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스승들/아바타 붓다

법화경 핵심연구 - 성불과 멸도 열반

有然(유연) 2021. 11. 21. 16:02


시공 초월한 영원한 부처님 (여래수량품)
 
전통적인 《법화경》의 해석에 의하면
《법화경》은 본문과 적문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경우 본문의 중심은 여래수량품이고,
적문의 중심은 방편품이 된다.
 
현대의 《법화경》 연구가들과 달리
중국의 《법화경》 연구가들이
본문의 핵심을 여래수량품에 둔 것은
시공을 초월해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여래가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근본이나 주축을 지칭한다면
적문은 현상이나 방법을 의미한다.
 
본질이란
언어나 감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현상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본질의 움직임과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언어나 개념에 의해 파악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양한 현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항상 드러내고 있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적 수행을 통해
체험하거나 통찰력을 개발해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들이 그러한 본질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규격화된 언어나 개념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어느덧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나 개념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교운동가들은
이러한 본질을 알려주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세속제와 진제로 설명되거나
아니면 삼매를 통한 교감 등이 강조된 배경이다.
 
“본질이란
언어나 감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종교적 세계를
논리나 개념에 의해 파악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그러한 점에 적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세계는
이미 논리적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만일 종교의 궁극적 세계가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면
그때는 종교의 차원이 아닌
철학적 차원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의 입장이 다른 것은 여기에 있다.
 
불교에선 궁극적 본질의 세계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진여, 불성, 법성, 실제, 일승, 불승 등등이다.
 
서양에선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를 神(신)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유일자나 절대의 세계 등으로 말하거나
야훼, 神(신) 등으로 표현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 역시 궁극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만 그의 존재는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독특한 언어나 기호에 의해 교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서양 근대의 실존철학자 하이데커의 기호론도
동일한 맥락에서 신을 설명하고자 한다.
일상 신과 교감하기 위한 특별한 언어는
바코드를 비롯해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이미 오염되어 있으며,
특별한 개념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종 역시 송나라 시대에 들어오면
특별한 기호에 의해 절대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서양에서 말하는 기호론 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미 유사한 사고의 유형이 등장하고 있다.
 
《법화경》의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오랜 시간 이전에 이미 성불했으며,
무수한 시간을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성불한 지는
이 보다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겁이나 더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비유적으로 “산수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부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적인 속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생명의 가치나 생명의 빛을
‘불성’이나 ‘부처님’으로 말하기도 한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자기의 몸을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거나 다른 이의 일을 보이나니,
설하는 모든 말은 다 허망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며,
다양한 존재들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래의 부처님이 드러낸
다양한 모습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된다.
 
혹자는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유신론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그러한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래수량품의 부처님은 구제불이며, 창조불은 아니다.
세상을 창조한 근원자로서의 부처의 속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을
실체론적으로 접근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길고 긴 불교의 역사 속에서
부처님에 대한 이상은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교사로서의 부처님,
그리고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인격화 내지 신격화된 부처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신불이나 
반야지를 상징하는 부처님 등이 그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반야지의 속성이나
법신불의 속성이 융합된 부처님이다.

반야지나 법신을 하나로 융합한 여래수량품의 부처님을
《법화경》에선 일승이나 불성으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의 부처님은
실체적인 본질은 아니다.
만일 실체적인 본질이라 말한다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설과 배치될 것이다.
 
그러나 실체적인 속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생명의 가치나 생명의 빛을
불성이나 부처님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것을 인격적인 표현으로 부처님이라 말하며,
물리적으로는 빛이라 표현하는데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한다는 종교적 감성을 전해준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이념이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인도 당시의 
다양한 사상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이
구제불로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힌두교의 권화(權化)사상을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질은 요지부동이지만
다양한 권화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 구제한다는 논리의 전개가 그렇다.
 
그러나 중국의 법화사상가들은
다른 입장에서 여래수량품을 중시하고 있다.
즉 중국에는 도(道)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고 있었으며,
그 도는 우주 만물의 근원자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개념이나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도는 우주를 창조하기도 하며,
보편적 존재로서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비슷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런 도를 중국 사람들은 본질이란 의미에서 체(體)라고 표현하고,
모든 현상은 본질의 작용이란 의미에서 용(用)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본질은 작용에 의해 파악이 가능하며,
작용에 의거하지 않으면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로 체와 용을 설명했다.
 
그런데 《법화경》이 중국에 소개되었을 때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말하는 도의 개념과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중국인들은 여래수량품을 중시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법화경》을 해석하는 고전적인 방식인
본적론은 중국 전통의 체용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미 견보탑품이나 종지용출품에서 말했듯이
부처의 본질적 속성인 진여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며,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하나일 수 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영원한 부처는
“생사를 초월해 존재하고,
짧고 길다는 범주를 초월해 있으며,
법신은 형태나 시간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길장의 설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국적인 해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천수천안 금강신문'