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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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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상가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1757~?) 그는 우리나라에는 ‘절제의 성공학’이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관상가(觀相家)입니다. 그의 관상 저서들은 한국에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남북상법(南北相法) 10권, 신상전편정리해(神相全篇精理解), 연산상법이해(燕山相法理解), 상법대역변론기린(相法對易弁論麒麟)의 책, 봉황지권(鳳凰之卷), 초목전(草木傳), 남북상법수신록(南北相法修身錄), 군신제후전(君臣諸侯傳) 등이 있습니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관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때밀이, 장의사 등등을 다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그의 중요이론 중 ‘天糧論’(천량론이란 태어나면서 평생 먹을 양식을 하늘이 내려주는데 그 양식을 다 소비하면 죽는다는 운명법칙) 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절제의 성공학 서문’에 있는 글과 인터넷에 있는 미즈노 남보쿠의 글들 정리해 보았습니다.( 문기자 주.)

 

일본의 관상가(觀相家)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1757~?)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대장장이를 하던 작은 아버지 밑에서 키워졌습니다. 10세 때부터 술을 배우고, 도박을 일삼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일으키다가 결국 18세 되던 해에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반 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남보쿠는 밖에서 보아왔던 사람들과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꽤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감옥에서 죄인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남보쿠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 관상가를 찾아갔습니다.

 

“1년안에 칼에 맞아 죽을 관상이니, 이 길로 속히 절에 가서 출가하기를 청하시오.”

 

이 말을 들은 남보쿠는 그 길로 가까운 절에 가서 출가를 청했으나, 절의 주지 스님은 “중이 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오. 앞으로 1년 동안 보리와 흰콩으로만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오면 그때 받아주겠소”라며 거절했습니다.

 

남보쿠는 바닷가에서 짐꾼으로 힘들게 일하면서도 살기 위해 보리와 흰콩만을 먹고, 술도 끊고 버티었습니다. 어울리는 무리들이 난폭하여 종종 싸움이 일어났지만, 작은 상처만 입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년을 무사히 넘기고 출가하기 위해 절로 향하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던 관상가에게 찾아갔습니다. 남보쿠를 알아본 관상가는 크게 놀라며 물었습니다.

“완전히 관상이 바뀌었군요. 어디서 큰 덕을 쌓았소, 아니면 사람의 목숨을 구했소?”

“생명을 구한 일은 없지만, 스님의 말씀 따라 보리와 흰콩만 먹고 1년을 살았습니다.”

“식사를 절제한 것이 큰 음덕을 쌓앗구려. 그것이 당신을 구했소!”

 

관상가에게 요절할 운명이 사라졌다는 말ㅇ르 듣고, 남보쿠는 출가보다는 관상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머리 만지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3년간 사람의 얼굴 모양을 연구했습니다. 그 다음 3년은 목욕탕에서 일하며 사람의 벗은 모습을 관찰했고, 마지막 3년간은 화장터의 인불고 일하면서 죽은 사람의 골격을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9년간의 수업을 마친 후에 관상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남보쿠는 상을 볼 때, 좀 의심쩍으면 옷을 벗기고, 체상(體相)과 골격까지도 감정하여 백발백중 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사람이 오면 일부러 거친 음식을 대접하여,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 관찰하여 운명을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관상뿐 아니라 선(仙)이나 호흡법에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새끼손가락을 불로 태우거나, 양팔뚝에 큰 뜸을 하는 것과 같은 힘겨운 수행을 하고, 50일이 넘는 단식과 냉수욕도 병행했다하니, 상법(相法)의 한길을 향한 그의 집념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남보쿠의 용모는 괴이하여,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실제로 그를 만나보고는 진짜인지 의심하였고, 지방에 출장을 가도 가짜라고 봉변을 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용모를 묘사하는 아래와 같은 글을 각지에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키는 작고 얼굴은 좀스럽다.

입은 작고 눈은 험하게 들어갔다.

이마는 좁고 눈썹은 거의 없다.

코는 낮고 광태뼈는 높게 나와 있다.

치아는 짧고, 발도 작다.

새끼손가락은 불에 탔으며, 양팔뚝에 뜸자리가 있다.

 

남보쿠는 노년에 거대한 저택에 큰

미즈노 남보쿠는 일본 강호시대(=德川幕府도쿠가와막부시대)의 중간시기쯤 경도(京都,교토)에 살았고 성덕태자(쇼오토쿠태자)를 교조로 모시고 신도(神道), 유교(儒敎), 불교(佛敎)를 깊이 연구했다.

 

3년간 이발소의 조수로 두상을 연구하고, 3년간 목욕탕 때밀이로 체상(體相)을 연구하였으며, 또 3년간은 화장장 소체부(燒體夫)로 죽은 자의 골상(骨相)을 철저히 연구하는 등 상법(相法)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깊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백발백중 틀리는 일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동서고금에서 비할 수 없는 상법(相法)의 권위자로 평생의 제자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미즈노남보쿠(水野南北)의 개운의 비결

나는 오랫동안 꾸준히 사람의 인상을 보아왔으나 한낱 인상만으로 판단하면 돈을 벌고 출세하여 장수할 상을 가진 사람도 빈한하게 요절하는 사람이 있고 빈한하고 요절할 상을 가진 사람도 실제로는 부유하고 출세하며 장수하는 사람이 있어 여간하여 맞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때 문득 사람에게 있어 먹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사람의 운과 불운, 수명은 모두 음식을 조심하느냐 조심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살펴본 결과 1년 안에 대난이 닥칠 사람도 삼가 음식을 조심한 결과 대난을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 생겼다.

평생 빈궁해야할 상(相)의 사람이 음식을 조심한 결과 상응한 부귀를 누리고 지금은 크게 출세한 사람이 있다.

전에는 병약하고 단명한 것으로 판단했던 사람이 매일 음식을 조심한 결과 심신이 공히 건강하고 장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런 예를 들자면 셀 수 없는 정도였다.

사람의 관상을 볼 때 그 사람의 평생 음식먹는 실태를 알아보고 그에 따라 일생의 운과 불운을 판단하였던 바 만인 중 일인의 오판도 없음을 알게 되어 사람의 운명은 오직 음식하나라고 확신하고 이것을 나의 상법의 비결로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권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실행하여 일생에 쌀도 안 먹고 오직 보리를 1일 1홉씩만 먹고 술을 즐기지만 이것도 1일 1홉으로 정하였다.

 

오직 나만 아니고 모두가 하루빨리 음식을 조심하여 개운행복하고 장수 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일생의 길흉은 오직 그 사람의 음식에 달려있다.

무서워할 것은 음식이다. 조심할 것은 음식이다.

음식을 체격에 비하여 적게 먹는 사람은 인상이 안 좋아도 길하고 상응하는 복을 받고 장수 행복하게 된다.

음식을 체격에 비하여 많이 먹는 사람은 설혹 인상이 좋아도 만사 순조롭지 않고 매사 뒤늦은 결과로 평생 걱정하게 되고 만년이 불길하다.

 

소식으로 엄격히 조심하는 사람은 예컨대 빈한하고 나쁜 인상이라도 상응하는 복을 받고 장수하며 만년이 행복하고 영양이 부족하게 보여도 병을 앓지 않는다.

대식하고 거기다 그 양도 시간도 정한 바 없는 사람은 말할 것 없이 평생불운하고 결국 가정도 무너지고 병에 걸린다.

음식에 규범을 정했어도 때에 따라 많거나 적거나 일정치 않으면 수입도 많아지고 적어진다.

음식이 일정불변하면 수입도 일정불변하여 오직 식사를 일정하게 엄수하는 것이 좋다.

수명의 장단은 오직 인상만으로 정하기 어렵고 평소의 식사량을 알아보고 관상을 보면 만인에 일인도 실수가 없다.

병이 없고 길상인 사람이라도 젊어서부터 매일 사치한 식사를 한 사람은 연로하여 위장병에 걸린다.

매일 일에만 열중하는 것만으로 입신출세하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검약하고 대식을 삼가고 조금이라도 하늘에서 받은 식록(食祿)을 아끼고 이를 기반으로 입신출세하기를 힘쓰는 것밖에 없다.

 

음식에 호사를 다하고 입신출세를 바라는 것은 극히 우매한 사람이다.

거듭거듭 음식을 조심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강조한다.

액년(厄年)에다가 대난(大難)의 상을 가진 자라도 언제나 절제있는 식사를 하고 엄중하게 지키는 사람은 액운을 면하게 된다.

 

술이나 고기를 많이 먹고 비대한 사람은 평생 출세 발전하지 못하고 만년에도 불행해진다.

입신출세하고자 하면 우선 제일로 음식을 줄이고 엄중히 지킬 것이다.

이것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입신출세하고 못한 사람은 평생 입신출세할 가능성은 적다.

 

번영하던 집에 운이 다하여 기울어가더라도 만약 후계 주인이 식사를 줄이고 엄중히 지키면 수입이 자연히 늘어나고 가운이 번성한다.

예컨대 빈궁하고 고생이 많은 인상이라도 스스로 가난한대로 조식을 먹고 이것을 지켜내면 자연히 가난을 벗고 상응한 재산을 이룬다. 이것을 자복자득이라고 한다.

 

술이나 고기를 배부르게 마시고 먹고 가장 건강한 듯 뽐내는 것은 본래 천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오래갈 수 없다.

 

겸손하게 처신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언제까지나 길이 오래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천일천야 기도했다 하여도 그 정성이 깃들지 않았다면 결코 신명이 감응치 않는다.

참으로 정성껏 기도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명을 神에게 바치라.

음식은 내 생명을 보양하는 근본이며 음식을 바치는 것은 자기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은 정직한 자를 돕는다. 탁한 것은 받지 않는다.

 

매일 식탁을 향하여 자기가 신봉하는 신불을 마음에 모시고 기도한다면 어떠한 소원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한 가지 일에 뛰어난 사람은 아무리 그 뜻이 견고하더라고 하늘은 더욱 곤궁하게 한다.

이것은 더 한층 정진하도록 하는 천심이다.

대인은 이럴 때 마음쓰지 않고 더욱더욱 노력함으로써 마침내 천하에 이름을 남긴다.

소인은 마음이 바로 흔들려 포기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일생을 우왕좌왕하며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비록 소인일지라도 음식을 근신하고 단단히 결심하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럼으로 우선 음식을 조심하고 그 외 어떠한 일이든지 선하다고 하는 일을 실행하며 천운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운은 돌아온다. 선악이 모두 자기의 행위에 따라 돌아온다.

운은 보답한다. 내가 한번 좋은 일을 하면 그 보답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

길흉간의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운은 옮겨온다. 자기가 행하는 선행이 작더라도 그것이 점점 쌓여갈 때는 천하의 큰 선행을 이루어낸다.

생명이 있는 한 누구에게나 운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일에 열중하고 그리고 음식을 조심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자연히 천리에 부응하여 운은 점점 열려온다. 이것을 개운이라고 한다.

음식을 조심하고 있으면 마음과 몸이 건강하여 기가 자연히 열려온다.

기가 열리면 운도 그에 따라 열려온다.

결코 틀림이 없다.

우선 3년을 조심해 보라.

그렇게 해서도 만일 運운이 열리지 않는다면 세계에 神은 없는 것이고 나 미즈노 남보쿠는 천지의 대적이다.

인상의 선악을 분명히 알고 싶으면 우선 자신의 음식을 조심하고 모든 낭비를 하지 말고 그리고 3년을 계속한다면 인상의 선악은 자연히 확연해진다.

나는 언제나 이것을 실행하고 자연의 선악을 내가 충분히 납득하고서 모든 인상의 판단을 내렸다.

이것이 상법(相法)의 대도이다.

내가 이것을 하지 않고 어떻게 남의 선악을 점칠 수 있겠는가.

타인을 점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수양의 전제가 된다.

나의 상법(相法)의 비결은 결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일본의 유명한 관상학자 미즈노남보쿠(水野南北)는 그의 <상법수신록(相法修身錄)>에서 '얼굴생김은 하늘이 주는 것이지만, 절제에 의해서 어떻게든 바꿀 수가 있다. 설사 가난하고 단명한 상이라도 식사에 주의하면 유복하고 장수하게 된다.

 

또 비록 부귀하고 장수할 상을 지니고 있을 지라도 많이 먹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병이 들거나 단명하게 된다'고 했다.

 

얼굴생김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손금은 식생활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바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될 수도 없고 손금도 개선되지 않으며, 좋은 운명을 맞이하기도 어렵다.

그러면 이상적인 식생활은 어떤 것일까?

 

원칙(原則) : 음식물에 관해서는 자기 정신이 기본이므로, 음식물의 분량이 일정하지 못한것이 날마다의 식사 분량(평소 8부분량을 3년 하면 개운)이 일정해지면 비로소 그 정신도 자연히 안정된다. 평정한 마음에는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사람이 귀하게 되거나 천하게 되는 것은, 한결같이 음식물의 신중 여하에 달려 있다. 사람은 심기를 기본으로 하므로 입신출세를 하려고 뜻하는 자는 우선 식사를 줄이고, 또 날마다의 분량을 엄중히 정해 놓아야 한다. 이렇게 정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입신출세를 한다. 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평생 입신출세를 못하기 마련이다.

 

소식(少食) : 식사분량의 한도보다도 적게 먹는 사람은 그에 상응한 복을 받고 장수하며, 노년에는 길하다. 소식으로 정해 놓은 분량을 엄중히 지키는 사람은, 비록 빈악의 상일지라도 상당한 복을 받고 장수한다.

 

과식(過食) : 식사의 분량 한도보다도 많이 먹는 사람은 비록 상이 좋을지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한평생 근심 걱정이 끊일 사이 없을 뿐 아니라 노년에는 흉하다. 부잣집의 주인이 만일 대식, 폭식이면 그 가독은 길지 못하다. 하루 세끼니 식사가 똑같지 못하고 일정하지 않은 사람은 심신이 아직 부정한 것이다. 부인이 대식하면 남편을 이기는 상극이요 부부의 인연이 변화하게 된다. 항상 대식하고도 차차로 말라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식사로 인하여 병을 얻어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신체가 강건한 사람이라도 항상 대주, 대식을 하고 보면, 혈색이 쇠퇴해서 발전할 기운을 잃고 출세하기는 어렵게 된다.

 

조식(粗食) : 그 수입, 지위, 신분 따위에 비해서 조식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가난뱅이의 상일지라도 상당한 복을 받고 또 수명도 받아서 노년기에 길하기 마련이다.

 

미식(美食) : 햇것이나 풋것 같은 음식물을 즐겨 먹는 사람은 아무리 인상에는 복이 있더라도 산재를 하고 가정을 망치게 된다. 더구나 가난뱅이는 덕이 어디로 사라져서 행방불명이 된다.미식하는 사람은 한 평생 발전하지 못한다. 번창(繁昌)하는 곳에서는 미미육식(美味肉食)을 보통으로 생각하며 생물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음으로써 사람 마음이 어느덧 오만불손해지고 드디어는 악하게 된다.

그러나 항상 조식(粗食)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스스로 안전하고, 따라서 악심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시골이나 두메 사람에게는 악인이 적고, 도회지에는 많은 것이다.

 

식사 분량이 일정한 사람

식사를 엄중히 일정하게 먹는 사람은, 비록 현재의 운이 나쁘더라도 출세를 할 수 있다. 식사를 일정하게 정해 놓은 사람은 몸이 다스려지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바라는 일이 성취되며 스스로 올바르고 성실해 보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덕이다. 또 식사를 한정하는 자는 뜻이 있으며 마음도 엄중하다. 따라서 그 신체도 엄중하다.

소식하더라도 식사를 일정하지 않게 먹는 사람은 반드시 다병이다.

 

식사 분량이 일정하지 못한 사람

식사의 분량(分量)이 일정하지 못한 사람은 인상이 좋더라도 흉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일이 안정되지 않고, 거의 다 되어가던 일도 그만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식사 분량이 일정한 사람의 경우, 저절로 그 분량이 흐트러 지면 틀림없이 흉사의 전조이므로 속히 엄중한 정량을 정해 놓아야 한다. 식사 분량이 흐트러져서 고르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는 엄중한 듯이 보이더라도 그 마음은 엄중하지 않고 반드시 겉면을 치장하는 격이다.

 

식(食)은 운명(運命)을 좌우한다.

인간 생명의 근본은 음식이다. 가령 어떠한 좋은 약을 쓴다 해도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진정으로 좋은 약은 바로 음식인 것이다.

이것은 옛날 증국에서 말하는 식약일체(食藥一體)의 원리로서, 우리말의 “밥(食)이 약이다.” 라고 하는 뜻이다.

진정한 약은 음식(食)이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식치법(食治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식치법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식양법(食養法): 매일 먹는 식사에 신경을 쓰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식사요법: 병에 걸렸을 때 더 심해지기 전에 대응하는 식품으로 만들어 먹는다.

이 두 가지는 입과 신체의 양생을 목적으로 한다.

 

미즈노 남보쿠는 수년간 관상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음식의 중요성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빈궁 단명의 상을 하고 있어도 유복하게 장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부귀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유복 장수의 상을 가진 사람도 실제로는 빈궁 단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당시 관상가로서 그 사람의 운명의 길흉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때가 되서야 사람의 운명은 음식을 절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길흉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관상을 볼 때 먼저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의 양을 묻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의 생애의 길흉을 점치게 되면 만의 하나라도 틀리는 법이 없다는 사실에 자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관상법의 가장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심오한 뜻으로 생각하고 관상법의 근본으로 정했다 한다.

중국의 식치법(食治法)은 질병만을 다스리기 위해서 입과 신체의 양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미즈노 남보쿠는 입과 신체, 그리고 마음의 양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음식에는 성질과 맛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몸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보리의 성질은 차고 맛은 달다. 술의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달고 쓰며 쏜다(甘苦辛). 보리를 매일 먹으면 몸을 차게 하는 작용이 있는 반면 술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즈노 남보쿠는 온냉(溫冷)의 밸런스를 유지하

 

고 있기 때문에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에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 보리를 매일 먹으면 꼭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보리의 맛이 달다는 것은 비위(脾胃)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많이 먹으면 비장과 위장이 상한다. 술은 달고 쓰며 쏘기 때문에 비위와 심장, 그리고 폐가 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루 한 홉이면 약이 된다. 따라서 사람의 부귀와 빈천, 장수와 단명, 곤궁과 안락, 그리고 입신 출세와 영달은 모두 음식을 절제하고 신중히 하는데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절제하고 신중히 하기를 바랄 뿐이다.

 

 

운명의 길흉은 식(食)으로 결정된다.

사람들이 매일 먹는 식사의 양에 따라 그 사람의 빈부와 수명, 그리고 미래의 운명까지도 예지 할 수 있다. 다음에 열거하는 사실은 그다지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노동의 내용에 따라 식사 량의 적량이 정해져 있고, 또 신체의 크기나 노동의 강약에 따라서도 식사 량의 적당량이 달라진다. 이 원칙도 나이가 젊거나 한 집안의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젊지만, 그 집안의 주인이라고 하면 그가 매일 섭취하는 식사 량의 다소에 따라 가세와 운명의 길흉이 결정된다.

 

옛날 선인들의 말 중에 "하늘의 녹(祿)이 없는 사람은 출생하지도 않고, 땅에 뿌리 없는 풀은 돋아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에 따라 누구라도 하늘에서 주어진 일정한 식사량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욕심을 내어 먹는 자는 하늘의 규율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베푸는 식사량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 할 수 있고, 생명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먹을 것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 발생한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은 음식에 따라 유지 될 수 있다. 인간 한평생의 길흉은 모두 음식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은 음식이요. 또한 신중히 해야 할 것도 음식이다. 그러니 음식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 있겠는가?

식사량이 적은 사람은 관상학적으로 불길한 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운세는 좋고, 그 나름대로 축복 받는 인생을 보내며 젊어서 죽는 법이 없다. 특히 이런 사람은 만년에 길하다. 식사를 항상 적당량 이상으로 지나치게 먹는 사람은 관상학 적으로는 길상이라 해도 몸의 컨디션이 무너지기 쉽다. 손이 뒤틀린다든지, 말초신경에 장애를 일으키기 쉽고 평생 동안 스트레스로 번민하게 되며, 만년의 운세 또한 흉하다.

 

64괘(卦) 중에 절(節)이라는 것이 있다. 절이란 절도 또는 조절이라는 뜻이다. 기후의 사계절이나 24절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한평생에도 일정한 리듬과 절도가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과식한다면 당뇨병, 췌장염, 심장병, 간장병, 신장병, 뇌졸증 등의 뇌혈관 장애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절도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무리 장수의 상을 갖고 있다 해도 실제로는 단명하든지, 아니면 질병의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 법이다.

 

왜 성공하지 못할까

왜 진정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줄 아시오? 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줄 아시오?

언제나 작은 성공에 술과 고기를 즐기고 스스로 조그만 성취에 취하여 놀 줄은 알아도, 진정으로 혼신을 다해 일 할 마음은 없기 때문이오.

그러니 항상 시작은 좋은 것 같아도 모든 일이 지지부진하여 끝내는 성공을 보지 못하는 것이오.

참을성이 없으니 작은 실패에도 또 다른 직업을 찾아다니다가 결국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마치게 되는 것이라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한 길을 이루지 못했다면 일백 년을 산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살아도 그 의미가 없으니 말이오.

이런 사람은 주위에도 덕을 쌓지 못해 죽어도 가까운 사람 몇몇만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쓸쓸히 지킨다오.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오.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없소.

기술이나 직업도 마찬가지요.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십 년까지 심혈을 기울이면 아무리 바보라도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진다오.

그때야 비로소 성공의 문이 열리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까지 혼신을 다해 일한 적이 없소.

당신과 같이 이리저리 마음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직업을 바꾸는 사람은 마치 광주리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개구리와 같소.

대나무 광주리는 안에서 보면 사방팔방 구멍이 다 뚫려 있으니 미련한 개구리는 자기가 그 많은 구멍으로 다 도망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오.

그래서 이 구멍으로 나가려다 안되면 저 구멍으로 나가려하고 또 힘들면 다른 구멍을 찾는 것이오.

당신은 미련한 개구리와 같이 무수한 성공의 길들 중에서 헤매는 것이오.

그렇게 이 구멍, 저 구멍 들쑤시기만 하다가 결국엔 제풀에 죽어 광주리에 그냥 갇히게 되는 것이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소.

그렇게 살다간 결국 고생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게 될 것이오.

광주리의 구멍이 다 똑 같은 것 같지만 그래도 구멍 중에는 조금이나마 큰 구멍이 있게 마련이오. 현명한 개구리는 그 구멍으로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다오.

 

개구리가 빠져나가기엔 엄청나게 작은 구멍이지만 그 길 밖에 살 길이 없는 줄을 알기에 그 구멍만을 뚫는 것이오.

몸에 상처가 좀 생겨도 머리에 피가 흘러도 한 구멍만을 판 개구리는 빠져 나올 수 있소.

사람이 혼신을 다해 한 길로 가고자 한다면 태산이라도 뚫을 수 있는 것이오.

한 길을 추구하다 보면 성공하지 못할 일이 없소.

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단 말이오.

수백만의 군사가 사방을 포위한다 해도 필사적으로 한 곳만을 뚫으면 살아서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오.

사방팔방의 적들과 다 싸우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처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당신이 쓸쓸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면 한 가지를 끝까지 이룬 후에 다른 것을 시작하시오.

 

하늘로부터의 시련

당신은 절제함으로써 더욱 큰 꿈을 이룰 것이오.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하늘로부터 시련이 내릴 수도 있소.

하늘이 시련을 내리는 이유는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큰 뜻을 더욱 단단하게 하려 함이오.

대인(大人)은 어떤 시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길로 정진하고 정진하여 결국엔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오.

하지만 소인은 작은 시련에도 운명을 탓하며 하늘을 원망하다가 더욱 더 곤궁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 절제를 엄중히 지키면서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오.

운(運)이라는 글자는 세상이 돌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소.

언젠가는 자신에게 때가 온다는 것이오.

성공의 운명을 가진 사람은 때를 기다림에 있어 절제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오.

성공과 실패는 다 스스로 하는 바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오.

작은 실패에 마음 뺏겨 정신상태가 헤이해지면 성공의 때가 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오.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절제하는 사람에게 빈궁함은 일시적인 일이오.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괴로움이 끝나면 즐거움이 오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오.

진전을 다하는 노력이 하늘에 닿으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라오.

 

스스로 성공하는 힘

항상 선배나 윗사람을 공경으로 대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선배의 덕을 중히 여기는 것이 정도(正道)입니다.

새로 시작한 사람은 열심히 배우는 것이 본분입니다.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본분을 아는 사람이 교활하거나 불성실할 수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약삭빠르고 술과 음욕을 즐기면 성장가도에 있다가도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선택한 직업에 전념하고 생활을 엄중히 절제해야 합니다.

쾌락을 성공과 바꿀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가난함을 알면

부자가 가난함을 알면 재물의 시작과 끝을 다 아는 사람이므로 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복을 불러들인 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인자하고 윗사람에게 공손합니다.

절대로 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세가 기우는 일은 없습니다.

부귀란 사방의 가난이 모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귀한 사람이 적은 이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이 부귀의 근본이니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가난함이 근본임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귀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미천함을 근본으로 합니다.

임금도 자신보다 미천한 신하가 깍듯이 모실 때 올 곧은 임금이 되며 가난한 백성이 자신의 근본임을 잊지 않는 임금에게 환란은 없습니다.

미천했을 때를 잊지 않고 아랫사람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부귀는 늘어납니다.

아랫사람을 자식같이 생각하면 아랫사람 또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아랫사람이 힘들 때는 여동생을 대하듯 위로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자식같이 품어 보살피고 항상 위아래 구별 없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은 절제를 위해 술을 금하고 있다 해도 아랫사람들까지 똑 같은 절제를 시켜서는 안 됩니다. 절제는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아랫사람에게 음식을 베풀더라도 자신은 세끼 식사 외에는 먹지 않는 절제의 생활을 하면 지금보다도 더 큰 가운(家運)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야 성공 운명이 된다

운(運)이라는 것은 기(氣)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운명을 운기(運氣)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 천지의 기 흐름이 좋으면 세상이 건전해 지는 것이고 내 몸의 기 흐름이 좋으면 운명이 반듯해 집니다.

해가 뜬 이후에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운명이 온전하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해가 솟아오를 때의 기운은 성공의 기운이며 그 기운을 받지 못하면 온 몸의 기가 제대로 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사람들은 건강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아침에 태양의 기운을 받지 못하면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난 원기(元氣)가 약해지고 마음도 옳지 못한 곳에 머물게 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과 늦게 일어나는 사람의 정신상태 또한 같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온전치 못하니 성공의 근처도 갈 수 없습니다.

늦잠을 즐기면 평생의 반은 누워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이것저것 먹는 것을 찾아다니느라 소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일에 시간을 다 보내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죽자 살자 일해 봤자 무엇을 이뤄낼 수 있겠습니까?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사람 중에는 밤에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이 다 쓸데없이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밤은 음(陰)의 시간이라 자야 하는데 깨어 있고 태양이 뜬 양(陽)의 시간에는 자고 있으니 음양을 도적질하는 셈입니다.

해가 벌써 중천인데 오밤중처럼 잠만 자고 남들이 다 일어나서 일을 할 때야 일을 할려니 손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럭저럭 아침시간을 때우고 점심밥을 먹고서야 일을 시작하니 운이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면 자연은 응당한 대가를 돌려주는 법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태양의 기운을 받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운명을 개척하는 길입니다.

성공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늦잠을 삼가고 일찍 일어나 직업에 전념하는 것이 곧 성공의 길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모든 것이 조용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쾌해지고 좋은 생각만 떠오릅니다.

밤에는 나쁜 생각이 쉽게 떠오르고 아침에는 좋은 생각이 나는 것은 그냥 그런 것이 아니라 기(氣)의 흐름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늦잠은 빈궁(貧窮)단명(短命)의 원인입니다.

 

먹는 것보다 큰 기쁨

벼슬아치는 높은 벼슬에 올라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농부는 풍작이 되어 알곡이 늘어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뛰어난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상인은 장사가 번창하여 큰 가업을 이루는 것이 기쁨입니다.

어찌 먹는 것같이 하찮은 것을 이런 기쁨에 비할 수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런 것들이 즐겁고 기쁘지 않다면 음식으로 그 기쁨을 찾아도 될 것입니다.

음식을 즐기기 전에 먼저 성공을 즐기세요.

성공한 다음에 음식을 즐겨도 늦지 않습니다.

입이나 항문이나 같은 구멍입니다.

입으로 한 번 들어간 음식은 토하더라도 항문에서 나온 똥과 같이 구린내가 납니다.

과식하는 것은 밥을 그대로 변소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먹고 싶을 때 밥을 변소에 버리는 상상을 해 보세요.

만약 그런 상상을 해도 진정 음식을 참기 힘들면 진짜 변소에 밥을 한번 버려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사람이라면 차마 그런 짓은 못할 것입니다.

음식절제를 못하는 것은 매일 밥을 변소에 던지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어리석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가난한 이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나쁜 짓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 왔습니다.

그런데, 왜 항상 가난하며, 사람들은 제가 한 일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착하게 대할지 몰라도 세상만물을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오. 세상 만물이 아무 뜻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세상 모든 것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소.

아무 물건이나 함부로 낭비하고, 물자가 귀한 것을 모르면 결국은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오. 지금처럼 낭비하면 앞으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물론, 세상 모든 것들에게서 버림받을 것이오. 사람만 소중히 여긴다고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만물이 모두 쓸모없이 보여도 그것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면 그것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운명을 개척하게 되는 것이오.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도 이와같이 대하는 것이 제일이오.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긴다는 것이지, 남들이 보기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오.

평생의 길흉을 어찌 한 순간의 관상으로 말할 수 있겠소?

지금부터라도 사람과 만물에 대해 고귀한 섬김의 자세를 가진다면 반드시 당신도 섬김을 받을 것이오.

 

죽을 때 괴로움이 없으려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다 음식이 원인입니다.

음식을 절제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작은 일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술과 고기를 먹으면 마음이 쉽게 흥분되고 흐트러져서 생각지도 않은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또한 과식하게 되면 몸 안의 기가 무겁게 되어 마음이 제 갈 길을 정하지 못합니다.

수행을 깊게 하는 사람들은 오후 4시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다 기(氣)를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않으면 밤낮 기도를 해도 마음이 항상 혼미하니 어찌 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다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현생에서 음식을 절제하여 이를 천지에 남기면 전생의 악연을 풀어 현생의 명복을 늘릴 수 있습니다.

현생에서부터 안락세계에 사니 자연스럽게 임종 또한 편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을 때 괴로운 마음이 없으면 다가올 세상에도 괴로운 마음이 없는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자녀의 운명은 부모하기 나름

어린 아기가 가난하고 나쁜 운명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부모가 절제하면 아기의 운명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초년에 부모가 하는 바에 따라 악상(惡相)도 좋게 바뀌는 일이 많습니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근본입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바르게 됩니다.

혹시 아기에게 태어나기 전 악연이 있다 해도 이것을 푸는 것은 부모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가 이 인연을 풀지 못하면 커가면서 자신의 행동에 따라 인연의 실타래가 풀립니다.

나쁜 인연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음덕을 쌓는 일입니다.

몰래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계속 하세요.

보통 사람들의 음덕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스스로 매일 먹는 음식에서 절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이지만 매일 절제를 실행하면 자손의 나쁜 인연을 풀어 아기의 가난함과 병약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마다 새롭게 변한다.

처음 세상이 만들어질 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에 음양의 기가 만들어지면서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의 기가 근본이고, 신체는 나중입니다.

그래서 관상이나 생김새를 먼저 논하는 것보다 기(氣)를 중심으로 인생을 논해야 합니다.

잘살고, 못살고, 오래 살고, 빨리 죽는 일이 다 스스로 만드는 기운에서 생깁니다.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은 다 이러한 기운을 근본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음양의 기운을 보는 것이 내 관상의 비법입니다.

우주의 기운은 너무 커서 눈앞에 있다 해도 쉽게 볼 수 없습니다.

 

관상은 먼저 우주의 기운과 세상이 이치를 근본으로 해서, 스스로 덕을 배우고 몸을 삼가는 것이 첫째 일입니다.

 

세상 만물은 모두가 날마다 새롭게 변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것을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만물을 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자세로 만물을 바라보면 하루하루의 길흉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태어남과 돌아감을 반복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올 필요가 있을 때 생겨나고,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相)을 보아도 그 이치를 미루어 알 수 없습니다.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남의 운명은 물론, 자신의 운명조차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줄 압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교만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특히 상(相)을 보는 사람은 이 이치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치를 모르는 관상가는 정확한 상(相)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을 가르칠 수도 없으며,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절제, 즉 스스로 멈출 줄 아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며 , 만물을 다스리는 근본 이치입니다.

천운(天運)은 무절제한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천운을 받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수신(修身)하기 쉬워집니다.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나무나 돌보다도 못한 사람입니다.

나의 상법의 비결은 오로지 절제를 첫째로 하여, 하늘의 안목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자가 많지만 이것을 제대로 아는 자는 극히 드물어 안타깝습니다.

가끔 알아듣는 제자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치를 가볍게 여겨 중도에서 물러나는 일도 많습니다.

만약 배우고자 한다면, 절제가 무엇인지 먼저 깨우쳐야 하며, 만물이 나의 근본임을 알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치의 심오한 의미를 깨달으면 내 비결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니 나에게 배울 것이 없습니다.

 

절제는 인생을 만들어 가는 도구다.

절제란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남이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운명을 바꾸는 계기는 언제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다스리는 사소한 절제가 결국 인생의 성공이라는 길로 가는 열쇠이다.

 

 

절제의 성공학 (요약)

*혼신을 다해 한 길을 가라.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시련이 온다.

*잡기는 즐겁게 노는 도구일 뿐이다.

*초심자는 열심히 배워라

*노력이 성공이다.

*돈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간다.

*줄어야 다시 찬다.

*부는 가난이 모여서 된다.

*검소와 인색은 다르다

*부하를 그림자처럼 아껴라.

*일찍 일어나야 성공 운명이 된다.

*삼가고 삼가는 것이 성공의 길.

*운명은 정성에 따른다.

*가난을 다 채우면 복이 들어온다.

*운은 누구에게나 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려라.

*검소함은 자신을 빛내는 일이다

*음식말고 성공을 즐겨라.

*불규칙한 식사는 운명을 바꾼다.

*음식은 금은보화보다 소중하다.

*패가망신의 지름길 폭식

*주는 것이 받는 것의 기본이다.

*좋은 운명을 만드는 소식(少食)

*넉넉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흐른다.

*절제하면 망하지 않는다.

*삼가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육식은 마음을 탁하게한다.

*차면 기운다.

*마음이 가난해서 항상 배고프다.

*음식으로 병을 고친다.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진다.

*절제를 물려줘라.

*만물을 소중하게 절제하라.

*자녀의 운명은 부모하기 나름.

*세상은 날마다 새롭게 변한다.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종교의 근본원리는 같다.

*음식이 운명을 좌우한다.

 

 

출처: 미즈노 남보쿠저, 최진호편저 食식은 운명을 좌우한다(도서출판 태일)

posted by 有然(유연)

내 고개만 끄덕여도

 

쿠툽(qutub)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중심점’ 또는 ‘중심축’을 뜻한다.

따라서 쿠툽(완벽한 스승)은

창조세계의 모든 것이 회전하는 그 중심축이다;

쿠툽은 모든 것의 중심(CENTRE)이기 때문에,

모든 경지의 모든 존재들과 동거리에 있다.


그대들이 개체들로서

또는 각기 다른 경지에 위치한

고립된 한 점들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모든 행동들은 그 표현과 결과에 있어 제한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인 내가 하는 각각의 행동은

그 행동의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표현과 결과에 있어 무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그대가 고개를 끄덕일 때,

그것은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슬픕니다’ ‘나는 먹었습니다’

‘나는 쉬었습니다’ 등의 각기 다른 행위와 기분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끄덕임은, 한 번에 오직 한 가지 뜻만을 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인 내가 고개 한 번 끄덕일 때,

그것은 모든 의식의 경지들에 동시에 파도처럼

무수한 작용과 반작용을 불러 일으킨다.

 

메허 바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2010~2011년 경 12차크라 에너지장

 

아래는 7차크라를 포함한 인체 에너지장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아미타불

나모 사마야

나모 붓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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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有然(유연)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삶처럼 특이한 에너지 흐름을 보인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8차크라 에너지 센터에서

푸른 색 나선 에너지가 인체의 1번 차크라까지 하강하고(은총의 흐름)

다시 나선으로 상승하여 돌아가는 에너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그의 깨달음이나 체험과 관련있어 보임)

 

몸주변의 마름모 상징은

여러 정신 영역의 능력을 사용할 때 드러난다

주변의 원형코일들은 그 파워가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발주변의 X상징과 감긴 에너지들은

그의 삶은 미지였고, 힘겨웠음을 의미하는 것 같아 보인다.

(8차크라 X참고)

 

2019년 1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도 궁극의 상태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유지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유지는 주로 먹고 자기만 하고 혹은 <타임>잡지를 읽으면서 조용히 지냈다. (유지는 다른 어떤 책도 보지 않았지만 <타임>지만은 읽었다고 한다.)

 

 

생각이 없으면 섹스도 없고 신도 없다. 아무것도 없게 된다. 당신은 종국적으로 깨달아야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여러분들은 상카라나 붓다를 따르는 값싼 모조품이 되려고만 하지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십니까? 여러분은 인류가 지금까지 배출한 모든 성자나 구세주들보다 훨씬 독특하고 비범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의 싸구려 모조품이 되려고 하십니까?

 

 

(UG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말을 종종 인용하곤 한다. 그것은 그가 '걷잡을 없을 만큼 높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것이다. 그의 외조부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UG 양육과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서 변호사일을 그만두었다. 그의 조부모와 그들의 친구들은 UG 이미 그의 전생에서 깨달음에 아주 가까이 다가선 인간, *요가 브라쉬타(yoga bhrashta)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요가 브라쉬타(yoga bhrashta) 요가의 성취가 불완전해서 실패하고 떨어진 사람을 뜻하는 단어.

 

 

 

유지 크리슈나무르티 - 그런 깨달음은 없다 (The Mystique of enlightenment)....................................

(
나흘째) 저의 눈에 무슨 일인가 생겼습니다. '리알토'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바뀌었습니다. 마치 오목거울로 세상을 보고 있는 같았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안에 들어왔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눈이라는 거대한 카메라가 자기 혼자 초점을 바꾼 같았죠.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면 저의 눈은 영화 카메라처럼 맞은편에서 오는 차는 저에게로 오는 것으로 보고, 지나가는 차는 저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봅니다. 무언가를 고칠 때는 마치 고정된 카메라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죠. 그날 저는 식당에서 돌아와 눈에 이상이 있나 싶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눈을 깜빡이지 않더군요. 사십 분쯤 들여다보았지만 한번도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본능적인 눈의 깜빡임이 멎은 겁니다. 아직도 그렇습니다.

(
닷새째) 저는 청각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소의 울음소리도 기차소리도 모두 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모든 소리가 그렇습니다. 밖에서 나는 소리 같지 않습니다.

.....................


거대한 폭포, 수천 개의 폭포가 동안 위에 쏟아졌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아픕니다. 에너지는 남의 사정을 봐주는 일이 없죠. 자기 식으로 움직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공항에 있는 윌스 담배 광고판을 일이 있을 겁니다. 시계방향으로 움직였다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합니다. 속에서 에너지가 그렇게 움직여 댑니다. 몸의 부분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몸 전체에서요. 마치 온몸을 빨래 짜듯이 짜는 같습니다. 그렇게 아픕니다. 고통은 아직도 남아 있죠. 여러분은 이것이 오길 바래서는 안됩니다. 바라지 마세요.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이것이 여러분을 포위하고 급습할 겁니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떻게 오는 거죠?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시작될지 모르죠. 자리에 누워 있는데 문득 이것이 시작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개미가 기어오르듯 서서히 시작하죠. 저도 처음에는 벌레가 기어가는 알았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보니 아무 것도 없었죠. 그러더니 이번에는 머리칼이 쭈뼛 서고, 그렇게 시작되었죠.

온몸이 아팠습니다. 생각은 이상 육체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완전한 탈바꿈이 시작되었죠. 모든 것이 저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손의 동작이 달라졌습니다. 보통 손을 이렇게 움직이는데 여기 손목의 관절이 말할 없이 아팠습니다. 개월이 지나 스스로의 움직임이 시작되자 아픔이 멎더군요. 모든 것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저의 손동작이 무드라라고 말하더군요. 사실 지금의 손동작은 이전과 아주 다릅니다.

 

 

찾으려는 노력은 항상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스럽다 거룩하다 심오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지저분한 ‘때’ 같은 것입니다.
--- p.18

‘생각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경험이든 다 만들어낼 수 있다. 엄청난 기쁨, 지복, 무아지경, 무無로 녹아 사라지는 등 온갖 신비체험들을. 그러니 이런 것은 해탈이 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고, 이런 체험들은 생각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날 뿐이니까. 명상은 나를 어디로도 인도해주지 못한다.’
--- p.26

그가 자신의 근본적인 의문에는 어떤 답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의문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일종의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UG는 그것이 “내부에서의 갑작스러운 ‘폭발’, 말하자면 몸의 모든 세포와 신경과 내분비선의 폭발”이었다고 말했다. 그 폭발과 함께 생각의 연속성, 내면의 어떤 중심, 생각들을 연결시켜주는 ‘내’가 있다는 환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p.57

닷새 동안 다섯 가지 감각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갑자기 내 몸이 사라졌습니다. 몸이 없는 겁니다. 나는 내 손을 바라보며 “이게 내 손인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건 내 손임이 분명했지만 내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 몸도 만져봤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촉감 말고는 거기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 몸이 보여? 내 안에는 이게 내 몸이라고 말해주는 게 전혀 없어.” --- p.65

이 상태는 내 상태나 신의 상태, 깨달은 사람의 상태, 남다른 변화를 이룬 사람의 상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상태, 여러분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자연스러운 상태지만 여러분이 뭔가를 얻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그런 상태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짓이 됩니다.
--- p.90

자연스러운 상태는 생각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생각이 여러분을 짓누르지 않고 자체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라 흘러갑니다. 생각을 판독하고 생각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 p.115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신비한 주문 같은 것을 통해서 자신을 단번에 무아 상태로 진입시키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황홀한 환상을 품고서 마법의 땅을 밟고 싶어 합니다. 한데 그런 짓은 여러분을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는 움직임입니다. 진정한 자신이 되는 데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한데 여러분은 이미 그런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누구도 여러분에게 그런 지혜를 줄 필요가 없고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 p.125

“나는 누구입니까?”가 정말로 당신 자신의 질문거립니까? 전혀 그렇지 않죠. 그건 어딘가에서 주워온 겁니다. 여기서 골칫거리는 물음이 아니라 묻는 자입니다. 물음과 묻는 자는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묻는 자의 관심은 답을 얻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존재하는 데 있습니다.
--- p.176

술집에 가든 사원에 가든 둘 다 현실도피예요. 이 길로 도망치든 저 길로 도망치든 간에 다 도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죠.
--- p.219

의식의 확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에게 깨달음의 새벽이 밝아오면 그런 체험은 제아무리 심오한 것이라 해도 전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인도의 성자들은 열락의 상태나 몸 의식의 부재라고 하는 아주 사소한 것을 체험하고는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체험은 의식을 제한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그렇게 제한된 의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아마 당신들은 그런 것들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을 겁니다.
--- p.243

당신들이 비참하고 불행한 신세가 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의 종말은 곧 ‘나’의 종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환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의 환상을 또 다른 환상으로 바꿔놓는 것뿐 입니다. --- p.251

여러분이 이런 상태에 들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할 겁니다.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최고의 고통이라고 내가 말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웃음)
--- p.263

여러분이 자기로 알고 있고 자기로 경험하고 있는 ‘나’는 자기 존재가 끝장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계속 이어지를 바랍니다. 모든 영적 추구들은 그런 연속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아중심적인 활동입니다. 어떻게 자아중심적인 활동을 통해서 ‘자아’의 활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어요?
--- p.268

‘어떻게?’라는 질문을 통해서 ‘나’라는 구조는 연속성을 얻고 영구히 자리를 잡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구요?
--- p.295

당신은 자기 자신한테로 돌아오며, 참으로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 p.306

 

posted by 有然(유연)


머리에서 가슴으로
황홀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인가 봅니다

저절로 깨어났지만?
아루나찰라 동굴들에서
수년간 사마디에 들어 수행하셨습니다


2017년 3월

8차크라 에너지장은 첫번째 임사체험의 깨달음
9차크라 에너지장은 두번째 임사체험이나 아루나찰라의 합일체험
10차크라 에너지장은 나는 누구인가? 참나 탐구의 깨달음으로 보여진다;
가장 높은 영적 중심의 에너지 흐름인 +x 선들은(+신성, x의지)
신의 뜻에 대한 순복(surrender)의 가르침(법륜)을 의미한다
한국불교 간화선 화두수행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10차크라 에너지장 위에 (*)은 신성한 빛이다
위에 있는 점은 아래의 큰 원들보다 거대한 영역을 의미한다


옴 나마 시바야
((()))

2020.1.6



신이나 스승이 개인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도록 해줄 수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뿐이지,
그들이 직접 개인에게 해탈의 상태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의 입안에 떨어진 먹이가 도망칠 수 없듯이,
스승의 자비로운 눈길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스승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며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노력으로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서 해탈을 얻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의 눈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나는 누구인가




Q: 왜 모든 구도자들은 그런 완전히 깨달은 영혼들의 안내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A: 그 구도자들 자신이 그런 완전한 스승들을 진실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무기력, 무지, 교만 등에 기인합니다.

Q: 당신은 구도자에게는 깨달은 영혼의 스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라마나 마하리쉬에게는 그러한 스승이 결코 없었지 않습니까?
A: 라마나의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특별히 강한 마음을 소유 했었지만
완전히 깨달은 영혼의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많은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으며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범했습니다.
라마나는 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구원됐는데 오직 죽을 때에야 신을 보았습니다.

- 시바푸리 바바


오로지 신만이 유일한 실재다;
그 외에 그대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무(nothing)의 연속에 불과하다.
나는 무한한 지식이며, 무한한 파워, 무한한 지복이다.
만일 내가 그러고자 한다면, 누구라도 즉각 신을 깨닫게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왜 저를 깨닫게 해주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대여야 하는가? 그대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나
길을 거니는 사람, 나무 위의 새나 저 돌은 어떤가?
그들은 모두 본래의 하나가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 뿐이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여태껏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아닌 무엇인가를 자신으로 믿도록
여왔던 거짓행세(falsehood)를 점점 버리게 될 것이다. -
즉 그대가 언제부턴가 그 뒤에 숨어살기로 결정한
자신의 가면을 결국 벗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모두의 안에 있으며,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한다.
나를 위한 그대의 사랑은 그대의 거짓을 닳아 없애고는,
진실로 그대인 참나(Self)를 깨닫게 할 것이다.

단지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신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다.
신을 그대에게 모셔오는 것은 그대의 사랑이지, 그대의 의문이 아니다.
의심은 자만심(pride)과 개별성(separateness)만을 먹여 살린다.
그러니 질문하는 대신에, 완벽한 스승의 ‘노예’가 되려고 노력하라.

그대의 삶이 그대 마음과 가슴의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비추어줄 때,
완벽한 스승의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성령의 강림을 재촉하기에 충분하다.
고대의 그이(Ancient One)인 내가 그대를 껴안을 때,
나는 그대 안에 계속해서 자라날 무언가를 일깨운다.

그것은 내가 심은 사랑의 씨앗이다.
그 씨앗이 발아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사실 그 목표에는 멀거나 가까움이 없으며, 거리나 시간도 없다.

영원에서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야 할 뿐이다.
무한한 존재인 신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메허 바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라마나 마하리쉬의 깨달음 요약

그런 벤카타라만에게, 1895년 11월, 그의 16번째 생일 직전, 이 소년의 남다른 운명을 알리는 첫 번 째 전조(前兆)가 나타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깊은 내면에서 ‘아루나찰라’라는 소리가, 장엄하게 압도하는 그 무엇으로 빛나면서, 고동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소리가 아닌 묘한 진동으로 그의 영혼에 늘 지속되는 것 같았다. 이 고동치는 아루나찰라가 스툴라(stula) 아루나찰라로 그 자신을 드러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오신 친척 어른께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그가 아루나찰라(Arunachala)에서 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벤카타라만은 깜짝 놀라, “무엇이라, 아루나찰라에서 왔다고”라고 소리쳤다. 벤카타라만은 막연하게 아루나찰라가 매우 성스러운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며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친척으로부터 아루나찰라가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라는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 이름이라는 것을 듣고 그는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고동치고 있는 ‘아루나찰라’에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두 번 째 전조도 곧이어 나타났는데, 이것은 책으로부터 왔다. 벤카타라만은 숙부가 빌려온 페리아푸라남(Periapuranam)이라는 제목의 타밀(Tamil) 지방의 63명의 성자에 대한 책을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토록 지고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성스런 열정이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희열에 찼다. 진실로 아름다운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신과 하나가 된 성인들의 이야기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96년 7월 중순 숙부의 집 2층 방에 앉아 있던 벤카타라만은 마침내 생애 최대의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그를 소년에서 성자로, 단 한 순간에, 재빨리, 그리고 영원토록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 절정은 아무런 탐구도, 아무런 노력도, 아무런 의식적 준비도 없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 날 그는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었다. 평소에 그는 거의 아프지 않았으며 그날도 그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공포는, 전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렬하고 불가사의한 체험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무 도움도 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이렇게 죽겠구나”고 느끼고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나,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그때 오직 이 죽음의 문제를 그 스스로 그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죽음의 충격에서 오는 이 공포는 그의 마음을 내면으로 이끌고 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죽음이 왔다. 죽음이 무엇인가? 육체의 죽음으로 오는 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몸은 죽는다.” 그래서 그는 즉시 죽음의 일어남을 드라마틱하게 하였다. 그는 죽음의 탐구를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눕고는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몸을 뻗어 뻣뻣하게 하였다. 그는 소리가 입 밖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은 물론 ‘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몸은 죽었다. 이 몸은 뻣뻣한 채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이 죽는다고 내가 죽는가? 몸이 나인가? 몸은 말이 없으며, 고요하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의 완전한 힘을 느낀다. 내 몸과는 별개인, 나 속에 있는 ‘나’의 소리조차도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몸을 초월한 영(靈:참나)이다. 비록 몸은 죽음에 이르나 몸을 초월하여 있는 영은 죽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죽음을 초월한 영이라는 것이다.”



기쁨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숨에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으로 향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사원의 세 큰 문을 포함한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으며, 안쪽에 있는 성소(聖所) 조차도 그러하였다. 성소에 홀로 들어가 빛의 링가인, 아루나찰레쉬바라 앞에 서자 격정이 소용돌이치면서 그는 링가를 껴안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버지에게 제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도착을 고하였다. 벤카타라만은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불길처럼 소용돌이치던 격정이 가라앉으면서 완전한 엑스터시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다. 마침내 합일의 희열 속에서, 그의 여정은 끝을 맺었다.




모든 의식을 마친 벤카타라만은 일 천 개의 기둥이 있는 만타팜 홀의 한쪽 구석에 앉아 사마디에 들었다.
그는 참나를 발견한 환희에 완전히 잠겼으며 낮이 가고 밤이 오기를 반복해도, 사마디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몇 주 동안을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깊은 환희에 잠겨 있었다. 자기들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말없이 앉아 사마디에 빠진 것을 본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며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티루반나말라이에 온 세샤드리 스와미(Seshadri Swami)가 이제 브라마나 스와미(Brahmana Swami)라고 불렸던 벤카타라만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막아보려는 세샤드리 스와미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브라마나 스와미는 일 천 개의 기둥이 있는 홀 아래의 지하 사원인 파탈라 링감(Pathala Lingam)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둡고 습한 이 지하실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드물었고, 일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개미, 지네, 모기 등 온갖 해충이 우글거렸다. 이곳에서 외부 세계의 모든 것을 잊고 사마디에 몰입한 그에게는 이미 몸에 대한 의식도, 감각도 사라졌다. 벌레들이 그의 몸에 다가와서 허벅지와 발을 물어뜯어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나중에는 이것이 고름과 한데 엉겨서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물린 자국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가장 강렬한 타파스(tapas)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타파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 없었던 몸을 그냥 잊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이미 지반묵타(jivanmukta)였으며 씻어내야 할 아무런 카르마도, 얻어야 할 더 이상의 목표도 없었다.
지하실에서 지낸 약 두 달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러나 참존재를 발견한 환희에 젖어든 그는 어떤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샤드리 스와미가 우연히 지하실 앞을 지나다 아이들이 그곳에 돌을 던지는 걸 보았다. 아이들이 던진 돌은 구석에 앉아 있던 브라마나 스와미에게는 이르지 못하였다. 아이들을 쫓아내고 지하실로 들어선 그 사람은, 주변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는 한 스와미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를 깨우려고 소리를 질렀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으며 몸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사마디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이 그의 몸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그를 안아들었을 때, 바닥의 흙과 뒤범벅이 된 그의 수많은 상처에서 피와 고름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몸을 망각한 깊은 사마디에 빠질 수 있는지 놀라면서 그를 들어서 지하실을 나와 근처의 수브라마니야(Subramanya) 사원으로 옮겼다. 어떤 스와미가 그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사마디에서 깨어나지 않아 도무지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씩 입을 벌려 음식을 떠 먹여 주어야 했으며, 때로는 몇 주 동안 허리 가리개를 묶을 생각도 않고 지낼 때도 있었다. 몇 주가 흐른 뒤, 그는 사원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또 후에는 꽃밭, 바나나 숲 등에 있었다. 어떤 때는 사원의 축제행사 때 쓰는 수레를 보관하는 곳에 있기도 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마디를 계속 했다. 브라마나 스와미가 일루팔(illupal)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부는 바람은 너무 매섭기도 하였다. 내린 이슬이 그의 몸을 하얗게 뒤 덥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추워 두 팔로 가슴을 감싸기도 하였다. 두 팔이 그가 입은 유일의 옷이 된 것이다.

이렇게 거의 6개월 가까이, 그는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에 머물렀고, 그 동안 그의 깊은 사마디는 계속 되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그는 마치 자다(jada)처럼 앉아있다. 그는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즐겼으며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오기를 바랬다. 심지어 그는 사마디 중에 이동하기도 하여, 가끔씩 그가 눈을 뜰 때면, 자신이 어떻게 그 장소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브라마나 스와미와 제자들은, 여름철에는 보다 시원하고 주변에 물도 풍부한 망고나무 동굴로 거처를 옮기곤 했다.
어느 날 비루팍샤 동굴로 돌아오면서, 그는 그의 두 번째 죽음의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났다. 이번에 그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실로 죽음 그 자체였는데 이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기 내 앞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얀 천 같은 것으로 가려졌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나타나곤 하다가 나중에는 사라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하얀 천으로 눈앞의 광경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천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두 번 일어났다. 나는 점점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버티기 위해서 거북 모양의 바위에 기대었다. 그것이 세 번째 일어났을 때 나는 바위 위에 앉았다. 내 주위가 온통 하얀 천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혈액 순환과 심장 박동이 멈추었고 나의 몸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몸은 마치 시체와 같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현상이 더 깊어졌을 때, 시중들고 있었던 바수(Basu)는 내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내 몸의 색깔이 변하는 것, 바수가 날 안는 것, 그의 몸이 떨리는 것,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 모두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나의 손과 발이 식어가며 나의 심장 박동이 멈추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나의 내부에는 전혀 공포가 없었다. 나는 뚜렷하게 이 모든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나의 몸의 상태에 대하여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에너지가 내 온 몸에 퍼졌으며 혈액의 순환과 심장의 박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두 번째의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비록 그의 내면적 신성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까지의 방관자적 관점에서 인류를 위한 영적 봉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하였으며, 오랜 자발적인 침묵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욕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을 정화하여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그가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오면 그냥 고요히 앉아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서 그윽한 연민의 눈길을 보내기만 하였다. 그러면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에 휩싸이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동안 쌓여왔던 모든 것이 녹아 내리는 걸 느끼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그의 발 밑에 엎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침묵의 가르침이었다. 이 침묵의 가르침은 글이나 말을 통한 어떤 가르침보다도 훨씬 확실하고 강렬하였다. 글이나 말을 통하면 제한되어버리고 왜곡되어버리는 진리가 침묵 속에서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면서 전해질 수 있었다. 그에게는 침묵의 힘이 있었으며 그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바로 이 침묵에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방황하던 마음은 고요해졌고, 오랫동안 갈구해왔던 영적 체험이 일어났다. 때로는 브라마나 스와미는 제자들에게 지시나 설명을 하기 위해 종종 글을 써 주곤 했으며, 침묵 때문에 제자들의 영적 수행이 곤란한 적은 없었다. 그는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제자들에게는 침묵을 통해서 그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전하고, 그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해서 가르침을 주었다.

아루나찰라에서 지낸 초창기, 그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으며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녔으나 그가 뿜어내는 광채는 그의 주변에 이미 상당한 수의 제자가 모여들게 하여 자연스레 아쉬람이 형성되었다. 그의 희열의 참나에서 나오는 광채, 그의 현존 그리고 그의 바라봄은 사람을 변화시켜 영적 열정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암중모색하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자비로 그는 그들이 던진 질문의 답을 종이 쪽지에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1902년, 공무 차 티루반나말라이에 들른 쉬바프라카삼 필라이(Sivaprakasam Pillai)가 이 젊은 성자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즉시 산을 올라 브라마나 스와미를 만난 그는, 처음 보자마자 이 스와미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14가지 질문을 던졌고, 브라마나 스와미는 여전히 침묵 중이었으므로 질문과 답은 모두 글로 전해졌다. 이때 주고받은 문답이 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엮어져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라마나의 초기 가르침을 담은 이 작은 책은, 그가 세상에 전한 가르침의 정수를 모두 담고 있다.

전문 http://cafe.naver.com/avatarmeherbaba/2665

posted by 有然(유연)
2019. 8. 2. 00:12 영혼의 영적 여정

▣ 책소개

 

<근원 에너지>란 우주 만물의 바탕과 근간이 되는 에너지를 뜻한다.

우리 마음도, 인생도, 더욱 깊은 차원에서의 영혼도, 모든 일들이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데 이 모든 것들을 <근원 에너지>가 꿰뚫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근원 에너지에 대해 이해하고 적극 활용하여 자신을, 본래 자기 아닌

에너지를 정화하고 비움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행복의 상태로 치유되며

참나,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 작가소개

 

明濟 전용석

중학생이 되던 해(1985)부터 호흡공부를 통해 명상을 시작했다.

삶이 곧 번뇌임을 알고 명상에 매진한 결과, 스물다섯이 되던 해

깊은 영적 체험들을 통해 참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스스로 명상을 통해 바뀐 것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

아봐타(마스터), NLP, 최면, 오라소마, 레이키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섭렵했다.

7년 동안 IT컨설팅 업체 재직 후 억대 연봉 제안을 뿌리치고

명상 지도, 자기계발 강의 및 상담을 위해 자기계발 센터를 창업했다(2003).

이후 <한흐름 기명상원>을 설립하고(2007) 서울, 양평, 대전, 부산, 광주에 지원을 두고

기명상 지도를 비롯해 <마음의 법칙> 워크숍, <치유정화> 워크숍을 통해

영적 〮심적 〮정신적 향상을 돕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저서에 <아주 특별한 성공의 지혜>, <나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 <마지막 시작>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한권으로 보는 과학, 인문, 종교, 자기계발서!

 

알프레드 아들러, 파울로 코엘료, 앤서니 라빈스, 아인슈타인, 칼 융, 켄 윌버,

데이비드 호킨스, 스베덴보리, 오쇼 라즈니쉬, 라마나 마하리쉬, 붓다등

자기계발, 과학, 심리학, 철학, 신비주의, 종교, 각분야의 영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면서 위대한 영혼들의 깨달음과 에너지를 실감할 수 있다.

천마디 말보다 한장의 그림이 영혼을 깨어나게 한다!

 


가장 큰 신성한 이분법은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보려는 것이다.
오직 ‘한 존재’, 따라서 오직 ‘한 영혼’ 만이 있다. 그리고 그 ‘한 존재’ 속에 많은 영혼들이 있다.
영혼이란 모든 물체(의 오라로서) 안과 둘레에 존재하는 생명 에너지다.
-신과 나눈 이야기3

나무의 모습은 보는 사람과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이지만
나무의 크기와 방향은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혼의 모습은 관찰자와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 되더라도
영혼의 진화와 파동은 공명될 수 있다
깨달은 영의 침묵하는 평화같이...
추사의 불이선란도는 한국의 보물이지만
때가 되면 세계가 이 책에 주목할 것이다
책에서 방사되는 신성한 에너지가 있기에
-유연 시인

<책 속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던 부정적 에너지들을 비우고 정화하여 근원과 소통 됨으로써,
파이프라인의 흐름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근원 에너지>의 흐름 을 타고 나아가게 된다.
근원은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지혜이자 지성이며 정보의 데이터베이스이다.
근원 에너지의 흐름에는 한낱 인간 개인의 의식만으로는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지혜가 담겨있다.
‘작은 나’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근원 에너지의 큰 흐름에 맡겨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아가는 것이다.

<1부 마음의 에너지> 편에서는 우리가 닦아나가야 할 마음을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마음이 신기루 같은 허상이 아니라 실존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져있음을 밝힙니다. 이러한과정에서 몇 가지 과학이론들을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렵게 느껴지는 독자는 대충 훑고 지나가더라도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큰 상관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2부 인생의 에너지> 편에서는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가족관계, 인간관계와 삶의 목적, 목표 등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에너지를바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러한 차원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더 나은 삶으로 변화시켜나가는데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모든 독자들께 유익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깊이 있는 자기계발에 관심이 있는분들께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3부 영혼의 에너지> 편에서는 보다 깊은 관점에서 우주의근원과 물질(또는 현실)을 구성하는 에너지에 대해 설명하고, 이러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여 영적으로 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4부 영성의 회복을 위한 에너지장> 편에서는 영적 에너지장(영혼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다양한 사례들을 확인함으로써 영적인차원에서 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모색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된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자신을 비우고 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써 제가 지도하고 있는 기()명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목차

들어가는 말
일러두기

1 마음의 에너지
일체유심조 | 22
모든 것은 에너지다. 마음도 에너지다 | 24
-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장
경험은 정보와 에너지의 작용 | 34
마음은 뇌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불과한가? | 38
- 조르다노 브루노의 에너지장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 46
마음이라는 이름의 창조자 | 51
- 스티븐 호킹의 에너지장
시크릿의 비밀이 통하지 않는 이유 | 59
당신이 알고 있는 ‘마음’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 62
당신은 파블로프의 개인가? | 69
- 빅터 프랭클의 에너지장
모두가 하나 ? 집단무의식 | 75
달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사라진다 | 86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 | 87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 이론 | 90
- 데이비드 봄의 에너지장
생각이 실제 현실에서 작용하는 원리 | 98
- 스티븐 킹의 에너지장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에너지의 법칙 | 107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기자신이 된다 - 주의 | 114
모든 것의 시작 - 의지 | 120
의지 - 주의를 컨트롤하여 창조하는 힘 | 120
의지 - 아니면 충동 | 124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에너지장
세상에 나와있는 모든 자기계발 이론과 방법의 핵심 - 신념 | 132
- 부설거사의 에너지장
가장 순수한 교류의 방식- 느낌 | 145
마음을 비우면 지혜로워진다- 직관 | 147

2 인생의 에너지
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 152
마음은 에너지를 담는 항아리 | 156
마인드 컨트롤이 아닌, 주의를 다스리기 | 162
인간관계도 에너지의 작용 | 168
- 제임스 레드필드의 에너지장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기 | 175
사랑의 동심원 | 188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때 길은 스스로 열린다 | 195
- 파울로 코엘료의 에너지장
당신을 인도할 길잡이별을 찾아라 | 202
목표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비밀 | 210
상상하는 것은 이루어진다? | 218
진인사 대천명의 지혜 - 모든 의식이 하나되는 노력의 법칙 | 222
- 앤서니 라빈스, 지그 지글러,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에너지장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 235

3 영혼의 에너지
근원의 에너지장은 만물의 어머니 | 244
- 노자의 에너지장 하늘과 땅 사이에 | 251
나는 누구인가? - 오직 모를 뿐 | 263
가족은 나를 비추는 거울 | 271
결국 신과 우주는 지극히 공평하다 ? 윤회 | 281
-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에너지장
운명을 바꾸는 방법 - 내재된 자동반응 프로그램의 정화 | 292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원초적 불행 | 299
정화 - 비움으로써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지혜 | 308
- 리처드 모리스 버크의 에너지장
죽음의 문턱에서 근원의 빛을 체험하다
- 유체이탈, 빙의, 임사체험 | 322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에너지장
꿈을 통한 미래 예지가 가능한 이유 | 333
내맡김의 지혜 | 340

4 영성의 회복을 위한 에너지장
영성의 참된 의미 | 352
영적 에너지장이 갖는 의의 | 357
영적 에너지장의 이해 | 361
원형 | 362
- 원형을 바탕으로 한 에너지장 380
사각형 | 364
- 사각형에 갇혀있는 에너지장
- 영웅문의 작가 김용의 에너지장
잡스러운 기운과 흐트러진 선 | 368
- 전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에너지장
- 지기의 영향을 받아 일그러진 에너지장
-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른 상태의 에너지장
빙의 | 374
- 스스로 빙의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나 빙의가 아니었던 에너지장
- 외부 영체에 빙의된 에너지장1
- 외부 영체에 빙의된 에너지장2
- 외부 영체에 빙의된 에너지장3
- 넓은 의미에서 빙의된 에너지장
에너지장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들 | 379
유명인의 에너지장 사례 | 384
직업인들의 에너지장 | 386
- 정치인의 사례1 - 버락 오바마
- 정치인의 사례2 - 유시민
- 과학자의 사례 - 니콜라 테슬라
- 사업가의 사례 - 정주영 회장
- 심리학자의 사례 - 알프레드 아들러
영적 교사와 명상가, 수련단체장 등 | 399
- 어느 유명 채널러의 사례
- 어느 명상단체장의 사례
- 어느 최면요법사의 사례
- 다석 유영모 선생 - 타 종교에 열려있는 다원주의 신학의 선구자
- 루이즈 헤이 - 어떤 역경을 딛고서라도 자신을 사랑하라
- 구제프 - 강력한 용과 뱀 에너지를 통해 제4의 길을 추구하다
바른 수행의 결정체 - 2장 이상의 에너지장 | 413
- 칼 융 - 분석심리학의 아버지
- 켄 윌버 - 의식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
- 오쇼 라즈니쉬 - 현대판 인도의 성자, 논란의 중심에 서다
- 데이비드 호킨스 - 의식수준을 수치로 측정하다
- 라마나 마하리쉬 - 침묵의 성자
역사상 위대한 성인의 에너지장 | 428
- 석가모니
그리고, 더 나아갈 길 - 기명상 | 433
깨달음의 해묵은 논쟁 - 돈오, 점오, 점수, 돈수 | 437
기명상의 보편적 원리 ? 회전력과 보텍스 | 444
기명상의 기본적 방편들 | 451
기명상을 통한 에너지장 변화 사례 | 477
- 8일만에 변화된 에너지장
- 사무처리 후 변화된 에너지장
- 에너지장의 한 경계를 넘어선 사례
기명상 수행 후기 | 484
기명상 지도 후기 | 508

 

책 속으로

모든 만물의 바탕에서 작용하는 에너지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근원 에너지' 라 할 수 있다.
근원 에너지는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각각의 영역에 적절한 에너지로 작용함으로써 큰 영향을 끼친다.

예컨대 정신적인 에너지 차원에서도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정신적으로 질량이 큰 것이 작은 것을 끌어당긴다.

목표는 물질화시키고자 하는 에너지의 구체적인 중심점이다.
현실적인 에너지 차원에서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원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에너지를 쏟은 것’이 된다.

사람들은 물... 더보기

모든 만물의 바탕에서 작용하는 에너지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근원 에너지' 라 할 수 있다.
근원 에너지는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각각의 영역에 적절한 에너지로 작용함으로써 큰 영향을 끼친다.

예컨대 정신적인 에너지 차원에서도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정신적으로 질량이 큰 것이 작은 것을 끌어당긴다.

목표는 물질화시키고자 하는 에너지의 구체적인 중심점이다.
현실적인 에너지 차원에서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원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에너지를 쏟은 것’이 된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현실만을 바라보지만
인생의 본질은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에너지 게임’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게 된다.

마음을 채우고 있던 부정적 에너지들을 비우고 정화하여 근원과 소통 됨으로써,
파이프라인의 흐름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근원 에너지>의 흐름 을 타고 나아가게 된다.
근원은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지혜이자 지성이며 정보의 데이터베이스이다.
근원 에너지의 흐름에는 한낱 인간 개인의 의식만으로는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지혜가 담겨있다.
‘작은 나’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근원 에너지의 큰 흐름에 맡겨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아가는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_본문 중에서

posted by 有然(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