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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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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5:50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원경당 성진 대종사 행장


불기2565(2021)년 12월 6일 주석처인 평택의 만기사에서 홀연히 원적에 든 원경당 성진대종사는 온 몸으로 한국사회의 격동기를 지낸 보기드문 위인입니다. 해방과 분단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불가에 입문한 여로(旅路)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대종사는 남한의 남조선노동당을 이끈 부친 박헌영 거사와 모친 정순년 여사 사이에서 1941년 태어났습니다. 1946년 부친 박헌영 거사가 미군정의 압박을 피해 월북하자 남한에 홀로 남겨져 홀연단신 고아가 되었으며,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부친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출가한 한산(寒山)스님의 슬하에서 청년을 맞았습니다.

자연스레 한산스님의 문하에서 10세 때부터 삭발염의하였으나 정식적으로 출가를 결행한 것은 송담 정은 대선사를 만난 1960년의 일입니다. 1960년 3월 전강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3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시니 어엿한 출가사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1996년 국립사회복지연수원, 1997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였습니다.

대종사는 젊은 시절 은사 송담스님을 따라 화두참선 수행에 매진하여 어묵동정 행주좌와 화두참구하기를 인천 용화선원, 수덕사 정혜선원, 문경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26안거를 성만하시고 비로소 출세간의 깊은 묘리를 세간에 내보이셨습니다.

兜率摘花香自濕 두솔적화향자습
松下喫茶心自閑 송하끽다심자한
圓鏡生平修得何 원경생평수득하
滿庭月光露不霑 만정월광로불점

도솔천에서 꽃 따다 보니 향기 절로 배이고
솔 아래 차 마시다 보니 마음 절로 한가하네.
원경이여 한 평생 닦아 무엇을 얻었는가?
뜰에 가득한 달빛은 이슬에 젖지 않는다오.

대종사는 치열한 정진으로 상구보리하였으니 세간으로 나아가 하화중생하기를 서원(誓願)하여 허물어져 가는 가람을 일신하고 복전을 일구셨습니다. 1974년 흥왕사 주지로 처음 부임한 이래 1983년 청룡사 주지, 1987년 신륵사 주지 등을 거쳐 1995년 만기사 주지를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스님의 원력이 큰 줄기를 이루어 중생이 감화하고 불연이 꽃을 피웠습니다.

큰 어려움이 처할 때에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갔습니다. 2014년 4월 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추대되고, 2015년 1월에는 최고 법계 대종사를 서품하셨으며, 2017년 12월 원로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지난 봄 종단의 법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거듭된 요청을 거절치 못하시고는 후학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 현실을 늘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아울러 가람수호와 중생교화에 진력하면서도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굴곡진 근현대사를 이념과 사상에 치우치지 않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매진하였습니다. 1993년부터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부친 박헌영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아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10년 펴낸 시집 <못다 부른 노래>는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수행자로 살아온 삶을 회고하며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기자협회 한민족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으나, 대종사께서는 이 또한 거추장스런 허물이라며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근래 건강을 걱정하는 제자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지 어찌 꺼리랴” 하시던 대종사의 말씀이 세연을 다함을 미리 알고 계신 가르침이었습니다. 지난 12월 6일 누구도 부르지 아니하고 세연을 다하시며 법납 62년, 세수 81세의 삶을 쪽지 한 장 열반송으로 일러주었습니다.

適來時也何尤誰 적래시야하우수
適去順也何忌憚 적거순야하기탄
離席促我末後句 이석촉아말후구
阿汝爲悲獻一花 아여위비헌일화

올 때가 되어 온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랴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지 어찌 꺼리랴
떠나는 자리 나에게 마지막 말을 재촉한다면
그대여 슬프거든 꽃이나 한 송이 올리게나.

[1613호 / 2021년 12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https://isness.tistory.com/m/208

'무엇을 근거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인가?' 한국참선지도자협회 세미나 / 불교수행법 현황 -

三光(삼광) - 精光(정광), 氣光(기광), 神光(신광) - 이 뜬다. 이것이 後光(후광) 또는 光背(광배)이다 신성한 빛과 에너지의 모든 것(오라와 후광 비율) https://m.cafe.naver.com/divinesoulenergy/3169 죽음과..

isness.tistory.com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2. 12. 20:16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1970년대 '여배우 춘추전국' 진도희, 췌장암으로 별세
입력2015.06.27. 오후 1:31  수정2015.06.27. 오후 1:41


지난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영화배우 진도희(본명 김태야)가 지난 26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난 진도희는 여고 시절 문학에 심취, 전국 문학 콩쿠르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그는 중앙대 전신인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후,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편입했으며, 재학 시절 인연을 맺은 국립극단장의 권유로 MBC 공채에 응시, ‘김경아’라는 예명으로 4기 탤런트가 됐다.

1972년 영화 ‘자크를 채워라’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내디딘 진도희는 ‘대추격(1972)’ ‘늑대들(1972)’ ‘체포령(1972)’ ‘일요일에 온 손님들(1973)’ 등 다양한 작품에서 연이은 주연배우를 도맡아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를 발판삼아 진도희는 1974년 ‘제1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여배우상을 받았다.

진도희가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1970년대 초반은 여배우의 춘추전국시대로 불렸다. 1세대 트로이카 ‘남정임·문희·윤정희’와 2세대 트로이카 ‘정윤희·장미희·유지인’ 등이 너나 할 것 없이 연기력을 뽐내던 시절을 뜻한다.

진도희는 한때 자신의 이름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화 ‘젖소부인’으로 유명한 에로 전문 배우 진도희에게 예명을 도용당해 각종 오해에 시달린 적도 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며 입관 예배는 27일 오후 3시로 예정되어 있다. 발인은 오는 29일 오전 8시며, 장지는 서울 승화원이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https://m.blog.naver.com/dragon6666/150090147396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2. 10. 09:07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인도 11세 ‘포르노 중독’ 소년들, 6세 소녀 성폭행 시도 후 살해
입력 2021-10-26 18:52

인도에서 6세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11세 소년 두 명이, 이를 도운 혐의로 8세 소년이 체포됐다. 데일리 메일 홈페이지 캡처

인도에서 11세 소년 두 명이 성행위를 거부한 6세 소녀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데일리 메일은 인도 아삼주에 거주하는 11세 소년들이 6세 소녀에게 포르노에서 본 성행위를 강요하다 거부당했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러 경찰에 체포됐다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가해 소년들은 ‘포르노 중독자’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부모님의 휴대전화로 학교 온라인 수업을 듣다가 성인용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은 지난 18일 자신들이 본 포르노를 따라서 이웃에 사는 6세 소녀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다. 이들은 이웃집 소녀가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겠다”며 극렬히 저항하자 머리를 돌로 때린 뒤 화장실로 데려가 폭행했다. 집 근처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피해자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이내 사망했다.

경찰은 20일 가해 소년 두 명을 체포했다. 또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폭행하는 과정에서 망을 봤던 8세 소년도 함께 붙잡았다.

데일리 메일은 인도에서는 어린이들이 7세 때부터 형사책임을 지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붙잡힌 3명은 조르하트 소년 교정 시설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경찰은 또 가해 소년의 부모가 증거를 조작하고, 자녀가 사건에 연루된 것을 은폐하려 한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은 이번 범행이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모바일 기기를 허용하면서 포르노에 대한 접근이 매우 쉬워져 생긴 결과라고 분석했다.

정신 건강 및 행동 과학 전문가인 사미아 마호트라 박사는 “과도한 포르노 시청은 개인의 강박적인 특징과 행동을 자극할 수 있다”며 “나이에 맞는 세심한 성교육이 위험한 행동을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미진 인턴기자

posted by 有然(유연)


담배도 뉴트로가 대세…KT&G, '88 리턴즈' 출시
김동호 기자 승인 2021.03.25 10:46기사공유하기

【뉴스퀘스트=김동호 기자】 40대 중반이상 흡연자라면 ‘88’담배에 대한 추억이 많다. 88올림픽을 모토로 만들어졌던 ‘88담배’는 당시 최고급 담배로 애연가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KT&G(사장 백복인)는 최근 ‘뉴트로(Newtro)’ 열풍에 발맞춰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88’ 제품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88 리턴즈(88 Returns)’를 오는 29일 전국 편의점에 출시한다.

‘88 리턴즈’는 ‘뉴트로’ 콘셉트를 적용해 ‘88’ 고유의 특성인 담배 본연의 맛을 담은 신제품이다.


‘88 리턴즈’는 ‘88’의 상징인 하늘색을 패키지 색상으로 정했고, 당시 심볼이었던 국보 1호 숭례문을 삽입했다. 또한, 고급감과 편의성을 강화하기 위해 소프트 케이스 대신 ‘하드’ 케이스를 적용했다.

‘88’ 제품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1987년 처음 출시됐다. 특히, ‘88’ 브랜드는 1988년부터 1995년까지 8년 동안 국내 시장에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제품이었다.

브랜드명 ‘88’은 1986년 당시 대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당시 약 10만명이 참가해 화제를 모았으며, 공정한 심사를 거쳐 ‘88’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됐다.

정윤식 KT&G 브랜드실장은 "88 브랜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담배 본연의 맛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88 리턴즈'를 선보이게 됐다"며 "88의 추억을 기억하는 이들과, 현대적인 트렌드를 즐기는 소비자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뉴트로(Newtro)' 제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88 리턴즈’의 타르와 니코틴 함량은 각각 3.0mg, 0.30mg이다.

posted by 有然(유연)

"백신 맞고 1346명 죽었다, 억울해서 촛불 든다"..가족들 눈물
박효주 기자
입력 2021. 12. 08. 08:35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지난 10월 28일 코로나19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 회원들이 백신 피해구제를 요구하는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코로나 19 백신 접종 후 사망했다고 신고된 사례가 지난 7일 기준 1340명으로 집계된 가운데 백신 부작용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이 정부의 인과성 인정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코로나19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이하 코백회)의 김두경 회장은 7일 오후 MBC 라디오 '표창원의 뉴스 하이킥'에 출연해 "백신 접종이 시작된 이후 이달 1일까지 백신 접종 후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는 신고는 950건, 다른 증상으로 신고됐다가 중증으로 악화해서 사망한 건수는 396건"이라며 "이 중 인과성을 인정받은 사례는 단 2건뿐"이라고 지적했다.


백신 접종 후 사망자가 1346명인데 그 중 단 2명만 백신으로 인한 사망이 인정됐다는 것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중증 이상 반응 사례의 경우에도 1200여 건 중 단 5건에 대해서만 백신과의 인과성이 인정됐다. 코백회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자 매주 토요일마다 촛불 집회를 열고 있다.

김 회장은 "우리는 순수하게 백신을 접종한 피해 국민이다.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집에 머무를 수가 없어 어떻게라도 억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이어 "'인과성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는 주치의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의, 지방자치단체 역학 조사관의 소견을 질병 관리청에 접수해도, 질병청은 '다른 요인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며 "심의 결과 내용을 공개해주지도 않고 납득할 만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김 회장을 비롯한 코백회 회원들은 정은경 질병청장과 면담했다. 김 회장은 "정 청장에게 '왜 인과성이 있다는 소견을 무시하느냐'고 했더니 '백신에 대해 아는 의사들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임상시험은 미국, 유럽인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한국형 인과성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 "'K-방역'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방역이라면 접종률 80%라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접종에 따른 피해 보상도 그만큼 이뤄져야 한다는 점과 인과성 인정률이 0%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정 청장은 "발생률, 신고율을 분석 중이고 외국 참고자료를 통해서 한국형 인과성 기준을 마련하려고 준비 중"라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정 청장은 이달 중순 코백회와 또 한 번 간담회를 갖는다.

김 회장은 "지금 부모, 형제, 자매들을 다 잃고 지금 시름에 놓여 있는데 정부는 또 만 12~17세 백신 접종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며 "소아·청소년들은 백신 접종을 충분한 검토한 후에 실시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박효주 기자 app@mt.co.kr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1. 26. 21:45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 佛音堂 梵能 (불음당 범능) 스님 행장


1961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 출생(5남 1녀 중 차남)
1981년 전남 화순읍교회 청년회 활동
1982년 방위 복무중 노래 활동으로 ‘보안대’ 연행, 고초
1983년 문화운동단체 ‘일과놀이’ 소극장에서 풍물 연수
1984년 갈릴리 문화예술단, 기독교문화선교원 활동
1984년 아시아자동차 노동자로 근무
1984년 광주민중문화연구회 주최 ‘광주문화큰잔치’에서 공연
1985년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위해
전남대 예술대학 국악학과 입학(피리 전공)
1985년 <광주출전가>, <혁명광주> 등 첫 자작곡 발표
(전국 최초 5.18 오디오다큐「광주여 오월이여」 수록)
1985년 전남대 노래패 ‘횃소리’ 창단하여 노래운동 본격화
1987년 노래패 ‘친구’ 창단 (전문적인 노래운동단체)
1987년 노래패 ‘친구’ 창립 공연 ‘타는 목마름으로’ 개최
1988년 노래패 ‘친구’ 두번째 공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개최
1989년 전남대 예술대학 국악학과 졸업
1989-1990년 전남 진도로 가셔서 인간문화재 51호인
조공례 선생께 <진도들노래> 등 민요 사사
1990년 광주 ‘우리소리 연구회’ 창단
1990년, 1991년 일본 사가현 주최 ‘아시안 들노래 페스티벌’ 우리소리연구회 대표로 참가

이렇게 노래운동으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왔습니다.
그러시다가 발심 출가하시어

1993년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송원 설정스님(현 수덕사 방장스님)을 은사스님으로 수계하셨습니다.

-순천 송광사 강원에서 수행하셨습니다.

불교음악 발전의 원력을 세우고 천일기도 전국 순례를 시작

-영천 영지사에서 천일기도를 입재하시어
-영주 봉정사, 안성 칠장사, 광주 증심사를 천일기도 순례를
하시고, 강진 백련사 천일기도 회향하셨습니다

-대전 대진정사(현 정수사) 주지 소임을 맡아 도심포교에 앞장 서셨습니다.

1999년 이곳 전남 화순군 북면 옥리에 비닐하우스 법당과
컨테이너 요사채로 불지사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2000년 조립식건물 요사채 불사
2003년 음반발매 음성공양으로 현 위치 임야 구입
2003년 9월부터 음반발매 음성공양으로 법당 불사 시작
2004년 2월 1층 법당 완공, 비닐하우스에서 부처님 이운
2008~2010년 2층 공양간 및 요사채 완공
2011년 3층 법당 완공, 부처님 1층 법당에서 이운
2010~2012 불지사 음악법회 10회 이상 개최 (매회 신곡 발표)
2012년 불교음악의 새 지평을 여는 새 찬불송 기획, 작곡
2013년 5월 30일 새 찬불송 노래 편곡, 녹음, 음반 디자인 완료
2013년 6월 1일 음반작업과 대외활동 과로가 겹쳐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119로 긴급이송, 의식불명,
중환자실 긴급입원 13일째까지 깨어나지 못하시다가
6월 13일 새벽 2시 22분 입적하셨습니다.

<주요 활동>
2002년 미황사 산사음악회 개최(미황사 아랫마을 서정분교 돕기 기금마련) 이후 전국 주요 사찰 산사음악회 공연
2003년 새만금 문화제 환경노래 공연
매년 만연사에서 열리는 소아암 어린이 돕기 공연
불교환경연대 사무실 기금 마련 음악회 개최
‘다문화가정지원센터’ 마련 음악회 광주전법단과 함께 개최
4대강사업 반대 환경음악회 공연
‘4대강 반대 소신공양 문수스님 추모 공연’

2007년 조계사 한국불교역사기념관에서 서울 단독 콘서트 개최
빛고을 아카데미 음악법회 개최
불지사 음악법회, 매회 신곡 발표 (10회 이상)
2013년 5월 '5.18광주민중항쟁 33주년 '즉문즉답- 오월의 꽃 통일로 피어나라‘ 공연
2013년 7월 10일 ‘외국인 근로자 쉼터’ 기금마련 합동공연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출가전 테이프 음반>
광주여 오월이여(1985)
어머니의 손
타는 목마름으로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언젠가 봄날에
이 산하에
봄날의 코스모스

<노래 음반>
1집 "오월의 꽃"
2집 "먼 산"
3집 "삼경에 피는 꽃"
4집 "무소의 뿔처럼"

명상음악1집 "나무아미타불"
명상음악2집 "관세음보살"
명상음악3집 "지장보살"
명상음악4집 "신묘장구 대다라니"
명상음악5집 "옴마니반메훔"
명상음악6집 "나무아미타불2"
명상음악7집 "석가모니불"

환경노래
우리는 하나, 갯벌사랑가, 도요새

<새 찬불송>
1집 "나 없어라"

그토록 공을 들이시고, 불교음악의 새 지평을 열고자 불철주야 준비해오신 새 찬불송 음반 <나 없어라>를 만져보지도 못하시고, 들어보지도 못하시고 안타깝게 범능 스님께서는 입적하셨으니

세수 53세 법랍 20년 이십니다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1. 26. 14:44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민정기 /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2021년 11월 23일) : 광주 피해자들이나 유족에 대해서 사죄하라는 뜻이 없느냐 하는 거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셨고, 광주 청문회 때도 다 말씀하셨고, 여러 차례 그런 말씀 하셨어요.]

전두환이 사죄했다는데, 사실일까?

[백담사로 가기 전 대국민 담화 (1988년 11월 23일) : 저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경으로 피나는 반성과 뼈아픈 뉘우침 속에서….]

"대통령이 된 뒤에 (5·18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던 점을 깊이 후회하면서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 대국민 담화 중 (1988년 11월 23일)

[5공 청문회 (1989년 12월 31일) : 반성과 수도의 길을 걸어온 제가 오늘 이처럼 국회에 나와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언짢은 문제들에 관해 말씀드리게 된 것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5·18)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 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5공 청문회 서면 답변 (1989년 12월 31일)

[수감 전날 골목 성명 (1995년 12월 2일) : 끝으로 12·12를 포함해서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제5공화국의 책임자였던 저에게 물어주시고….]

그런데 그가 사죄했다던 그날 그는 다른 말과 행동도 남겼다.

"나도 인간인데 동네북처럼 두들기지 마라. 노태우가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나를 도청하다니 내가 빨갱이냐!" - 백담사로 떠나며 (1988년 11월 23일)

청문회에선 불성실한 태도와 책임회피 발언에 의원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퇴장 후 다시 돌아오지 않고, 별도의 기자회견만 하더니 국회를 떠났다.

- 5공 청문회 (1989년 12월 31일)

[수감 전날 골목 성명 (1995년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운동 방향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사죄와는 거리가 먼 말과 행동이 이어졌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 KBS 인터뷰 중 (2003년 2월)

[총선 투표 후 취재진 앞에서 (2008년 4월) :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아 놓고.]

[강원도 홍천의 한 골프장 (2019년 11월) : (광주 5·18 학살책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 광주 학살에 대해 나는 모른다. (왜 모르세요? 직접 책임 있으시잖아요.) 내가 왜 직접 책임이 있어?]

그가 사망했다.

그의 길에 놓인 수많은 죽음은 끝까지 외면한 채.

사죄했다던 날 그는 이런 바람을 드러냈다.

[5공 청문회 당시 별도의 기자회견 (1989년 12월 31일) : 저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염치를 아는, 창피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기억되고 싶을 뿐입니다.]

전두환 '와석종신'하다.

(1931년 - 2021년)

※와석종신(臥席終身) : 제명대로 다 살고 편안히 죽다.

제작 / 이상엽[sylee24@ytn.co.kr], 온승원[onsw0211@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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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15. 07:40 오늘의 정보/오늘의 죽음


'향수' 가수 이동원 식도암 별세…전유성이 임종 지켰다
입력2021.11.14. 오전 10:10 수정2021.11.14. 오전 10:47

가수 이동원. [중앙포토]
‘향수’, ‘가을편지’ 등을 불러 1980∼1990년대 사랑받은 가수 이동원이 14일 오전 4시쯤 지병인 식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이날 가요계에 따르면 이동원은 개그맨 전유성이 있는 전북 남원으로 옮겨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전유성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전유성씨가 과거 이동원씨 집에서 함께 산 인연이 있어 이동원씨가 말년에 남원의 전유성씨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말했다.

정지용 시인의 동명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애절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큰 인기를 끌었다.

이동원은 6·25 동란 중이던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북이 고향이다. 이듬해 상경해 서울에서 줄곧 살았다. 1970년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이동원은 1989년 ‘향수’가 수록된 앨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발매했다. ‘향수’가 크게 히트하며 국민가요가 됐다. 정지용 시인의 동명 시에 작곡가 김희갑이 멜로디를 붙인 이 곡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선구적 만남이었다. 대중음악은 고급스런 이미지를 얻었고 클래식은 대중화의 길을 텄다. 이동원은 당시 서울대 음대 교수인 테너 박인수를 찾아가 듀엣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명태’(양명문 시인), ‘물나라 수국’(김성우 시인) 등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즐겨 불렀다.

방송인 정덕희 교수와 가수 조영남 등 이동원의 지인들은 오는 22일 그를 위한 사랑의 음악회를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동국대일산병원 장례식장 15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6일 오전 11시 30분, 장지는 일산 청아공원이다.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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