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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然(유연)
God-Realization 신-깨달음의 영적 여정....... 삶의 목적은 우주적인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지복, 파워, 지식 (전지, 전능, 지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아바타 메허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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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묻기를 ‘즉심시불(卽心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인데, 어찌하여 다시
아미타불을 염불하여 보려고 노력하는가?
라고 질문을 하기에
 
성암대사가 답하기를 ‘즉심시불이란 말은
얼음을 가리켜 물이라 하는 말과 같다.
 
즉, 얼음이 비록 물이기는 하나,
물이 얼어붙었으므로 태양의 열을 빌려서야
비로소 녹아 풀어져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불(佛)이기는 하나
전체가 어지럽고,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부처의 힘을 빌려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어찌 사리에 어두운 마음만을 고집하고
부처님을 뵈옵기를 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 묻기를 「즉심정토(卽心淨土」라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가?
라고 질문하기에 답하기를

‘즉심정토라 함은 나무를 가리켜서 기둥이라
함과 같다.
 
즉 나무가 기둥이 될 수는 있거니와 나무
그대로가 기둥이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비록 정토를 지을 수는 있으나
마음 그대로가 정토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24시간 내내 모든 경계에 대하여
한 털끝만치라도 잡념, 더러운 마음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마음이 공(空)하지 못한 것이거늘
어떻게 즉심정토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스스로 속는 것이다.
만일 정토에 왕생하지 아니하면 유심정토가
끝끝내 드러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연중집요 중에서

posted by 有然(유연)


성암 대사(省巖大師)
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
고항(古杭) 범천사(梵天寺) 사문 실현(實賢)

진정 보리심을 냅시다 !

불초(不肖)하고 어리석으며 낮고 평범한 중 실현(實賢: 진실로 현명하다는 뜻의 법명)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마를 조아려 눈앞의 대중과 현세의 모든 정신남(淨信男: 淸信男·우바새)·정신녀(淨信女: 淸信女·우바이)들께 구슬피 말씀드립니다. 오직 자비로이 조금만 귀 기울여 듣고 살펴 주시길 원합니다.

일찍이 듣잡건대, 도(道: 진리)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은 마음을 내는 것[發心]이 으뜸이고, 수행에 시급한 일은 서원을 세우는 것[立願]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서원이 서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며, 마음이 나면 부처님의 도[佛道]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커다란 마음을 내지 않고 견고한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설령 우주의 모든 티끌 수만큼의 겁(劫)이 지나더라도 여전히 생사 륜회를 헤매며, 비록 제 아무리 수행에 정진할지라도 결국 보람 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보리심(菩提心)63)을 잊거나 잃어버리면,
온갖 착한 법[善法]을 닦아도 악마의 업[魔業]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보리심: 보리(菩提)는 도(道) 또는 깨달음[覺]으로 번역되는데, 진실한 도를 구하는 마음 또는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구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다.]

잊거나 잃어버려도 오히려 그와 같거늘, 하물며 보리심을 아예 내지도 않은 경우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여래승(如來乘: 佛乘)64)을 배우려면, 반드시 먼저 보살의 서원을 지체 없이 발해야 합니다.

[여래승(如來乘): 보통 불승(佛乘)이라 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화엄경』에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도를 설한 교법(敎法)으로, 유일한 성불의 법이기에 유일승(唯一乘)이라고도 한다. 또 삼승(三乘) 가운데, 보살승을 성문승 및 연각(벽지불)승에 대해 불승으로 일컫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과 서원은 서로 차별이 있고, 그 모습이 다양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가리켜 알려 주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로 향하여 나아가겠습니까? 이제 대중들을 위해 대략 말씀드릴까 합니다.

마음과 서원의 모습에는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삿되고[邪] 올바른[正] 것, 진실하고[眞] 거짓된[僞] 것, 크고[大] 작은[小] 것, 편협하고[偏] 원만한[圓] 것이 그것입니다. 삿되고 올바르며, 진실하고 거짓되며, 크고 작으며, 편협하고 원만하다는 명칭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自心]은 참구하지 않고 단지 바깥 일에만 정신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러는 이익이나 공양 얻기만 구하고, 더러는 명성이나 평판을 좋아하며, 더러는 현세의 욕망과 쾌락에 탐착하고, 더러는 미래(세)의 좋은 과보(果報)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면 삿된 발심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이익이나 공양이나 명성이나 평판을 전혀 구하지 않고, 또 현세의 욕망·쾌락이나 미래의 과보에도 탐착하지 않으며, 오직 생사(生死) 해탈을 위해서, 보리(菩提: 道·깨달음)를 위해서 마음을 내어야, 올바른 발심이 됩니다.

생각생각마다 위로 불도(佛道)를 추구하고, 마음마음마다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불도(부처님 길)가 멀고 험한 줄 듣고도 겁내어 물러서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기가 정말 힘든 줄 보고서도 싫증이나 짜증을 내지 않으며, 마치 만 길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반드시 정상을 밟고야 말고, 구 층 가파른 탑을 오르는 것처럼 기필코 꼭대기에 올라서겠다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진실한 발심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죄악이 있어도 참회할 줄 모르고, 허물이 있어도 제거하지 않으며, 속으로는 혼탁하면서도 겉으로는 청정한 척하고, 처음에는 부지런 떨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지며, 설사 좋은 마음을 품더라도 대부분 명예나 이익을 꾀하는 불순한 생각에 뒤섞이고, 비록 선량한 법이 있더라도 흔히 죄악과 업장에 오염되기 일쑤인 사람이 많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면 거짓 발심이라고 합니다.

중생계(衆生界)가 다해야 바야흐로 내 서원이 다하고, 보리도(菩提道)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내 서원이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마음을 내어야 정말 큰 발심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견고한 감옥과 같은 줄 알고, 생사 륜회를 악독스런 원수처럼 여기면서, 단지 자기만 해탈하길 꾀하고 남을 제도하려고 하지 않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면 작은 발심이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 밖에 따로 중생과 불도가 있는 걸로 보고, 그 중생을 제도하고 그 불도를 이루려고 발원하면서, 그 공덕을 잊지 못하고 알음알이 지견(知見)이 스러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발심은 편협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만약 자기 성품[自性]이 중생인 줄 알고 제도·해탈시키길 발원하며, 또 그 자기 성품이 바로 불도인 줄로 알아 성취하길 발원하면서, 어떠한 한 법도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있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허공 같은 마음으로 허공 같은 서원을 발하고 허공 같은 수행을 행하여 허공 같은 과보를 증득(證得)하면서도, 또한 허공이라는 모습조차 얻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이와 같은 발심이 바로 원만한 것입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 차별을 알아야 잘 살펴볼[審察] 줄 아는 것이고, 잘 살펴볼 줄 알아야 제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 제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음을 낼[發心] 수 있습니다.

잘 살펴본다[審察] 함은, 내가 내는 마음이 이상의 여덟 가지 가운데, 삿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진실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편협한 것인지 원만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또 취사선택이라 함은, 삿되고 거짓되고 작고 편협한 마음을 내버리고, 올바르고 진실되고 크고 원만한 마음을 내세우는 걸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만, 비로소 진정(眞正) 보리심을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보리심은 모든 선(善) 중의 왕인지라, 반드시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바야흐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인연을 대략 열 가지로 추려 볼까 합니다. 어떻게 열 가지가 되는가 하면,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스승과 웃어른[師長]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시주(施主)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중생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이고, 여섯째는 생사 륜회의 고통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자기의 영혼[己靈]을 존중하기 때문이고, 여덟째는 죄악 업장을 참회하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구하기 때문이고, 열째는 정법(正法)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있길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우리 석가모니여래께서 맨 처음 보리심을 내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보살도를 행하면서 무량겁에 걸쳐 온갖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업을 지을 때, 부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슬퍼하며 온갖 방편으로 교화하셨건만, 우리가 멍청하고 어리석어 그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일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면, 부처님께서는 더욱 비통(悲痛)한 마음으로 우리의 고통을 대신 받고자 하셨으나, 우리의 죄업이 하도 크고 무거워 도대체 건져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인간 세상[人道]에 태어나자, 부처님께서는 방편 법문으로 우리에게 착한 뿌리[善根]를 심도록 이끄시면서, 세세생생에 걸쳐 우리 곁을 따라다니며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세상에 나셨을 때는, 우리가 아직 악도(惡道)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친견할 수 없었고, 이제 우리가 다행히 인간 몸을 받고 태어나자 부처님께서는 이미 녈반에 드시어 또 친견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죄악으로 말법(末法)시대에 태어나고, 그나마 무슨 복덕으로 출가 수행자[부처님 정법을 듣고서 믿는 불자]가 되었겠습니까? 또 무슨 업장으로 부처님의 황금 신체[金身]를 친견하지 못하고, 그나마 무슨 행운으로 부처님 사리(舍利)나마 몸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유해 본다면, 가령 우리가 당초 착한 뿌리를 전혀 심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부처님 법을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우리가 항상 부처님 은혜를 받고 있는 줄 알기나 하겠습니까? 이러한 은혜와 공덕은 태산으로도 비유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스스로 커다란 마음을 내고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님 법을 우뚝 세우고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면, 설사 몸을 부수고 뼈를 빻을지라도, 그 은혜와 공덕을 어떻게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첫 번째 인연입니다.

둘째 ,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애처롭고 구슬프신 부모님께서 우리를 낳아 기르신 노고가 어찌 한량 있겠습니까? 열 달을 임신하고 삼 년을 젖 먹이시며, 젖은 자리 걷어 내고 마른 옷을 갈아 입히며, 쓴 것은 당신께서 삼키시고 단 것을 뱉어 우리 입에 넣어 주시어, 가까스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기대한 유일한 희망은, 집안의 대를 잘 이어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어 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미 출가하여, 외람되이 석자(釋子: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라고 일컬으면서 사문(沙門)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공양 올리지도 못하고, 제사와 성묘도 하지 못합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는 입(음식)과 옥체(의복)도 봉양할 수 없는데, 돌아가신 뒤에 정신 영혼[神靈]마저 좋은 데로 인도할 수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세간의 윤리를 크게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출세간(출가)의 도덕에도 전혀 실질 이익이 없게 될 터이니, 두 길 모두 잃고 맙니다. 그 무거운 죄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유해 본다면, 오직 백겁(百劫) 천생(千生) 동안 항상 부처님 도를 수행하며, 시방 삼세의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금생 한 번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과거 모든 전생의 부모님들이 다 함께 제도 받을 수 있으며, 또 단지 나 한 사람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부모님들이 죄다 좋은 곳에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두 번째 인연입니다.

셋째, 스승과 웃어른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부모님께서 비록 우리 몸을 낳아 길러 주셨지만, 만약 세간의 스승과 웃어른이 안 계셨더라면 예의(禮義)를 몰랐을 것이며, 출세간의 스승과 웃어른이 아니었다면 부처님 법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의를 모르면 짐승과 같게 되며, 부처님 법을 알지 못하면 세속 사람들과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거칠게나마 예의를 알고, 간략하게나마 부처님 법을 이해하여, 가사(袈裟)를 몸에 걸치고 계품(戒品)을 받아 지녔습니다. 이러한 크나큰 은혜는 모두 스승과 웃어른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만약 조그만 과위(果位)를 추구한다면, 단지 자신만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승(大乘)을 지향하여 모든 사람들을 두루 이롭게 하려고 발원하면, 세간과 출세간의 두 종류 스승과 웃어른들이 다 함께 그 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세 번째 인연입니다.

넷째, 시주(施主)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매일같이 쓰는 온갖 물자와 비용은 하나도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아침 점심 두 끼니의 죽과 밥은 말할 것도 없고, 사계절의 의복이나 질병에 필요한 의약이나 몸과 입에 들어가는 것 등, 이 모두가 남들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을 우리가 얻어다 쓰고 있습니다. 저들은 뼈빠지게 힘을 다해 농사 짓고도 오히려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데, 우리는 편안히 앉아서 받아 먹고 있으면서 도리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립니다. 저들은 쉴새없이 베를 짜면서도 오히려 옷을 제대로 못 입어 헐벗기 일쑤인데, 우리는 넉넉히 남아돌 만큼 따뜻하게 입으면서 도리어 아낄 줄도 모릅니다. 저들은 사립문에 초가지붕 밑에서 한평생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널찍한 방사(房舍)에서 일년 내내 한가롭고 여유롭게 지냅니다.

저들의 수고로움으로 우리의 안락함이 얻어지는데,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남들의 이익을 가져다가 우리 몸을 윤택하게 공양하니, 리치에 순조롭겠습니까? 스스로 자비와 지혜를 함께 나란히 운용하고 복덕과 지혜를 장엄하게 갖추지는 못하고서, 단지 시주의 신심 있는 은혜를 입고 중생들의 공양을 받기만 한다면, 쌀 한 톨이나 실 한 올도 모두 되돌려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마니, 죄악의 과보를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네 번째 인연입니다.

다섯째, 중생의 은혜를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나와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세부터 대대로 매 생애마다 서로 부모 자식이 되어 왔기에, 피차간에 은정(恩情)이 두텁습니다. 지금은 비록 전생(前生)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혼미를 거듭하기 때문에 서로 잘 알아 보지 못하지만, 리치로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어찌 그 은혜를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이 달린 짐승들이 예전에 우리 자녀가 아니었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꿈틀꿈틀 기어다니고 파닥파닥 날아다니는 곤충들이 일찍이 우리 부모님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어릴 때 부모 곁을 떠난 사람들을 보면, 커서는 부모님의 얼굴 모습조차 깡그리 잊고 마는 자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숙세의 친족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지금 김씨인지 이씨인지 기억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한 숙세의 친족들이 지금 지옥 속에서 울부짖거나 아귀(餓鬼) 가운데 나뒹군다고 해도, 그 고통을 누가 알아 주며, 그 굶주림을 어디에 하소연하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그 모습을 못 보고 그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할지라도, 저들은 틀림없이 건져 주고 구제해 주길 애타게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경전이 아니면 이런 사실을 기술할 수도 없거니와, 부처님이 아니시면 이런 말씀을 설하실 수도 없습니다. 다른 온갖 사견(邪見)에 빠진 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개미를 보더라도, 모두 과거의 부모님이자 미래의 부처님으로 여기면서, 항상 그들을 이롭고 유익하게 도와주어 그 은혜에 보답하기만을 생각한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다섯 번째 인연입니다.

여섯째, 생사 륜회의 고통을 생각함은 이렇습니다.

나와 중생은 모두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세부터 항상 생사 륜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천상, 이 세계와 저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향상과 타락을 반복해 왔습니다. 금방 천상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새 지옥·축생·아귀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암흑의 문[黑門]을 아침에 나섰다가 다시 저녁에 되돌아 들어가기도 하고, 철벽의 굴[鐵窟]을 잠시 떠났다가 또 끌려 들어가기도 합니다. 칼날의 산[刀山]에 오르면 온몸에 성한 살갗이 하나도 없고, 칼날의 나무[劍樹]를 타다 보면 한 치의 살점도 성한 데 없이 베이어 갈라집니다. 달군 쇠[熱鐵]는 굶주림을 채워 주지도 못하면서, 삼키면 오장륙부가 다 문드러지고; 끓는 구리쇳물[吻銅]은 목마름을 풀어 주지는 못하면서, 마시면 살과 뼈까지 모두 녹아 버립니다.

날카로운 톱이 쓸고 가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고, 교묘한 바람이 불고 지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는 성(城) 안에서 새어 나오는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차마 들어야 하고, 지지고 볶는 가마솥 안에서 흘러 나오는 오직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얼음이 막 얼어 엉길 때면, 그 모습이 마치 청련(靑蓮)의 꽃봉오리가 벙그는 듯하며;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 나올 때면, 그 몸은 마치 붉은 련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죽었다 살아나는 게 지하에서는 매양 만 번을 되풀이하고, 하루아침 고통 속에 시달려도 인간 세상에서는 이미 백 년이 훌쩍 지나고 맙니다.

번번이 옥졸(獄卒)을 귀찮고 피로하게 만들면서도, 누가 염라대왕의 훈계와 경고를 믿을 것입니까? 지옥에서 벌을 받을 때면 고통스러운 줄 알지만, 아무리 후회하고 한탄해도 어떻게 되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지옥을 벗어나면 곧장 도로 잊기 일쑤이니, 또 다시 죄업을 짓기가 예전과 다름없고 맙니다.

당나귀를 채찍질하여 피가 흥건히 흐른다 해도, 누가 우리 어머니의 비참한 모습인 줄 알겠으며; 돼지를 끌어당겨 도살장에 들어가면서도, 어떻게 그대 아버지의 고통스런 마음일랑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을 먹으면서도 자식인 줄 모른 것은 문왕(文王) 같은 성인도 그러했거늘, 부모인 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다 그러합니다.

그 당시 은혜와 애정을 주고받았던 사이가 지금은 원수 집안을 맺기 일쑤이고, 옛날 원수 척졌던 관계가 지금은 혈육을 나눈 친족이 되기 십상입니다. 옛날 어머니였던 분이 지금 아내가 되기도 하고, 예전에 시아버지였던 분이 지금 남편이 되기도 합니다. 숙명통(宿命通)으로 안다면 정말 낯뜨겁고 부끄러운 짓이며, 천안(天眼)으로 본다면 진짜 우스꽝스럽고 불쌍한 꼴입니다.

더러운 똥오줌 무더기 속에서 열 달간 갇혀 지내기도 정말 어렵지만, 피고름 뒤범벅된 통로에서 한 순간에 거꾸로 빠져 나오는 것도 진짜 불쌍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동쪽과 서쪽도 구분 못하는데 무얼 알겠습니까? 커서 철이 들기 시작하면 곧장 탐욕이 생겨나고, 그러다가 잠깐 사이에 늙음과 질병이 잇달아 찾아오며,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덧없음[無常; 죽음]이 닥쳐 옵니다.

바람[風: 寒氣]과 불[火: 熱氣]이 번갈아 볶아대면, 그 가운데 우리 신식(神識: 정신, 영혼)은 무너져 내려 어지러워지고, 정기(精氣)와 피(血)가 밭아 가면 피부와 살이 안팎에서 바싹 메말라 붙습니다. 그러면 어느 터럭 하나 바늘로 찌르는 듯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구멍 하나 칼날로 도려내는 듯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거북을 삶아 요리할 때 그 등가죽을 산 채로 벗기기는 오히려 쉬워도, 우리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 그 신식(神識)이 몸을 떠나가기는 그보다 배 이상 어렵답니다.

마음은 항상스런 주체가 없는지라 장사꾼처럼 도처에 분주히 나돌아다니고, 몸은 일정한 형상이 없는지라 집이나 방처럼 빈번히 옮겨 다닙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티끌 수로도 우리가 그렇게 들락날락 옮겨 다닌 몸을 다 헤아리기 어려우며, 사해(四海)의 바닷물로도 우리가 그렇게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을 셈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랗게 쌓인 뼈 무더기는 태산보다 훨씬 높고, 사방 천지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대지(大地)보다 훨씬 많습니다.

가령 우리가 애당초 부처님 말씀을 못 들었다면, 이러한 사실을 누가 보고 누가 들을 수 있으며; 또 부처님 경전을 보지 않았다면, 이러한 리치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여전히 탐욕에 연연하며 예전처럼 어리석음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직 천만겁의 생애가 지나도록 한 번 잘못이 천만 번 잘못으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사람 몸은 받기는 어려우면서도 잃기는 매우 쉬우며, 좋은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려 뒤쫓을 수가 없습니다. 갈 길은 아득하고 어둑어둑한데, 이별은 끝도 없이 길기만 합니다. 삼악도(三惡道: 지옥·아귀·축생)의 고통스런 과보가 자신에게 닥치면 스스로 받아야 하는데, 그토록 말할 수 없이 엄청난 고통을 누가 대신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하는데도, 마음이 오싹 춥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까?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생사 륜회의 흐름을 끊어 버리고 애욕(愛欲)의 바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남들을 다 함께 건져 내어 피안(彼岸: 녈반 언덕)에 나란히 올라가야 합니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 이래로 가장 큰 특별한 공훈이 바로 이 한 가지 수행에 있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여섯 번째 인연입니다.

일곱째, 자기 영혼을 존중함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현재 한 마음[一心]도 지금 있는 그대로 석가여래와 전혀 둘이 아니고 다름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석가세존(世尊)께서는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일찌감치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셨으며,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뒤죽박죽 혼미(昏迷)를 거듭하는 평범한 중생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또 부처님 세존께서는 무한한 신통력과 지혜를 두루 갖추어 공덕이 장엄하신데, 우리는 단지 무한한 업장과 번뇌에 사로잡히고 생사 륜회에 얽매여 옴짝달싹도 못합니다.

마음과 성품[心性]은 부처님과 우리 중생이 하나로되, 미혹과 깨달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러니 차분히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값으로 칠 수 없는[無價] 보배로운 구슬이 진흙탕 속에 묻혀 있어, 마치 흔한 자갈처럼 여기고 전혀 애지중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한량없이 많은 착한 방법[善法]으로 번뇌망상을 마주 대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후천적인 수행의 덕[修德]의 공부가 쌓여야, 선천적인 성품의 덕[性德]이 비로소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진흙탕 속에 묻혀 있던 보배로운 구슬을 건져 깨끗이 씻은 다음 높다란 깃대 위에 걸어 놓으면, 그 눈부신 광명이 찬란히 빛나며 모든 사물을 뒤덮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가 헛되지 않고, 자기 영혼도 저버리지 않는 게 됩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일곱 번째 인연입니다.

여덟째, 업장(業障)을 참회(懺悔)함은 이렇습니다.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한 길라(吉羅)65)를 범해도 사천왕(四天王) 수명으로 5백 년 동안 지옥(地獄)66)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길라(吉羅): 돌길라(突吉羅)의 준말로, 계률을 범하는 죄·나쁜 짓·나쁜 말을 가리킴]

[지옥(地獄): ‘니리(泥梨)’의 번역으로, 즐거움이 전혀 없다, 갈 곳이 없다는 뜻이라고 함.]

한 길라 같은 자그만 죄도 오히려 이처럼 엄청난 악보(惡報)를 받거늘, 하물며 무거운 죄의 과보는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 하는 말 한 마디나 몸짓 하나도 늘상 계률에 어긋나고, 또 밥 한 숟갈 물 한 모금도 모두 빈번히 시라(尸羅)67)를 범하고 있습니다.

[시라(尸羅): ‘청량(淸凉)’ 또는 ‘계(戒)’로 번역되며, 몸·입·뜻으로 지은 잘못 때문에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을 막아 시원히 식혀 준다는 뜻이라고 함.]

하루 동안 범하는 계률만으로도 그 죄악 한량없이 많을 것인데, 하물며 종신토록 지은 죄와 무량겁 동안 전생에 쌓아온 업장은 더욱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가불자의 기본 오계(五戒)로만 말해도, 열 사람 가운데 아홉은 계률을 범하고, 또 잘못을 드러내는 이는 적고 감추는 자가 훨씬 많습니다. 오계는 우바새(優婆塞)의 계률로 두루 갖춰진 것[具足]이 아닙니다. 하물며 사미(沙彌)나 비구(比丘)나 보살(菩薩) 등의 계률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름(신분)을 물으면, ‘나는 비구다’라고 자부심을 갖고 말하는데, 실질(수행)을 물으면 오히려 우바새에도 턱없이 못 미치곤 합니다. 그러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계률은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받으면 깨뜨리거나 어김이 없이 단단히 지녀야 합니다. 또 받은 계률은 깨뜨리거나 어김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깨뜨리거나 어기면 끝내는 틀림없이 (나쁜 곳에) 타락하고 맙니다.

그러니 마땅히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남들도 불쌍히 여기며, 자신을 마음 아파하고 남들도 마음 아파하며, 입으로나 몸으로나 다 함께 간절하게 소리도 내고 눈물도 흘리면서, 모든 중생과 두루 함께 애처롭게 참회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천만 겁의 생애가 지나도록 죄악의 과보를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여덟 번째 인연입니다.

아홉째,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구함(발원함)은 이렇습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수행함에도 도(道)에 정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 극락정토에 왕생하면 부처님 되기가 진짜 쉽습니다. 거기에서는 부처 되기도 쉽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생애에 뜻을 이룰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정진하기도 어려운 까닭에 오랜 겁토록 도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보다 앞서 오신 성현들께서 누구나 한결같이 극락정토를 향해 가셨으며,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설(論說)이 모두 다 도처에서 극락 왕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세(末世)의 수행으로는 이보다 나은 법문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경전(佛說阿彌陀經)에 보면, 적은 선행 가지고는 왕생하지 못하고, 많은 복덕을 갖추어야 비로소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복덕으로 말하자면 ‘나무 아미타불’의 거룩한 명호를 꽉 지니고 염송하는 것보다 뛰어난 게 없으며, 많은 선행으로 말하자면 넓고 큰 마음[廣大心]을 내는 것보다 훌륭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이나마 ‘나무 아미타불’의 거룩한 명호를 지니고 염송하는 것이 백 년 동안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한 번 큰 마음을 내는 것이 오랜 겁 동안 수행하는 것을 크게 앞지릅니다.

무릇 념불(念佛)이란 본디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큰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비록 입으로 념불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마음을 내는 것[發心]은 원래 수행하기 위함인데,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않는다면, 비록 큰 마음을 낸다 하더라도 쉽게 물러나고 맙니다.

그러한즉, 보리(심)의 씨앗을 뿌린 뒤 념불이라는 보습으로 가꾸어 주면, 도의 열매[道果]가 자연스럽게 저절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여기다 큰 원력의 배[大願船]에 올라 타 정토 법문의 바다에 들어간다면, 서방 극락세계는 틀림없이 왕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아홉 번째 인연입니다.

열째, 정법(正法: 진리)이 오래 머물도록 함은 이렇습니다.

우리 세존께서 무량겁 이래로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보리도(菩提道)를 닦으시면서, 수행하기 어려운 걸 능히 수행하시고 참기 어려운 걸 능히 참으시어, 원인 자리와 과보 지위를 다 함께 원만히 갖추심으로써, 마침내 도를 이루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되신 다음 인연 있는 중생들을 두루 다 교화하시고 나서 녈반에 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법(正法)·상법(像法)은 모두 이미 다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겨우 말법(末法)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68)

[정법(正法)은, 비록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부처님 당시처럼 가르침[敎]과 수행[行]이 이루어져 과위(果位)를 증득하는 시기로, 정(正)은 증(證)의 뜻이다. 상법(像法)은 부처님 법이 점차 와전(訛傳)되고 본래 진면목이 변질되어, 가르침[敎]과 수행[行]은 이루어지지만 과위를 증득하지는 못하는 시기로, 상(像)은 사(似; 비슷함)의 뜻이다. 말법(末法)은 부처님 법이 말단지엽으로 흐르고 아주 희미해져, 가르침[敎]의 이름만 겨우 명맥을 이을 뿐, 진실한 수행이나 증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기로, 말(末)은 미(微)의 뜻이다.

세 법의 시기에 관해서는, 말법은 대비경(大悲經)에서 말한 1만 년 하나뿐인데, 정법과 상법의 시기는 ① 각각 1천 년, ② 각각 5백 년, ③ 정법 1천 년 상법 5백 년, ④ 정법 5백 년 상법 1천년의 네 설로 나뉜다. 예로부터 고승대덕들이 주로 취한 다수설은 정법 5백 년 상법 1천 년이다. 어쨌든 지금은 말법시대가 분명하다.]

그래서 가르침의 이름만 겨우 있을 뿐, 진실로 수행하여 증득하는 사람은 없으니, 삿된 이단과 정통이 뚜렷이 구별되지 못하고, 시비 선악을 분간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나 나와 남을 나누어 앞 다투기 일쑤이고, 죄다 명예와 이익을 좇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눈을 들어 살펴보면, 천하의 도도한 흐름이 모두 다 이러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법(法)이 무슨 뜻이며, 스님[僧]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릅니다. 불법의 쇠퇴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더 이상 차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매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자기도 모르게 절로 눈물이 흘러 내리곤 합니다.

저는 부처님 제자[佛子]로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없습니다. 안으로는 자기에게도 이익됨이 없고, 밖으로는 남들에게도 이익을 줌이 없으며; 살아서는 현세에 이익됨이 없고, 죽어서는 후손들에게 이익을 줌도 없습니다. 하늘이 비록 높다 한들 나를 덮어 감싸 줄 수도 없으며, 땅이 비록 두텁다 한들 나를 안전히 실어 줄 수도 없습니다. 지극히 중대한 죄인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을 머금고, 빠져 나갈 궁리가 없음을 생각해 보니, 문득 내 자신이 비천하고 고루한 것조차 까맣게 잊고서, 갑자기 큰 마음을 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시대의 말법 운수를 완전히 돌이켜 세우지는 못할지라도, 다가올 후세에 정법이 이어질 수 있도록 보호해야겠다는 의지는 결연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착한 벗들과 함께 도량에 모여 참회를 고백하고 이 법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48개의 큰 서원을 발하여 한 서원 한 서원마다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로 했으며, 백천 겁의 깊은 마음을 기약하여 마음마음마다 부처를 이루기로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 한 몸 다 마치면 안양(安養: 극락) 국토에 돌아가길 서원합니다. 극락정토의 구품 련화(九品蓮華)에 오른 다음, 다시 이 사바세계에 되돌아와 부처님의 햇살[佛日]이 새롭게 빛나고 법문(法門)이 다시 드날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승가 대중이 맑고 깨끗해져, 우리 동방에서 인민 중생이 교화의 혜택을 입으며, 그로 말미암아 재앙의 운수가 바뀌거나 연기되고, 올바른 법[正法]이 오래도록 머물러 유지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이는 비록 하찮고 보잘것없지만, 진실하고 간절한 저의 고심(苦心)입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내게 되는 열 번째 인연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인연을 모두 인식하고 여덟 가지 방법[마음 내는 모습]을 두루 알면,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문이 보이고 무엇을 어떻게 닦아 펼쳐야 할지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이렇게 사람 몸을 받아, 부처님 법이 전해지는 문화의 중심지에 살면서, 육근(六根: 눈·코·귀·혀·몸·뜻의 여섯 감각 기관)이 탈없이 두루 갖춰지고 사대(四大)69)가 가뿐하니 편안하며, 신심(信心)도 굳게 지녀 다행히 특별한 마장(魔障)도 없습니다.

[사대(四大): 우선 진짜[實]와 가짜[假]로 나뉘는데, 흔히 말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은 가짜 사대이다. 진짜 사대는, 첫째 땅은 만물을 떠받쳐 주는 단단한 성질, 둘째 물은 만물을 윤택하게 거두어 들이는 축축한 성질, 셋째 불은 만물을 뜨겁게 달구는 따뜻한 성질, 넷째 바람은 만물을 낳아 길러주는 움직이는 성질을 각각 가리킨다.

또한 안과 밖으로 나뉘기도 한다. 우리 중생이 기본 과보[正報]로 받는 사람 몸[人身]을 안의 사대 또는 의식 있는[有識] 사대라 하고, 부수 과보[依報]로 받는 주변 환경[諸色]을 밖의 사대 또는 의식 없는[無識] 사대라고 한다.여기서는 사람 몸을 가리키는 안의 사대 또는 의식 있는 사대이다.



성암(省庵) 대사(?~1734) 휘(諱: 본명)는 실현(實賢)이고, 자(字)는 사제(思齊)이며, 성암(省庵)은 호(號)이다. [옮긴이: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가지런해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자기는 그러지 않은지) 안으로 스스로를 살핀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省也: 論語 里仁 편).”라는 공자 말씀에 본명과 자와 호가 모두 담겨 있음이 특히 눈에 띈다]. 강소성(江蘇省) 상숙현(常熟縣)의 시(時)씨 아들로 태어났는데, 대대로 유교(儒敎)를 공부한 집안이었다. 어려서 출가하여 엄격하게 비니(毘尼: 毘奈耶, 계률)를 배웠고, 곧 강연(講筵: 강원)에 들어가 법성(法性)과 법상(法相)의 학문을 연구하셨다. “념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者是誰]?”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넉달이 지나면서 홀연이 크게 깨닫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지혜 근기(根機)가 발랄하고 날카롭게 번득였으며, 변론 재주가 막힘없이 종횡무진하셨다. 낮에는 대장경을 열람하고, 날이 저물면 부처님 명호를 지송(持誦)하셨다. 아육왕산(阿育王山: 절강성 寧波시 동쪽 소재, 東晋 때 慧達 스님이 창건한 아육왕사가 유명함)의 부처님 앞에서 손가락을 불사르며[燃指] 48대원(大願)을 세우시자, 그에 대한 감응으로 부처님의 사리가 찬란한 빛을 내셨다[放光].

이에 「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을 지어 사부대중을 격려하셨는데, 독송하는 이마다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청나라 옹정(雍正: 世宗 연호, 1723~35 재위) 12년(1734) 4월 14일 서쪽을 향해 고요히 입적하셨다. 장례를 모시러 대중들이 몰려 들자, 갑자기 눈을 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갔다가 곧 다시 온다. 생사(生死) 해탈은 아주 큰 일인데, 각자 스스로 마음을 맑히고 념불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두 손을 합장한 채, 계속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며 가셨다.

대사를 찬탄하는 게송에 이르기를:

“자비로운 마음 크고 넓으시어 보리심 내기 권하는 글을 쓰시고,

48가지 서원을 세우시니 그 원력 크고도 깊어라.

수행과 깨달음 모두 진실하여 상서로운 감응이 특별히 뛰어나시니,

련화 정토종의 법맥이 대사의 은덕으로 길이 전해지네.”

]

더구나 지금 우리들은 출가(出家)도 하고 구족계(具足戒: 비구·비구니계)까지 들었으며, 또 다시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참회의 법문까지 닦고 있으며, 게다가 착한 친구[善友·道伴]들을 만나는 등, 훌륭한 인연들이 두루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러한 큰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또 어느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여러 대중께서는 저의 우직한 정성을 어여삐 여기고, 저의 고뇌스런 뜻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 함께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다 함께 이러한 마음을 내십시다. 그래서 아직 내지 않은 분은 지금 내고, 이미 낸 분은 더욱 키워 가며, 이미 키운 분은 지금 더욱 굳건히 하여, 앞으로 계속 이어가도록 합시다.

험난함을 두려워하여 겁먹고 물러나지는 말며, 쉽다고 가볍게 보아 붕 들뜨지도 말고, 성급하게 욕심 내어 덤비다가 꾸준히 오래하지 못하지도 말며, 게으름과 늑장 부리느라 용맹정진을 안 하지도 말고, 유들유들 맥없이 늘어져 정신을 분발하지 않지도 말며, 구태의연한 습관에 얽매여 더 이상 미루며 기대하지도 말고, 어리석고 둔하다고 줄곧 목석(木石)처럼 무심(無心)하지도 말며, 근기가 얕고 보잘것없다고 열등감에 빠져 스스로 자격 없다고 포기하지도 맙시다.

원을 세우고 마음을 내는 것은, 예컨대 나무 심는 일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뿌리가 얕아도 시일이 오래 지날수록 날로 뿌리가 깊고 단단히 활착(活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칼을 숫돌에 가는 일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무딘[鈍] 칼날도 오래 갈다 보면 점차 날카롭게 서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처음에 나무 뿌리가 얕다는 이유로 아예 심지도 않고 말라 죽게 놔두며, 또 어찌 칼날이 무디다고 숫돌에 갈아 보지도 않고 쓸모없이 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만약 수행을 괴로움으로 여긴다면, 이는 게으름 피우는 게 더욱 큰 괴로움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행이란 잠시(인생 몇 십년) 수고롭게 닦아 영원토록 편안하고 즐거운 것인 반면, 게으름 피우면 금생의 몇십 년 구차하게 편안을 누리는 듯하지만, 내세에 오랜 생애 동안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옮긴이 보충 해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고행하고, 어리석은 자는 고생한다[智者苦行, 愚者苦生].”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물며 극락정토를 항공모함으로 삼으면, 어찌 물살에 휩쓸려 밀려날 근심이 있겠습니까? 또 무생법인(無生法忍)으로 법력을 얻는다면, 무엇이 힘들고 어려울까 염려되겠습니까? 지금 지옥에 갇혀 있는 죄인도 과거 겁(劫)에는 일찍이 보리심을 낸 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륜 도덕을 갖춘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금생에 큰 원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작도 없는 전생부터 혼미를 계속해 왔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는 따지거나 타이를 수도 없습니다. 또 지금 당장 깨닫고 뉘우친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아직 새롭게 쫓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혹되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슬프고 불쌍한 일입니다. 또 알아차리고서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더욱 비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지옥의 고통을 두려워한다면, 용맹스런 정진(精進)이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또 만약 덧없음[無常: 죽음]이 아주 신속히 닥칠 것을 생각한다면, 게으름이 생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부처님 법으로 채찍을 삼고 착한 벗[도반]들과 서로 손잡고 도와, 잠깐 동안도 떠나지 않고 한평생토록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보리심이 물러나거나 사라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일념(一念: 한 순간 생각)이 보잘것없이 가볍고 미세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또 마음으로만 내는 빈 서원[虛願]은 별 이익이 없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진실하면 일도 실제로 이루어지며, 서원이 크고 넓으면 수행도 깊어지는 법입니다. 허공이 큰 게 아니라 마음의 왕[心王]이 진짜 크며, 금강(金剛: 다이아몬드)이 굳센 게 아니라 원력(願力)이 가장 굳셉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대중 여러분께서 정말로 제 말씀을 내팽개치지 않으신다면, 보리(菩提)에 딸린 사람[도반]들이 지금부터 모두 한 가족이 되어 련화정토결사(蓮華淨土結社)를 이루고 돈독한 우호 관계 속에 튼실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직 원하는 바는, 우리 모두 다 함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다 함께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다 같이 중생들을 교화하여, 똑같이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세에 우리가 얻게 될 부처님의 32상(相)과 온갖 복덕 장엄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을 내고 서원을 세우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대중들이 다 함께 힘써 나아갑시다.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큰 다행이겠습니다.

posted by 有然(유연)



[정토종 제11조 성암 대사] 화두타파 후 서방 삼성(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친견


염불각자 열전

정토종 제11조 성암 대사

‘염불하는 자 누구인가?’ 홀연 夢서 깨다
원문출처

숭복사 영취화상 문하서 참구
진적사서 치열한 무문관 수행
연지공양, 서방발원문 주해

부처님께서 염불법문을 열어 보여주심은 중생들로 하여금 육근을 거두고 깨끗한 생각으로 계속하여 아미타불 명호를 불러 생각의 경계가 고요하고 마음이 텅 빈 데 이르면 불성이 저절로 드러나서 곧 부처님 지견(佛知見)에 깨쳐 들어가 자성이 저절로 드러나서 각자 자기에게 갖추어 있는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친견하여 한 가지 출세의 큰 인연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권수염불문(勸修念佛文)〉

믿음(信)과 원력(願)과 염불 행(行)은 윤회계를 벗어나 정토에 나는 양식이 되는데, 양식만 준비하면 정토에 나기가 어렵지 않고, 정토에 나면 삼계윤회를 벗어나므로, 석가여래께서는 여쭙는 제자 없이〈아미타경〉을 스스로 말씀하시어(無問自說) 염불 발기의 인연이 된 것이다.

중국 청나라 때 태어나신 성암 대사(省庵大師, 1686-1734)는 부처님께서 염불법문을 열어 중생들로 하여금 발심 염불하여 누구나 본래 갖추고 있는 불지견에 깨쳐들게 한 이러한 도리를 몸과 입과 뜻으로 여실하게 보여준 선지식이다. 청나라 강희 25년(1686) 8월 초파일 태어나 훗날 정토종 제11대 조사로 추존된 대사의 본명은 실현(實賢), 자(字)는 사제(思齊), 강소성 상숙(常熟)사람이다. 속성은 시(時)씨로서 대대로 유교의 선비 집안에서 자랐다.

7세에 동진출가… 15세에 불교ㆍ유교 통달

대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육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지혜와 온화하고 부드러운 본성을 드러냈다. 마치 여러 생을 통해 오염된 세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의 뜻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모친 장(張)씨는 아들이 불연이 깊음을 알고 출가 수도의 길을 열어 주었다. 대사는 일곱 살이 되자, 모친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청량암(淸凉庵) 용선(容選) 화상을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스승으로부터 불전의 가르침과 규율을 배우는 동시에 유교 등 세상의 학문도 함께 익혔다.

대사는 15세(1700)가 되자, 정식으로 비구계를 수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불교와 유교에 두루 달통하여 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정밀한 기예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는 절대 다른 업에는 탐닉하지 않았으며 나고 죽는 큰일(生死大事)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세간의 문장과 이치에 달통한 대사는 충과 효를 돈독히 여겨 모친이 서거하자, 불전에서 무릎을 꿇고 49일간〈불설부모은중난보경(佛說父母恩重難報經)〉을 독송하기도 했다. 더불어 매년 모친의 기일(忌日)이 되면 공양을 베풀고 경을 독송하며 어머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다.


성암대사 사리가 모셔져 있는 아육왕사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화두 타파

어느 날, 성암 대사가 우연히 선인사(善仁寺)에 들렸는데, 홀연히 한 스님이 땅에 머리를 박고 입적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문득, 생명의 무상함을 깨닫고 자신을 경책하며 부지런히 수행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이로부터 대사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의발(衣鉢)을 놓지 않고 하루 한 끼 만을 먹으며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고 정진했다.
이후 사방으로 선지식으로 참방하러 운수행각을 다녀온 후, 25세(1710)가 되자 대사는 거성(渠成) 스님과 소담(紹曇) 스님으로부터 불교교리를 배우고, 대승의 성종(性宗)과 상종(相宗)을 연구하는 한편, 소승 방등경전을 공부하였다.
이렇게 3년의 세월이 흐르자 천태종 삼관(三觀)ㆍ십승관법(十乘觀法)의 종지와 성상(性相) 2종의 교학을 두루 막힘없이 관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암 대사의 경학이 경지에 오르자 소담 스님은 그에게 천태정종(天臺正宗) 영봉(靈峰) 선사의 제4세 법맥을 전했다.

강희 53년(1714), 29세에 대사는 숭복사(崇福寺)의 영취(靈鷲) 화상 문하에서‘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是誰)?’는 화두를 치열하게 참구하다가, 120일이 지나자 홀연이 크게 깨닫고“나는 꿈에서 깨어났다(我夢醒矣)”고 말했다. 이때부터 대기대용이 자재했으며, 변재가 막힘 없이 터져 나왔다. 영취 화상이 성암 대사가 불문의 법기임을 알고 법맥을 전하려고 하자, 대사는 완곡히 사양하며 예를 갖추고 떠났다.

3년 무문관 수행으로 염불삼매 증득

이듬해, 대사는 진적사에서 폐관(閉關: 무문관)수행에 돌입했는데, 낮에는 대장경을 열람하고, 날이 저물면‘아미타불’명호를 지송했다. 밤을 지새우며 정진한지 3년이 지나자 대사는 마침내 염불삼매를 증득했다. 이러한 삼매 증득이 정토법문에 대한 확고한 신심과 불가사의한 지혜를 낳게 되자, 대사께서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연지 대사의‘서방발원문(西方發願文)’에 주해를 달게 된다. 3년간의 폐관정진을 성공적으로 회향하자, 진적사의 대중들은 성암 대사에게〈법화경〉을 강의해 줄 것을 공손히 청했으며, 대사는 법좌에 올라 막힘없는 변재와 혜안을 갖춘 설법으로 승속 대중의 진실한 찬탄을 크게 받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소담 스님의 하명에 따라 항주 융흥사(隆興寺)에서 경과 율을 대신 강의하도록 했는데, 강의를 들은 대중들이 찬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로부터 대사의 명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연지공양하며 48대원 발하자 방광

강희58년(1719), 절강성 영파시 도옥에 소재한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부처님 진신사리 앞에서 손가락을 불살라(燃指) 공양하며 48대원을 세우시자, 그에 대한 감응으로 부처님 사리가 찬란한 광명을 내셨다. 이로부터 매년 부처님 열반일에 대사께서는 승속의 대중을 모아놓고 경전을 독송하며 불공을 올렸다. 이때 대사는〈유교경(遺敎經)〉과〈불설아미타경〉을 강의했는데, 선종의 종지인“시심시불(是心是佛: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의 깊은 뜻을 결합시켜 예리하고 둔한 상중하의 모든 근기가 두루 이익을 얻도록 대중법문을 설하였다.

청나라 세종 옹정2년(1724), 불혹(40세)의 나이에 이른 대사는 항주 범천사(梵天寺)에 가서 주석하면서 유명한 작품인〈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을 짓게 된다. 이후 대사는 항주 선림사(仙林寺)에 은거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며 염불에 전념하면서 절 밖을 나가지 않고 모든 인연을 단절한 채 전수염불(專修淨業)에만 매진하였다. 아울러 사중의 대중을 격려하고 지도하면서 오로지 깊은 신심, 견고한 발원, 전수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때 함께 정토수행을 한 대중들은 한결같이 성암 대사를“(아미타불의 화신인) 영명연수 선사께서 원(願)을 타고 사바세계에 다시 오신 분(永明延壽禪師 乘願再來)”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칭명염불 위주의 염불결사 창립

만년의 대사는 다시 대중의 간청을 받아들여 항주 봉산(鳳山)의 범천사로 돌아와 주석하면서 더욱 광범위하게 정토법문을 전하고 중생을 구제하여 이롭고 편안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대사는 옹정 7년(1729)에 전수염불 단체인 연사(蓮社)를 창립했다. 정토왕생에 뜻을 두고 신원염불(信願念佛)을 하는 이들이 명을 마칠 때까지 염불결사에 동참할 것을 문서로 기록해 서원을 하도록 하였다. 매일 수행일과를 20이라 할 때 10은 칭명염불, 9는 관상(觀想)염불, 1은 예배와 참회로 나눠 밤낮으로 쉼 없이 정진하도록 했다. 대사의 영향 아래 결사 대중이 함께 염불수행을 하니 그 이익이 결코 적지 않았으며, 재가 염불행자가 출가득도한 자도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다.

매일 10만 편 염불… 서방삼성 친견

옹정 11년(1733) 음력 1월 8일 성도일, 대사는 대중을 모아 말씀하시길 “나는 내년 4월 14일이면 이 세상을 떠나 왕생극락을 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는 향을 피우고 방 문을 걸어 잠그시고 매일 십만편(遍) 씩을 염불했다.
이듬해 4월 2일, 대사께서 출관(出關)하신 후 10일이 되자 대중에게“내가 10일 전에 서방 삼성(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께서 허공에 강림하신 모습을 친견하였고 지금 다시 보노라. 나는 정토에 왕생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곧 이어 사원의 사무를 부촉하시고는 다시 성 안의 여러 호법거사 등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시자가 유훈을 내려주실 것을 청하자, 대사는 글로써 대중에게 설했다.
“내가 14일로 왕생을 결정하였으니, 너희들은 나를 위해 모여서 염불을 해다오.”

“극락에서 중생구제 위해 다시 오겠다”

13일에는 음식을 들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좌선했고, 14일 새벽 3시 경이 되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염불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신도들이 모여들어 눈물을 흘리며 예를 갖춰 대사는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이때 대사가 다시 눈을 뜨고 대중을 둘러보고는“내가 왕생극락하여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나서 곧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생사가 큰일이니, 각자 마음을 맑혀 염불하는 것이 가하리라”는 말을 마치시고는 합장한 채 부처님 명호를 부르시며 편안하게 왕생했다.
이때가 청나라 옹정 12년(1734) 4월 14일이었다. 세수 49년, 승랍 25세로 대사의 삶은 길지 않았으나, 정토종에 끼친 공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넓었다.
대사가 입적한 12월 8일 제자들이 대사의 영골(靈骨)을 상숙 금천의 불수암(拂水岩) 서쪽에 모셨다. 청나라 건륭 7년 2월 15일, 항주 일대의 제자 등이 다시 대사의 유골을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오른편 탑에 봉안했다. 대사의 저작으로는〈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정토시집〉〈성암대사어록〉〈성암법사유서(省庵法師遺書)〉 등이 있다.



posted by 有然(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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