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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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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지상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적어도 십만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이상일 수는 있어도 그 이하는 아니다.
왜냐하면 십만 권 이상이 되면서부터
나는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오쇼, 내가 사랑한 책들

 


많은 영적 지식과 감각, 깊은 영적 체험이 있어도
신성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좁은 길이다.
인간의 마음은 무지하고,
영혼은 무명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혜, 무한한 파워, 무한한 지복인
완벽한 스승은 상상을 초월하고 만나기도 어렵다.

 

오쇼 라즈니쉬는 아바타 메허 바바가 탄생한 인도 푸나의 같은 병원에서 출생했다

 

수많은 영적 스승들을 비판했던 오쇼는

메허 바바의 다르샨을 받기 위해서 2번이나 찾아 갔다

메허 바바는 라즈니쉬에게 지침을 주었지만

오쇼 라즈니쉬는 자신의 뜻을 펼치며 힘겨운 삶으로 향해 갔다

 

 

우주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신성과 스승에게 항복하는 내맡김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영에게 내맡기는 항복은

자아의 마음을 놓아버리고 신성한 의지(Divine Will)에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 바보 주리반특 존자가 그랬던 것처럼

지성이 부족한 사람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다.

 

아바타의 전령이며 완벽한 스승인 라마크리슈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인간은 결국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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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가르침들>

사랑은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의 생물학적인 만남이 아니다. 사랑을 두 영혼의 만남으로 이해하면, 사랑은 우리에게 커다란 날개를 달아준다. 인생에 대해 위대한 통찰을 할 수 있게 한다. 연인은 처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면을 쓴 적으로 남는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종교가들이나 성자들, 삶과 대면하지 않는 겁쟁이들은 섹스를 비난하는 것으로 사랑이라는 개념에 독을 섞었다. 섹스를 비난하면서 사랑 역시 비난했다. 사람들은 섹스와 사랑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섹스는 사람들이 가진 생물학적인 에너지일 뿐이다.
사랑은 사람들의 존재 전체이자 영혼이다. 섹스는 사회나 종족의 보존을 위한 욕구이다. 그러므로 종족 보존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참여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은 피해갈 수 없다. 사랑을 피하는 순간 모든 창조성은 사라지고, 모든 감각은 무뎌진다. 주위에 먼지가 가득 쌓여버린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사람이 된다. 숨 쉬고 먹고 말하고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지만 죽음이 해방해주기까지는 평생 권태를 등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쇼 라즈니쉬


<각성>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움직이는 요소는 주의력이다.
주의력은 사물에 대한 각성이다.
의식 안에 있는 무언가의 반향이다.
눈의 상태가 순간순간 바귀는 것처럼 주의력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24시간 내내 누구도 똑같은 정도로 깨어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안전한 상태일수록 무의식적이 되고 불안전한 상태일 수록 각성하게 된다.
위기상황 응급상황을 느끼는 순간 잠들 수 없게 된다. 졸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협적인 순간엔느 전 존재가 결정화되어 주의력이 전부 응축될 것이다.
주의력은 결정적인 순간에만 응축하게 된다.
일단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 잠이 든다.
이것이 위험이 흥미를 끄는 이유이다.
위험한 상태에선 어느때 보다 더 각성상태가 되고 이 순간에는 잠들 수가 없다.
각성상태로 있어야만 한다. 분명히 주의력을 결정화 시킨다.

누군가에 대한 끌림은 사실 주의력의 끌림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가슴설레게 하는 그 순간에만 마음이 완전히 각성되어
그때만이 누군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도박을 하든
헌집 대신 새집을 새 지위를 얻으려 쫓아다니든
전쟁터로 나가든
깊은 곳에서는 이러한 모든 추구가 결정화된 주의력 명상을 경험하려는 심오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삶에서의 모든 환희는 주의력이 얼마나 결정화 되었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지복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깨어나야 한다. 잠자고 있으면서 환희를 얻을 수 없다.

우리가 깨어있다 부른 것은 여전히 매우 잠에 취한 몽유병상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꿈속에서 일어나 물마시고 일하고 다시 잠자러 간다.
"꿈에서 깨여."
주의력이 매우 예민한 상태에선 감정적이 된다.
고통의 순간이나 행복의 순간엔 주의력이 최고조에 있다.
그래서 각성상태로 충만한 기억들이 모든 의식을 가득 채우고
일반적 평범한 일들은 잊혀진다.

오쇼 라즈니쉬


그대를 영혼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사랑이
늘 만족스럽지 못한 까닭이다.

-오쇼 라즈니쉬


독신의 가치는 기계적인 억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독립감에 있다.
그러나 마음이 욕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는 없다.

같은 식으로, 결혼의 가치는 채움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다른 이와의 합일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합일 또는 이원성의 용해는
오직 신성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메허 바바



누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순간에 스승이 필요하다.

메허 바바(Meher Baba, 1894-1969. 근대 인도의 성자)는 위대한 일을 했다.
그는 뿌나poona 근교에 살던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예전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는 수년 동안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직 이 일에 전념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미친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 미친 사람들은 그대보다 낫다.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학교가 없다면, 도움을 주는 스승이 없다면 그대는 이 중간 지점에서 헤맬지 모른다. 
스승이 그대를 도와 끌어내 준다. 
이 황무지 같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능력으로 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대만의 힘으로는 어렵다. 
때로는 우연히 빠져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미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은 내게 올때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럴 때 나는 측은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이 문제다. 
강요하면 할수록 그는 도망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심 나는 측은함을 느낀다. 
나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



신神은 에너지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 에너지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신神은 엄청나게 활발하고 무한한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대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러므로 신神을 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제게 오십시오” 하고 신을 초대하기 전에 어떻게 준비를 갖추느냐 하는 것이다.》

그대는 아주 작지만 신神은 말할 수 없이 광대하다. 

《이것은 물방울 하나가 바다 전체를 초대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언제 밀려올지 모른다.
물방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물방울은 바다를 수용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다면 무한한 바다가 밀고 들어와도 물방울은 깨지지 않는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종교, 요가, 탄트라 등 뭐라고 이름 붙여도 좋다. 

《그대의 관념에 따라 신神을 보지 마라.》

《유태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따위는 버려라.》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지식의 차원에 매달린다. 
그대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신神은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신神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 

《미묘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신神에 대해 직접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틀렸다. 
그 모두가 가르침을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대에게 개념과 이론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신神은 개념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신은 가설이 아니다. 
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신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려라. 
그래야만 첫걸음일 뗄 수 있다. 
아무런 개념도 없이, 아무 옷도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채 신에게로 가라. 

《아무런 관념도 없이 텅 빈 가슴으로 신神을 향해 나아가라.》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텅 비었을 때 그대는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된다. 
필요한 것은 수용성뿐이다.

- 오쇼 라즈니쉬

posted by 有然(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