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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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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형성된 에너지 흐름은;
(X)은 미지, 무지, 의지, 작용, 봉인의 의미가 있다
양쪽 어깨팔 부위의 활발한 에너지는
운동역학 의식수준 측정의 권위자로 인한 것이다
OO 흐름은 기도와 헌신의 에너지이고
발부위의 에너지는 방향성이 독특하다


신의 깨달음을 얻으면
운동역학을 통해 질문하고 대답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시 명상할 필요도 없다.
선문답을 통해 확인하거나 인가 받을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과정은 그 깨달음이 전지(전능,지복)하지 않고
무명에 가려져 무지하기 때문이다

 

출처 https://cafe.naver.com/divinesoulenergy/186

 

 

=== 의식수준 측정 테스트 ===

호킨스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이다. 본인에 따르면 이전까지는 개인의 직관과, 스승의 가르침, 명망있는 기존 도서 등을 통해서 영적 진실을 추구해야 했으나, 이 테스트를 이용하면 손쉽게 영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방법으로는 오링 테스트(O-ring Test, 주로 1인용)와 승모근 테스트(2인용)가 있는데, 승모근이 측정하기 가장 편해서 주로 쓰는거라, 사실상 그 어떤 근육도 테스트에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에 그 방법이 적혀 있다.

1.자기 힘의 세기를 측정하여 기준으로 삼는다. 즉 영점조정을 한다.

2.긍정적 인물의 대표값(예수, 석가모니)과 부정적 인물의 대표값(히틀러)을 넣었을때 발생하는 손가락/승모근 힘의 세기를 측정한다.

3.원하는 질문[* 대답이 예/아니오로 나오게 해야 한다]을 하고나서 감잡은 대로 힘을 주어, 손가락을 떼거나 팔을 누른다. 힘을 계속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서로가 매칭 시켜놓은 느낌만큼 세게 주는 것이다.

4.그랬을 때 나온 힘의 세기가 긍정적 인물과 비슷한지, 부정적 인물과 비슷한지 측정한다. 긍정에 가까우면 답은 Yes이다.

다만 사용에 몇가지 제약조건이 있다고 한다.

1. 측정참가자 본인의 의식수준 200 이상이어야 한다. 의식수준은 특히 참가자 전원이 1~3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오링 테스트는 참가자 본인과, 승모근 테스트는 팔드는 사람, 누르는 사람 모두다.

2. 질문의 의도가 의식수준 200 이상이어야 한다.

3. 유물론적 태도나 회의적 태도를 보이는 참가자는 자신의 의식수준 측정값이 200 이상인 경우라 하더라도 큰 오차를 발생시키며, 테스트를 거의 사용할 수 없다.

4. 의식수준 200 이상 600 (인류의 0.4% 미만) 이하인 경우 측정시 오차발생 가능성이 존재한다.



‘내 영혼의 여정’ - 데이비드 호킨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나 자신이나 에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무한한 힘을 가진 무한한 존재만이 있었다. 세상은 이 무한한 하나의 밝음으로 비치기 시작했고, 하나는 만물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고요함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자신의 의지를 갖지 못했다. 내 육체는 무한하고 강력하고 끝없이 부드러운 존재의 의지에 완전히 통솔되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진실은 자명했고, 어떠한 개념화도 불필요했다. 신경계는 극도로 피로해졌다. 순환에 필요한 허용량 이상의 에너지가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걱정과 두려움, 세속적인 동기들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완전했으므로 아무 것도 더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명성도, 성공도, 돈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개업을 다시 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TV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책을 썼다. 나의 신경조직의 병변은 차츰 회복되었고,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달콤하고 유쾌한 에너지의 줄이 척추에서 뇌로 흐르기 시작했고, 강렬한 열락의 세계에 나를 맡기곤 했다. 삶의 모든 것들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일어났고, 모든 것이 다 기적이었다. 나 자신이나 내 생각보다 위대한 그 ‘나’(위대하신 분의 현존)가 모든 일을 결정했다.

나는 부처, 후앙 포, 라마나 마하리시, 니사가다타 마하리지 등의 영적인 가르침을 읽기 시작했고,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바가바드 기타, 스리 라마 크리슈나, 크리스찬 성인들이 묘사한 영적인 엑스터시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광채를 띠고 있었고, 절묘하게 아름다웠다. 살아 있는 만물이 고요함과 찬란함 속에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내적인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고 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하던 한 시간의 명상을 그만 두었다. 명상을 통해 오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홀감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오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만물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완전함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추악하다고 보는 것 속에서도 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이러한 영적인 사랑은 내 모든 지각을 채웠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 너와 나라는 모든 경계선이 사라졌다.

여러 해 동안 내면의 침묵에 잠겨 있었고 위대한 그분의 힘은 커져 갔다. 개인적인 생활이 없어지고 그 분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내뿜는 오라(aura) 속에서 기이한 평화를 느끼곤 했다. 그들은 나에게 해답을 구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참나로부터 해답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나의 참나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어떻게 그들의 육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놀라왔다.

여러 해 동안 고통 받았던 지병들이 사라졌다. 시력은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끔씩 나는 축복의 에너지,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가 내 가슴에서 방사되는 것을 느꼈다. 어떤 때는 떨어져 보여야 할 물체와 사람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절대의 침묵 속에서 나는 아무런 사건들도, 사물들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고통은 나라는 에고가 존재한다는 환상에서 온다. 자신이 곧 우주이고, 완전한 존재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실은 모두 하나이며, 끝이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는 극도로 절망적인 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구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나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정수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내면의 평화를 느끼게 됨에 따라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위대한 그분의 자비심이 치유를 한 것이다.

나는 세상을 떠나 시골에서 은둔하기 시작했고, 7년 동안 명상과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 서 영적 수련을 그만 두고 다시 연구와 저작 활동을 하기로 했다. 세상과 사귀기로 하고 사회적 관심사를 알게 되었다. 나는 평범한 존재 자체가 곧 신성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이유에서 한껏 평범해지기로 작정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관심과 친절을 갖고 사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드러난다. 다시 나는 위대한 그분의 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분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도록 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위대한 존재는 침묵 속에서 평화를 실어 나른다. 그분은 온화하지만 바위와 같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영적인 기쁨은 설명할 길 없는 고요한 황홀 상태에서 나타난다. 시간이 멈추고, 근심 걱정, 후회, 고통, 어떠한 기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쁨의 원천은 끝이 없으며, 언제 어디에나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더 이상 상실감도 없고, 슬픔이나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흠이 없다.

시간이 정지할 때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육체와 마음의 분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속에서 침묵이 점점 커져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사라지게 되면 순수 의식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온 우주와 시간을 초월한다.

이런 의식 수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단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아무 예외 없이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모든 것에 자비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나 생각들에 대해서도 자비로워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어느 순간에나 자신의 의지를 항복시켜 치미는 욕망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생각, 느낌, 욕망, 행위를 그분에게 바쳐야 한다. 처음에는 문장과 구절을, 그 다음에는 생각과 관념을 바친다. 자신의 생각을 소유한다면 결코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없다.

나는 생각으로 무르익기 이전의 에너지까지도 그분께 맡길 수 있었다.

일상적인 활동을 해 나가면서도 나는 언제나 정신을 집중하여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명상하는 동안에도 산만해지는 순간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점차 습관이 되어 갔고, 나중에는 힘 들이지 않고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은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지만 일단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타성에 의해 움직인다.

홀연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깨어 있음으로 이동이 이루어진다.

자아의 죽음과 함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황홀한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에고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순간에는 공포가 다가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 자체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왔지만 에고가 죽은 그 자리에는 참나가 들어섰다. 모든 것이 오롯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참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하나는 온전히 모든 것이었고, 완전했다. 모든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성을 뛰어넘어, 심지어는 인간성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는 이제 더 이상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영적인 깨달음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신체의 병은 저절로 없어지거나 가벼워진다. 육체는 예정된 과정을 밟은 후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육체는 나라기보다는 방 안의 가구 같은 또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황홀경이 절대적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추락은 우리의 여정을 힘겹게 하며, 상황을 환원시키는 데는 커다란 의지가 필요하다. 황홀경의 영광을 포기하고 싶지만 무아경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예기치 못했던 두려움,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외로움이 일어난다. 나는 비존재의 두려움이 엄청나서 번번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번민에 사로잡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새우고 나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뚜렷이 느껴졌다. 이것은 극도의 노력을 아끼지 말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욕구마저 항복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전부와 무를,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게 된다. 이때가 가장 어려운 고비이다.

이 정점에서 존재에 대한 신기루를 초월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나 자아의 마지막 대전환인 이 지점에서, 홀로 남아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을 푸는 것은, 우주적 신성에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만이 가능하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개인적 의식도,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마지막 단계는, 그 때, 오직 신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 혁명


데이비드 호킨스, 나의 눈 요약


[자아와 에고] 사람들은 마치 최면에 걸려서 평상적인 자아가 자신의 실체라고 믿는 듯하다. 평상적인 자아란 시나리오에 따라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행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에고의 주된 기능은 독립된 나의 형상을 유지하고, 나의 존재 및 독자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영속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에고는 괴로움과 고통,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 자신이 별개의 실체라는 믿음은 두려움을 낳으며, 그 두려움은 생존을 지향하는 온갖 충동을, 그리고 욕구, 탐욕, 시기, 자만, 미움, 죄의식과 같은 에고의 기본적 메커니즘을 강화시킨다. 에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과거에 대한 후회 사이에서 요동하는 듯하다.

에고는 자만심과 두려움에 의해 유지되는 자신의 개성들이 모여 엮어진 것으로, 철저하게 겸손한 자세를 통해 소멸된다. 에고를 넘어서려면 사랑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자세로 모든 개성과 정신적인 습관을 신에게 기쁘게 바치고자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과거의 기억은 과거 환상들의 기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기억의 가치는 축소된다. 에고는 갓 들어온 정보를 과거에 기초한 프로그램에 따라 즉각 편집하고, 자동적으로 왜곡시킨다.

거짓된 에고, 자아는 그 본성과 구조와 특성상 평화와 참된 행복을 실현시켜줄 능력이 없다. 기껏해야 조건에 기반을 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정도이고, 그 조건이 상실하고 나면 다시 비탄과 불행을 맛보게 된다. 결국 마음을 버리는 희생이야말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은 에고와 같은 것이자, 그 둘은 하나이다. ‘참다운 앎’의 상태는 ‘마음이 없는’ 레벨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의식수준] 의식은 인간의 모든 경험과 기획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므로, 의식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의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그 영혼의 주파수에 따라 결정되는 의식수준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 갈 곳과 상호 관련이 있다.

인류의 78%가 200이하로 측정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회가 거짓을 진실로 여기고 있음을 뜻한다. 전 세계 인구의 15%만이 진실이 무엇인지 이해할 능력이 있고, 단 4%만이 사랑의 레벨인 500이상의 수치에 도달해 있다. 피라밋의 꼭대기에는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다.

인류의 1/3이상은 우울증과 과식, 약물중독, 자기행동을 억제하는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뇌를 갖고 있다. 그런 사람의 이성은 통제할 수 없는 격정의 폭발로 순식간에 완전 파괴될 수 있다. 이런 동물적인 본능과 정서는 늘 존재하고, 언제든 표면화될 태세를 갖추고 있다.



200이하에서 사회는 내적인 힘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에 의존한다. 모든 악마는 200이하로 측정된다. 많은 이들이 예언한 20세기말의 ‘최후의 순간’인 인류의 대파멸은, 획일적이고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전 인류의 의식수준이 190에서 207로 상승되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00대에는 정치가 인류 구원의 희망이 되고, 정치적 이데오르기, 표어, 구호를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며, 개인적인 삶의 가치가 저하된다.

400대 중간 이하에서는 지성과 이성, 합리적 사고에 대한 자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원천인 과학이 신을 대신한다. 미국의 의식수준은 현재 425로 측정된다.

사랑은 200수준에서 나타나 점차 강해지다가 500에 이르면 압도적인 에너지장이 되며, 540에서는 무조건적 사랑이 되어 비로소 활짝 꽃이 핀다. 500-540사이는 조건적 사랑을 의미하며, 540의 무조건적 사랑으로의 도약은 ‘이원성을 놓음’으로 이루어진다. 깨달음의 수치는 600에 해당되며, 이 단계에서 이원성은 비이원성으로 용해된다. 600은 영혼과 인간이 만나는 참조점이다.

500대 중간 이상의 영적인 스승들은 많은 사람들과 가장 가깝게 접하는 이들이며,

700대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널리 인정받는 위대한 영적 스승이나 성인의 영역이고, 속세를 물러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제자를 기르고 영적 단체를 설립하곤 한다. 8-900에 해당되는 이는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물며, 700대는 개인과 집단을 상대로 가르치는 반면, 8-900대의 이들은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다.

1000수준의 에너지장은 인간의 몸과 신경계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이며, 인류 역사에 출현했던 위대한 아바타(신의 육화된 존재)들 가운데서도 극소수만이 도달한 수치로서,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 모세가 여기에 속한다.

현재 이 행성에는 700이상의 현자들이 22명 정도 있고, 그 가운데 800이상이 20명, 그 가운데 900이상이 10명이며, 그 중의 한 현자는 999에 이르고 있다.



[스승] 평화와 사랑 이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이는 오류를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원칙이다. 모든 위대한 스승은 비폭력과 비난치 않는 자세,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친다.

영적 구원자들은 에너지장에서 방출되는 순수한 힘을 통해서 더 낮은 의식들을 끌어올려준다. 기도나 예배에 의한 종교나 영성적인 헌신은, 영적인 스승들을 통해 빛을 발하는 신의 은총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저 성스런 인물을 생각하거나 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당사자를 강하게 해준다. 사실 구원자는 의식수준 600이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의식수준 600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기적 같은 것들은 삶의 일반적인 패턴이 되고, ‘에너지는 생각을 따라 간다’거나 ‘마음속에 품은 것은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는 의식의 특성이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참된 스승과 거짓 스승]

여느 세상과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도 돈과 권력, 명성을 얻기 위해 순진한 자들을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사기꾼이 있게 마련이다. 참된 스승은 너무 드물고 사기꾼들은 너무 많다. 붓다는 ‘그대들의 머리위에 다른 머리를 얹지 말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참나’라는 스승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에고가 자기 내면에 있는 참나의 앎을 가로막기 때문에, 앎의 영적 스승의 가르침이나 접촉을 통해서 진리와 재접속하게 된다. 위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공덕을 입게 된다. 수많은 스승들 가운데 참된 스승을 만날 확률은 55%쯤 된다. 널리 알려지고, 많은 존경을 받으며, 뉴에이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바(힌두교 스승)의 일부는 200이하 수준으로 측정된다. 성기체 서커스의 드라마를 영적 진리로 혼동하는 탐구자들은 이 환영의 놀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형상이나 특별한 것에 의존한다. 그 모두가 우주선, UFO, 외계인, 심판의 날의 예언들을 들먹이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성기체적인 서커스를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쉽게 휘말린다.



참된 스승은 명성이나 평판, 겉치레, 추종자를 갖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지 스승이 아니다. 가르침은 스승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를 숭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스승은 영감과 정보의 원천이 되고, 탐구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영감이다.

박학다식함도 진리를 보증해주지는 못한다. 대단히 영민한 스승들도 심장 차크라(사랑)가 불균형하다. 더없이 다정다감한 자애로운 스승의 경우에는 인당 혹은 정수리 차크라(신성-지혜)가 불균형하여 추종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참된 스승의 전형적인 특징은 겸허함과 소박함, 사랑과 자애로움, 온화함 등이다. 그들은 돈과 개인적인 권력,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진리를 전달할 때 금전적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한다.



[위대한 영적 가르침]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에게 예외 없이 부드럽고 온화하고 따뜻하고 너그럽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라. 사심 없이 봉사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하는 일에 집중하라. 부정적인 마음가짐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 쾌락과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피하라.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나 ‘나는 옳다’는 자만을 삼가고, 정의를 가장한 덫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비난 말고 이해하려 애써라.

인간적인 모든 잘못과 한계, 연약함을 꿰뚫어보는 신성의 사랑과 자비, 무한한 지혜, 연민을 신뢰하라.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신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라.



[가르침의 다양성] 유사 이래 영적인 가르침과 신에 이르는 길은 대단히 많았다. 그런 가르침이나 길은 각자 자기네 학파나 종교, 영적인 문헌, 경전 등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성인과 스승,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또한 그 가르침들은 민족적 특성과 문화를 많든 적든 흡수해왔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전통의 대부분은 종종 그 가르침의 내적인 순수성에서 이탈하거나 해치곤 하여 민족적 관습과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위대한 종교들 간의 불화를 조장했고, 참혹한 종교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영적인 진실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이런 피상적인 차이점을 넘어서 어느 민족, 어느 문화, 누구에서 나왔든 간에 중요한 본질만을 골라 모을 것이다. 영성 자체는 누구와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종교] 불교는 비교적 원래의 수준을 잘 유지해온 종교이다. 그밖의 종교들은 그 수준이 놀랍도록 저하되었다. 기독교는 애초 900대에서 출발했으나, 니케아 종교회의가 구약과 계시록을 포함시킴으로 400이상 떨어졌다. 구약은 190으로 측정되나, 창세기는 660으로 측정되며, 창세기를 제외한 구약은 130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원래 가르침은 1000이었으나, 신약은 475로 측정되며, 30수준인 계시록을 제외하면 630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종교가 발생한 문화는, 과학의 부재로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을 초자연적인 힘의 탓으로 돌렸고, 이런 신을 달래기 위해 흔히 각가지 야만적인 행위와 무지가 성행했던 문화였다. 적어도 지난 5천년 동안의 문명사는 수백만명을 학살한 참혹한 사건들로 극에 달한, 되풀이되는 공포의 역사임에 분명하다. 악마를 신으로 잘못 본 것은 인류에게 실로 가공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 때문에 신에게는 수많은 정의와 서술이 따라붙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원적인 영역을 다루는 반면, 깨달음은 비이원적인 영역을 다룬다.

오늘날에 의식수준이 비로소 임계점 200을 넘어 207에 이르렀고, 과거같이 야만성이나 증오에 대해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다. 교회들도 더 이상 죄와 두려움을 강조하지 않고, 이제 사랑의 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간의 신에 대한 이해의 신기원이 도래하고 있다. 200을 넘어설 때는 스스로를 교정하기 시작한다.



[신] 신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 모든 개념들은 저절로 배제된다. 신은 자체로는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기껏해야 물리적인 세계에 투사된 내적 체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의 세계에서 참나와 신과 전체성은 하나다. 거기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신은 형상을 넘어서 있다. 결국 우리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영적인 에너지 수준과 힘의 장에 위계가 존재한다. 영적인 위계에서 1000을 넘어서는 의식수준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힘을 뜻한다.



[진리와 앎] 각각의 의식수준은 진리의 다른 맥락을 갖고 있다. 이 사회문제의 해결책은 앎이 증대되는 것 말고는 없다. 깨달음에 이른 앎의 드러남은 미묘하고, 강력하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더없이 아름다우며, 모든 것을 두루 어우른다. 감각은 무시되고, 모든 지각은 사라진다. 마음은 그런 드러남으로 인해 놀라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혀 말을 잃고 침묵해버린다.

붓다는 ‘참으로 죄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지’라고 말했다. 에고의 핵심은 바로 교만이며, 교만은 무지에 기반을 둔다. 해독제는 철저한 겸손이다.

마음은 어떤 것도 제대로 알 능력이 없다. 순수한 의식만이 지각의 장애를 돌파하여 진리의 영역에 들어간다.

진실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든 진실은 일정한 의식수준 내에서만 진실일 뿐이다. 믿음과 참된 체험에 바탕을 둔 앎은 고요하다. 진리는 설득이나 논쟁을 통한 강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정의] 세상을 부정적 방향으로 기울게 한 주요한 지렛대 중 하나는 정의라는 자멸적 개념의 형태를 띤 무기였다. 그것은 190에 해당되는 교만으로 측정되며, 지난 수천년간의 인류 역사에서 으뜸가는 파괴적 힘이자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왔다.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가장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둘러댈 수 있는 수단이었다.

우주에서 ‘정의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의의 모든 영역은 시비를 걸려는 태도, 맞서려는 태도, 갈등, 가해자와 희생자의 개념, 인과관계의 환상, 앙갚음 등으로 이어진다.



[본성의 재발견] 마음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을 갖춘 테레비와 같아서, 어떤 생각이 유혹한다고 해서 그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이 모든 선택이 우리의 마음을 은근히 잡아끄는 것은 내적인 보상이나 은밀한 만족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보상을 거부할 때, 생각의 스크린 뒤에서 보이지 않던 고요한 기쁨의 공간이 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의 원천은 늘 존재하고, 늘 접할 수 있으며,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 단 2가지 장애가 있을 뿐이다.

1) 그것이 항상 접할 수 있고, 항상 존재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2) 은밀한 보상의 즐거움 때문에 이 평화와 기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

참으로 ‘정상적인’ 의식상태는 모든 부정적 요소를 벗어난,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상태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지각의 왜곡현상과 망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깨달음] 진리는 연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잘못된 것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된다. 무한한 참존재는 늘 존재하고, 그 드러남은 방해 요소들이 제거될 때 저절로 드러난다. 주요한 영적인 도구 중의 하나는 의지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는 가치들의 우선순위와 위계를 정해준다. 영적 노력은 헌신인 동시에 탐험이다.

신의 빛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신성을 드러내주는 앎의 빛이다. 무한한 참존재의 고요함 속에서 마음은 침묵한다. 모든 것은 완전하고 정확하게 저 혼자 이야기한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존재 대 비존재의 마지막 이원성마저 넘어선다. 거기서는 오로지 존재하는 것만이 있고, 진리와 반대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신의 평화가 깃들여 있다.

깨달음에는 단식, 의식, 수련, 호흡법, 만트라 이중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 영적 탐구자들은 종교가 각기 나름의 과제와 한계를 안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깨달음에 이르는 영적인 길은 단 하나뿐이다. 신앙심을 갈도 닦는 것과는 다르다. 신학은 400대의 의식수준이지만, 깨달음은 600대 이상과 관련된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내면의 상태는 잠자는 상태와 비슷하다. 일체가 침묵하고 고요하고 평화롭다. 거기에는 어떤 의지도, 움직임도, 형상도 없으며, 생각이나 정신활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성공의 비결은 단 한가지의 개념 -절대적인 용서나 사랑- 또는 영적인 도구를 선택하고 그것을 쉼없이 강력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나 도구를 모든 생각, 느낌, 행동, 행위 등에 예외 없이 적용하라. 처음에는 저항 때문에 힘들지만, 점점 자신을 포기해감에 따라 자발적인 의지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그 도구는 자체의 생명력을 얻게 된다.

갑작스런 죽음의 고통에 이어서, 모든 창조의 진실은 모든 시간을 넘어 절대적인 완벽함과 아름다움 속에 늘 존재하는 참나로 스스로 드러나고, 깊은 경외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것은 하나이고, 개인적인 자아도 없어지며, 이것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영적 수행] 가장 좋은 영적 수행의 태도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음적 태도이며, 이해와 통찰, 얻기보다는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이루어진다. 적극성을 내포한 수동적인 마음가짐이며, 분명한 것을 보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고, 마음의 모든 장애를 치워버리기만 하면 된다.

영적 수행 과정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폭넓은 응시로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체를 배제함으로 이루어진다. 의도는 대상의 중심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랑은 동공을 확장시켜 대상의 주변에 초점을 맞추어 그 본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지성은 양이고 참나는 음에 더 가깝다.

사람에 변화가 어려운 것은, 그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개성과 동일시한다. 자신의 이미지는 자아를 형성하고 각색하는 강력한 카르마적 성분을 갖고 있다. 이 개개의 스타일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룸과 동시에 이익을 얻는다.

무법자들도 역시 집단적인 동일시를 반영한다. 그런 이미지에는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이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소중히 여기고, 이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이는 변화에 저항하는 무의식적인 경직된 자기규정이다.

영성의 영역은 바로 의식의 영역이다.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영적인 성장과 진화를 촉진시킨다. 정보자체가 스승이 되지만, 영적 성장은 본인의 자유의지의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몸과 인격을 닦는 것은 곁가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몸은 자연의 소산이고, 마음과 개성은 사회적, 가족적, 문화적 프로그램의 소산이다. 깨달음에 가까이 갈수록 자아가 참나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신에 이르는 길] 영적 탐구는 지성에 의한 탐구가 아니다.

이해는 내적인 성숙과 영적인 발전을 가져다준다. 영적인 성숙이 지속됨에 따라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게 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일어난다. 이 행성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증오심이 생존의 주제와 이유가 되고 있고, 사회 전체가 희생자와 가해자라는 이원론과 앙갚음을 토대로 하여 존립한다. 우리는 영적인 가르침의 완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에고는 이에 저항한다. 에고는 겸허한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자존심이 있어서 자신이 폄하되는 것에 분개한다.

의지와 용기, 믿음은 낡은 것을 놓아버리는 일을 수월하게 해준다. 의지는 안달하는 마음과는 달리, 단단히 고정되고, 한가지 일에 전념하고, 확고하게 한 곳만을 지향한다. 의지는 이해와 납득이 된 의미에 의해 결정되며, 이 의미에 의한 가치가 성취를 위한 노력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의지는 자아의 내재적인 힘이 작용하는 자리다.

영적 의지는 사랑과 헌신, 양보하려는 의지에 의해 힘을 얻고 활성화된다. 영적인 의지를 활성화시키는 참나는 에고의 집을 허무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다.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되는 또 다른 요소는 조급증이다. 에고만이 지루해하고 따분해 할 수 있다. 시간의 환상은 상실감이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므로 평화를 깨뜨리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오로지 모든 것을 버리려는 마음가짐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은 ‘나’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좋다. 마음은 오만하고, 꼬드기며 부추기는 존대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하는데 있다. 사실 모든 생각은 저절로 일어난다. 생각은 결핍에서 일어나고, 생각의 목적은 ‘얻자’는데 있다. 전체성 속에는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온전하고 완벽하다.

에고, 마음은 목표하는 바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사실 에고가 없으면 우리는 훨씬 더 잘 지낼 수 있다. 에고는 오로지 미래의 만족에 대한 기대를 먹고 산다. 에고가 가망없는 것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에고를 버릴 수 있다. 최면에 가까운 에고의 매력을 뿌리치고, 점점 주시에서 관찰로, 바라봄으로, 의식 자체로, 마지막에는 의식을 비춰주고 앎을 열어주는 앎으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묵상은 영적인 노력의 가장 효율적이고 의미 깊은 활동이다. 약간의 성찰이나 묵상만으로도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묵상은 명상의 한 방법이며, 가부좌를 틀고 하는 명상보다 질이 낮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다.

작은 자아는 참나에 의해 녹는다. 자아에 대한 참나의 치유적 태도는 연민이다. 우리는 용서함을 통해 용서받는다. 이로써 지각의 지배와 이에 따는 모든 고통의 원천인 이원성이 해소된다. 이원성의 해체는 신의 선물이다. 비이원성에서는 고통이 일어날 수 없다. 에고가 사라짐으로 절박한 위기가 영적인 발견의 기회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적인 실천의 본질은, 영감과 헌신과 의지의 결정에 의해 의식의 여러 측면들을 점차 역할을 해나가도록 활성화하는 것을 뜻한다. 의식의 여러 측면들은 연민과 헌신, 겸허함, 절대적인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려는 자세로 힘을 얻으며, 이럴 때 지각은 영적인 통찰로 변형된다.



[기도] 기도 혹은 기원은 겸허함에서 나오는 행위다. 기도는 요청이 아니라 자신을 바치는 것이된다. 치유력이 있는 기도는 부정적 에너지를 540의 무조건적 사랑 이상의 치유적 차원으로 상승시키려는 노력에 따른 것이다.

주의 종, 거룩한 사랑의 매개체, 신의 의지의 통로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앞으로의 갈 길을 묻고, 신의 도움을 청하고, 헌신을 통해 개인적인 모든 의지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신을 위해 바쳐라. 사랑과 평화를 가장 먼저 선택하고, 무조건적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는 목표에 전념하라.



[왜? 명상법]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왜? 라고 물어본다. 그 대답은 늘 ‘내가 더 행복해질 테니까.’이다. 따라서 행복의 거처는 늘 자신의 밖에, 미래에 있는 것이 된다. 이는 스스로를 외부적인 상황의 희생자로 보는 결과을 초래한다.

실질적인 행복의 원천은 사실 내면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은 지금을 넘어서 과거나 미래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에서 일어난다.



[모든 존재] 에너지 장이 높고 낮은 것은 어느 것이 더 낫지 않고 오직 다를 뿐이다. 각각의 실체는 전체에 기여하는 저마다의 할 일을 갖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실체는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는 기쁨을 평등하게 누리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신의 참존재가 깃들어있다. 동물, 식물, 인간은 모두 존재의 기쁨을 향유한다는 면에서는 평등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금 이 순간의 형상과 동일시하는 태도에 갇히곤 한다. 동물들도 인간과 같이 자기의 존재와 삶의 체험에서 기쁨을 얻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신성, 신, 전체, 하나, 절대 뿐입니다. 신과 반대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물적 형상이 존재의 필요조건이라는 환상 때문에, 이 형상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리적인 몸] 물리적인 몸은 자연의 소산이요, 동물의 세계의 일부이다. 몸은 본래 자연의 것으로, 우리가 잠시 빌려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몸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므로, 과도한 관심을 갖거나 중시하는 태도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물리적인 몸은 본래 어떤 것도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감각에 대한 체험은 몸의 형상 내에 있는 에너지체, 자신의 존재와 연결된 의식의 한 특징이다. 무의식 상태의 자아체험에서도 의식은 감각을 동반한 채 몸을 빠져나가며, 이때 ‘나’라는 감각은 에너지체에 있고, ‘내 몸’은 그냥 ‘몸’으로 보인다. 영혼, 혹은 에너지체는 몸의 거주자이고, 의도적으로 몸을 떠나곤 한다. 욕망은 몸을 통해서 개별적인 체험과 감각을 추구하는데, 문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경험을 예상하고 통제하려 드는 것은 마음이다.



[카르마] 모든 생각이나 행위는 당사자의 에너지체와 결부된 고주파 에너지 패턴인 진동 혹은 트랙(형적)을 방출한다. 각 에너지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된 결정과 행위, 감정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적 트랙을 동반하고 있다. ‘나’라는 감각의 자리인 에너지체는 물리적인 몸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카르마는 과거에 선택했던 것들의 결과의 장이자 성립가능한 선택지의 장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지배적인 조건들의 세트는 운명, 숙명, 혹은 운이라고 부른다.

영적인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죽음 이후의 운명은 영적인 몸의 오라 속에 형성된 에너지 패턴에 의해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듯하다. 즉, 스스로 선택한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참나의 무한한 바다 속에서 자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의해 자신의 운명으로 끌려간다. 이것이 전능한 신의 절대적인 정의이다. 환생은 이 카르마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며, 이는 과거의 영적인 잘못을 바로 잡거나 완화코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랑]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앎의 상태요,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스스로와 타인을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신이나 자연, 애완견에 대한 사랑조차도 영감의 문을 열어준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기심을 넘어서게 한다. 남을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수행의 좋은 출발점이다. 사랑은 점차 강렬하고, 무조건적이고, 기쁨이 넘치는 애정으로 꽃 피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모든 사람, 사물과 사랑에 빠지는 때가 온다.



[지각] 이원성은 지각의 소산이다. 지각은 물질이나 몸과 관련된 동물적인 삶에서 소중하다. 그것은 형상을 다룬다. 지각은 환영이요, 사고 작용이 빚어낸 가공물이다. 이는 생각과 개념, 물질을 다루는 데는 유용하지만 영적진화라는 목표를 지향할 때는 아무 쓸모가 없다. 지성과 지각은 천재적인 수준에 이를 수 있지만, 의식수준은 400대로 제한된다. 즉, 과학적 천재는 499에 이르지만, 영적인 천재는 600에서 드러나 1000까지도 상승한다.



[창조와 진화] 생명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인 신성의 빛에 의해 탄생된다. 이런 과정에서 의식이 주동자가 된다. 형상은 물체, 물질의 이원성을 띄지만, 생명은 이 이원성 사이에서 성장과 작용의 주체로 주동자가 반듯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원적이 아니라, 삼원적인 것이다. 생명은 신성한 빛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물질만으로는 생겨날 수가 없다. 창조의 패턴은 신이 현존하는 조건의 삼위일체이다.

태초에 창조의 에너지이자 모든 생명의 에너지인 빛으로서의 신이 있었다. 태초에는 단지 무한한 에너지와 잠재력만이 존재했다. 이어 이 에너지는 비활성 물질과 물체로 나타났다. 물질 구조의 이원적인 기초는 생명현상이 전개될 수 있도록 살아움직이게 해주는 주동자가 더해짐으로 활성화될 수 있었다.

최초의 생명형상은 극도로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고, 최초의 과제는 생존과 복제였다. 의식은 진화의 과정에서 활발한 주동자 역할을 하면서, 형상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했다. 그로 인해 피드백과 학습이 가능해졌다. 진화는 바로 그 의식의 작용으로 일어났고, 여러 가지 적응력의 습득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자료를 저장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필요가 생기면서 신경계가 생겨났고, 결국 뇌가 탄생했다.

창조에는 지성의 미학과, 아름다움의 무한한 표현인 생명의 형상이 포함된다. 생명은 진화를 통해 우주로 표현되는 신의 빛이며, 우리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창조과정의 소산이자 증인이다. 신은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는 모든 곳에서 진행되고 지속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큰 힘을 갖고,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갖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의 지혜의 나무의 과일로 표현된 선악과는 인간에게 선과 악의 분별심, 지혜를 가져다주어,) 인간의 마음은 이원성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허구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으로 빚어진 수치심과 죄의식, 교만, 형제 살해,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등으로 고통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나의 눈 - 데이비드 호킨스

 

posted by 有然(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