신이 어떻게 그 장소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브라마나 스와미와 제자들은, 여름철에는 보다 시원하고 주변에 물도 풍부한 망고나무 동굴로 거처를 옮기곤 했다.
어느 날 비루팍샤 동굴로 돌아오면서, 그는 그의 두 번째 죽음의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났다. 이번에 그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실로 죽음 그 자체였는데 이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기 내 앞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얀 천 같은 것으로 가려졌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나타나곤 하다가 나중에는 사라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하얀 천으로 눈앞의 광경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천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두 번 일어났다. 나는 점점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버티기 위해서 거북 모양의 바위에 기대었다. 그것이 세 번째 일어났을 때 나는 바위 위에 앉았다. 내 주위가 온통 하얀 천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혈액 순환과 심장 박동이 멈추었고 나의 몸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몸은 마치 시체와 같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현상이 더 깊어졌을 때, 시중들고 있었던 바수(Basu)는 내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내 몸의 색깔이 변하는 것, 바수가 날 안는 것, 그의 몸이 떨리는 것,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 모두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나의 손과 발이 식어가며 나의 심장 박동이 멈추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나의 내부에는 전혀 공포가 없었다. 나는 뚜렷하게 이 모든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나의 몸의 상태에 대하여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에너지가 내 온 몸에 퍼졌으며 혈액의 순환과 심장의 박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두 번째의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비록 그의 내면적 신성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까지의 방관자적 관점에서 인류를 위한 영적 봉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하였으며, 오랜 자발적인 침묵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욕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을 정화하여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그가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오면 그냥 고요히 앉아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서 그윽한 연민의 눈길을 보내기만 하였다. 그러면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에 휩싸이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동안 쌓여왔던 모든 것이 녹아 내리는 걸 느끼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그의 발 밑에 엎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침묵의 가르침이었다. 이 침묵의 가르침은 글이나 말을 통한 어떤 가르침보다도 훨씬 확실하고 강렬하였다. 글이나 말을 통하면 제한되어버리고 왜곡되어버리는 진리가 침묵 속에서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면서 전해질 수 있었다. 그에게는 침묵의 힘이 있었으며 그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바로 이 침묵에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방황하던 마음은 고요해졌고, 오랫동안 갈구해왔던 영적 체험이 일어났다. 때로는 브라마나 스와미는 제자들에게 지시나 설명을 하기 위해 종종 글을 써 주곤 했으며, 침묵 때문에 제자들의 영적 수행이 곤란한 적은 없었다. 그는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제자들에게는 침묵을 통해서 그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전하고, 그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해서 가르침을 주었다.

아루나찰라에서 지낸 초창기, 그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으며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녔으나 그가 뿜어내는 광채는 그의 주변에 이미 상당한 수의 제자가 모여들게 하여 자연스레 아쉬람이 형성되었다. 그의 희열의 참나에서 나오는 광채, 그의 현존 그리고 그의 바라봄은 사람을 변화시켜 영적 열정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암중모색하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자비로 그는 그들이 던진 질문의 답을 종이 쪽지에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1902년, 공무 차 티루반나말라이에 들른 쉬바프라카삼 필라이(Sivaprakasam Pillai)가 이 젊은 성자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즉시 산을 올라 브라마나 스와미를 만난 그는, 처음 보자마자 이 스와미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14가지 질문을 던졌고, 브라마나 스와미는 여전히 침묵 중이었으므로 질문과 답은 모두 글로 전해졌다. 이때 주고받은 문답이 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엮어져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라마나의 초기 가르침을 담은 이 작은 책은, 그가 세상에 전한 가르침의 정수를 모두 담고 있다.

전문 http://cafe.naver.com/avatarmeherbaba/2665

posted by 有然(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