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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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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지상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적어도 십만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이상일 수는 있어도 그 이하는 아니다.
왜냐하면 십만 권 이상이 되면서부터
나는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오쇼, 내가 사랑한 책들

 


많은 영적 지식과 감각, 깊은 영적 체험이 있어도
신성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좁은 길이다.
인간의 마음은 무지하고,
영혼은 무명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혜, 무한한 파워, 무한한 지복인
완벽한 스승은 상상을 초월하고 만나기도 어렵다.

 

오쇼 라즈니쉬는 아바타 메허 바바가 탄생한 인도 푸나의 같은 병원에서 출생했다

 

수많은 영적 스승들을 비판했던 오쇼는

메허 바바의 다르샨을 받기 위해서 2번이나 찾아 갔다

메허 바바는 라즈니쉬에게 지침을 주었지만

오쇼 라즈니쉬는 자신의 뜻을 펼치며 힘겨운 삶으로 향해 갔다

 

 

우주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신성과 스승에게 항복하는 내맡김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영에게 내맡기는 항복은

자아의 마음을 놓아버리고 신성한 의지(Divine Will)에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 바보 주리반특 존자가 그랬던 것처럼

지성이 부족한 사람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다.

 

아바타의 전령이며 완벽한 스승인 라마크리슈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인간은 결국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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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가르침들>

사랑은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의 생물학적인 만남이 아니다. 사랑을 두 영혼의 만남으로 이해하면, 사랑은 우리에게 커다란 날개를 달아준다. 인생에 대해 위대한 통찰을 할 수 있게 한다. 연인은 처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면을 쓴 적으로 남는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종교가들이나 성자들, 삶과 대면하지 않는 겁쟁이들은 섹스를 비난하는 것으로 사랑이라는 개념에 독을 섞었다. 섹스를 비난하면서 사랑 역시 비난했다. 사람들은 섹스와 사랑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섹스는 사람들이 가진 생물학적인 에너지일 뿐이다.
사랑은 사람들의 존재 전체이자 영혼이다. 섹스는 사회나 종족의 보존을 위한 욕구이다. 그러므로 종족 보존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참여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은 피해갈 수 없다. 사랑을 피하는 순간 모든 창조성은 사라지고, 모든 감각은 무뎌진다. 주위에 먼지가 가득 쌓여버린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사람이 된다. 숨 쉬고 먹고 말하고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지만 죽음이 해방해주기까지는 평생 권태를 등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쇼 라즈니쉬


<각성>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움직이는 요소는 주의력이다.
주의력은 사물에 대한 각성이다.
의식 안에 있는 무언가의 반향이다.
눈의 상태가 순간순간 바귀는 것처럼 주의력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24시간 내내 누구도 똑같은 정도로 깨어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안전한 상태일수록 무의식적이 되고 불안전한 상태일 수록 각성하게 된다.
위기상황 응급상황을 느끼는 순간 잠들 수 없게 된다. 졸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협적인 순간엔느 전 존재가 결정화되어 주의력이 전부 응축될 것이다.
주의력은 결정적인 순간에만 응축하게 된다.
일단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 잠이 든다.
이것이 위험이 흥미를 끄는 이유이다.
위험한 상태에선 어느때 보다 더 각성상태가 되고 이 순간에는 잠들 수가 없다.
각성상태로 있어야만 한다. 분명히 주의력을 결정화 시킨다.

누군가에 대한 끌림은 사실 주의력의 끌림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가슴설레게 하는 그 순간에만 마음이 완전히 각성되어
그때만이 누군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도박을 하든
헌집 대신 새집을 새 지위를 얻으려 쫓아다니든
전쟁터로 나가든
깊은 곳에서는 이러한 모든 추구가 결정화된 주의력 명상을 경험하려는 심오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삶에서의 모든 환희는 주의력이 얼마나 결정화 되었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지복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깨어나야 한다. 잠자고 있으면서 환희를 얻을 수 없다.

우리가 깨어있다 부른 것은 여전히 매우 잠에 취한 몽유병상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꿈속에서 일어나 물마시고 일하고 다시 잠자러 간다.
"꿈에서 깨여."
주의력이 매우 예민한 상태에선 감정적이 된다.
고통의 순간이나 행복의 순간엔 주의력이 최고조에 있다.
그래서 각성상태로 충만한 기억들이 모든 의식을 가득 채우고
일반적 평범한 일들은 잊혀진다.

오쇼 라즈니쉬


그대를 영혼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사랑이
늘 만족스럽지 못한 까닭이다.

-오쇼 라즈니쉬


독신의 가치는 기계적인 억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독립감에 있다.
그러나 마음이 욕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는 없다.

같은 식으로, 결혼의 가치는 채움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다른 이와의 합일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합일 또는 이원성의 용해는
오직 신성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메허 바바



누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순간에 스승이 필요하다.

메허 바바(Meher Baba, 1894-1969. 근대 인도의 성자)는 위대한 일을 했다.
그는 뿌나poona 근교에 살던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예전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는 수년 동안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직 이 일에 전념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미친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 미친 사람들은 그대보다 낫다.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학교가 없다면, 도움을 주는 스승이 없다면 그대는 이 중간 지점에서 헤맬지 모른다. 
스승이 그대를 도와 끌어내 준다. 
이 황무지 같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능력으로 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대만의 힘으로는 어렵다. 
때로는 우연히 빠져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미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은 내게 올때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럴 때 나는 측은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이 문제다. 
강요하면 할수록 그는 도망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심 나는 측은함을 느낀다. 
나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



신神은 에너지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 에너지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신神은 엄청나게 활발하고 무한한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대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러므로 신神을 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제게 오십시오” 하고 신을 초대하기 전에 어떻게 준비를 갖추느냐 하는 것이다.》

그대는 아주 작지만 신神은 말할 수 없이 광대하다. 

《이것은 물방울 하나가 바다 전체를 초대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언제 밀려올지 모른다.
물방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물방울은 바다를 수용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다면 무한한 바다가 밀고 들어와도 물방울은 깨지지 않는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종교, 요가, 탄트라 등 뭐라고 이름 붙여도 좋다. 

《그대의 관념에 따라 신神을 보지 마라.》

《유태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따위는 버려라.》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지식의 차원에 매달린다. 
그대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신神은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신神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 

《미묘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신神에 대해 직접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그 모두가 가르침을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대에게 개념과 이론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신神은 개념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신은 가설이 아니다. 
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신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려라. 
그래야만 첫걸음일 뗄 수 있다. 
아무런 개념도 없이, 아무 옷도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채 신에게로 가라. 

《아무런 관념도 없이 텅 빈 가슴으로 신神을 향해 나아가라.》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텅 비었을 때 그대는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된다. 
필요한 것은 수용성뿐이다.

- 오쇼 라즈니쉬

posted by 有然(유연)

https://sacredart.tistory.com/m/48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의 신성화 Sacred Art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에너지 그림 설명 : 1. 귀에서 귀로 금색의 강한 원형의 에너지 흐름이 드러났다. 2. 영적 중심선이 머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1번의 금색 에너지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갔다...

sacredart.tistory.com

 

세상에서의 의미있는 연결은 명백한 인과 관계가 없는 우연의 일치를 통해 나타난다는 그의 ‘동시성’ 이론은 그의 영적 중심을 통한 직관이다.

”동시성은 우리 의식의 일상적인 차원과 근원적인 차원, 즉 두 정신적 차원의 순간적인 연합이다.”

이와같은 칼 융의 동시성에 대한 정의는 그의 관점이 영적 차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그는 심리학자로 알려져있지만 기독교, 불교, 힌두교, 도교, 영지주의, 연금술, 점성학, 동서양 철학, 문학 등등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나타냈다. 라마크리슈나와 라마나 마하리쉬에 대한 비교 글도 썼던 그의 영적인 관심은 신성화에서 드러난 영적 중심의 발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에너지가 흐르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성향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58년 10월 어느 날 꿈에서 나는 렌즈 형태의 빛나는 두 금속성 원반을 보았다.
그것들은 내 집을 넘어 날아가 호수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두 대의 UFO였다.
이윽고 또 다른 물체가 나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그것은 완전한 원형의 렌즈였다. 꼭 망원경의 렌즈 같았다. 사 오백 야드 앞에서 잠시 정지하더니 이내 날아가 버렸다. 그 직후 또 다른 물체가 공기를 가르며 재빨리 날아왔다. 그리고 그 렌즈 형태의 금속성 물질이 확장되더니 박스 모양이 되었다.
마치 환등(幻燈) 같았다.
그것은 나를 똑바로 향한 채 육 칠십 야드 떨어진 허공 중에 멈추어 섰다.
깜짝 놀란 나는 잠에서 깨었다.
비몽사몽간에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우리는 항상 UFO가 우리의 투영이라고 생각해왔어.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가 UFO의 투영이구나.
나는 환등에 의해 C. G. 융으로서 투영되고 있는 거야.
그러면 대체 그 환등을 조종하는 것은 누구지?”


일전에 나는 자기(self)와 자아(ego)의 문제에 대해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도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구릉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고 있어 주위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이윽고 나는 길옆의 작은 성당으로 다가갔다. 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제단 위에는 성모 마리아의 상(像)도 십자가도 없었고 단지 아름다운 꽃 장식만 있었다. 그때 나는 제단 앞마루 위에 한 요기(요가 수행자)가 연화좌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니 바로 내 얼굴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난 나는 잠에서 깨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하, 그래. 그는 나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 존재로구나.
그는 꿈을 꾸고 있다. 바로 나에 대한 꿈을.”
나는 알았다.
그가 깨어나는 순간 나는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C. G. 융 (스위스 심리학자. 그의 전기 “회상, 꿈, 그리고 사상 Memories, Dreams, Reflections” 중에서. 심리학 용어에서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튼 인간 존재의 핵을, 자아ego는 표면적인 의식을 말한다. 쉽게 말해, 전자는 고급자아, 후자는 저급자아라 할 수 있다. 꿈속의 요기는 융의 고급자아, 즉 ‘자기’를 상징한다.)


융이 주역에 집중한 이유 중에 하나는 64괘로 분류된 상징적 이미지 때문이다. 이미지 즉 상(象)은, 언어가 일의적(一義的)인 것과 달리,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중요한 것은 현상을 관찰하는 주체가 동시에 그 현상의 공시적 체험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인과율의 경우에 주체는 현상 밖에 있으면서 관찰할 뿐이지만, 공시성의 입장에서 주체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공시적 감응으로서 무의식에 잠재하는 일종의 직관지의 능력을 통해서 인지된다.

posted by 有然(유연)

 

요가 수행을 통해

영적 중심 센터에서 치유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강한 에너지장이다

posted by 有然(유연)

 

 

Power vs Force

제I부 방법

1장 앎의 도약

가) 신과학의 태동
① 생리학 - 운동 역학
㉠ 육체가 마음과 동시에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줌.
㉡ 질병 뒤에 의식이 작용하고 있음을 밝히는 길잡이..
② 컴퓨터 그래픽 - 혼돈 이론 해석 가능
③ 이론 과학 - 양자 역학
④ 수학 분야 - 비선형 동역학
⑤ 정신 의학 - 신경 정신 약리학

나) 과학 이론을 종합
① 우주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
② 인간 경험의 다양한 표현들이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통합됨

다) 임계점 분석
고도로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가장 작은 힘으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키는 특별하고 결정적인 지점이 존재
㉠ 초기조건의 민감한 의존성-초기의 미세한 변화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엄청난 변화의 결과를 가져온다.

라) 끌개(Attractors)
겉보기에는 무의미한 방대한 자료들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동일한 패턴
끌개는 전체적인 상황을 창조한다.
비선형 동역학은 해독 불가능한 자료 더미나 아무 상관성이 없다고 세상이 포기한 것에서도, 보통 문제 해결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법으로 상호 관련성을 찾아낸다. 알지 못하는 비결정적 의문의 자료에서 앎의 해답 단계로 움직인다. 또한 인과 관계는 문제를 논리적인 연속성에 의하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패러다임에 의하여 작용한다.

마) 지배의 場
우주 삼라만상은 다양한 힘을 가진 끌개 패턴의 상호작용
뇌의 신경 조직망은 끌개의 패턴 시스템과 같이 작용하고, 축적된 기억들은 끌개처럼 작용하며, 신경세포 하나하나는 우연에 의해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경계 전체는 우연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님.
인간의 의식 안에는, 타고난 '인간성'을 행동을 통해 발휘하도록 해주는 엄청난 강력한 끌개의 장이 존재.
뇌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일련의 에너지 패턴을 받아드리는 수신기에 지나지 않고, 이 에너지 패턴은 의식이 생각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처럼 존재한다.

바) 인과관계
우주를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들이 포개는 힘)와 눈에 보이는 질서(밖으로 펼치는 힘)로 이루어진 홀로그램


의식의 지도

700-1000
언어 이전
순수 의식
항상 존재하는
완전한
평화

600
축복
자각
하나
전부 갖춘
기쁨

540
고요함
거룩함
사랑
자비로운
사랑

500
존경
계시
현명함
의미 있는
이성

400
이해
추상
인정 많은
화목한
포용

350
용서
초월
감화 주는
희망이 찬
자발성

310
낙관
의향
능력이 있는
만족한
중용

250
신뢰
해방
용납하는
가능한
용기

200
긍정
힘을 주는
무관심한
요구가 많은
자존심

175
경멸
과장
복수에 찬
적대의
분노

150
미움
공격
부정하는
실망하는
욕망

125
갈망
구속
징벌의
무서운
두려움

100
근심
물러남
경멸의
비극의
슬픔

75
후회
낙담
비난하는
절망의
무기력

50
절망
포기
원한을 품음
사악한
죄의식

30
비난
파괴
멸시하는
비참한
수치심

20
굴욕
제거


2장 시험결과의 해석

㉠ 200이하의 수준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는 '살아남기'이다. '분노와 욕망의 단계에 이르면 개인의 생존을 위해 자기본위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자존심'의 수준에 이르면 살아 남으려는 본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함.

㉡ 200의 수준에 이르면 다른 사람의 안녕이 점차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 500의 수치에 이르게 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고려하여, 그것이 그 사람을 움직이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 600에 가까워지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인 눈뜸에 관심 을 갖게된다.

㉤ 600대에 이르게 되면 선과 깨달음의 추구가 삶의 기본적인 목적이 된다.

㉥ 700이상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삶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의식의 향상을 꾀할 수 있는가를 입을 모아 말해 왔다. 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스승이 없이는 영적 성숙을 기약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적어도 특별한 가르침을 받거나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깨달음을 얻으려는 열망이 있어도 목표를 성취하기 어렵고 자신의 무능력에 절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위의 도표가 이러한 궁극적인 인간의 열망에 유용하게 쓰여지기를 기대해 본다.

의식의 지도를 숙고하며 들여다봄으로써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싹틀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의식 수준과 더불어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인지 능력도 향상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결과물'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식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을 초월하여 '나를 지배하는 외부의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배움의 기회로 작용할 것인지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인 것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거나 도피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물에 가두는 데서 생겨나는 것일 뿐,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혼도 원하지 않을 때에는 큰 아픔이 되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해방을 뜻한다.

의식의 지도로 인해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도 새로운 조명 이 가능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힘(force)과 인간에게 내재된 진실한 힘(power)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대영제국의 억지의 힘(175)은 간디의 진실의 힘(700)을 만나면 결국 패하고 만다.

치료(treatment)와 치유(healing)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치료' 하려는 사람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변화가 없고 한결같다. 그러나 '치유'하려는 사람은 문제의 앞뒤 관계를 파악하여 관점에 변화를 꾀한다. 그리하여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증상을 다루기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다. 고혈압 환자에게 약을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환자로 하여금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게 하여 분노하고 억압하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명상을 함으로써 '기쁨'의 단계에 이르는 보다 빠른 길을 발견하기를 기대해 본다. 기쁨으로 가는 열쇠 는,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고 자비심을 갖는 데에 있다. 이러한 자비심이 없다면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없이는 어떠한 환자도 진실로, 또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바로 이 점에서,개인의 치유는 나아가서는 곧 사회의 건강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치유 받은 사람'이 곧 '치유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3장 인간의 의식 수준

의식의 에너지 장에 상응하는 감정을 거론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감정이란 것이 한 개인의 내면에 순수한 상태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이다. 의식의 여러 층들이 언제나 복합되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는 이런 의식 수준이었던 사람이 다른 조건을 만나면 전혀 다른 의식 수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총체적인 의식 수준은 이처럼 다양한 여러 수준들을 합산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가) 에너지 수준 20 : 수치심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로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을 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이다. 이 수준의 공통점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체면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나, 모욕을 당하거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을 패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치심'의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원시 사회에서는 수치스런 죄를 저지른 자를 추방했으며, 추방이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성폭행과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수치심'을 초래하므로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평생 계속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수치심은 신경증을 초래한다. 또한 정서적, 심리적 건강에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며, 이로 인해 신체적 질병으로까지 발전하기 쉽다. '수치심'이 성격의 바탕이 되면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이며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수치심은 잔인성의 도구로 쓰이며, 여기에 희생된 피해자는 자 기 자신들 또한 잔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치심'에 찬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 한다. 의식 수준이 단지 20대에 머무는 사람들의 행동은 아주 위험하다. 그들은 비판적이거나 피해 망상적인 환상을 보기 쉽고, 정신병 환자가 되거나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

수치심'이 바탕이 되는 성격의 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완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수치심을 보상하려고 하며, 무엇에 사로잡힌 것같이 자기 자신을 몰아간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과격한 도덕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적인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여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시킨다. 연쇄살인자들은 나쁜 여자들을 벌하여 성도덕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자신을 정당화시키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잦다.

수치심은 개인의 전체 수준을 끌어내리기 때문에 다른 부정적인 감정에도 영향을 받기가 쉽고, 자만심이나 분노, 죄의식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 에너지 수준 30 : 죄의식

처벌과 농간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죄의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학대, 피해의식에서 생기는 여러 증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인 죄의식은 정신 이상에 원인이 있는 신체의 질병을 초래하고, 사고를 저지르기 쉽고,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전 생애를 바쳐서 죄의식과 싸우는 사람들도 많고, 죄의식을 전면 부인함으로써 필사적인 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역시 죄의식의 소산이다.

'죄의식'에 가득 찬 사람들은 종교단체의 선동자들에 의해 강요당하고 조종당하기 쉽다. '죄와 구원'을 파는 파렴치한들은 응징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는 경향이 짙다.
자학 증상이 심해지면 공공연한 동물 학살로 잔인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죄의식은 분노를 일으키고, 살상은 이러한 분노의 표현이 된다. 사형이란 죽이는 행위가 죄의식에 물든 사람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지나지 않다. 용서에 인색한 미국 사회는 그 죄인들을 언론으로 실컷 두들긴 후 형벌을 결정한다. 하지만 형벌 때문에 범죄가 억제되었다는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 에너지 수준 50 : 무기력

이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 단계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보살펴 주는 사람에 의해 외부의 에너지가 조달되지 않는 한, 무기력에 의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살려는 의욕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며, 시선은 더 이상 사물을 좇지 않고, 주어진 음식도 삼킬 만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

집도 없이 헤매는 사람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나이 든 노인들의 체념 상태이기도 하고, 또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의지해야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기가 쉽다.

사회에서는 자원의 낭비로 보이는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테레사 수녀와 그 추종자들이 걷는 인도의 캘커타 거리야말로 바로 이 수준에 해당된다. 이 수준은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 상태이다.

라) 에너지 수준75 슬픔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 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비탄, 공허,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 수준을 지배한다. 실패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만성적인 도박 등으로 돈, 건강, 직장, 친구, 가족,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어렸을 때의 커다란 상실은 슬픔과 비탄을 삶의 필요악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다.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만사를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린이들이 자라는 것도 슬프고, 세상 만사 돌아가 는 것도 슬프고, 삶 자체가 슬프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슬픔으로 채색된다. 잃은 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으며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상실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폐해이다.

그들은 하나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전부를 잃어버린 양 일반화시키고,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사랑 자체의 상실이 된다. 그러한 감정적인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무기력'의 상태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충격 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다. 또 일단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마) 에너지 수준 100 : 두려움

100의 수준에는 좀더 활발한 에너지가 보인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인 것이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두려움이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적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회적인 다수의 두려움은 인간 행동에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위험해 보이고, 함정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려움은 독재자가 민중의 통제를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고, 불안감의 조성은 시장을 독점하려는 회사들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언론이나 광고업체들도 두려움을 유도하여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두려움의 확산은 인간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이 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번져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를 유발하고, 만성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두려움은 편집증이나 신경증적인 상태로 진전될 수 있고,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 상태를 초래한다. 두려움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뚫고 일어설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보다 높은 수준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수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지도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바) 에너지 수준 125 : 욕망

욕망의 수준에는 더 많은 에너지가 발견된다. 경제적인 욕구를 위시한 욕망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광범위한 동기로서 작용한다. 광고업자들은 본능적인 욕망을 이용하여 육감적인 유혹을 한다. 목표 달성과 보상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욕망은 우리를 다그친다.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욕망은 또한 집착의 수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때로는 욕은 수준으로 뛰어오르는 도약대가 될 수 있다.

사) 에너지 수준 150 : 분노

분노는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수준 자체는 죽음의 주위에서 맴도는 단계에서 훨씬 벗어난 상태이다.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이나 '슬픔'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상태에 이르면, 이제 그들은 무엇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감을 초래하고, 좌절감은 '분노'를 가져온다. 그런 이유로, '분노'는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사회에 대한 희생은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사회 구조에 대변혁을 가져온 커다란 사회 운동으로 발전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분노'는 흔히 분개나 복수로 표현되고, 따라서 폭발적이고 위험하다 성급한 사람들, 즉 사소한 일에 과민하고 못된 짓만 하고 잘 싸우고 소송을 일삼는 사람들이 이 '분노'의 수준에 속한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인 욕망의 에너지 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아) 에너지 수준 175 : 자존심

175로 측정되는 '자존심'은 미국 해병대를 통솔할 만한 충분한 에너지 수준이다. 이것은 미국 국민이 대부분 동경하는 수준이다. 이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낮은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다. 자존심의 향상은 낮은 의식세계에서 그들이 경험한 모든 고통의 진통제가 되어 준다 자존심은 삶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자존심은 '수치심', '죄의식',혹은 '두려움'에서부터 비약한 상태이다. 빈민가에서 사는 절망의 수준에서 해병대의 자존심으로 비약하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자존심은 좋은 덕목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존심은 분기점인 200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다. 더 낮은 수준에 비교할 때에만 좋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자존심의 팽만은 추락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이다. 자존심이 방어적이고 약점 투성이 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풀어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약한 의식 수준이다.

'자존심'은 분열과 파벌주의를 초래하며, 그래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러 왔으며, 군대는 지금도 애국심이라는 '자존심' 아래 서로를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교 전쟁,정치적인 테러리즘, 중동과 중유럽의 광적이고 무서운 역사는 '자존심'의 대가이고, 사회 전체가 치러야 했던 벌이었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과 부정否定이다. 이러한 특성상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감정적인 문제임에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성품이 갖고 있는 약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자존심'이 자리잡고 있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자) 에너지 수준 200 용기

200의 수준에서는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너지 수준 200 이하인 피험자들 모두가 약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기술한 바 있다.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200이상의 수준에서는 모두가 강한 반응을 보여준다. 200이야말로 인생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구분하여 주는 분기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 우리는 이 수준에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하며, 이 단계야말로 탐구, 성취, 인내, 결단의 영역이다. 이보다 낮은 수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희망이 없고, 슬프고, 무섭고, 좌절감으로 가득차 보인다. 하지만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용기'는 우리에게 기꺼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게 도와주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준다. 이 수준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새로운 직업기술을 배울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되고, 성장과 교육이 성취의 목표가 된다. 이 수준에 이르면 두려움이나 성격의 결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걱정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낮은 의식 수준에서와는 달리 노력 자체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200이하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마는 장애물을 만난다 할지라도 잠재력을 갖기 시작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이를 자극제로서 활용한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 보낸다. 반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로 환원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고, 더욱 더 용기 백배하게 된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인류의 전체적인 의식 수준은 오랫동안 190에 머물렀으나,20년 전부터 204의 수치로 괄목할 만한 비약을 보여주고 있음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차) 에너지 수준 250 : 중용

이 수준이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250이하의 수준에서는 사물을 이원적이고 융통성 없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 때문에 흑과 백으로 분명히 가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동양 무술에서도 유연하지 않은 동작은 큰 약점으로 취급된다. 구부릴 줄 모르는 완고함은 그만큼 부러지기가 쉬운 것이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반대와 장애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 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이 직장에 못 들어가면 다른 직장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이 단계는 내면의 자신을 신뢰하는 출발점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느끼기 시작하며, 쉽게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다.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는 일도 없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인생이 어찌 굴러가든 근본적인 수용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250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좋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잃지 않는다. 함께 지내기가 쉽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대립이나 경쟁 심리, 죄책감 등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 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중용'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다.

카) 에너지 수준 310 : 자발성

매우 긍정적인 이 수준의 에너지는 더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한 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용'의 단계는 직장의 일이 적절하게 굴러가는 수준이지만, '자발성'의 단계는 주어진 과제가 훌륭히 이루어지고 성공의 결실을 맺는 수준이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200이하의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하게 닫혀 있지만,31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하고, 사회적 ·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른다. 자발성'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실직을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사회의 선에 이바지한다. 그들은 또한 내면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이 수준에 이르면 자긍심이 높고, 이것은 사회적인 인정, 존중, 또는 보상 등에서 오는 반응에 의해 항상 보강된다. '자발성'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기꺼이 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이고 사회에 기여한다. 곤경으로부터의 회복 능력,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수준으로 향상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학생들이며 또 쉽게 가르칠 수 있어서, 사회의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된다.

타) 에너지 수준 350 : 포용

이 수준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고 원천이 된다는 이해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이하의 사람들은 무력하며,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이 '밖'에 있다고 믿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지에서 그들은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포용'이란 무기력의 한 형태인 무저항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포용'이란 슬프고 기쁜 인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지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포용하는 마음은 감정적인 온화함을 가져오고, 부정의 단계를 벗어나 보고 느끼는 능력을 넓혀 준다. 그들은 이제 사물을 오해나 왜곡의 감정 없이 볼 수 있다. 경험의 의의를 깊게 이해함으로써 결국 사물에 대해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포용' 이란 균형, 조화, 지나치지 않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목표보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항상 중요하고, 자기 훈련과 일의 숙달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

'포용'의 수준에 이르면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고,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히기 쉬운 반면,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차별과 편협을 초월한다. 평등이란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눈을 뜸으로써, 거부하기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파) 에너지 수준 400 : 이성

이 수준에 이르면 이보다 하위 수준의 감정 단계를 벗어남으로써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관계의 미묘함, 점진적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같은 상징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 의학, 그리고 개념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차 증가되는 것도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되곤 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400수준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노벨상 수상자, 위대한 지도자, 대법원의 판사들이 이 수준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이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수준의 결점은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사에 대한 객관적 ·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고, 개념과 이론의 탐닉에 의해 본질의 중요성을 찾지 못하고 지식 자체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이성'의 수준은 본질이나 복잡한 문제의 핵심에 대한 통찰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갖게 된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은 광범위한 지식과 문헌을 생산해 내지만, 방대한 자료와 결론 사이의 모순 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철학 이론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지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 사회에서 이성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 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다.

하) 에너지 수준 500 : 사랑

언론이나 TV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육체적 매력,소유욕,통제,탐닉,에로티시즘,신선함 등의 격렬한 감정과 결합된 형태를 떤다. 그러한 사랑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쉽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도치곤 한다. 사랑에 좌절하게 되면 그 동안 숨겨졌던 노여움과 의존성이 발가벗겨져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같이 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감상주의의 소산에 불과하다. '자존심'에서 비롯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그런 관계 속에서는 사랑이 머무르지 않는다.

500의 에너지 수준은 조건 없고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에의 눈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을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정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도 아니고, 표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고양시켜 주고,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인해 크나큰 성취를 이루게 하기도 한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 과정 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 혹은 육감이라고 불리는 이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아주 구체적이다. 사랑의 느낌을 가지면 뇌에서는 엔드르핀endorphin이 분비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랑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을 수 없기에 너와 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감싸 안고,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여 삶을 힘차게 긍정하게 한다. 사랑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공격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그것을 녹여 버린다.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 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가) 에너지 수준 540 :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 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변화에 의해서 오는 갑작스런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딘가에 근원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매순간마다 솟구치는 것이다. 540의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되며, 영적인 자조그룹은 이 수준에 속한다. 540이상부터는 성인, 영적 치유자, 그리고 그 제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 장의 특징은 계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 상태이다.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수준에 이르면 창조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눈뜨게 된다. 세상 만물은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신성의 표현이다. 이 세상 모든 개개인은 신의 뜻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았고, 신성 안으로 녹아들어 갈 것이다. 이들은 우리들이 기대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에너지 장의 잠재력이 발현된 것이지, 어느 한 개인의 힘은 결코 아니다.

이 수준에서 느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이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어느 특정한 개인보다는 생명 자체의 유익을 위해 쓰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의 능력도 증폭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사망 선고를 듣고도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은 540∼600의 에너지 수준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나) 에너지 수준 600 : 평화

이 에너지 장은 초월이나 자아 실현,신 의식 등의 용어로 묘사되는 경험과 깊이 관련된다. 이 수준은 천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아주 드문 현상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또 특별한 관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들은 지복의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세상일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고, 따라서 범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확연히 드러나진 않지만 인류의 개선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이들은 성인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일도 드물지만은 않다. 기존 종교의 형식을 초월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아무 것도 멈춰 있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발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인데도, 세상 전체가 시간과 공간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마치 슬로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춤을 계속 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 무엇도 개념화시키는 일이 없이 절대의 침묵에 잠겨 있다. 보는 자와 보며 지는 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사람이 풍경 속으로 녹아 들어가 풍경과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지금 여기 계시는' 분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그분의 힘은 무한하고, 끝없이 온화하고, 그러면서도 바위처럼 견고하다.

600∼7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위대한 미술, 음악, 건축 작품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우리들의 의식을 더 높은 세계로 고양시켜 주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어 준다.

다) 에너지 수준 700∼1,000 깨달음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단계로서,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군중들이 추종하고 따르며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 사람들은 신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들 자체가 신성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강렬한 영감의 소유자로서, 이들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끌개 에너지 장을 형성한다. 이 수준에서는 개성을 띤 어느 한 사람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더 이상 분리되는 일이 없다. '진아(Self)'와 '의식'과 '신성'이 하나로 동일시된다. '보이지 않는' 세계조차도 마음을 뛰어넘어 '진아'로서 경험된다. 이렇게 에고를 초월함으로써 인간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모범이 된다. 이 수준이야말로 인간의 몸을 입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인 것이다.

심오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정신을 앙양하고, 인간성의 자각에 눈뜨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이상을 갖는 것은 '은총'이라 불리며, 이 은총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
이러한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시간과 개별성을 뛰어넘게 된다. 육신인 나'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서, 운명이라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육신이란 마음의 창문을 통한 의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사 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자아는 보다 큰 '진아'에로 녹아 들어간다. 이 단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의 수준이다. 의식의 분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간다. ')

이러한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들은 소위 무드라라 불리는 특별한 손 모양을 보여주는데, 손바닥에서는 축복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축복의 에너지 장을 인류의 의식 세계로 보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성한 은총은 1,000에 이르는 것으로 측정되며, 역사에 기록된 인간으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서, 우리가 아는 세 성인에게는 주(Lord)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주 크리슈나(Lord Krishna), 주 부처(Lord Buddha), 주 예수 그리스도(Lord Jesus Christ)가 그 분들이다.

4장 의식수준의 사회적 분포

세상살이의 모습을 살펴보면 수긍하게 된다. 아직도 생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지구 도처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기근과 질병은 흔해빠진 현상이고, 여기에 정치적인 탄압과 사회적인 자원의 결핍으로 시달리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력'의 수준으로 측정되는 절망 상태에서 비참한 빈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저개발 국가뿐만 아니라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형태이든 안정을 희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절박한 생존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나 어느 정도 선택의 여지가 생긴 사람들도 욕망으로 치달리고 있는 세상의 '경제 방앗간'에서 곡식이 되어 짓찧어지고 있으며, 욕망을 성취함으로써 기껏해야 '자존심'의 수준에 도달할 뿐이다.
250이 되기 전까지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 250수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의 자기 만족이 생기고, 그로써 의식의 진화 선상에 서서 긍정적인 삶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문화적 상관관계

200이하의 에너지 장은 겨우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아주 원시적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입을 옷이 흔치 않고,문맹이 보통이며, 소아 사망률이 높으며, 질병과 영양 부족이 만연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인 잠재력을 찾아볼 수 없다. 기술 수준도 보잘것이 없어서, 고작 땔감 마련이나 식량 구하기, 움집 짓기 등에 활용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들은 변덕스러운 그때그때의 주위 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것이야말로 석기시대의 문화 수준으로, 동물의 존재 방식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200대 중에서도 낮은 수준에 속하는 사람들은 숙련되지 않은 노동, 원시적인 상거래, 카누나 움집 만들기 등에 노력을 소모한다. 이렇게 유목민의 상태에서 떠돌며 살다가 의식 수준이 조금 높아지면 농경 사회가 나타나고, 화폐를 사용하는 매매 단계로 진화된다.

200대의 중간 수준에서는 조금 숙련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소박하긴 하지만 생활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식주의 경제가 존재하고, 기초적인 교육이 시작된다.

200대의 높은 수준에서는 숙련된 노동자, 막일꾼, 상인, 소매업자 등을 볼 수 있다. 200대의 중간 이하 수준에서는 고기잡이가 개인이나 부족의 일이었던 것이 200대 중간 이상이 되면 어엿한 산업으로 등장하게 된다.

300대의 수준에서는 기술자, 숙련공, 경영자, 그리고 소박한 형태의 사업가를 볼 수 있다. 이차적인 교육이 시작되고, 옷차림이나 운동, 연예에 대한 흥미가 생기고, TV가 주요한 소일거리가 된다.

300대 중간 수준에서는 전문 경영인, 기능공, 교육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자기 가족이나 이웃, 도시를 초월하여 국가와 국가의 복지를 생각할 줄 아는 세계관이 생기기 시작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생존이 보장되고, 따라서 사회적인 관심사를 대화의 중심으로 삼는다. 사회적인 유동성, 융통성, 또는 자원에 의해 제한적이나마 여행과 레크레이션이 가능해진다.

400대의 수준에서는 지성의 눈뜸으로 진정한 식자층이 나타나고,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전문가 층과 과학자, 행정 관리 등이 형성된다. 이보다 낮은 수준에 속하는 사람들의 집에서는 아무런 읽을 거리도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수준에 이르면 잡지나 정기간행물, 그리고 적지 않은 장서를 갖추게 된다. 이들은TV교양프로그램에 흥미를 갖고, 정치적인 사건의 배경에 관심을 갖는다. 컴퓨터나 통신 계통을 이해하여 사용하게 되고, 지적인 관심을 갖고, 예술적인 창조성을 발휘하는가 하면 체스, 여행, 영화나 연극, 연주회 등을 즐기기도 한다. 사회 환경을 개선하려는 계획을 진지하게 토론하기도 한다. 대법원 판사,대통령, 정치가, 발명가, 산업계의 지도자들이 이 범위에 속한다.
교육은 이 수준의 토대가 되므로, 사람들은 정보의 근원지가 되고 큰 대학이 있는 도시에 모이게 된다. 교수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들 도 있고, 변호사나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동료의 안녕은 이들에게 공통적인 관심사가 된다.

400대 중에서도 높은 수준에서는 각 분야의 지도자들,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고위급 인사를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499의 측정치를 보인다. 400대의 수치가 대학과 박사들의 수준이긴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어 융통성 없는 뉴턴의 우주관이나 몸과 마음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에 머무른다. 뉴턴과 데카르트도 499의 측정치를 보여준다.
200의 측정치가 의식세계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듯이,500의 수치 는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500대의 수준에서 는 개인의 생존이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행동의 저변에는 사랑의 동기가 작용하기 시작하고, 창조성의 능력이 곳곳에서 보이며, 이는 헌신, 열심, 다채로운 경력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스포츠에서 과학 탐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뛰어난 노력을 보여준다. 원리 원칙을 중시하지만 남을 아끼는 마음이 행동 동기가 된다. 자신은 지도자의 위치를 추구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로 우대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수준에서 음악, 미술, 건축들의 걸작이 나오고, 이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의기가 고양된다.

500대의 높은 단계에서 우리는 사회 전반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속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관점과 이해를 창조함으로써 인류 전체에 끝없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들은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지만 사회 대중으로부터 는 보통이 아닌 어딘가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며 진다. 500대 중간 수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심오한 의미를 갖는 영적인 체험을 하기 시작하고, 영적인 추구에 몰두함을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기도 하며 이로써 주위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이 수준에서는 사회 전체를 발전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600의 수준으로 도약한 다. 이 수준에서는 개인의 생애가 전설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600대의 특성은 자비로서, 그들의 행동 밑바닥에는 자비가 깔리게 된다.

의식의 진전

이상에서 기술한 의식 수준의 진폭은 매우 큰 것이 사실이지만, 한 개인이 생애를 사는 동안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다. 태어났을 때 측정된 에너지 장은 일생 동안 겨우 5점 정도의 증가를 보일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들의 의식 수준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한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인류의 문화로서 표현되는 의식 세계 자체는 수많은 세대를 거쳐 아주 천천한 발걸음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경험을 자신들의 타고난 에너지 장 또는 의식 수준에서 해석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진로를 이룩하긴 하지만, 타고난 에너지 장을 초월한다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수준이 우리의 행동 동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동기는 의미에서 나오고, 의미는 사물을 이해하고 믿는 개인의 관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은 사물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비롯되며, 이 관점에 기반을 둔 행동 동기가 결국 우리들의 의식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애를 통해서 겨우 5점밖에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물론 통계적인 숫자로, 이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며 선택하는 많은 행동들이 결국 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에는 그다지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행한 사실을 보여준다.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의식이 고도로 성장한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영향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의 낮은 에너지 장을 상쇄한다. 반대로 극소수의 사람들 의 악영향은 전문화를 흔들어 놓을 수 있고, 전반적인 의식 수준을 끌어내린다. 이는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운동역학의 시험 결과는 단지 전 인구의 2.6%의 잘못된 사람들이 72%에 해당하는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백 이상의 수치에 이르는 갑작스러운 도약 또한 가능하다. 만일 개인이 에고 중심적인 200이하의 에너지 장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친절하고 진실하고 착하고 용서할 줄 아는 의식 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자기의 근본 목적이 된다면, 그는 높은 차원의 의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한 의지력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평생에 걸쳐서도 한 에너지 장에서 다른 에너지 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잠재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잠재력과 만나고, 그 잠재력이 그 사람의 인생길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진보를 기대하기 어렵다.

의식 수준의 측정치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수(logarithm)로 확장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인생길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361과 361.1이 갖는 에너지 수준은 현저하게 다르다. 따라서 361의 삶 과 361.1의 삶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서는 이러한 작은 차이가 세상 전체를 바꿔 놓을 수도 있다.

5장 새로운 지평선

6장 생활 속에서의 임계점 분석

7장 잠재력의 근원

제II부 연구

1장 삶의 자세와 잠재력 패턴

2장 정치에서의 잠재력

3장 시장경제에서의 잠재력

4장 스포츠에서의 잠재력

5장 사회에서의 잠재력과 삶의 경기

6장 예술에서의 잠재력

7장 천재와 창조에서의 잠재력

8장 진정한 성공

9장 건강과 잠재력

① 지혜란 높은 힘을 가진 끌개 패턴과의 결합한 결과물이다. 위임받은 원칙에서 생겨난 동기가 이해 능력을 결정하고, 그로써 행동에 대한 의미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② 모든 치료법은 에너지의 불균형이 초래한 결과를 교정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불균형을 초래하게 된 근본 자세가 교정되지 않는 한 질병은 재발하게 되어 있다.

가)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은 환자이다.

10장 건강과 질병

제III부 의미

1장 의식의 데이터베이스

2장 의식의 진화

3장 순수의식 탐구

4장 영혼의 투쟁

5장 진실의 추구

6장 앞으로 나아갈 길

posted by 有然(유연)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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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David R. Hawkins 의 에너지 그림. 신성화

데이비드 호킨스 David R. Hawkins 에너지 그림 설명 : 영적 중심: 빛의 상징이 드러났지만 다각형의 무거운 에너지가 겹쳐있다. 다각형의 에너지에서 하나의 선이 흘러나와 발에 연결되는 것은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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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과학 운동역학

-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blog.daum.net/comate77/17566029 (현재 비공개 블로그)
- 운동역학에 대한 본 글은 데이비드 호킨스의 <호모스피리투스>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 그의 빛과 어둠


1. 라메쉬 발세카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번역자이면서 그와 20년 이상 가깝게 교우한 결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지요. - P.351 15장 까르마

발세카는 마하라지의 번역자였다 -------------- 거짓

20년이상 ------------------------------------ 거짓

교우하였다 ----------------------------------- 거짓


* 마하라지는 자신이 직접 책을 저술한 바 없으며 그러므로 번역일을 할 사람이 필요치 않다. 그의 가르침에 관한 최초의 책 이나 그뒤에 나온 몇권의 책들은 마하라지와의 대화내용을 녹음한 후 편집하여 마라티어나 영어로 출간된 것이다. 여기엔 번역자가 없다. (편집자만 있다) 발세카는 런던 대학을 나온 은행 CEO 출신으로 마하라지가 오직 뭄바이(봄베이) 현지 토속어인 마라티어 밖에 할 줄 모르므로 이를 영어로 통역한 사람중의 한명이다.

* 발세카가 마하라지를 처음 알게된 것은 마운틴 패스(The Mountain Path: 라마나 스라맘의 정기간행물) 1978년 10월호에 실린 마하라지에 관한 글을 보고 부터이지만, 실지로 만나게 된 것은 이후 책을 읽고 나서였다. 그러므로 관계한지 20년 이상이라니 터무니없다. 설사 마하라지라는 이름을 인지한 그날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다치더라도 마하라지께서 돌아가신 1981년 9월까지 계산하면 3년도 채 안된다. (이 진술은 발세카가 직접 책 서문에 쓴 것이다.)

* 발세카는 마하라지와 교우한 것이 아니다. 마하라지는 발세카에게 큰 스승이었다. 그는 마하라지 앞에선 너무도 겸손하고 진지한 제자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가장 잘 소화한 수제자였다. 의 인도 출판사 사장인 딕쉬뜨가 그가 눈을 감고 마라티어를 영어로 통역할 때는 마치 마하라지가 영어로 말하는 것과 같다고 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장은 진실도가 999.9 이다.



2. 헌신자가 만족스러운 진보를 이루는데 실패하면 마하르시는 그들을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에게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마하라지는 그때 당시에 여전히 가르침을 펴고 있었고...... - P.385 16장 최후의 문

----------------------------------------------- 거짓


* 인도 전통에서 자신에게 헌신한 제자를 다른 구루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보내는 일은 없다. 더구나 마하르시는 완전한 진아 깨달음을 얻은 진아 그 자체인 분인데 만족스러운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다른 이에게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잘못된 진술이다.

제자는 오직 한 스승에게 몸과 마음 일체를 귀의한다. 스승은 진아가 육신으로 현현된 분으로 진아이자 참부모이다. 오직 한 스승에게만이 순복하며 결코 다른 스승을 찾지 않는다. 만일 다른 스승을 찾는 제자가 있다면 이는 그 스승에게 완전히 귀의한 제자가 아니고 이곳 저곳 영적 스승을 쇼핑하는 유랑 구도자일 터이다. 하물며 스승이 자신에게 귀의한 헌신자를 다른 스승에게 보내다니!

영적 헌시자의 스승에의 순복은 세상사에서 '내 기술로 부족하니 내 약점을 보완해 주는 다른 동료 스승에게 보내 추가적인 조련을 맡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마하라지는 그를 찾아오는 여러 구도자들에게 한결같이 이미 스승이 있다면 거기에 순복하고 자신을 찾아와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두분은 결코 만난 적도 없다. 연배나 깨달음의 시기 또한 맞지도 않는다. 라마나 마하르시님이 71세로 타계하신 때가 1950년 4월이고 라마나님이 타계하신 이 당시는 마하라지님은 깨닫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다. 마하라지님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73년 그 불멸의 대담집 초판이 출판된 이후 부터이다. 이때는 마하리쉬님이 입적한지 이미 23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그러니 "마하라지는 그때 당시 여전히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란 진술은 전혀 사리에 맞지않는다. 뜬금없이 그때 당시라고 하니 언제를 말하는지는 몰라도 마하리쉬님이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것이 21세가되던 1900년도 부터이니 이때는 마하라지님은 아직 아이(3살)일때다. 마하라지님은 1936년도에 깨달았으며 이후 담배장사 일과 순례 여행으로 오랜 시간뒤에야 자신의 다락방에서 하나둘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이 장은 진실도가 1000 이다.



3. 마하라지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호킨스는 의식수준 700으로 측정한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 봄베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읍니다. P. 385

---------------------------------------------- 거짓


* 그는 의식수준이 700이 아니라 720으로 측정되었다 - <내안의 참나를 찾아서>
어느 측정이 맞을까?

* 깨달을 당시 그는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살고 있었다. 봄베이 사는 사람이 봄베이를 향해 걷다니? 전혀 있을 수 없는 희안한 진술이다. 깨닫고 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담배장수 일을 계속하다가 어느날 홀연 인도 전역과 히말라야로의 순례여행을 떠났다.

이 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4. 마하라지는 1986년 경에 사망했읍니다. - P.385

----------------------------------------------- 거짓


* 마하라지는 1986년이 아니라, 1981년 9월 8일 저녁 7시 32분에 봄베이 자택에서 열반에 들었다. 임종을 지켜본 그의 열렬한 헌신자인 발세카의 기록이다.

이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5. 흥미롭게도 그의 번역자로서 오랜세월 가깝게 교우했던 라메쉬 발세카는...... - P.385

------------------------------------------------- 거짓


*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발세카는 번역자가 아니라 봄베이 지방 언어인 마라티어를 영어로 통역했던 통역자였다. 그리고 오랜세월 가까이 교우한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관계였으며, 3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에도 불구하고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발세카였다.

* 라메쉬 발세카(의식수준: 760)님은 마하라지 생전에 깨달았으며, 마하라지 사후 봄베이 자택에서 그의 스승처럼 전세계에서 그를 찾아오는 구도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여러명의 깨달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많은 저작들을 남겼고 현존하는 최고의 아드바이타 스승이시다.

이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6. (깨달은 후 2년간 침묵했고) 남은 생동안 라마나 마하르시는 아쉬람을 떠난적이 없습니다. 그는 1958년 경에 사망했읍니다. - P.386

------------------------------------------------- 거짓


* 마하르시는 아쉬람에 깨달은 2년 뒤에 부터 거처해 온 것이 아니고 아쉬람이 처음 생긴 것은 1916년 37세되던 해이며, 이때는 진아 깨달음을 얻은지 무려 2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최초의 아쉬람인 스칸다쉬람으로 거처를 옮기기 까지 20년 동안은 인근의 사원들과 과수원, 산굴등을 전전하며 가르침을 폈고, 제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이후 1922년에 새 아쉬람인 라마나스라맘으로 옮겼다.

* 라마나 마하르쉬는 1958년이 아니라 1950년 4월14일 저녁 8시 47분에 범열반에 들었다. (공식 연보로 확인)

이 장의 진실도는 1000이다.


***** 2번부터 6번까지는 제16장 최후의 문에 나온 거짓 진술에 대한 그 교정이다.

이 16장 최후의 문은 의식수준 측정치 1000이다!!!

그런데 이 지상 지고의 진리안에 어떻게 이런 거짓들이 춤추고 있는가.

누가 이 거짓으로 얼룩진 가짜 진실을 최고 완전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느뇨!!!



7.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등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암살당한 것에 주목합니다...... - P.481 제20장 전망

-------------------------------------------------- 거짓

* 예수 그리스도는 암살 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이 장의 진실도는 994.1이다.



8. 네팔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 고타마는...... - P.540 제23장 호모스피리투스

-------------------------------------------------- 거짓

* 고타마 싯달다는 네팔에서가 아니라 인도 북동부 미하르주에 있는 부다가야에서 깨달으셨다.

이 장의 진실도는 999.6이다.



9. 깨달음과 '깨달음의 수준들' 제9장

깨달음 (600)

나는 있다 I AM (650)

존재로서의 참나 (680)

뚜리야-존재가 그 의미: 이 앎 (750)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 P. 268

아라한 (800)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 P. 149

예수, 붓다, 크리슈나, 브라만 (1,000)


가장 낮은 수준으로 측정된 깨달음(600)은 무엇이며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또 아라한(800)이란 이 깨달음 이후 계속 진보하여 이르게 되는 더 높은 경지인가?

당최 무엇을 두고 깨달음이라 하는가...


사람마다 영적 배경과 환경, 처한 상황, 그 이르는 과정이 다르므로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깨닫는 과정엔 정형이 없다.

즉, 호박사 말대로 반드시 '최후의 문'을 통과하여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란 에고가 멸절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에고(마음)가 그 나온 뿌리인 진아 속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다시는 생겨지지 않는 상태이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마음이 없다,

에고가 없으므로 완전한 진아로서 존재하며, 남은 육체는 타고난 운명에 따라 남은 생을 살아가는 유기체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이렇게 완전히 마음이 멸절된 진아 깨달음의 상태를 니르구나(Nirguna-구나가 꺼짐)라고도 하고, 이렇게 된 사람을 냐니(Jnani진인; 냐나Jnana진아知를 얻은 이)라고 한다. 이 냐나(jnana 진아지)를 얻는 수행이 바로 냐나 요가(975)이다. 마하라지, 마하리쉬 이 분들은 바로 이 냐나 요가의 최고 스승들 이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남방불교(근본불교)에선 마음의 탐진치가 완전히 뿌리까지 뽑혀 나가 아라한뜨 도과에 든 이를 아라한(800)이라 한다. 최상승의 진리에 이른 분으로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란 뜻이다.

아라한뜨 도과에 들기 전 도과의 첫 단계인 수다원(예류), 사다함(일례), 아나함(불환)의 도와 과의 과정을 차례로 통과한다. 최종적으로 아라한뜨 道에 들고 果로 나와 닙빠나(Nibbana, Nirvana니르바나)에 이른다. 불이 꺼진(적멸) 것이다.

그러면 아라한이 된 이(800)와 깨달은 이(600)는 수치 200만큼 엄청한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어서 깨달은 이는 깨닫고 나서도 계속 아라한과 더 이상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나?

남방불교에서는 단순히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도과에 들었다고 깨달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아라한이 되어 완전히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깨닫지 못한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

이는 흔히 말하는 견성했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의 본래 성품은 알았으나 아는 내가 남아 있는데 무슨 깨달음이겠는가.

성불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히 완전히 불이 꺼져야한다. 즉, 열반(Nirvana의 음역)해야한다.

열반이 고승들이 죽었을 때 높혀 부르는 말이 아닌 진짜 '나'의 확실한 죽음이어야 한다.


완전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내가 있다(I AM)'는 것을 아는 앎(750)도 되고 나아가 '내가 있다'(650)도 되지만

최종적인 것은 '나라는 생각' 즉, 에고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내가 있다'(650)는 '내가 있다 앎'(750)이 있은 뒤에 나타나는 더 높은 경지이다.

'내가 있다 앎'은 앎은 아는 자가 있지만

그 아는 앎이 없어지고 존재와 하나가 되는 일시적 일원성 상태가 '내가 있다'이다.

이것은 앎이 없으므로 모름이라 한다. 이 상태가 더 깊어지면 개념적 깨달음이 온다..

하지만 깨달음은 아니다.

그 '내가있음'이 뿌리에 까지 이르러 그 '있음'이 나온 근원으로 함몰되어야 한다.


그 근원에 잠시 빠져 진아의 광휘를 맛본들 여전히 마음은 살아있으며. 그 근원인 진아에 영구히 완전히 가라앉아야 한다.

이를 마하리쉬와 그 제자분들은 본연적 무상(사하자 니르비갈파) 삼매로 부른다.

마하라지는 빠라브라만 빠라마트만으로 칭하지만 그 이름은 어떤들 상관없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이에게는 마음이 완전 사라졌기에 까르마도 윤회도 없다.

이 존재내의 어떤 것에도 (호모스피리투스가 출현하든 말든, 우주가 폭발하든 말든) 관심 가질 개체가 사라진 것이며, 오직 진아로서 존재만 한다.


라마나 마하르쉬의 제자 락쉬마나 스와미는 라마나님과의 친견만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며, 락쉬마나 스와미의 어린 여제자 사라담마가 스승의 보호아래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의 자세한 과정을 읽어보면 에고가 진아 안으로 꺼져가는 그 마지막 여정은 실로 경외롭다.



10. 깨달음과 '최후의 문' 제10장

책에 서술된 바, 최후의 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깊은 헌신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흔들릴 수도 있읍니다. (호모스피리투스 P. 379)

기꺼이 죽음을 경험하려고 하라. 죽음을 경험하려고하는 자발성을 강하게 해줍니다. 수행자는 뛰어듦에 내맡긴다...... (P.376)

깨달음에 이르는 최후의 문에 도달한 이의 84%가 이행에 실패한다......

마하라지와 마하리쉬 이 두 현인은 성공적으로 살아 남았읍니다...... (P.386)

......

루시퍼나 마라의 유혹을 이겨내고 마침내 최후의 문을 통과하는(까르마 P. 353) 자는 누구이겠는가?

그런 유혹을 이겨내는 석가나 예수 혹 화신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있기는 할까?


모든 마음과 느낌과 생각들이 오고감을 '나'의 것으로 붙잡은 것이 바로 에고다.

내가 유혹을 뿌리친다. 내가 신께 생명을 내맡긴다, 내가 최후의 문에 뛰어든다 하는 그 '내'가 에고다....

죽음을 경험하는 '자'는 누구이겠는가- 바로 에고다.


유혹을 받는 자가 있고 유혹을 뿌리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돈에 미련남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며, 갈등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 것이며, 유혹을 뿌리쳤다는 생각이 생겨나고 사라진 것 뿐이다.

거기에 어떠한 독립된 개별적 행위자는 없다.


그러면 내가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위에서 말한 그 앎이 있기 때문이다. 앎이 있다는 것은 아직 깊어진 경지가 아니란 얘기다.

설령 내가 온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해도 내가 곧 우주라해도 내가 우주임을 아는 '내'가 있는 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내'가 있는 한,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해 온 그 어떤 인물도 에고가 스스로 '최후의 문'을 향해 뛰어든 예는 없다.

깨달은 스승과의 친견에서 그냥 저절로 깨달아진 사람들의 사례는 위의 예들 말고도 많다.

왜냐하면 깨달은 스승이 바로 진아이기 때문이며, 준비가 된 제자가 스승을 만날때

그 제자의 에고는 스승인 진아의 흡인력에 의해 소멸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오직 에고를 있게 한 그 근원인 진아에 의해서만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에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에고는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에고가 사라지면 실재인 진아만이 원래대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아는 스스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일원성의 하나이다. 그래서 절대이다 상대의 반대 개념인 절대가 아니다.

항아리의 물이 대양에 풍덩 던져져서 항아리의 물을 대양의 물과 구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근원인 진아와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깨달은(600) 이후에도 무수한 잔챙이 과정(650, 680, 700, 750 등등)을 통과하고 아라한의 800 고지도 넘어야 하고, 인간의 한계 1000까지 계속 도전해야 한다.

이 책에선 황벽선사는 깨달은 후도 계속 진보하여 960 까지 갔다고 한다.

호박사와 부처, 예수도 더이상 나아 갈 수 없는 1000까지 도달하신 분들이라고한다.

웃긴다.


깨달음이 일어나면(600) 앎을 아는(750) 자는 당연히 없다.

또 아라한이 되어야 할 자도 없다.

아라한(800)도 깨달음(600)도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1000으로 진보를 계속해 나가야 할 자도 없다.


항아리의 물은 바닷물과 이미 섞여 버렸고, 예전에 담겼던 항아리물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 어느 바닷물을 다시 퍼올려서 그 바닷물더러 다시금 바닷물이 되기 위해 진보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으리오.

이 장(깨달음의 수준들)에서 말하는 (P. 229외) 내용들은 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완전히 깨닫고 나서도 진보해야 할 '내'가 있어1000까지 나아가야 한다면, 깨달은 이후에도 여전히 유혹받는 내가 있다면, 그건 진짜 깨달음이 아니다.

이치가 그러 하지 아니한가?



11. 대천사 50,000 + 의 진실 (호모스피리투스 - P. 485)

이 어마어마한 수치, 정말 상상될 수 없는 수치의 대천사란 무엇인가. 아마 호박사가 기독교 배경이라 이런 개념에 익숙하였으리라.

힌두교나 불교에 기반한 사람들은 그 의미하는 바를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생경한 용어다.

가톨릭에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등 세명의 공식 인정된 대천사가 있다. 대천사는 기독교, 천주교뿐아니라 이슬람교,유대교, 조로아스터교에도 광범하게 등장하는데 천사의 품계를 보면,

상급 천사로 치품 (熾品, Seraphim)

지품(知品, Cherubim)

좌품(座品, Thrones) 천사

중급 천사로는 권품(權品, Dominates)

능품(能品, Principatus)

역품(力品, Potestates) 천사

하급 천사로는 주품(主品, Virtus)

대천사(大天使, Archangelus)

천사(天使, Angelus)가 있다.

즉, 대천사란 천사의 9계급 중에서 하급에 속하며 전체 서열 8번째에 해당되는 천사계급이다. 그렇다면 대천사 이상의 품계들의 측정치는 50,000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최상위 치품천사인 세라핌이라면 한 5,000,000 이상 정도 되려나? 상상불가이다.

그러면 지구에서의 수 많은 생을 전전하며 온갖 유혹 다 뿌리치고 피터지는 수행후 겨우 얻어진 깨달음이 기껏 600인데, 이 무슨 절망 허탈감을 안겨주는 수치란 말인가. 깨닫고 나서도 또 인간 한계인 부처되는 1000까지 계속 진보해야 하는데,지금껏 부처가 최고 경지인줄 알았더니 이건 뭐 50,000이상 되는 대천사에다가 그 위로 줄줄이 끝도없는 단계가 있으니 부처도 그에 비하면 세발의 피가 아닌가.

부처에서 천사 수준에 도달하려면 다시 또 까마득한 무궁한 정진을 해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거기다 더해서 세람핌에 이르자면 또 얼만큼이나 기약없는 고행을 해야만 하는고. 또 혹시나 세라핌 더 이상은 없을까? 왜 없기는 무한이라는 것도 있던데.

그럼 죽자고 깨닫고나서도 다시 부처도 되어야 하고 대천사 되고 세라핌 되고 그리고 나서도 또 무한을 향해 나아가야 되고, 무량겁의 끝없는 전진만 있네... 휴식도 즐거움도 없이.

그럴까...?

근데 가만....

깨달았으면 내가 사라져 나는 더 이상 없는게 분명한데 누가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누구에게 그런 진보의 필요가 요구되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한가.

먼저 어떤 계급의 천사라 하더라도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싶다.

천사 또한 하나로 아직 합쳐지지 않고 분리 되어있는 개체성의 의식이며(물론 육체 의식은 아닌), 단지 의식이 아주 높은 수준이지만(미카엘이니 하는 이름도 있다!) 이도 분명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니 절대로 참인 것은 아니다.

하나 안에 속해 있지만 분리되어 있는 의식체의 상태라 해야 하겠다. 즉, 그 의식체가 나온 바탕인 둘없는 하나인 절대 의식과 아직 하나되지 못한 의식이다

그러면 그 하나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절대진아인 우리의 본래 면목이며, 모든 생겨나는 존재의 근원이다. 진아는 태어남이 없고 그래서 죽음도 없으며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이 바로 이 뜻이다. 육체가 죽어도 온 우주가 생멸을 거듭해도 진아에겐 티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홀로 존재하므로 스스로의 존재조차 아지 못하는 절대의 초월자이다.

그러니 천사가 아무리 높은 의식 수준이라하더라도 천사또한 그 천사를 있게 한 바탕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별적 존재일 뿐이며, 이땅을 거쳐간 수많은 스승들이 가르침을 주시는 바대로 600점짜리 깨달음이라도 학실하게 깨쳐서 진아 깨달음을 얻는다면, 50,000 점짜리 개념적 천사가 되려 부러워하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그 깨달음 600이란게 진짜 무한인지도 모르지.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님의 스승 싯다라메시와르 마하라지님은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나는 매일 한시간씩 나의 진아에서 걸어나와 강의를 한다. 그리고 나머지 23시간동안은 나의 진아안에 존재한다"


깨달은 이는 살아서도 늘 완전한 하나 속에 깊히 머물러 언제나 진아로 존재하며 이 현상계가 꿈인 것을 안다. 이 꿈속에서는 50,000의 대천사나 200대의 인간이나 1000의 호박사나 그저 꿈속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기에 이 꿈속에서 제아무리 높아봤자 꿈 깨면 일시에 사라지는 꿈속 존재들이니 숫자의 높고 낮음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모두가 똑같은 꿈 속의 객체일 뿐이다.



12. <호모스피리투스> 의 진실


이 책 전체의 의식수준은 999.8이다. 그리고 16장 최후의 문은 1000이다!!!

도데체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이 되길래 소숫점까지 측정되었을까 하고 그 정밀성에 찬탄하였었다.

1000보다 0.2가 모자란 이 정확도에 더 무서운 신뢰감이 가지 않았던가.


전망 994.1 호모스피리투스 999.6 카르마 999.9 그리고 최후의 문 1000 -

이 지구상에서 더이상 높아질 수 없는 진실의 최고 지점

인간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극한의 임계지수 1000.


도처에 거짓 진술을 품고 있는 이 책이 999.8이며 불과 0.2가 모자란 1000이란데 너무나 놀란다.

또 각장에서 완전의 수치 1000에서 불과 0.1, 0.4, 5.9 가 모자라는, 소수점을 다투는 극미의 정확한 측정치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거짓 진술이 있음에도 그 진실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여러 거짓된 진술을 알고나서도 무슨 변명으로 덮으며 읽어야 할까.

거짓은 진실이 전혀 아닌 것이며, 이는 빛이 없는 원초적 어둠과 같다.

1000이란 수치가 이 지구상 최대의 진실 수치라면 아마 1000이면 온 구석 구석을 찬란한 빛으로 환히 완전히 밝힐 수 있는 그런 조도의 진리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짙은 어둠을 도처에 깊히 품고 있는 1000이란 완전의 진실 수치는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칠흑같은 어둠이 드리워진 곳에 온전한 진리는 결코 없으리라.

또한 책 뒤에 나와 있는 수많은 참고 문헌들은 무엇에 쓰이는가. 거기서 인용한 문장들은 이 책에서 옮겨오기만 하면 최소한 990대 이상으로 환골탈태되어 지는가. 젖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 호박사가 인용하기만 하면 300대 400대의 저술들이 갑자기 990대로의 초고속 승차를 하게 되는 것인가?

이미 1000이라 자타가 인정한 호박사 자신께도 여전히 세상의 잔지식으로 짜깁기할 필요가 남아 있으신건가.

마하라지나 마하리쉬 라마크리슈나 등등 많은 영적 스승들 처럼(그들은 700대에 불과하시지) 진아 그 자체이시라면 개념에 불과한 이런 진세의 잡식들을 다 버리고 참존재로부터 우러나오는 무한한 진리의 감로를 부어주실 수는 없었을까.

마하리쉬나 마하라지님은 교육조차 제대로 못 받은 분이지만 온갖 지식과 논리로 중무장한 세상의 숱한 석학들을 그의 발아래 조아리게 한 위대한 진아의 힘을 보여 주셨는데 왜 그분보다 더 고결하신 분이 한점 기록, 한점 기억에 불과한 타인의 지식들을 그렇게나 많이 인용하여야만 했을까.

세상의 지식은 의식내의 거품이요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실체인 진아에서 나오는 것은 불멸의 진리이니 어찌 단순한 그림자가 태양빛을 감당하겠는가.



운동역학의 진실과 거짓


1. 진실을 측정치 못하는 위험한 도구

운동역학이 호박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그 누구도 정확한 측정으로 신뢰할 만한 측정치를 내어놓은 이는 없다. 운동역학은 단순히 정확도를 가리는 통계상의 확율 게임이 아니다.

단 1%의 부정확한 측정이라도 그 부정확함은 바로 진실과 거짓을 뒤바꾸는 것이니 실로 섬짓한 도구가 아닐수 없다.

만일 아래와 같이 그 1%의 부정확성이 재수없게 한 인생과 나아가 이 지구 전체에 영향 주는 질문에 맞춰져 버린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아찔하다.

"이 핵폭탄 발사의 단추를 누르는 일은 인류에 바람직하다." ............... [예스]

수 십년간 이 운동역학을 일상화하며 업으로 살아온 호박사마저도 그의 저서들에서 숱한 거짓 진술들이 진실을 위장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대중들이 안심하고 사용하기엔 너무나 위험하고 무용한 도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호박사같은 그 특수한 위치와 권위로 인해 결과치를 무의식적으로 강요받고 받아 들이며 믿고 따른다.

어째서 한국의 한 무명씨가 지적낼 수 있는 숱한 오류들을 출판된지 수년이란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왜 어디서도 거론되지도 않고 여전히 호박사의 세미나는 이어지며 그의 저작들은 수정없이 판을 거듭하고 있는가.

예수 부처와 같은 수준의 위대한 존재 완벽한 영적 저작이라는 반복적 주입은 높은 지성의 사람에게조차 이러한 냉정한 객관적 비판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언행은 신격화되고 점점 사이비의 길을 걷는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구와 결과 수치를 맹신하여 잘못 측정된 거짓된 진실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때 세상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얼룩지고 헝클어진 혼란상은 얼마나 자심하겠는가. 누구나 배우고 익혀 사용함에 모두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면 그건 세상을 해치고 결국 자신을 해치는 또 다른 살상무기와 다름이 없다.

그간 운동역학의 진실측정이 일상 여러 부분에서 진실 수준을 알려주고 사이비 스승과 부정적인 저작들을 가려주는 바로미터가 아니라 오히려 무수한 영적 저작과 영적 스승들을 평가하고 서열 매기고 심지어는 추락한 영혼으로 난도질하여 이 꿈의 세상에 더욱 더 깊은 혼란과 갈등, 분별을 조장하는 그릇된 무기가 되지는 않았는가.


2. 운동역학은 원시적 수준의 채널링

사소한 질문에도 운동역학으로 측정해 보시는 그분의 모습은 마치 공수를 의뢰하는 무녀의 신들림과 오버랩되어 안타깝다. 누가 누구에게 진실과 거짓을 물어본단 말인가.

그분은 곧 진아가 아니었던가?

운동역학의 질문에 답을 주는 그 힘은 질문자와 분리된 외부에서 나오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측정시 금속테 안경이나 화학섬유 모자를 착용하면 안된다고 명시했다. 인체 안테나가 수신에 장애를 받기 때문이란다. 인체의 근육은 그 외부의 힘으로 부터 수신받은 신호에 자극받아 2진법의 반응(답)을 낸다.

1. 근육에 강한 반응......... [예스] 아니면

2. 근육에 약한 반응......... [노]

모르스 부호보다 못한 이 얼마나 아메바적인 교신인가 말이다. 그나마도 일방통행이고 교신 상태도 엄청 불량하여 수신 내용을 믿을 수도 없다. 예스/노로 답이 불가한 주관식은 아예 질문도 못한다.

그에 비하면 채널링이나 무속인의 접신같은 건 쌍방향의 최첨단 위성 통신급이다. 또 에드가 케이시같은 영능력자를 운동역학에 비교하자면 요즘의 음질좋은 국제전화와 중세의 봉화만큼의 수준 차이라고나 할까. 그의 리딩은 개인은 물론 인류역사 우주의 숱한 비밀을 시공을 초월하여 다 읽어내었다. 아니 묻고 답받았다. 그는 아주 이타적이고 영적인 분이었다.

이 분의 리딩(Reading)에 답을 주는 원천은 일체 우주의 모든 의식이 영구히 각인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Akasic Record)이다. 운동역학의 질문에 답을 준다는 원천과 같은 소스이다.(<나의 눈> P. 413) 운동역학이 얼마나 석기시대의 장비로 첨단 현대를 희롱하는 원시적인 도구인지가 짐작 될 것이다.

운동역학이 결국 지극히 원시적인 수준의 채널링이나 무속인의 접신과 하등 다를 바가 무엇인가. 뛰어난 영매는 의사소통뿐아니라 비쥬얼, 그것도 칼라 동영상으로 교신한다. 호박사가 거주하는 세도나란 곳 자체가 볼텍스라는 자기장이 특히 강하게 형성된 유명 지역이라 많은 초상능력자들 기능력자들이 모인 곳이다. 마치 한국의 무속인들이 밀집한 계룡산처럼.

매순간 결정의 시기마다 더 좋은 결과를 바라고 운동역학을 이용하는 것은 질문자 호박사 스스로를 독립된 행위자로 치부하는 것이며 질문하는 자와 질문되는 대상으로 나누게되는 이분법적 행위이다. 이 분리가 실재하는 한 진리와는 요원하며 모든 현상계는 꿈이 아닌 실재로 환각된다.


3. 추락한 영혼으로 추락한 오쇼

<의식혁명>을 비롯한 호박사의 모든 저작들 전편에 걸쳐 수 없이 등장하는 운동역학의 의식측정, 그리고 이 진실도 수치를 기반으로 하는 호박사의 이론과 설명은 이제 결코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을 조심스레 그러나 힘주어 말해야겠다.

우연히 실수에 의해 오류된 한두가지도 아니고 한 평범한 독자로서 책을 읽는 도중에 발견한 치명적 거짓이 이 정도인데 만일 책 세부적인 내용 하나 하나를 작심하여 진실성 진위 여부를 점점해 들어간다면 얼마나 많은 진실을 가장한 거짓 진술들이 또 숨어 있을 지는 알 수없다.

측정된 의식수준에 기반한 모든 호박사의 말을 이제는 믿지 않으련다. 아니 무엇을 믿겠는가.

그가 낮은 수준으로 측정하여 폄하시킨 숱한 영적 저작들과 영적 스승들, 그리고 의식수준의 높낮이에 따라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대하였던 이 세상의 모든 측정 대상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실로 한사람의 영향이 전 우주를 진리의 빛으로 이끌게도 하고 그 빛을 가려 어둠을 만들고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운동역학이 참스승과 사이비 스승을 가려주는 훌륭한 도구가 될 거라고 호언하였지만 자신 스스로가 자신이 비난했던 사이비 스승들보다 더 큰 우를 혹 범하지는 않았는가.

오쇼 라즈니쉬(180),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75), 에크하르트 톨레(240)는 정말 그의 말대로 추락한 영혼 사이비 스승이었던가?

또 미얀마(155)는 미국(421)보다 훨씬 영적 수준이 낮은 나라인가?

영화 벤허(475)는 펄프 픽션(25)보다 월등히 더 진실한가?



에필로그

모든것은 헛된 개념일 뿐, 개념이 사라지면 진아는 여여하다.

꿈 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꿈을 꾸는 자가 꿈울 깨어버리면 한줄기 바람에 촛불이 후욱~ 꺼지듯이 사라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 참된 진리는 결코 문자나 말, 생각으로 표현되어 질 수도 없는 것인 즉, 아무리 1000의 호박사가 1000의 저작들에서 그 어떤 화려한 수사와 난해한 조어로 진리를 표현코저 했다 쳐도 진리는 객관적 대상이 될 수 없기에 표현되는 즉시 개념이 되어버린다.

그는 진리에 이르는 곧고 좁은 길을 설명하려했지만 겨우 길의 특성을 복잡하고 장황하게 그리고 아주 부실하게 설명한 꼴이 되었다. 진리의 그림자를 어려운 용어로 복잡하게 글쓴다고 진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난해한 영적 저작을 잘 썼다 잘 해독했다 하는 특정인 특정그룹의 영적 만족은 채워줄 수 있으되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에고가 개념을 이해한 것 외에 다름 아니다.

진리를 표현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다 헛된 일이며 자칫 참된 구도자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깨친 이는 침묵으로 가르치며 침묵으로 일깨우는 것이며, 그래서 이심전심인 것이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진리를 표현할 때 그 방법이 없음을 알고 다만 주장자로 법상만 쳤을 따름이다. 부처님은 단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셨다. 이 사람의 이 글 또한 개념 덩어리임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진리의 입장에선 호박사도 그 책의 진실도 다 한낮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호박사와 그의 저작들은 자신이 설정한 지상 최고의 진리수준인 1000에 와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측정하신 바 자신의 말씀, 자신의 저작들을 지상 최고의 진리로 측정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계속 그 저작들의 출판은 이어진다.

참된 진리는 실로 언어와 마음너머의 것이고, 이 일체 현상계가 진아가 드리워낸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니 그 현상계내의 극히 작은 일부이자 피조물인 객체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감히 창조주 진아의 주체성을 참칭하여 스스로가 주체인양하며 진아가 스스로 현상으로 드러난 이 일체 우주에 대해 그 얄팍한 지성으로 사량하고 수치로 또 평가할 수 있으리오.

추락한 영혼도 없고 상승하는 영혼도 없다... 추락은 상승과 쌍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며 추락하거나 상승하는 행위자 주체란 있을 수가 없다. 또 더 나은 것도 없고 더 모자란 것도 없다. 또 더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분별하는 에고일 뿐,

이 현상계 어디에도 진아와 분리된 개별적이고 독립된 행위자는 없다. 오직 진아의 지고한 움직임만 있을뿐. 구도자도 또한 없다. 단지 구도의 행위만 있을 뿐. 깨달은 자도 없다. 깨달음만 있을 뿐.

개별적 자아인 에고란 본시 존재치 않는 것이니 분별하는 에고가 사라지면 있는 그대로가 참자아의 현현이요, 이대로가 완벽하며, 모두가 하나인 진아의 나툼일 뿐인저.

posted by 有然(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