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2021. 12. 13. 20:54 한국의 스승들/숭산 스님


숭산 스님의 대 예언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87.
2016-02-15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예언자가 충분히 오래 살면 재앙이 닥친다,
  예언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재앙이, 예언자에게
  큰 예언일수록 큰 재앙이 닥친다

- 심지어 20년 후에 대한 예언도 안심할 수 없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예언자가 생각보다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예언한 사람과 그 예언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
  둘 다 충분히 오래 사는 것은 최고의 비극이다.


숭산 스님(1927~2004)은 한국선불교를 해외에 퍼뜨린 위대한 포교사이시다. 미국인 현각 스님과 헝가리인 청안 스님 등 뛰어난 선지식들을 배출하였다.

스님이 1991년에, 현 조계종정인 진제 스님이 부산 해운정사에서 생명의 실상을 주제로 개최한, 33인 큰스님 초청법회에서 한 설법을 소개한다(YouTube ‘숭산큰스님 생명의 실상’ 참조). 이 설법에서 스님은 서기 2000년경이면 민주주의가 망하고 인류가 에이즈에 걸려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스님의 설법을 따라가 보자.

"해운정사에 이 고깃덩어리를 끌고 온 놈이 있다. 어떤 놈이 고깃덩어리를 끌고 와서 말을 듣고 있느냐?
(평: 그놈은 필경 주인공 참나일진대, 그럼 도박꾼의 참나가 도박장으로 도박꾼의 몸을 끌고 가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상을 허망하다고 보는 놈이 여래다. 이 세상을 허망하다고 보는 놈은 허망하지 않다. 바로 이놈이 여러분 몸을 끌고 여기 오셨다. (평: 살인범을 범행현장으로 끌고 가는 것도 그놈인가? 윤회를 하게 하는 것도 그놈인가?)

인간보다 나쁜 동물이 어디 있나? 인간이 제일 나쁜 동물이다.
(평: 그런데 어떻게 축생계가 인간계보다 더 나쁜 곳인가? 6도윤회론에 의하면 인간이 나쁜 짓을 하고 처벌받기 위해 가는 감옥 같은 곳이 축생계 아닌가?)

호랑이 늑대는 동물을 잡아먹어도 병신이나 병든 놈만 잡아먹지 싱싱한 놈은 잡아먹지 않는다.
(평: 새끼를 잡아먹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들은, 동물을 잡아먹어도, 새끼보다 성체를 잡아먹는다. 키워 잡아먹으려는 속셈도 있지만 새 생명에 대한 존중도 있다. 육식동물이 병신이나 병든 놈을 잡아먹는 것은, 건강한 놈은 잽싸게 신나게 질기게 도망가 잡기 어려워 그런 것이지, 포식자가 착해서 그런 게 아니다.)

싱싱한 놈만 잡아먹는 인간은 악질이다.
(평: 병들고 불구가 된 것도 서러운 일인데 잡아먹히기까지 해야 하는가? 인간사회에서도 ‘병자와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기본인데 축생계에서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한 종교인이라면 그리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약자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연민이 종교인들의 마음이 아닌가? 독자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신가?)

어느 종교나 (지금이) 말세라고 한다.
(평: 종교는 항상 말세라고 주장한다. 2,0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영업전략이다. 말세라고 해야 사람들이 겁이나 종교를 믿고 그래야 돈을 바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세가 오기는커녕 거꾸로 세상이 점점 더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이 말세를 안 믿게 되어 종교에서 멀어져가자, 작전을 바꿔 '신이 물질적으로 잘사는 법을 알려주므로 신을 믿자'고 주장하는 게 번영신학이다. (이는 '가난을 찬미하고 부를 경멸하던' 청교도 신앙과 정반대 방향의 길이다.) 이것은 일종의 주객전도 현상이다. 자기가 망할 거라 한 사람들이 오히려 잘사는 걸 보더니, '잘살게 해주겠으니 나를 따르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스스로 힘(과학기술)으로 이미 잘살게 되었는데 왜 이제 와서 남(종교)의 힘에 의지해야 할까? 기독교건 불교건, 종교인들의 말세론적 설교는 코미디이다. 코미디 중의 코미디이다. 착하게 살자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 근거로 드는 말들은 많은 경우 무지의 소산이다.)

복숭아가 익으면 며칠 못 가, 열흘 보름이 못 가 땅에 떨어져 썩는다. 작년(1990년)에 공산주의가 없어지고 모두 민주주의로 바뀌었는데 정치가·경제가·사상가들 말에 의하면 이게 10년이 못 간다고 한다.
(평: 민주주의가 2000년까지 못 간다는 말이다. 당시 Y2K 광풍을 연상시킨다. 서기 2,000년 전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음산하게 광적으로 외치던 다미선교회 등의 사이비종교들도 있었다. 세기말에는 사람들이 광분을 한다. 연도는 인간이 임의로 만든, 즉 기독교 교주 예수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만든, 지극히 인위적인 햇수에 불과한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1,000년 단위로 마치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소란을 떤다. 자기 똥을 보고 ‘이게 웬 똥이야’ 하고 놀라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이 부분은 스님이 다른 이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구태여 인용한 것은 이 말을 믿는다는 뜻일 것이다. 스님이 뒤에서 어차피 2000년경에 인류가 사라질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사라지면 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게 사라질 것이 아닌가?)

익은 복숭아가 땅에 떨어져 썩듯이 인류사회가 부패되어 고통이 오기 시작한다. 에이즈에 걸리면 고치지 못한다.
(평: 에이즈는 칵테일 요법을 쓰면 병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 암이 오히려 더 치명적이다. 종교인들의 주장처럼 세상은 더 악해지고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은 점점 더 선해지고 더 살기 좋아진다. 현대 한국인들 중 몇 사람이나 조선시대로 돌아가 살고 싶을까? 돌아가면 90% 이상이 피지배계층이 되고 많게는 70% 이상이 종이 된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을까? 조선시대, 고려시대, 신라시대, 고조선시대, 크로마뇽인 시대로? 정말로? 도대체 이런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은 진실로 불가사의하며, 깨달은 사람들은 더 불가사의하다.)

미국인의 60%가 이 병을 앓고 있다.
(평: 2억 명의 미국인 에이즈 환자라니,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직 발병하지 않은 보균자까지 쳐도 백만 명 정도로서, 0.5%도 되지 않는다. 혹세무민하고 있다.)

남녀 관계가 문란한 나라는 60~70%가 에이즈에 걸려 몸뚱이가 썩어가고 있다.
(평: 이것은 숭산 스님이, 자신이 이 설법하던 1991년 당시가 말세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든 근거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에이즈는 잠복기간이 10년이므로 앞으로 10년 후면 인류가 다 없어질 때가 되었다.
(평: 중세유럽은 에이즈보다 더한 흑사병으로 인구의 1/3이나 몰살당했지만, 유럽인들은 멸종되기는커녕 승승장구하여 인구도 늘고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종교인들은 세상이 험악해질수록 신이 난다. 드디어 내말이 맞았다고 즉 말세가 왔다고 신이 난다. 하지만 종교인들 말대로 정말 말세가 왔다면, 아마 지금까지 적어도 수천 번은 말세가 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떤 나라가 살 것이냐? 한국같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덕적인 나라만 살아남는다.
(평: 도대체 효도와 에이즈가 뭔 관계가 있는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과 인도양 모리셔스 섬의 코끼리새와 도도새는 인간이 들어오면서 멸종당했는데, 그 이유가 이 새들이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안 하는 등 부도덕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가? 동방예의지국 조선이 성이 문란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조선이 부도덕한 나라였기 때문인가? 문화대국 송나라가 살육과 근친혼을 즐기는 야만적인 몽고에게 멸망당한 것도 송이 부도덕한 나라였기 때문인가? 정말인가?)

한국 선불교가 불교골수다. 일본 선불교는 대처불교가 되었다. 서양인들도 나를 찾기 위해 공부한다. 복숭아가 썩어야 씨가 결실을 하듯이, 세상이 다 썩을 때 한국불교가 결실을 한다. 몸뚱이는 병 사고로 죽을 수 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을 찾으면 심즉불(心卽佛 마음이 부처)이다.
(평: 진제 스님의 설법처럼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 참나를 찾으라'는 말이다. 전형적인 유아론이다. 숭산 스님과 진제 스님은 유아론적 참나론에 있어서 완벽하게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석두 스님이 15살부터 35살까지 머슴을 살아 받은 돈을 들고 금강산 마하연에 갔는데 거기서 참선하는 스님들을 보았다. 자기도 열심히 수행을 해서 화두를 타파해 큰스님이 되었다. (평: 그런데 이 석두 스님과 법명이 비슷한 석두보택 스님이 젊어서 화두를 타파했지만 말년에 보살과 관계를 했다. 파계했다고 대중으로부터 냉대를 받는 은사 석두 스님을 상좌인 효봉 스님이 남쪽 송광사로 모셔 극진히 보살폈다. 화두를 타파하고도 파계를 했다면, 그 화두타파는 뭘 타파한 것일까? 계율과 도덕을 타파(打破 두들겨 부숨)한 것일까? ‘숭산 스님이 인류의 멸망원인으로 든’ 부도덕한 삶을 살기 위해 도덕적인 삶을 타파한 것일까? 깨달은 이는 면죄부를 받은 것일까? 누구로부터?)"

이상이 숭산 스님의 설법이다. '서기 2000년이 되기 전에 민주주의가 망할 것이고, 1991년 현재 미국 등 남녀관계가 문란한 나라 사람들의 60~70%가 에이즈에 걸려있으며 잠복기간이 끝나는 2000년경에 인류가 다 없어질 것'이라는 숭산 스님의 주장은 도가 지나쳤다. 너무 지나쳤다. 망상이다. 대(大)망상이다. 범인(凡人)도 이런 말을 하면 문제인데,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大)선사가 이런 망상을 참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을 하다니, 한국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깨달았다는 분이 대망상을 한다면 과연 그분이 깨달은 분일까? 아니면 깨달음은 망상을 부분적으로만 제거할 뿐이어서, 깨달은 분에게도 여전히 망상이 남아있는 것일까? 숭산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당시는 에이즈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므로, 숭산 스님의 '에이즈 말세론(에이즈로 인한 인류멸종론)'은 필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망상이 생긴다는 말인가?
숭산 스님은, ‘2000년경이면 민주주의가 망하고 인류가 에이즈에 걸려 다 없어질 것'이라고 1991년에 주장했지만 그로부터 9년 후인 2000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입적하신 2004년 말까지도 5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기미(幾微)도 없었다. 과연 스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깨달은 사람은 망상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면 망상을 하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것일까? 깨달은 사람은 8정도(그중에서도 특히 정어正語와 정사유正思惟)를 어겨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면 8정도를 어기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것일까? 부처님은 브라만을 결정하는 것은 태생이 아니라 행(行)이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은 오도송(悟道頌)과 인가(認可)가 아니라 수행자의 행(行)일 것이다. (이 글은 결코 숭산 스님의 위대한 업적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깨달음(究竟覺)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숭산 스님의 업적은 그가 깨달았건 못 깨달았건 변함없다. 오히려 깨닫지 못했을 때 더 커진다고도 할 수 있다. 같은 공이라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역경 속에서 이룬 공이 더 값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남을 비난할 수는 없다. 불완전한 가운데 불완전함을 개선하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성취를 많이 이룬 분일수록 더 많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 인간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 면에서 숭산 스님은 위대한 분이다.)

‘과학자도 틀린 예측을 하지 않느냐’고 항변을 한다면 할 말이 있다. 과학자들은 자기 말이 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증거와 더 설득력 있는 이론이 나오면 자기 이론을 포기한다. 평생을 투자한 수십 년 된 이론일지라도 포기한다. 과학이 발전하는 비결이다. 이에 비해 종교인들은 자기들 교주는 완벽한 존재이고, 자기들 경전은 불변의 진리이며, 자기들이 명상과 기도 중에 보고 경험한 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믿기에 아무리 새로운 증거가 나와도 마이동풍이다. 특히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과 신과 사적으로 은밀히 대화한다는 사람들이 더욱 심각한 증세를 보인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점점 더 기괴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변하고(특히 타종교 종교인들의 눈에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로, 갈수록 심해지는 구세대의 환망공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세대일수록 종교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무지몽매하던 시절에 종교를 흥하게 했던 종교적 환망공상이 이제 개명천지 현대에 종교를 망하게 하고 있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2. 13. 19:27 한국의 스승들/숭산 스님



출가


숭산스님

숭산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총독의 압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은 극심하게 탄압 받고 있었습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
'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 라고 햇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셋째 날에 숭산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스님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결국 스님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선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득도


고봉선사에게 받은 전법게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 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였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숭산행원 대선사 약력

1927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출생
1940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공립학교 졸업
1945
평양시 평안공업고등학교 졸업
1946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47
마곡사 출가 득도
1949
고봉 선사로부터 수계 건당(1.25),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 수지(3.1)
1950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래 11안거 성만(4.15)
1951
마곡사에서 대교과 수료(9.2)
1952
육군 입대(12.3)
1957
육군 중위로 전역(7.20)
1958
화계사 주지로 취임(3.15)
효봉ㆍ동산ㆍ청담ㆍ경산 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 추진
대한불교 조계종 종의회 구성, 종회의원 피선
1960
대한불교 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5.3)
1961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취임(6.5)
군승(軍僧)제도 시행으로 젊은 층 신자 흡수, 신불교 포교시대 전개
1962
대한불교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피선
비구ㆍ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 피선.
승려의 기강 확립을 위한 감찰제도 설립, 초대 감찰부장 취임.
예비역 군 출신, 법조인으로 구성된 불교 지식인 단체 '달마회'조직
동국대학교 동국학원 재단상무이사 피선
대한불교 조계종 재무부장 취임
1964
한국 불교 최초로 승려 대학 교육 실시, 종비생 제도 실시
불교과, 인도철학과 포함 도제 양성, 역경, 포교 종단 3대 사업 확장
1966
일본 흥법원 개설, 초대원장 취임.(한ㆍ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에 한국 사찰 건립)
한ㆍ일 불교 유학생 교류와 문화 교류를 일본 정부와 협의, 민간 외교에 지대한 공헌
군에 불교ㆍ기독교ㆍ천주교 3대 종교의 동등한 헌법상의 종교 활동 자유 보장을 정부에 건의, 국회 국방의원회에서 심의 결정.(군법사 제도 확립)
1969
홍콩 홍법원 개설, 원장 취임
1972
미국 홍법원 개설, 원장 취임
1974
캐나다 토론토 선원 개설
1978
폴란드 바르샤바 홍법원 개설, 8개 선원 개설, 원장 취임
1980
영국 런던 선원 개설
1981
스페인 팔마 선원 개설
1982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서 재미 홍법원 개설 10주년 기념 "세계 평화 종교 지도자 대회" 개최
1983
브라질 상파울로 선원 개설
1985
프랑스 파리 선원 개설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에서 세계평화상 수상(5.13)
중국 북경 불교회 초청, 여러 고승들과의 법거량 통해 한국 선불교 위상 떨침
1986
구소련 정신문화협회 초청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문화적ㆍ정신적 지도자들의 역사적 회합' 에 참가, 구소련 포교 여행
1987
수덕사 '제1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88
폴란드 한국 선불교 포교 10주년 기념 행사 개최
1989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한국 선지식으로 최초로 포교 활동
1990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생존과 환경을 위한 국제대회' 에 종교분과위원으로 초청강연(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영접 받음)
대만에서 한국 선을 지도하고 포교
서울 화계사에서 국제선원 신축을 위한 불사 시작
수덕사에서 '제2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92
중국 본토 육조 혜능 대사 남화사에서 승려와 일반인을 위한 참선 지도
홍콩 국제선원 개설
재미 홍법원 개설 20주년 기념 대회 개최
1993
싱가폴 국제선원 개설, 수덕사에서 '제3차 세계일화대회' 개최
1994
한국인 선지식으로는 최초로 베트남 방문(베트남 지도자급 승려들과 법거량)
1995
스리랑카, 미얀마 성지 순례 및 한국 선불교 포교 활동
1996
대한불교 조계종으로부터 '해외 포교 30주년' 감사패 전달받음(6.20)
2000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1년에 3~4번씩 미국, 홍콩, 말레이지아, 유럽 등지의 해외 선원에 포교 여행차 순방
화계사 조실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스님 (1997.3.10~2004.11월 기간7년)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스님 (2001.10.8~2003.10.8 기간2년)
2004년 11월 30일(음력 10월 18일) 열반

https://isness.tistory.com/m/208

'무엇을 근거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인가?' 한국참선지도자협회 세미나 / 불교수행법 현황 -

三光(삼광) - 精光(정광), 氣光(기광), 神光(신광) - 이 뜬다. 이것이 後光(후광) 또는 光背(광배)이다 신성한 빛과 에너지의 모든 것(오라와 후광 비율) https://m.cafe.naver.com/divinesoulenergy/3169 죽음과..

isness.tistory.com

'한국의 스승들 > 숭산 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숭산 스님의 대예언 - 강병균 교수  (0) 2021.12.13
posted by 有然(유연)


만현스님의 소립자 명상 (분자에서 엑기스광까지)
<자재 만현스님> 2006/06/15 01:29
 
▲ 설법하시는 만현스님


소립자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이루고 있는 물성(物性)을 지닌 최소입자를 분자라 하고, 분자는 서로 다른 원소가 모인 것이며 원소는 동일한 원자들의 집합이라 합니다.
 
또한 원자는 소립자(핵자, 전자 등)의 모임이요,소립자는 '쿼크'의 모임인데, 이 쿼크라는 초미립자는 쇠붙이도 통과합니다. 불교 구사학(俱舍學)에서의 '수진' '금진'이라는 입자가 물리학에서의 쿼크라는 초미립자에 해당합니다.
 
철학에서는 아원자(亞原子) 소립자부터 형이상(形而上)이라 하지만 나는(만현 큰스님) 진정한 형이상은 모든 물질을 생성하는 지수화풍을 생성하는 공대(空大)부터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불교의 반야계통에서 공이라함은 물리적인 공간, 곧 장(場)이 아니라 사실은 오온(색.수.상.행.식)이전으로 봐야 합니다.
 
아래 하늘 천상계는 초미립자 쿼크를 이루고 있는 '코스몬'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위하늘 천상계는 최종 기본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윤회를 벗어난 성중하늘(성자, 아라한이 나는 세계)은 공이라는 입자(?)의 장입니다.
 
미륵보살佛이 교화하시는 도솔정토나, 서방극락 정토는 공(空)에서도 백천만리 떨어져 들어간 묘유의 세계입니다. 물리학에서의 '코스몬','서브쿼크'의 극미립자는 불교에서 '마진','극미진' 수준이며, 최종 기본입자는 '인허진(隣虛塵)'이라고 보면 됩니다.
 
공.진여는 최종 기본입자, 곧 물질을 생성하는 능력과 진여식(10식)의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부터는 만유(萬有)의 근본이라서 물질이 아닌 빛입니다. 그래서 소위 무루 대아라한 이상의 보살 수준으로 들어가면 자기 몸에서 10억 와트(watt)의 빛도 필요하다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동서양의 철학은 이미 인간의 내부에 신의 속성, 곧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밝혔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붓다까지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봅니다.
 
그러나 진여자성을 깨치고, 그걸 증득했다 해서 붓다는 아닙니다. 나는 수 차례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붓다는 자기의 불신을 가져야 붓다입니다.
붓다는 자성관이 아닌 무량광 억종광이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자성광의 본원(本源) 엑기스광으로 그 몸뚱이가 이뤄져 있습니다.
 
이는 이미 상(相)이 아니요, 적멸상입니다.
붓다의 빛은 이미 빛이 아닙니다.
붓다의 음성은 이미 음성이 아닙니다.
미묘음입니다.


posted by 有然(유연)


"수행은 필요 없고, 경전공부만 해도 성불" <자현스님>
 
화엄종의 3조 현수법장 스님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 교상즉관법(敎相卽觀法), 신만성불론(信滿成佛論)
 
<1>교상즉관법(敎相卽觀法)
화엄종은 따로 수행이 필요 없고, 화엄사상의 논리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면
그것이 곧 수행이라고 함
경전공부를 따로, 수행을 따로 하고가 아니라, 경전공부가 어느 정도
투철하게 되면 그것이 곧 수행.
그 원리를 철저하게 이해하면 다시는 미혹하지 않아,
따로 수행 필요 없어, 공부 자체가 수행
인도불교식으로 말하면 성문승(聲聞僧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들어서
그 원리를 이해하면 깨달음)
 
예) 곱하기 나누기가 처음엔 어렵지만 반복학습으로 그 원리가 확실하게 이해되면 죽을 때까지 가져간다.
"이러한 사상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됨". 공부로 어떤 개념이 딱 서면 결코 흔들리지 않아,
영화, 연극, 수학.. 어떤 분야든 그 원리를 딱 터득하면 그것에 관한한 절대로 미혹되지 않아
 
화엄종은 천태종의 영향을 받았고, 화엄종은 다시 선종에 영향을 주었는데,
선종의 공격에 대한 반론
 
"말로만 갖고는 안된다" -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
"진리는 언어를 초월해 있고.." -
초월해 있다는 그 말 자체도 이미 언어다, 무슨 헛소리!
"진리는 생각할 수 없고.." -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생각. 정말 생각할 수 없으면 그런 말도 할 수 없어
"알기는 아는데 이것은 어떻게 언설로 설명할 수 없는 것" -
그건 불완전하게 알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 알면 전문용어로만 유창,
그러나 분명하게 이해한 사람은 상대방 수준에 맞는 대기설법이 가능)
 
그런데 그 원리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이해를 못 해도 믿음만 확고하면 그 자체로 성불 -
<2>신만성불론(信滿成佛論)
 
사실 극락도 믿음으로 가는 것이고,
화엄경 현수품에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믿음은 도(道)의 근원(으뜸)이며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도 믿음을 강조하는 말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면 그 자체로 성불)
이러한 개념은 성기설(性起說) 때문에 가능 -
이미 우리는 완성된 존재. 이것을 믿기만 하면 성불
(불교에서 대표적 믿음은 극락신앙,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 그 서원에 편승하기 위해서 믿는 것인데
화엄종에서 말하는 믿음은 '나는 본래 붓다'라는 믿음)
 
- 이렇게 투트랙으로 가는데 유가 법상종에서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보다
공부로 된다는 부분이 더 강력해서 신만성불론(信滿成佛論)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 말씀을 비방하다가 지옥 갔다는 순경나락가설이 생겨남)
 
- 이러한 사상은 나중에 돈오(頓悟)로 넘어가는 중요 분기점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알면 돈오, 안 되면 일단 믿음부터 갖으면 됨.

posted by 有然(유연)

posted by 有然(유연)

https://youtu.be/yWw59lwXbr8


부처님과 보살  총정리 - 자현스님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1. 27. 13:34 한국의 스승들/자현 스님


‘융합 학문’으로 중생들에게 다가가는 불교문화 전령사
이규대 기자 ()
승인 2012.07.29 22:41

자현 스님은 월정사 교무국장, 부산포교원 원장 등 조계종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승려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는 스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학자이다. 젊은 나이임에도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반 대중이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문화 전령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스님의 배움은 10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스님은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가슴속에 떠오르는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동양의 고전을 찾았다.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어떤 목적의식도 없었다. 당시 스님에게는 앎 자체가 삶의 유희이자 목적이었다. 그 결과 20대 초반에는 <대장경>을 비롯한 주요 불교 경전, 유가 및 도가 등을 포함한 제자백가의 고전들을 대부분 독파할 수 있었다.

스님은 남다른 독서 경험을 통해 탄탄한 지적 근육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후의 학문적 탐구에 주춧돌이 되었다. 동국대, 성균관대, 고려대 등을 오가며 철학, 동양철학, 불교학, 미술사학 등을 다채롭게 공부했다. 학제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융합 학문 시대를 일찍부터 살아온 셈이다. 지금까지 70여 편의 논문 및 10여 권의 저서를 내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스님은 불교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설명하려는 노력도 한다. 종교의 역할에 대한 성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스님은 “절을 찾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자책감이 들었다.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현대인들이 의지할 만한 곳이 종교가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불교문화에 주목했다. 종교가 일반 대중의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면, 바로 문화가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대중적인 책을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발간된 저서 <사찰의 상징 세계>는 이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절은 왜 산에 많은지, 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를 모시는지 등 일반 대중들이 사찰에 대해 궁금할 법한 질문 100개를 선정해 대답하는 형식을 취했다. 자현 스님은 “불교문화를 종교적 시각만으로 보아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유교나 도가, 무속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한국 문화의 복합체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posted by 有然(유연)
2021. 11. 27. 13:26 한국의 스승들/자현 스님

자현 스님

동국대경주캠퍼스 철학전공 졸업

자현 스님은 중앙승가대 교수이자 불교 역사와 문화를 다양한 책으로 전하며 불교 대중화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불교계는 물론 국내 최다 박사학위의 명예를 보유한 스님이시기도 합니다!
자현 스님은 우리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율장)와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건축),
고려대학교 철학과(선불교)와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한국고대사),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교육학) 등 다섯 곳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스님은 ‘논문의 신’ ‘논문 제조기’로 불립니다.
인문학자 가운데 1년에 가장 많이 학술진흥재단 등재 논문을 쓰셨습니다.
그동안 학술지에 등재한 논문만 160편, 그리고 저술한 책도 50여 권입니다.
스님이 쓴 50여 권의 책 중『불교미술사상사론』은 2012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사찰의 상징세계(상·하)』는 2012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붓다순례』(2014년)와 『스님의 비밀』(2016년), 『불화의 비밀』(2017년),
『스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2019년)은 각각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또 『백곡 처능, 조선불교 철폐에 맞서다』는 2019년 불교출판문화상 붓다북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제7회 영축문화대상(2019)과 제1회 한암상(2020)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에서 교수와 불교학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며,
월정사 교무국장과 조계종 교육아사리 그리고 《불교신문》 논설위원과
한국불교학회 법인이사 및 문수청소년회 법인이사와 상하이 푸단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맡고 계십니다.

자현 스님은 메일 인터뷰를 통해 “4차 산업과 5G 시대의 개막에 맞춰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력과 독창적인 콘텐츠이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미학적 판단, 그것이 동양의 정신문화 속에 온축되어 있다.”라고 전하셨습니다.

또한, 후배 동국인들에게 “미래는 기술과 기능의 시대가 아니라 감각과 미학의 시대임을 자각해서, 멋지고 드높은 비상을 이루시길 부처님께 기원드립니다.” 라고 격려하셨습니다.

학생홍보대사 동행 13기, 김소영 (영어영문학전공)

posted by 有然(유연)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